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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 화
〔 미력면 설화 1 〕 T. 미력 1 앞
용정리, 1986. 5. 18. 최덕원 조사
문승은, 남․76
□ 미륵 바위
* 제보자가 미륵면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알고 있다기에 이야기 해달라고 했더니 미륵재의 선돌(미륵바위)에 대한 이야기와 미륵이라는 지명유래를 구술했다.
그전에 어른들 말씀을 들으면 미륵재라고 하는 재가 있기난새 미륵바우가 있어요. 거가요 근디 그 납작한 반석우가 있어갖고 요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그렇고, 한나는 가운데가 높이가 3미터(cm)정도 깊이가 되고 둘레의 직경이 30센찌나 될 겁니다. 옴막해요.
그래 인자 그 아이들이 지내거나 부인들이 훅 지내며는 옴막헌 디들 맞추면 아들난다 해갑고 독을 땡겨싼게 그 밑에가 자갈이 수북해. 그랬는디 왠 큰 미륵바우라 한 것은 그렇게 인자 바우가 있어갖고 이리 돌고 저리 돌고 한께 독이 끌어리가 쪼삣해요. 가마구 주둥이 같이는 않지만 좀 쪼삣헌 맛이 있는데 그 대가리를 복내 사람들이 오면 복내로 올려 놓고 그러면 이익이 있다고 인자, 미력 사람은 미력을 돌리고 하기난새(때문에) 구식에 선비들이 띠 안 띠고 댕기요. 허리에 사람이 수가 작으면 여렇게 손으로 잡을수는 없은께 그 바우가 커갖고 띠를 끌려갖고 잊어갖고는 잇어갖고 돌리먼 돌아가드라요. 그런께 독우(돌 위)에 연친 것이라 그랬는가 몰라 그래갖고 바우를 또 돌려놓고 이런 장난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중간에는 왜정 말엽인디 복내 사람들이 복내쪽으로 대가리를 돌려부렀어. 복내면에서 울력한다고 치도 울력헌다고 고리 와갖고는 미력서는 새로동원을 해갖고 질 때 닦어부렀는디 동원을 해갑고 가서 돌려갖고 꽉 묻어부렀어. 인자 돌리기 어려울 거이요. 근디 빠짝 질 우에게 있읍니다.
시방 그래서 미륵면이 미력면인디, 중간에 미륵허잔께 륵자를 쓰기도 고약한게 가죽 혁대 부르고 힘력(力)자만 붙여서 미력면, 그리 되었다고 고런 말을 들었읍니다.
〔 미력면 설화 2 〕 T. 미력 1 앞
용정리, 1986. 5. 18. 최덕원 조사
문승은, 남․76
□ 민폐 끼친 마태 돈
* 조사자가 마태 돈에 대한 이야기를 청했더니 자세히 설명했다. 차분하고 침착하게 이야기를 잘 했다. *
마태 돈이란 구한말 시대에 서울로 올라가는 말이 즉 제주서 나왔는디 제주산인디, 그것을 서울까지 몰고 올라 갈라허면 쉽게 말허자면 말 식량 그것이였는디, 그놈을 콩으로 다 걷을 수가 없은께 돈으로 할당을 해갖고 돈으로 걷은디, 그것이 민폐가 대단해서 보성독에 사시던 문병열씨하고 조성 석보마을 사시던 조욱승씨 하고 그 다음 율어면에 가서 송두만씨하고 그 세분이 들어서 진정을 해갖고 마태 돈을 없애서 민폐가 없어졌다는 그런 말이 있지요.
그 마태 돈이 민폐라고 헌 것은 왜 그런고 허니 그것이 각 개인당으로 헌다든지 혹은 면적으로 헌다든지 간에 요새 돈으로 십원이나 한다고 하면 각 민간에다 할당하기는 한 백원이나 이렇게 하기난새 그겅이 민폐라고 했답니다.
〔 미력면 설화 3 〕 T. 미력 1 앞
용정리, 1986. 5. 18. 최덕원 조사
문승은, 남․76
□ 미력면의 지세
* 선친에게 풍수지리학과 한문을 배웠다고 하며, 돈보기 안경을 겹으로 쓰고 느린 말씨로 미륵면의 지세를 자세히 구술했다. *
미륵재가 그가 그 및에 와서 동정골이라고 하는 마을이 있는디 등정골, 그 마을에서 시작을 해갖고 면골․흔덕골 이리 해갖고 이건네 우리마을 건네 와서 가마골이 있는디 거그 와서 장군대좌형이 있다고, 뫼자리가 좋은 놈이 있다고 그래. 그것은 지리학적으로 이야기 허자면 여기서 그전에 이약을, 고을에 이야기를 들으면 여기서 관가에 거동을 허면 점심도 먹고 쉬고 자기도 하고 그랬다 그런디. 그래 등정골이 시방은 퉁정골이라 허기마는 나는 등정골이라 인식을 한 것은 오를 등(登)자, 정(程)자 질에 나서는 등정하는 어디가는 행차하는 길에 나섰다는 말인 것 같고, 그래서 등정골.
