<지난주 요약>
사론의 수선화, 골짜기의 백합화와 같은 야생화로 자기를 비유했을 때, 솔로몬은 더 나아가 술람미 여인을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처럼 우리 주님도 신부들인 우리들의 삶이 가시나무와 같은 고난 속에 있는 형편을 알고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들꽃과 같이 평범한 야생화로 살고 있는 우리들을, 수풀 가운데 사과와 같은 누구도 비교할 수 없는 그분이 우리들을 신부들을 취하기 위하여 오셔서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분 예수님은 우리의 유일한 쉴곳, 안식처입니다. 그늘입니다.
그리고 사과처럼 달콤한 사랑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우리들에게 주십니다.
오늘은 혼인잔치를 꿈꾸며 사랑을 나누는 두 연인을 볼 수 있습니다.
4절,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칫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은 내 위에 깃발이로구나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칫집에 들어갔으니”
조금 전까지는 배경이 숲속이었는데 여기서는 배경이 잔치집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학자들은 숲속 데이트 장소가 아니라 혼인 잔치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2:10절부터 시작되는 청혼의 내용이 뒤에 나오는 모습이 되므로 내용의 연결이 순서대로 되지 않습니다.
이 장면을 실제 잔치집이 아니고 두 연인이 여전히 숲속에서 푸른 침상, 곧 푸른 잔디와 같은 곳에 누워서 황홀한 가운데 혼인 잔치를 꿈꾸고 있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용도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잔치집은 혼인날에 있을 것을 백일몽으로 꿈꾸는 장면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혼인잔치가 아니라 사랑 잔치인 것입니다.
조금은 깊이가 있는 내용입니다.
① 잔치집은 원어적으로 “포도주의 집”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잔치집에서 포도주를 만들었던 집과 같은 집인 것입니다.
가나 혼인잔치에서는 예수님이 신랑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들의 참 신랑되심을 미리 맛보기로 보여주는 잔치인 것입니다.
주님 재림시 행해질 진짜 혼인잔치를 꿈꾸게 하는 잔치인 것입니다.
가나 혼인잔치는 세상 포도주와 주님이 만든 포도주가 썩여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천국 혼인잔치를 경험해 보고, 맛보는 혼인잔치인 것입니다.
주님 재림하시면 주님이 만든 포도주 만을 사용하는 잔치집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가서에서도 오늘 말씀과 같이 2장에서는 이 땅에서 주님과 사랑을 경험하는 사랑 잔치(2장)를 보여주고 있고, 3:5부터 4장에서는 주님 재림시 경험하는 진짜 혼인잔치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꿈꾸는 잔치집, 진짜 혼인날 이전에 있을 사랑 잔치집으로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인도하여 들어간 것입니다 (히필형,사역형).
주님 재림시 진짜 천국 혼인 잔치집도 우리 주님이 인도해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은 내 위에 깃발이로구나”
이 문장을 원어적으로 다시 번역한다면, “그리고 내 위에 있는 그의 깃발은 사랑이로구나” (원어,NIV,KJV)
사랑잔치이기 때문에 사랑의 깃발이 걸려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잔치가 열리는 집이나 연회장에 깃발을 세우는 풍속이 있습니다. 잔치를 배설하는 자의 성을 쓴 깃발입니다. 잔치 중이라는 사실과 잔치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나타내고 있는 깃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술람미 여인을 향한 솔로몬의 사랑의 깃발이 걸여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과 사랑중이다”를 표시하는 이미지인 것입니다.
② 그러므로 이 잔치는 솔로몬과 술람 여인의 사랑의 잔치, 사랑을 위한 잔치인 것입니다. 아직 혼인잔치가 아닌 것입니다. 혼인잔치의 깃발이 아닌 것입니다.
앞으로 이루어질 혼인잔치를 위한 두 연인의 사랑을 위한 깃발인 것입니다.
→ 오늘날 우리 인간들의 혼인은 다양한 숨은 목적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때로는 상대방의 재산을 위하여, 출세를 위하여, 가문을 위하여 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때로는 계약혼도 하고 있습니다.
모두 사랑과는 거리가 멉니다.
아가서의 두 연인은 그런 것들이 개입할 여지가 조금도 없습니다. 술람미가 왕비가 되고자 하는 목적도 아닙니다. 권세를 얻고자 하는 목적도 아닙니다.
오직 솔로몬과의 사랑입니다. 순수한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깃발은 그들의 관계가 사랑의 관계임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관계에서 혼인을 해야 합니다. 요즘 계약혼인, 혼인전 동거 등 이상한 모습으로 혼인을 하고자 하는데 그러면 안됩니다. 아가서에 있는 사랑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순수한 사랑입니다. 이것이 우리들과 주님과의 사랑인 것입니다.
▶ 우리 주님과의 관계도 이래야 합니다.
무슨 목적을 위해서 교회오는 것, 모두 이해관계에 의한 신앙입니다.
잘 살기 위하여 교회에 옵니까? 저주를 받을까봐 율법적으로 교회에 옵니까?
교회 목사님에게 눈 도장 찍기 위하여 옵니까?
무슨 은사를 받고자 옵니까?
부모의 뜻을 맞추기 위하여 수동적으로 옵니까?
전부 빗나갔습니다.
오직 주님과의 사랑관계 때문에 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주님의 사랑의 깃발이 우리 위에 걸려야 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죽으신 십자가 사랑을 깨달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아직 주님의 사랑의 깃발이 여러분들 위에 걸려 있지 않다면 그 사랑을 갈망하십시요!
