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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씀배경
시편 120편~134편까지 15편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표제가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순례자들이 올라갈 때 부르는 노래라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몇 주 동안 이 말씀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묵상할 것 같은데, 이 말씀을 듣는 모든 분들에게 영적인 시즌이 성전에 올라가야 할 계절이 아닌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 “올라간다”(알라)고 하는 것은 먼저 성전이 지형적으로도 높은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성이 있는 예루살렘은 지중해에 비한다면 해발 800m 고지에 있고, 여리고를 기준으로 한다면 고지가 1000m나 됩니다. 더구나 다윗성 주변에는 기드론골짜기, 힌놈의 골짜기, 횡단골짜기, 티로포이온 골짜기 등으로 둘러 싸여 있어 우뚝 솟아난 지형입니다. 더구나 성전이 있는 시온산 (성전산, 모리아산) 부분은 이보다 더 높은 고지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에 가는 길은 올라가는 길인 것입니다.
하지만 영적으로는 순례자의 위치가 어디에 있든지 성전으로 가는 것을 “올라감”(마알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도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지 않더라도 성전으로 가는 것은 성전으로 올라가는 것이 되고 그의 신앙은 올라가는 신앙인 것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좁게 해석하여 “올라감“의 원어가 ”계단, 층계“라는 뜻도 있기 때문에 성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계단, 층계를 올라갈 때 부르는 노래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솔로몬 성전에도 올라가는 계단이 있고, 더구나 에스겔 성전에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의 표제가 붙은 시편의 수와 같은 15개의 계단이 있습니다.(겔 40:22,31)
아무튼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표제가 붙은 시편은 세상에 살면서 세상을 잠시 뒤로 하고 높이 계시는 하나님을 뵙고자 성전을 오르는 순례자들의 노래이며 예배하러 올라가는 그들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는 시이며 노래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들도 성전인 교회에 갈 때에, 예배하러 갈때에 어떤 마음으로 중심으로 올라가야 하는지 성전에 올라가는 시편을 통하여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향해 올라간다는 것은 거리적으로 오늘날 우리들이 교회 성전에 올라가는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들은 성전에 가기 위해서 가까우면 걸어서 가기도 하고 멀면 차로 한 두시간 내에 도착하는 거리에 성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가까이 성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까지 가야합니다.
하나님을 일 년에 세 차례 뵙기 위하여 이스라엘 전역에서 올라가고 그리고 각 나라로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들도 각 나라에서 성전을 향해 올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5절을 보면 ”천하 각국“으로부터 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행 2:5)
가까이는 애굽에서부터 멀리는 지금 이란지역인 엘람까지 그것도 사막을 가로질러 올 수 없으므로 시리아 쪽으로 돌아오면 800km~1500km 이상을 와야 합니다.
걷거나 낙타 또는 나귀, 말을 올 것입니다. 하루에 20km를 걸어도 40일에서 75일 걸립니다.
에스라서 7:9절을 보면, 에스라가 2차 바벨론 포로귀환을 할 때에 약 4개월이 걸렸습니다.
[에스라 7:9] 첫째 달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
짐승과 어린아이까지 포함되어 늦은 것도 있지만 바벨론 나라 어디에서 출발하는냐에 따라서도 한 달 이상 차이가 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과거 한양갈 때 천리길 400키로를 한 달 이상 걸이서 과거시험보러 다녔습니다.
성전을 향해 사방에서 몰려오는 순례자들의 모습이 그려지십니까?
지금도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순례자들이 많습니다. 무슬림들도 자기들의 성지인 메카를 해 매년 많은 사람들이 순례를 떠납니다.
이 순레자들이 성전을 향해 올라 가면서 그 먼거리를 오면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를 불렀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가까이에 와서만 부른 것이 아닐 것입니다. 15편을 부르고 또 부르면서 올라갔을 것입니다.
노래 하면서 지루함도 이기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노래하면서, 감사함으로 올라갔을 것입니다. 이 순례자들의 마음이 우리들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우리들이 성전에 가는 것은 너무 편한 것입니다. 너무 편해서 너무 자주 갈 수 있어서 오리려 감동이 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간절함도 떨어지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전 개념과는 오늘 개념은 너무 다르지만 우리들도 성전을 향해 올라가는 그 중심은 당시 순례자들의 마음과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무튼 누구에 의해서 언제 기록되었는지를 잘 알 수 없지만 시편 저자의 마음과 순례하는 자들의 마음이 우리들의 마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2. 시편 120편
1절, 순례자는 여호와 신앙으로 살아가면서 어떤 사람들로부터 환란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런 환란 속에서 해결책으로 여호와께 부르짖었다는 것입니다.
환란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특히 순전한 믿음을 지키고자 하는 자에게 반드시 다가오는 것이 환란입니다. 양이 이리 가운데 있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 같도다” (마 10:6, 눅 10:3)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고 채찍질하리라”고 했습니다 (마 10:17). 또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마 10:25) 하셨습니다.