그래갖고 그 및에 가서 흔덕골 뭐 석골 면걸 그런디 이놈이 연에 흔덕골로 난다고 그렇게 인식을 해요. 석골을 지내면 석골은 저역 석(夕)자로 보고 저녁이 되야서 거그서 자고 명골은 밝은 명(明)자로 봐서 그 이튼날 날이 샜다고 봐야 되겄고, 그 밑에가며는 흔덕골이 있는디 거그서 인자 천천히 흔들흔들 내려와가지고 주엽정이라고 허는 지명이 있어. 주엽정에가서 인자 점심먹고 낮 주(晝)자, 점심 엽(엽)자. 그래갖고 쪽 내려오며는 이 가마골이라고 허는 마을이 있는디 거그는 멍에 가(駕)자, 말 마(馬)자가 가마골로 보고, 또 가마골서 보작 그 넘에 가서 투구봉이라는 봉이 있는디 거그에 장군대좌가 있다고 칭허고, 인자 거기서 저기 독에 마을 뒤를 돌아가는 돌아가자면 복고재가 있어요.
그러면 도로 복(復)자, 돌아볼 고(古)자, 뒷을 돌아 본다고 나는 판단을 허고, 그러면 거그서 저리 독에 미륵학교 뒷으로 저리 뒷돌아 가며는 정이네라고 허는 마을이 있는디 거시 가서 거기가 그 행차가 정지했다 허고 거그 마을 앞에 들어 가서 그전에 진터가 있었어요. 진터라고도 헌 것이 그에 말 듣는 것하고 비교해 보면 거의 방사한 것 같읍니다.
그러고 우리 마을 춘정이라 허는 데는 그전에는 석정이라고 했었는디, 돌석(石), 정자 정(亭), 석정리라 헌 것은 사장에 가서 독이 뭉쳐갖고 있기난새 석정이라 했었는디. 내 증조부님 호가 춘암이신디 그 양반이 들어오신스로 춘정으로, 봄 춘(春)자로 독 석(石)자를 봄 춘자로 고쳐써서 지금 춘정으로 현재 부르고 있고, 이 마을에 대한 관계는 내 일가가 한 삼십여 호살고,타성은 신씨, 박씨, 외성씨들 거식허며는 우리 일가의 반수가 좀 못 되야 읍니다.
〔 미력면 설화 4 〕 T. 미력 1 앞
용정리, 1986. 5. 18. 최덕원 조사
문승은, 남․76
□ 걸객으로 보여 쫓겨난 월파 선생
* 이어서 이 이야기를 구연했는데, 구연하는 제보자의 대도에서 옛날 고고한 선비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마을에가 한 백년 전에 저 문덕서 오신 광산 정(鄭)씬디, 호는 월파 시고, 이름은 때 시(時)자, 수풀 임(林)자, 그 선생님이 여기 계셨는디, 구식거식으로 학문으로 장성 사시는 노사 선생의 제자여. 그 분은 모든 것을 잘 알으시고 그런디 단 검박허기가 너무나도 검박해갖고 갓이 뚫어지며는 삼베 헌(헝)겊으로 붙여서 먹칠해서 쓰시고, 망근도 뚫어지며는 삼베 헌겊으로 꿰매갖고는 먹칠해 쓰시고 이래서 그럭해 검박허니 허실 때야 물론 옷이야 말헐 것 없고.
한디 용허기를(순하기를) 한없이 용허든가, 여그서 멀지 않는 노동 가서 뉘집이를 비에 쫓겨 들어가겼는디, 아 쥔이 들어와 보니 숭학한 걸객처럼 생겨노시논께 눈은 한나 못 보게 되야부르고. 그런게 외통 눈에다가 의관할라 그러제. 그런께는 숭학한 걸객으로 알고 쫓아 내놓으면은 도로 들어가고 들어가고 해갖고 해도 아랫목에는 안 가셔. 윗목에서 잠시 앉으시면 꿇고 딱 앉으시고 그래서 과객상으로 저녁밥을 거그서 얻어 자시고.
저녁에 그 집 쥔이 아이들 형제를 글을 갈친디 한나는 논어를 읽고 한나는 맹자를 읽는디, 그 아그들이 글을 읽으라고 그런께 갖고 와서 읽는디 읽으면서 뜻을 갈쳐주라 허니까 뜻을 갈쳐준디 가만히 앉여서 들은께 잘 못 가르쳐. 책은 안보고 욉디로 안져 있는디, 그래 갈쳐서 내보낸 뒤에 주인을 불러갖고,
“그 맹자에 아무 대목은 그 앞주에 내기를 이러 이렇게 나고 논어에 아무데 대목은 앞주에 내기를 이러 이렇게 났는디 그렇게 갈치면 돔 잘못한 것 같소.”
아이 쥔이 꼼짝 놀래갖고 책을 다시 가져오라 해서 본즉 과연 그러게 났은께, 그래갖고 인자 물론 선생님으로 아시고.
“아니 저 월파 선생님이 계신다드만은 혹 월파 선생님이시오 ?”
“아니 그리 않다고.”
하다(자꾸) 물어싼디.
“무단히 넘들이 나보고 그러지마는 가당찬다고.”
그래서 월파 선생인 줄을 알고 그뒤에는 잘못했다고 꿇고 엎져 빌고 그랬으나 당체 그리 못허고 했다는 설이 있지요.
〔 미력면 설화 5 〕 T. 미력 1 앞
용정리, 1986. 5. 18. 최덕원 조사
문승은, 남․76
□ 석정돌의 영험
* 조사자가 더 이야기 해 달라는 말을 꺼낼 필요도 없이 지명에 얽힌 이야기를 계속해서 구술했다. *
그 전에 이 마을이 저 입구에 들어오며는 하미력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그 때는 한 백여 호 살았고 구식문자로 행신가는 밸로 적었든 모양인데, 그 뒤에 요리 동네를 요건네 선촌이 되야감스로 석정이라고 하는 마을이 돌이 있어서 석정이라고 했는데 석정이라고 헌 것은 그 들어온 입구에 가서 독이, 그전 이야기를 들으면 딱 뭉쳐서 똥뫼 모양으로 그렇게 생겼든 독이라 그러는데,그것을 우리 종조부께서 여름이면 여럿이 놀기 좋게 한다고 여그 놓고, 동네서 지리가 그렇게 된가는 몰라도 동네서 모도 병환이 많으고 사망자가 생기고, 그래갖고는 수구 쪽에 가서 반석 모양으로 생긴 큰 바우가 있었는데, 그걸 파서 주저 않히고 쟁기질 하면 걸거친 다고 주저 앉혀가지고 또 동네서 역시 몬야 모양으로 탈이 많이 있었고 했으나, 거그 가서 독이 있다고 석정이라 했다가.