5절,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 사과로 나를 시원하게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생겼음이라
솔로몬의 그 사랑이 술람미 여인에게 부어지니 술람미 여인은 그 사랑을 받을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런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원어에는 “너희는”이 없습니다 (영어성경, 한글 바른성경) 그러므로 제 삼자에게 이런 요청을 하는 것이 아니라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에게 요청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건포도, 사과는 모두 솔로몬 곧 예수님이 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① 건포도는 원어적으로 “건포도 떡들”(히,아쉬샤)입니다. 건포도가 들어간 떡은 마치 포도주와 떡을 함께 보여주고 있으므로 성찬으로 표현하고 있듯이 “십자가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사랑을 알게 하여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달라는 것입니다.
② 그리고 사과로 시원하게 해 달라(히,라파드)는 것은 3절에서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새롭게 해달라, 회복시켜 달라”는 의미입니다. 사과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부어주셔서 하나되는 사랑을 받을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③ 결국 술람미 여인은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게 해 주시고, 성령의 역사로 사과를 먹는 것과 같이 새롭게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사랑을 받을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주님의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이런 간구가 필요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하게 해 주시고, 성령으로 새롭게 하소서”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생겼음이라”
술람미 여인은 물밀 듯 밀려오는 사랑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상사병”이 생긴 것입니다. 5:8절에서 십자가의 사랑이 경험한 후 또 다시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상사병은 사랑이 유일한 약입니다.
6절, 그가 왼팔로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팔로 나를 안는구나
5절의 술람미 여인의 요청에 솔로몬은 그를 왼팔로 머리를 고이고 오른 팔로 안아 줍니다. 이것이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이것이 그녀가 요청한 십자가의 사랑과 회복시키는 방법인 것입니다. 그녀를 힘을 돋구고 새롭게 하는 사랑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것으로 안아주면 끝입니다.
술람미 여인과 같이 우리들의 어떠함에 상관없이 안아주는 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의 품에 안기면 5절의 십자가의 사랑, 성령의 역사로 충만한 사랑이 다 채워져 부족한 모든 것이 다 사라집니다. 품에 안긴다는 것은 영적으로 하나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이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요 6:56, 14:20, 15:4). 이것은 성령의 내주 하심으로 가능합니다.
이제 그의 사랑을 느끼기만 하면 됩니다.
왼손은 보이지 않는 사랑이요, 오른 손은 보이는 사랑의 손이기도 합니다.
이 사랑 안에는 보호도 안식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은 우리 주님과 같이 술람미를 위해서는 죽음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안아 주는 것은 영원히 사랑한다는 싸인인 것입니다.
7절,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을 두고 너희에게 부탁한다 /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내 사랑이” (히, 아하브)는 솔로몬을 말씀하고 있으므로 술람미 여인의 노래입니다.
참고로, 아가서에서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을 표현하는 “사랑”의 단어가 “도드, 아하바, 아헤브”입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나타낼 때에는 “라야, 라흐야티”입니다.
7절과 같은 요청은 3:5, 5:8, 8:4절에서도 계속 됩니다. 물론 5:8, 8:4절에서는 “노루와 들사슴을 두고”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노루와 들사슴은 솔로몬, 곧 예수님을 상징하므로 4장에서 혼인을 했으므로 사랑으로 채워졌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아무튼 이 구절은, 한마디로 사랑을 방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연인은 서로 안고 있을 것입니다.
▶ 예루살렘 딸들로 비유되는 우리 주변에 있는 믿는 자들로 인하여 현실적으로 우리가 주님의 깊은 사랑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 받을 때도 많이 있습니다.
자꾸 만나자고 하고, 교회 밖에서 밥 먹자고 하고, 사람을 분요하게 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품에서 친밀한 사랑을 경험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와서 방해를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술람미 여인의 강하고 확실한 요청을 반영하는 것이 바로 “노루와 들사슴”을 두고 부탁하는 상사병 것입니다. 두가지 해석을 해 볼 수 있습니다.
①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우물 판 증거를 삼고자 암양 새끼 일곱을 주고 서로 맹세한 이야기가 창세기 21장에 나오는데 (창 21:22-34). 확실한 맹세의 언약을 위하여 이렇게 짐승을 놓고 맹세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부탁한다”의 원어가 창 21:31절에서의 “맹세하다”와 같은 단어인 의 뜻인 “샤바”를 사용하고 있습니다(창 21:31).
이와 같이 오늘 말씀에서는 “노루와 들사슴”을 맹약의 증거로 두는 것입니다.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과의 사랑을 깨지 않도록 노루와 들사슴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로의 사랑을 누군가가 깨지 않았으면 하는 강한 갈망의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② 두 번째로 볼 수 있는 해석은, 제가 다른 분들의 해석을 참조하여 추가적으로 깨달은 해석입니다. 저는 이 해석도 좋아합니다.
아가서에서 사슴과 노루는 솔로몬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아 2:9, 17, 8:14)
사슴과 노루는 정한 동물로서 (신 14:5) 거룩하신 예수님을 상징할 수 있는 동물인 것입니다.
그리고 노루와 들사슴이 아주 예민한 동물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소리가 나도 놀라 도망하는 동물입니다.
그러므로 노루와 들사슴처럼 사랑의 관계를 깨는 것에 대하여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하는 솔로몬이니 이 사랑 방해하지 말라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이신 우리 예수님은 사랑에 대해서는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출 34:14, 신 4:24)
다른 신랑에게 당신의 신부의 마음을 빼앗기는 것에 대하여, 사랑을 방해하는 것에 대하여 노루와 들사슴처럼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③ 영어 성경은 대부분 “I charge you, daughters of Jerusalem, By the gazelles, or by the hinds of the field” 로 번역하여 첫 번째 해석, 맹세의 의미로 취하고 있습니다.
어쨋던 이 구절에서 사용하는 동사가 사역형, 강조형, 미완료형으로 사용하고 있어 강하게 그리고 계속적으로 흔들거나 깨우지 말라는 부탁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