믿는 자들, 경건한 자들은 필연적으로 환란 속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저자가 받은 환란의 내용은 2절, 7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2절에 보면,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로 죽음의 위기에 처하는 것이며, 6절에 보면,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과 함께 사는 것이며, 7절을 보면, 그들은 화평을 원하지 않고 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런 환난 속에서 그가 취한 행동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환난 가운데서 부르짖는 기도를 응답하신다고 성경은 수없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 35:3, 시 20:1, 시 86:7)
[시편 20:1]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오늘 말씀에도 “응답하셨도다” (1절) 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계속용법, 미완료형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계속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 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의 첫 번째 내용이 환란일까요?
이런 환란을 당한 자가 성전에 올라가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환란을 당하면 무조건 성전에 올라가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당시에는 성전에 하나님께서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어려움이 있거나 반대로 감사해야 할 때에도 성전에 제물을 들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환란을 당하면 성전에 나아가 기도해야 합니다.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시 145:19, 시 40:1)
2절,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는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 의해서 환란을 당했습니다. 내 생명을 건져 달라고 하는 것을 보니 그런 입술과 혀를 통해서 순례자가 죽을 지경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성경은 입술(입)과 혀에 대한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혀를 잘 못 놀리면 생명이 왔다 갔다 합니다. 친구 사이가 하루 아침에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최근 우리나라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많은 파장을 일으키고 있고 국가간의 관계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말은 골라서 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얼마나 많이 말과 관련된 입술, 혀, 목구멍에 대한 경계를 하는지 대표적임 말씀 몇 구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잠언 18:21]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잠언 21:23]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느니라
[로마서 3: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야고보서 3:5]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야고보서 3:6]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야고보서 3: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그래서 성경은 혀를 재갈 물리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고 악한 말을 그치고 그 입술에 거짓을 말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야고보서 1:26]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베드로전서 3: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마치 혀는 칼과 화살과 같다고 했습니다.
[시편 64:3]그들이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칼과 화살은 깊은 상처를 내어 죽이는 무기입니다. 그 사람에게 치명적인 독이 되는 것입니다.
잠언에도 거짓 증거하는 사람에 대해 ”방망이요, 칼이요, 뽀족한 화살“이라고 했습니다.
[잠 25:18] 자기의 이웃을 쳐서 거짓 증거하는 사람은 방망이요 칼이요 뾰족한 화살이니라
그래서 그런 자가 받을 보응도 4절에 “장사의 날카로운 화살”인 것입니다.
참으로 입술과 혀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듭니다. 욕이나 거친 말들도 문제이지만 특히 거짓된 입술, 속이는 혀는 가장되어 있어 당사자만 알고 남들은 잘 모릅니다.
“거짓된”이란 히브리어 단어가 “세케르”인데 법정에서 거짓된 예언자에게도 사용된 단어입니다 (렘 27:10). 그러므로 거짓된 예언도 동일하게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생기가 없는 거짓된 우상에 대해서도 사용되었습니다(사 44:20). 그러므로 거짓된 우상을 섬기면 화살에 맞는 것과 같이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속이는”은 히브리어 “레미야”로서 속임, 사기, 기만, 배반을 뜻합니다.
순례자는 이런 거짓되고 속이는 입술과 혀에 의해서 생명의 위협을 받은 것입니다.
3절, 그 속이는 혀를 사용한 그들에게는 “더해지는”는 저주를 받게 됩니다.
“네게 주며, 네게 더할꼬”, 더할꼬는 증가하다는 말입니다. 추가로 더하다는 말입니다.
이런 표현은 고대 근동사람들이 서로 맹약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라고 합니다.
맹약을 어겼을 때 “신이 네게 무엇을 주며 무엇을 더할꼬“ 라고 말하면 다른 한 사람이 ”저주와 심판을 네게 더할 것이다“라고 말한답니다 (옥스퍼드 주석)
마치 맹세를 어겼을 때와 같은 저주가 더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누군가가 남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독하고 거짓된 말을 했다면 죽음과 같은 환란을 당한 그가 성전에 거하시는 하나님께 올라와 기도하면 이런 더해지는 무서운 저주가 응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런 더해지는 저주에 빠지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더해지는 저주의 내용이 4절에 나옵니다.
4절, 더해지는 저주의 내용은 장사의 날카로운 화살과 로뎀 나무 숫불입니다.
① 장사의 날카로운 화살은 깊은 상처를 내면서 죽이는 저주입니다. 2절에서 말씀을 드렸듯이 말로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내기 때문에 그들이 받을 보응도 화살에 의한 깊은 치명적인 상처인 것입니다. 그것도 장사가 쏘는 화살이기 때문에 더 깊게 더 치명적으로 박힙니다.
화살이 깊게 박히면 살 수 없습니다. 겉으로도 상처가 보이지만 깊은 상처를 받게 됩니다. 이것은 보이는 상처와 보이지 않는 깊은 영혼의 상처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사의 날카로운 화살을 맞는 저주는 죽음과 같은 저주입니다.