그 열에 가서 사정나무는 그전에 하미럭 때 하미력이라 헐 때게 심거논 사정나무여. 수백년 된 나문디 어디를 갔다 오시다가 뒷재를 넘어오시는디 물금차, 그전 구식에 관광에서 물금차라고 글씨 석자를 붙여 놓고 빌면 누가 금허근 못헌 그런 관계가 있다고 헙디다. 헌디 그걸 비다가 인자 보시고는 쫓아가가지고는 깨를 벗고 그놈들 한테다가 빤 듯이 들어누워 오즘을 싸심서 차라리 이 나무를 빌라면 내 배를 따라 하고 한통에 그 사람들이 못 베고, 그 고약허다 하고 그냥 간 사실이 있었는디 지금 그 나무가 그렇게 끝텅가지 식어부렀소, 죽어갖고.
〔 미력면 설화 6 〕 T. 미력 1 앞
용정리, 1986. 5. 18. 최덕원 조사
문승은, 남․76
□ 문익점 일화
* 조사자가 사당에 대한 이야기를 부탁 드렸더니 문익점 선생의 사당이 있다면서 문익점 선생의 야기를 느릿느릿 구연했다. *
나로 해서는 선조가 되니까는 좀 존중해야겠소. 익자, 점자, 그 할아버님께서 당초 충신이라는 액자도 내렸고, 국가에서 헌 것은 구려 공민왕 때에 중국으로 가시게 된 것은 공민왕에 가서 덕흥군이라고 그이가 임금이 있었는디, 그분이 뭣이냐 덕흥군을 이 공민왕을 쫓아내고 이 덕흥군을 데려다가 중국 임금의 동생인디. 덕흥군을 데려다가 조선 임금을 삼아라 허니께 ‘천무이일(天無二日)은 하늘에 두 날이 없고, 지무(地無)이 이왕(二王)이라 땅위에는 두 왕이 없는 것이라.’ 그래서 거역을 허니까 지금 현재 월남등지나 된 것 같아요. 교지로 귀양을 보내가지고 삼년만에 나오신디, 귀양풀이에서 나오신기 거기서 미영(목화)씨를 갖다가 거기서 취종을 해다가 이 한국에 지금 미영씨 있는 것이 그때 시작되었다고 우리는 알고요.
또 그 뒤서 가서 내 자 할아버님이 계셔요. 명으로 실빼는 것을 문래등 그런 것은 문가에 래자 이름의 그분이 가져 왔다 해서 문래라고 했고 현 것이 그것이다 비선조 문헌에는 비치되어 있읍니다.
그런고 그렇게 했으나 서울 해현동서 계시다가 병난을 만내가지고 경상도 신천군 신안면 신안리 그리 오셨는디, 또 그랬어요 그때 뭐 난이 있어서 그그서는 한집도 문가라면 살 수 없게 된 그런 뭣이 있었어요. 중간에.
[조사자 : 뭣이 있었습니까 ?]
거 저 선조의 동행 한 분이 나뿐짓을 해갖고 제주로 조공바치는 중국으로 조공바치는 배를 턴 것은 그 뒤에 일이였었고, 그때는 저기서 경상도 신안 아까 말한 신안면 신안리 선유동이라고 허는 꼬랑에 저기 들어가며는 절이 있었다고 그러는데, 그 절에서 사술공부를 해갖고 그 사술이 구식에는 배척이라 그래갖고 그걸 두며는 안된다고 그래서, 헌디 왜 그랬는고니는 중국으로 여그서 조공을 금을 보냈는디 그걸 가져와부렀어요, 술법으로 해갖고. 그래갖고 그때 시상에 한국이 중국에 매여갖고 있는디 아갖다가 중국으로 보내는 물건을 그랬다 해갖고 역적이라 해서 역적이란 구식에 삼족을 멸하는 것이라 우리가 그 지방을 떴어요.
떠서 했는디, 그 뒤에 협천 이가라 한 것이 아까 그 익 자점 할아버님의 사우가 한나 있는디, 그 아들이 이름이 승문(承文)이라고.
그래갖고 외손 봉사한다고 해서 승문이라 했어 그래갖고 여장을 한 통에 사패지리가 모도 있고 헌디 승문이 그집들 하고 좀 괴상한 거리가 많았고 그랬는디 돌아가신 뒤에 일이고. 그전에 어쩔 수가 없은께는 인자 사방으로 흩어져 부렀는디 그래 큰 아들집은 없읍니다. 중간에까지 손이 없었는디 중간에사 양자라고 그래갖고 어치께 된 까닭이 있고. 그래서 그것이 한통에 그그 자손이 없고 해서 산청 그 부근에 가서는, 경상남도 부근에 가서는 살기가 어려운 처지에 놓였든가는 몰라도 좌우간 그 터를 비여불고 사방으로 다닌 동에 그 후세에 와서 익자 점 그 할아버니 지사를 받들어야 할거인디 지사를 받들 수도 없고. 또는 자기가 심거 놓으신 은행나무가 있는디 그거 역시 죽어부렀고 그러다가 한 백오십 년 뒤에서 그 은행나무가 다시 살어나서 지금 상당히 크요.
