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대순진리회의 신앙 입장
(2) 세상에 대한 믿음 (b)
기계 문명을 뒷받침 해서 이루어진 오늘날의 사회에서 정신적인 질환이
빚어집니다.
「 文明開化三千國」이라고 한 찬란한 문명은 무엇보다도 기계 문명에 지지되어
있다고 할 것입니다. 대량의 생산량이나 대량의 생산 소비를 자랑하고 있는
오늘날의 고도 산업 사회는 기계 문명에 의해서 건설된 것입니다. 그러나 기계
문명의 덕으로 열린 오늘의 시회는 덮어 놓고 환영할 것이 못됩니다. 왜냐하면
문명 개화에서의 기계 문명이 「 발휘하게 되자 마침내 큰 시비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 시비의 예를 전경에서 들어 봅니다.
「 부귀한 자는 빈천을 즐기지 않으며, 강한 자는 약한 것을 즐기지 않으며,
지혜로운 자는 어리석음을 즐기지 않으니…… .」(225면).
이 구절은 부귀한 자와 빈천한 자에 대해 언급한 말씀이나, 기계 문명으로
이룩된 산업 사회에서 사람들 사이에 거리(距離)가 생긴 실정을 가리킨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재물이 있고 없는 사정에 따라서 둘로 나뉘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은 사람으로서 취급되는 것이 아니라, 한낱
재물이란 사물로 취급받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두 세력으로 나뉘어지면 사람은 부귀한 사람이건 빈천한 사람이건
간에 고립(孤立)을 면치 못하며, 따라서 자기의 의식을 잃는 일종의 이탈(離脫)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또한 사회는 사회대로 분열을 계속하게 되어서 사람은
정신적으로 사회가 싫어지게 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염증을 느껴 마침내는
세상을 비관하고 증오 저주하게 됩니다. 기계 문명에서 오는 사람의 정신적인
커다란 문제입니다.
문화, 문명이 개화(開化)된 사회에서 빚어진 대병(大病)은 심각한 문제로
고발되고 있기도 합니다. 그 문제는 인간성의 회복, 대순진리에서 말하는
인존(人尊)수립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 회복 방향은 전경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기계 지상주의의 문명이나
거대한 조직체 우선의 방향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1) 지금은 해원시대니라.
「 양반을 찾아 반상(班常:양반과 상놈)의 구별을 가리는 것은 그 선령(先靈)의
뼈를 깎는 것과 같고 망하는 기운이 따르나니라. 그러므로 양반의 인습을 속히
버리고 천민을 우대하여야 척이 풀려 빨리 좋은 시대가 오리라.」(222면).
이 구절은 양반과 상노(常奴) 사이의 신분의 차이에서 오는 원한 관계와
거기에 따른 사회의 파괴에 관한 말씀이나, 그 말씀의 뒷 면에는 부귀한 사람들
위주의 세계에서 버림 받은 사람들의 회복을 일깨워 주는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사람들이나 나라들 사이에 벌어진
거리나 분리에서 탈출하여 사람마다 자주성(自主性)을 지녀야 함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제 역할을 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전경은 「 이제는
인존시대라. 천존과 지존보다 인존이 크나니라.」(244면)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제 역할을 하는 자주성을 지닌 것이 바로 인존입니다.
「 사람마다 그 닦은 바와 기국에 따라 그 사람의 임무를 감당할 신명의 호위를
받느니라. 남의 자격과 공부만 추앙하고 부러워하고 자기 일에 태만한 마음을
품으면 나의 신명이 그에게 옮겨가나니라. 」(237면).
이 구절은 사회에서의 자기 책임을 수행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
사회에서 자기가 종사하고 있는 일의 목적에 대한 이해와, 자기가 수행할 역할의
중요성을 의식할 경우, 목적의 달성과 역할의 수행을 사회적인 책임으로
자각하게 됩니다. 어느 조직의 말단직에 있는 한 사람일지라도 사회적 책임이
있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직무(職務)가 재 편성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 일에 대해서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무력감(無力感)에 사로 잡혀서
자기의 존재를 잃고 맙니다.
사회에서의 자기의 위치와 할 일에 대한 책임과 더불어 사람들 끼리의
일체감이나, 친밀감이 조성될 때에 작게는 가정에서, 크게는 온 인류 사회가
큰병(大病)에서 회복될 것입니다. 그래서 典經은
「 전쟁사를 읽지 말라. 전승자의 신은 춤을 추되, 패전자의 신은 이를 가나니,
이것은 도를 닦는 사람의 주문 읽는 소리에 신응(神應)되는 까닭이니라.」(237면).
고 기록하여 싸움의 세계로부터 해방되는 길을 열었습나다. 이 외에도 일체감과
친밀감에 대한 구절이 여러 곳에서 발견됩니다
「 너는 표단이 있으니 인단으로 가름하라.」(239면).
「 이웃 사람이 주는 맛없는 음식을 주어 먹고 혹 병이 생겼을 지라도 사색을
내지 말라. 오는 정이 꺽여 또한 척이 되나니라.」(242면).
화평 속에 일체감이나 친밀감이 있으며, 척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보복과
싸움이 번갈아 되풀이 되는 법입니다.
또 하나의 대병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 내가 할 일을 할 뿐이고, 타인이
알아주는 것과는 관계가 없느니라. 타인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소인이 하는
일이니라.」(247면)의 구절에 담겨져 있는 자기를 실현하는 행동입니다. 일하는
과정에서나 그 결과 속에서 다만 정신적인 성장을 바라는 요구나 창의성(創意性)
즉, 개성이 발휘하는 데에 기쁨을 가지는 것입니다. 상제께서는 자식이 없는
부부에게 자식을 태워주시는 데에 기쁨을 보셨고, 도움을 베풀고 그에게
알려주는 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정신적으로 성장하려는 데에서는 만족을
얻을 때에 그 사람은 직장에서나 가정에서 산 보람을 찾아 자기를 상실한
상태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회가 큰 병에서 회복하려면 이상에서 말한 몇가지 인간 회복이 있어야
합니다. 그 인간 회복을 위해서는 각자 개인이 할 일과 더불어 가정이나 사회의
일체감에 따른 결합을 굳건히 하고, 자기를 실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전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더듬어 보았습니다. 이것과 대조되는 대병(大病)은
내가 무력하다는 느낌, 의미가 없는 존재란 무의미감(無意味感), 고립감,
자기 상실감입니다.
그런 대병을 고치기 위해서 상제께서 삼계의 대권을 장악하셔서 권지로 재생의
은혜를 베푸시고, 예시함으로써 온 누리의 마음을 돌리셨던 것입니다.
첫댓글 사람마다 자주성을 지녀야 함을...~자기실현 이란 말씀이 와닿슴니다.감사함니다!
사람마다 그 닦은 바와 기국에 따라 그 사람의 임무를 감당할 신명의 호위를 받느니라 ...많이 들어본 말씀인데도 다시한번 생각하게 하는 군요,께우침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