② 로뎀 나무는 고대 근동에서 숯으로 많이 사용된 나무입니다. 오래 열을 간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형벌의 지속성과 큰 고통을 나태내는 말씀입니다
상대에게 준 아픔도 오래 가지만 자기가 받는 보응의 아픔도 오래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의 보응은 이 땅에서 육신의 죽음과 죽은 후에 지옥불에 들어가는 영혼의 멸망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Weiser 주장)
5절, 메섹과 게달의 장막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메섹과 게달의 장막은 그가 환란을 받은 현실적이고 영적 환경을 예표합니다. 메섹과 게달의 영이 역사하는 곳입니다. 그곳은 어떤 곳인가요?
메섹과 게달은 한마디로 잔인한 야만인을 대표하는 민족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 시편 저자가 거기에 거주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죄로 물든 세상을 예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① 메섹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디라스와 함께 야벳의 아들입니다 (창 10:2) 이들은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사는 족속으로 군사력과 경제력이 풍부했다고 합니다. 메섹의 기질이 에스겔서 38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중앙에 거주하는 백성, 평안히 거주하는 백성에게 나아가 물건을 겁탈하며 노략한다“고 했습니다 (겔 38:11-13).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으로 평안히 사는 이스라엘을 침략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을 영육간에 침략하여 괴롭히는 영인 것입니다.
그래서 겔 39장에서는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 곡이 명망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평안히 살고자 하는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러시아는 야벳의 족속의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 6-7절 말씀에도 메섹의 특징이 나와 있습니다.
오늘날 믿는 자들이 평화롭게 살고자 하나 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② 게달은 이스마엘의 아들입니다 (창 25:13), 아라비안 반도를 누리며 약탈하며 산 민족으로 이스라엘을 수없이 괴롭힌 이스마엘 민족입니다.
이삭을 희롱한 민족입니다 (창 21:9). 오늘날도 게달과 같은 족속이 믿는 자들을 희롱하고 있습니다.
시편 자자는 ”이들의 장막 중에 머무는 것이 내게 화로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6-7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실로 악인의 장막에 머무는 것은 선인들에게는 힘든 일입니다.
롯도 무법한 자들로 인하여 고통을 당했고 의로운 심령이 상했다라고 베드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벧후 2:7-8)
실로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습니다(시 84:10)
벨리알과 그리스도가 조화를 이룰 수 없으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자가 서로 사귀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고후 6:15)
오늘 날 우리들은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어렵게 하는 메섹과 게달의 영성을 가진 세상과는 거리를 두고 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6절-7절, 메섹과 게달의 영성은 화평을 미워하고 싸우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화평, 평강의 반대는 싸움입니다. 다툼입니다.
화평(평강)은 “살롬”입니다. 화평의 원천은 예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우리 예수님은 평강의 왕입니다 (사 9:6). 그들에게 예수님이 없으니 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북한처럼 말입니다.
지금도 전쟁, 싸움을 좋아하는 호전적인 민족들이 있습니다. 뭔가 화해를 하고 평화적으로 같이 가고자 하나 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을 멸망하게 하는 무기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 무기로 협박합니다. 같은 민족이지만 북한도 그러한 부류에 속하고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도 예외는 아닙니다. 중국도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 민족은 원래 백의 민족으로 화평을 좋아한 민족이었습니다. 북한은 하나님 없는 “공산주의”라는 사상이 들어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어둠의 역사입니다. 사망의 역사입니다.
참으로 예수를 믿는다면 그는 평화주의자일 것입니다.
과거 기독교역사를 보면 무슬림들과도 많이 전쟁을 했지만 같은 뿌리인 개신교와 가톨릭과의 싸움, 같은 개신교끼리도 많이 싸우고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모두 사탄의 역사에 놀아난 것입니다. 정치 권력에 휘둘린 것입니다.
성경대로 살지 않은 것입니다. 메섹과 게달의 영이 들어간 것입니다.
<맺는 말>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 그 첫 번째로 시편 120편을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들은 성전으로 올라 가듯이 신앙도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들이 사는 세상은 항상 메섹과 게달과 같은 무리들이 있습니다. 메섹과 게달의 영을 가진 자들입니다.
분명 그들의 영성은 속이는 영성이요 거짓된 영성입니다. 그리고 평화가 아닌 싸우고자 하는 영성입니다. 그들과 너무 오래 머물면 안됩니다. 힘이 들어집니다.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그래서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서 또 치료하기 위해서는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환경에서 거리두기와 회복을 위하여 성전에 올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전에 올라가면서 그동안 받았던 상처를 하나님께 다 내려 놓고 토로하셔야 합니다. 오늘 시편 저자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마음 속에 있는 아픔을 다 토로하면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원수는 하나님께서 더해지는 저주로 갚으실 것입니다. 원수를 친히 갚지 않습니다 (히 10:30).
시편 기자와 같은 마음으로 오늘날 우리들이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으로부터 치료와 회복이 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