그러고 해가지고 나라에서도 그 뒤에 후회를 했든가 몰라도 충신이라고 고려충신가문이라 헌 충신문도 세웠고. 또는 돌아가신 뒤에 준 벼슬이 정직이 쭉 계속해서 한국 말에까지 광해황제께까지 부민을 허는 아니 철종때까지 부민을 허는 액자를 내리고. 그래서 그 사당이름을 ‘부민의 묘’라 그래왔는디 인자 중간에 그리 되야논께는 중간에 종손집이 그리 되야불고 그래노니 이 제사는 없고 한 삼백여 년을 고향에 제사를 못지내고 했다가 나로 허며는 종증조부님 문 병자 열, 그 어른께서 나서게가지고 문사를 많이 허셨지요, 글도 잘하시고. 그래서 그 양반 힌트로 사손을 그러니께 종손은 아니고 지사나 지내라고 사손이라고 해서 사손이 되에 할라고 통장이 다 있고 그래요.
통운이 요새문자로 진정헌다는 그런 것 같애요. 통장이 있고 그래갖고 인자 병자 열 그분한트로 봉사손이라 명칭이, 그래갖고 그분한트로 되았기난새 그 분이 여그 도계에 살아요. 밀양면 독에 살기에 요리 뫼셔 왔지요.
그래서 당초 그 부조목을 보성으로 오신 내력이 그렇고 그뒤에 자손들이 미약해가지고 박향은 하기는 허나 그저 매년인자 제사는 지내고 그 여문에 대한 관계는 흥매산 선생하고 유봉서 선생하고 두 분이 다 마련해 주셔서 그대로 지내고 있지요.
[조사자 : 그래서 후손들이 있기 때문에 미영씨가 보급돼가지고 미영을 많이 심었습니까 ? 옛날에.]
아 근디 그 미영씨 관계는 그 요새 그때 말로는 적이라 그랬는디 근새 월맹이라 그러는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중국 남쪽으로 가셨기난새 거그서 미영씨를 가져다가 시한 것이 경상남도 산청군 배양리 앞에 가서 미영씨를 가져다가 시배지라 한 것이 경상남도 산청군 배양리 앞에 가서 지금 현재 그때 처음에 심군 밭 그것이 있어요. 그래서 그 밭때기가 불행이도 총로 난 통에 두 본박이(등강이) 되어갖고 두 때기로 되야 있지요. 거스서 미명씨를 자기도 심으시고 장인되신 정천억씨라고 js 이가 계셨는디 그분도 나나 지시고, 그애서 양가에서 키운 미영시가온나라로 퍼지게 되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후현들이 덕으로 입의 생명이라고 우리 백성들을 옷을 해 입었다는 이런 문귀가 많이 나와 있어요.
그때에 그래서 온 전국적으로 미영을 많이 허그는 했다고 허나 유독 이 근방 와서는 자손들 산 더 와선느 미명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심어가지고 외복들을 해 입고 그렇게 했읍니다.
〔 미력면 설화 7 〕 T. 미력 1 앞
덕림리, 1986. 5. 18. 최덕원 조사
정규수, 남․82
□ 징검다리 놓고 손자를 보다
* 돌에 대한 이야기를 해 달라고 청했더니 대중을 위해서 징검다리를 놓은 사람의 이야기를 했다. *
장성무는 아들을 못봐서 아니 늦도록 손자를 못봐서 손자를 얻기위해 상천리 보 다리 및에가 다리를 놓는, 일부 사람들이 시장을 보기 위해서 전부 그리 통과헙니다. 통과헌디 기 시한 삼동 얼음 속에 다리가 없어서 누구를 워했든지 손지를 위했든지 대중울 위했든지 그렇게 열의를 내서 징검다리를 났읍니다.
징검다리를 났는디 그뒤에 다리 놓은 것이 일 이년 뿐이 아니여요. 한 십여년 동안을 다리를 났읍니다. 매년 났는디. 그러니가 그공으로 했든가 아들(‘손자’라고 해야 옳다.) 삼형제를 낳어요. 아들 삼형제를 나서 오늘날 관직에 자기 구실을 다하고 자기 할아부지는 돌아가겠지만 그 공으로 자손까장 온르날 잘 됐읍니다.
〔 미력면 설화 8 〕 T. 미력 1 앞
덕림리, 1986. 5. 18. 최덕원 조사
정규수, 남․82
□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베틀 바위
* 바위에 대한 이야기를 한자리 더 하겠다면서 이 이야기를 구연했다. 연세가 많은데도 발음이 똑똑하고 기억력이 좋았다. *
우리 송림리 앞에가 베틀바우가 있는디 그 바우가 보통 바우가 아니고 큰 바우입니다. 그 큰 바우가 넘치면 전 들을 덮어 물이 넘치면 농사가 잘못되야가지고 흉년이 들고. 그래서 우리 마을의 마을뿐만 아니라 그 부근의 마을은 전부 우리 사회 생활하는디 중효한 걸로 본다 한(하는) 시험돌이라고 헌다. 이래가지고 오늘날 현재에도 있읍니다.
그돌이 있는디 지금 보성강 발전소가 됨으로서 모래가 쌓여 반이나 묻혔읍니다. 그 베틀바우를 보면 농사의 풍흉을 점치네요. 그러지 비가 많이 와서 베츨바우를 넘치면 흉년이 든다 이런 소리를 많이 했읍니다. 공사대가 말이여, 베틀의 일부 이름이라데, 공사대가 저 건네 용정리가 있어, 공사대가. 또 이건네 물에는 바우가 있어가지고 베틀바우가 있어. 따로 꾀인 돌, 그 돌이 괴여갖고 있어.
그 괸 돌바우는 덕림리 촌전말단에 있는데 겸백선을 통과할 때는 누구든지 이상하게 괴물로 본다. 보는디 그 바우가 약 주위를 말하면 5미터 고상으로 말하면 2미터 그런 바운디 본다. 그러면 괴인 독으로 보면 전엣 보면 후에 비치고 후에서 보면 전으로 비치고 이러한 돌이 있소. 돌을 괴인 돌은 네 덩인가 세 덩인가 될 것이요. 이런 돌이 있소. 행인들이 지나면 지금도 이상스럽게 뵈이기도 합니다.
〔 미력면 설화 9 〕 T. 미력 1 앞
용정리, 1986. 5. 18. 최덕원 조사
김복순, 여․68
□ 명당 파고 망한 집
* 민요를 부르고 난 후에 제보자가 파일한 이야기가 생각난다면서 구연했다. 어려서 한문공부를 많이 해서 그런지 무척 유식했다. *
옛날에 명당 파일을 했었는데요. 겁나 파일을 해가지요 풍수를 잘못 만나가지고 그놈을 ‘꼭 파일을 해야 그뫼슬 파야 된다.’ 그래서 파가지고 본께는 아조 그냥 통일을 해가지고 본께는 구실(구슬)이 그냥 줄렁줄렁 하드래요. 그런 뫼슬, 꼭 그래도 뫼슬 파가지고 본께 짐이 퉁글퉁글난디, 그아래 농꾼들이 와때 그놈을 함봉하라고 그냥 들에서 하도 난리드라요.
그래가지고 그 뫼슬 우리 계부님이 자기 옷을 옛날에 그 삼베옷 웃터리를 벗어가지고 함봉을 했답니다. 그래서 함봉을 해가지고 시방 한 사십년 될 것이라요. 인자 회복했어요. 그 산소를 파일해불고는 서구산이라고 그가보고다요. 인자 회복했어요. 그란디 그 명당을 파일을 하고는 집안이 아조 참 잘난 사람들은 싹 슬어버렸지요. 그러고 못난 사람들만 여하튼 남아가지고 인제 회복해서 인자 총생들이 날뛰고 있는 것 같읍니다. 아조 망했어요.
〔 미력면 설화 10 〕 T. 미력 1 앞
반용리, 1986. 5. 18. 최덕원 조사
이일래, 남․53
□ 아들 낳게 한 태산샘
* 향토문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어 이 고장 유래에 대해서 소상히 알고 있었다. 차분한 목소리로 조리맀게 구연했다. *
반용리 마산 마을에 태산 샘이 있읍니다. 이 샘은 마산 마을의 동쪽에 위치해 있는데 옛날부터서 아들을 낳지 못하는 사람이 이 물을 먹으며는 아들을 낳는다 해서 인근 마을에서 물을 떠다가 마시고 아들을 낳읍니다. 또한 이 마을에는 처음에 아들을 낳지 그 아들을 안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전혀 없읍니다. 그래서 그 인근까지 알려져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물이 마르지 않고 현재도 이 물을 사용하고 있읍니다. 그래서 이 물은 깨끗한 물로 지내거나 제사를 모실 때 이 물을 떠다가 마시고 현재도 그렇게 싷천에 옮기고 있읍니다.
〔 미력면 설화 11 〕 T. 미력 1 앞
반용리, 1986. 5. 18. 최덕원 조사
이일래, 남․53
□ 보성 팔명당(八明當)
* [설화 10]에 이어서 보성군의 팔명당 중에서 두 개의 명당이 미력면에 있다면서 구술해 주었다. *
저희 보성군의 팔명당 중에서 저희 미력면 두 개의 명당이 차지하고 있읍니다. 그것은 첮째에 일 도계라 그래서 저희 면 도계마을과 여섯 번재 해당되는 가평마을이 있읍니다.
그래서 이 팔명당은 일 도계, 이 복내면 당촌마을이 두 번째가 되겠고, 세 번째는 득량 박실, 네 번째는 득량면 강골이 되겠고, 다섯 번째는 보성읍 예동, 여섯 번째가 저희 면의 가평마을이 되겠고, 일곱 번째가 보성 주곡리 남문이 되겠고, 여덟 번째는 기억이 안나고 있읍니다.
이 저희 면의 일 도계와 육 가평, 이 마을은 계속해서 마을 흥성되고 있고, 첫번째 해당된 도계마을은 현재도 부자도 나 있고, 국제도덕협회 정일법당같은 데서는 미륵부처 앞으로 나오시게 되면 미륵부처님이 도가 열리는 곳에서 나오신다 하여 현재 그 법당을 설치해 놓고 있고, 또한 제일 명당의 구실을 갖추기 위해서 수풍막이로 해서 전자에 말씀드린 칠섭이 있고, 또한 피활르 방지하기 위해서 설치되고 있읍니다.
〔 미력면 설화 12 〕 T. 미력 1 앞
반용리, 1986. 5. 18. 최덕원 조사
이일래, 남․53
□ 박동계 선생
* 연이어서 보성 육현 중의 한 분 이야기를 하신다면서 구연을 시작했다. *
박동계선생께서는 본 면 출신으로 보성 육현 중에 한 분이십니다. 이분은 사십에 이르득록까지 글을 배우지 못하고 사십 세에 이르러 말을 타고 가시는 중에 편지의 주소를 물으니 배우지를 못해서 알려 주지 못하고,
그 근처에 있는 농사 일꾼이 일을 하다가 나와가지고 답변을 하니, 그때야 뉘우치고 말을 치우며 공부를 하기 시작해서 말년에 문장이 되셨고 또한 육현에까지 되신 훌륭한 분입니다.
〔 미력면 설화 13 〕 T. 미력 1 앞~뒤
반용리, 1986. 5. 18. 최덕원 조사
이일래, 남․53
□ 명당이 많은 미력면
* 조사자가 “미력면은 산수가 수려한데 명당 이야기는 없느냐 ?” 고 했더니 복치를 찾기 위해 지금도 명사들이 돌아 다닌다면서 구연했다. *
저희 면은 석호산과 대룡산이 있읍니다. 이 양대산은 명산으로서 석호산은 복호자리가 있다. 그래가지고, 호박이 넝쿨처럼 열 때게 매디마다 열리듯이 바위가 있는 곳마다 복호자리가 있다 그래서 지관들이 찾아 다니고 있읍니다. 또한 대룡산의 동남간방에는 비룡망해가 있고 그래서 지관들이 찾아 다니고 있읍니다. 또한 대룡산의 동남간방에는 비룡망해가 있고 서북간에는 비룡망하자리가 있다 그래서 역시 이곳도 명사들이 매일과 같이 들어(더러) 다니고 있읍니다. 그래서 호박이 넝쿨마다 매디마다 열리듯이 찾아 다니고 있읍니다.
〔 미력면 설화 14 〕 T. 미력 1 뒤
반용리, 1986. 5. 18. 최덕원 조사
이일래, 남․53
□ 목동과 복종(伏鐘)
* 계속해서 지명에 대한 이야기를 구술했다. *
저희 면 용정리에 가서 목동이라는 골이 있읍니다. 그것은 맥일 목(牧), 아이 동(童)자, 아이들을 맥인다 그래서 그 목동이 있었고, 또한 반용리 가평에 가서 복종산이 있읍니다. 그래서 단순히 종을 옆어 논 것이다 그렇게만 알고 있었는데, 목동에는 그 후에 미력동초등학교를 설치했고, 복종산에는 보성종합병원과 미력남초등학교가 설치돼서 현재 운영되고 있읍니다.
그래서 옛날에 지명을 지어 논 것이 오늘에 와서 맞혀져 가고 있는 좋은 곳입니다.
〔 미력면 설화 15 〕 T. 미력 1 뒤
반용리, 1986. 5. 18. 최덕원 조사
이일래, 남․53
□ 죄가 있으면 못 나가는 문턱재
* 연이어서 문턱재에 대한 전설을 구술했다 *
저희 면 용정리 가마골 앞에 문턱재가 있었답니다. 그런데 옛날 관가에 출입하기 위해서 보성을 거쳐서 서울을 가게돼 있는데 서울에 가며는 ‘문턱재를 거쳐 왔냐, 안거쳐 왔냐.’ 해서 물었답니다. 그래서 ‘거쳐 왔다.’ 그러며는 그 사람은 죄가 없는 사람이고, ‘거쳐 오지 안했다.’ 하는 사람은 거짓말로 알고 있읍니다.
그래서 이 문턱재는 죄가 있는 사람이 거기를 저쳐가게 될 때에는 꽉 찝어갖고 나가들 못하게 해불고, 죄가 없는 사람은 그대로 통과를 시켜 주었다고 합니다.
〔 미력면 설화 16 〕 T. 미력 1 뒤
반용리, 1986. 5. 18. 최덕원 조사
이일래, 남․53
□ 김삿가의 문장(文章)
* “잡스런 이야기를 한 자루 한다.” 면서 구연을 시작했다.
옛날 서당 학동들이 잡스러운 문장을 했는데, 이는 서당에서 배운 것은 이미 다 알고 있고 생도는 모두 십명도 못되었는데, 선생이 또 와서 가르칠라고 헌다 하는 이 말을 ‘서당(書堂)은 내조지(來早知)요. 생도(生徒)는 지미십(지未十)인데, 선생(先生)은 내불알(來不謁)이라.’(김삿갓 혹은 김립(金笠)이라 하는 김병연(金炳淵)의 시로 알려진 것의 일부이다.) 하는 이러한 문장의 장난을 많이 했었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이와 같은 문장들이 많아서 웃고, 또한 공부가 하기 싫을 때에는 이런 걸 해갖고 서당에 선생님이 몰래 듣고 매를 맞기도 하고 많은 옷김을 가졌었읍니다.
〔 미력면 설화 17 〕 T. 미력 1 뒤
반용리, 1986. 5. 18. 최덕원 조사
이일래, 남․53
□ 과부의 지혜
* 끝으로 “속언을 한 자루 말씀드린다.” 면서 이야기를 구연했다. *
옛날에 과부를 덮치기 위해서 과부방에를 갔는데 과부가 하는 말이, “신정(新情)을 개로 급허면 고부곡어황천(故夫哭於黃天)이라 하는 말이 있읍니다.”
이는 새로운 정을 오늘 저녁에 맺는다면 옛 남편이 지하에서 통곡할 것이다 해서 그 거절을 했다는 이러한 속언도 있읍니다.
〔 미력면 설화 18 〕 T. 미력 1 뒤
반용리 덕래마을, 1986. 5. 18. 최덕원 조사
김동엽, 남․82
□ 노랭이 마음 고치게 한 정수동
* 시문을 겉드린 설화를 차분하게 막힘이 없이 구연했다. *
옛날에 서울에 정수동이라는 사람이 있었어. 정수동, 정수동이라는 사람이 몸자 좋고 글도 잘하고 아조 무지헌 문장인디, 벼슬이라고는 전번 눈도 안 떠. 과거를 허면 높은 과거를 허겄는디 통 그런 것 힘도 안 쓰고 살림이 아조 가욱 굶고 지낸디, 즈그 처자가 그저 가욱 동냥질 해딛기 해서 먹고 그런디 그냥 집안을 아무것도 돌보지 안해. 그런디 어디 가서 지일(제일) 잘 노냐 그러며는 그 유제가(이웃에) 김정승이 산디 그 김정승 집에가서 팽상 김정승하고 놀아
김정승이 왜 정수동을 좋아하냐 그러며는 그 정수동이 옛날 이야기를 잘하고 가람이 원청 아조 청백해가지고 청백해갖고 넘의 것이라곤 눈을 안 떠. 그런게 간곡(가난)하게 살어도 넘의 것에 눈 안 뜨고 일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여.
그란디 인자 김정승 앞으로 뭣이 늘 시방 뭐라든가 한기비(급) 올라 갈라면 뭐 돈 갖다 주고 안 그런가. 쌀도 갖주 다고 돈도 갖다 주고 그런디 그뭐 하다못해 선달이라도 해볼까 그러고 맨 요물이 들어 와. 돈도 가져오고 쌀도 가겨 오고 그 놈을 받으면 정승 혼자 다 묵을라고 생각해보니 정수동이가 부끄러와. 정수동이가 팽상 거그서 논디 근께 인자 쌀도 오면 더러 갈라서,
“어이 자네 갖다가 마느래 혼자 그 해묵고 살라니 곤란허니까, 이놈 좀 갖다 주소.”
그러면 그놈을 가지고 가서 즈그 마느래 주는 것이 아니여. 가다가 주막에서 술을 묵어부러. 또 돈을 혹시 또 주면 돈을 갖고 가서 주막에 가 술 묵어부러. 통 마느래는 아무것도 안 갖다 줘. 그런디 아 인자 그래 놓고 평생하는디 아 김정승이,
“자네는 어째서 그런가. 뭘 주면 갖다가 자네 식구대로 먹으라 한께 왜 그래분가, 술만 묵어분가.”
그런께,
“아 그것은 공것인디, 공 재물을 뭘라고 갖고 간다요 ?”
그러니까,
“허허, 참 자네 성질 묘하시.”
어이 그런디 경상도 거그가 어디라도만 마을 이름을 잊어 부렀네. [다시 이야기로]
“거그를 한번 다녀와 주소. 내가 꼭 그 볼띠가 있네, 볼일이 있네.”
그래 숫자를 한나 적어주면서 거그를 갔가 오라금서 여비를 줘. 거그를 갔다 올 만큼 여비를 주그던. 아이 인자 그놈을 갖고 시방 가는 판인데 자기 갔다 올 노수는 생각도 안하고 가다가 술 한 잔 딱 마셔불고 가다가 인자 일모가 거저 됐디.
어느 마을 앞에가 주맥(주막)이 있그던. 술 주맥이 있이서 그 술방에 가서 떡 들어가서 술 한 잔을 턱 묵고는 술 밭주인 보고,
“어야 이 사람아. 이 안애가 시방 기와집이 굴뜨락 같은 기와집이 많이 있는디 그 기와집이가 어떤 부자가 산가 ?”
“부자가 살어도 노랭이라고 별 호가 있소. 왜 노랭이 근께 과객 하나도 절대 안재우는 부자요. 수백 석거리 수천석 거리허는 부자요마는 통 과객 하나도 안 재웁니다.”
“그래 그러면 내가 거그 가서 하루 자녁 자고 싶은디.”
“아니요, 가시지 마시오. 갔다 도로 나올 것인디 뭘라 가게라.”
“아니, 가바사(가 보아야) 알제.”
그러고 인자 딱 떨고 나갔어. 나서 갔고는 그 첫 대문이 시(세) 대문이여. 첫 대문 저 안에 중간 대문, 저그 마즈막 대문. 그래 인자 문간이 서인디 첫 문간에 가서 본께 사람이 지내도 뭐 조용해. 그래서 둘째 문간에 가서는 서울 문자로 ‘오너라, 오너라.’ 한께 왜 흐건 영갬이 떡 나오드니,
“거 뉘시오.”
그러드라요.
“예. 길가는 사람인디 가다가 일력이 다 되어서 하리 저녁 유숙해 갈라고 찾읍니다.”
그러니까,
“아니오. 우리 집에는 못 잡니다.”
“왜요.”
“아니오. 우리 집에 이유가 있어 못 잡니다..”
“아, 그러지마는 정 잘 때가 없으면 여물청에서나 좀 자고 갈랍니다. 여물청에서나 좀 자고 갈랍니다.
그런께 그러니까,
“원 세상에 손님을 여물청에다 재울 수가 있는가 보냈으면 보냈지.”
“아니오. 그 상관 없읍니다.”
아 절대로 못 잔다고 그러네. 그래서.
“여보시오. 정 못 잘 것 같으면 내가 뭐 한나 써 놓고 갈 것이 있소.
지필묵 있으면 좀 갖다 주시오.”
그런께 지필묵을 갖다 주네. 종우를 딱 들고는 거그다가 뭐라고 썼냐 그러며는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하니, 세상사 여부운(世上事 如浮雲)이라’ 그러고 ‘평토제인산후(平土祭因山後) 산적적월황혼(山寂的月黃昏)’ 딱 써 놓고는 ‘앳시오.’ 그러고 나갑니다. 딱 주고는 나간단 말씀이오. 간디 영감이 그 글을 딱 보니까 ‘공수래 송수거 세상사 여분운이라’ 세상에 내가 이거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갈거인디 재물이거 다 뭣할 것이냐 이런 생각이 나그덩. ‘평토제 인산후 산적적 월황혼’ 평토제 지낼 때는 사람이 잔뜩 모여서 그 음식을 딱 묵고는 싹 갈려부리면 ‘산적적 월황혼이라’ 혼자 누런 달밤 밑에서 혼자 드러 누웠을 것이여.
에라 빌어먹을 저만치 가는 것을 ‘여보시오, 여보시오.’ 손을 치그덩.
쩌만치 가는 것을,
“거그 잠 있으시오.”
“아니 길 떠나 바쁜디요.”
한하고 간단 말이여
“아이 거그 잔 있으란 말이오.”
쫓아가서,
“가입시다.”
“왜요 ? 내 길 떠날 것인디 너디로 가냔 말이오.”
딱 덱고 와서는 자기 거처하는 사랑으로 잘 해 놓고 있그던. 딱 안으로 들어가더니,
“여봐라.”
그래. 하인이 나온께,
“주반상 하나 차려 오니라.”
주반상을 잘 채려 왔네. 그놈을 먹고 나니 참말로 생전에 못 먹든 음식이여. 잘 먹고는 인자 그날 저녁에 거그서 자제 된디 밥상이 저녁밥상이 나왔는디 상다리가 부러지게 채려 나왔어. 그놈을 떡 묵고는 자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갈라고 딱 챙김을 한께,
“아, 왜 그러시오.”
“아이 엊저녁에 잔 것도 감사허디 아처까장 있겄소. 나 갈라요.”
그런께.
“허허 이거 무슨 소리요. 이왕에 지겼은께 아침밥을 잡수고 가야제 쓸것이요.”
못가게 해. 그래 인자 거그가 주저 앉여서 아침밥도 잘 묵고 잘 떠난디 저만히 간께.
“가만 있으시오, 가만 있으시오.”
그러거든. 거그 섯은께 와서는 여비를 통통히 주네.
“이놈 여비해서 가이시오.”
하 이거 큰 대접을 받었지. 이거 딱 다녀 왔는디 그 영감이 뭔 수가 있냐 그러며는 그해부터는 소작료를 받는데, 두섬 받을 놈 한섬 받고, 한섬 받을 놈 열말만 받고, 열말 받을 데는 안 받아부리고, 또 없는 사람 노적 하나씩 다 나눠 줘부렀어. 그래 놓고 보니께 소작들이 뭐이라 헌고니 자,
“그 영감님이 돌아가실란가 변했드라. 하 이거 없는 사람을 귀밀을 주고 수도 반절씩만 받고 말고 그러니까 우리가 그 양반을 그냥 둘 수가 있냐 ? 그런께 그 런께 그 양반 기념비를 하나 해 세우자.”
그래갖고 그 면내에서 전부 총동원 해갖고 비를 아조 크게 훌륭하에 했든 것이여. 해갖고는 그 양반 마을 앞에 좋은 경치를 찾아서 비를 세웠는데 그 일 군(郡)을 소집을 했어.
그날 그런 잔치를 허는디 일 군을 소집을 해갖고 군수까지 다 나오고 그랬는디 ‘아무날 비를 세우는디 잔 나오시오.’ 그러고 영감한테 통지가 왔거든. 그래서 내가 뭘 비석을 세울 자격이 못된디 뭔 비를 세운다고 그러고 나가 봐어. 나가본께 그 들에다가 전부 채일을 딱 둘러치고 사람이 수백명이 수천명이 앉였는디 군수까지 나와 있거든.
비는 떡 세워 놓고 그래서 네 앞에를 떡 가서 음석을 한참 나나서(나누어서) 먹는 중이고 야단인데 음식을 잠깐 중지하라 해놓고는 그 글을 딱 몬야 지어갖고 온 글을 딱 뵈임스로(보이면서),
“자 내가 잠깐 이 글을 맺자 읽을라니까 그냥 들어보고 음식을 나나 먹으라고.”
그러고는 글을 딱 읽드라네.
“‘공수래 공수거하니 세상사 여부운이라. 평토제인산후 산적적월황혼.’ 이 글을 누가 지었냐 하며는 서울 정수동이라는 선부가 지었다. 그래서 이 글을 받은 후로 내가 대차 죽으면 빈손으로 가고 빈손으로 오고 헌디 내가 이 재물 뭣 헐 거이냐. 그래서 내가 소작인들에게 그만한 거석을 뭣 했는디 이것이 내가 인심이라고 비를 세우냐.”
그러고 거그서 잘 먹고 놀았드라네.
〔 미력면 설화 19 〕 T. 미력 1 뒤
반용리 덕래마을, 1986. 5. 18. 최덕원 조사
김동엽, 남․82
□ 율곡의 가르침으로 호랑이 잡은 남사고
* 옛날에 들었던 이야기를 기억해 내면서 구연했다. *
그 전에 율곡선생이 그 어른이 제자를 데리고 글을 갈친디, 서울에 누구냐 허면 서울에 남사고씨, 남사고. 제자가 남사고여. 율곡선생의 제자가 글을 갈치고 인자 여런이 글을 갈치고 있는디 중놈이 와서 선생님한테 절을 허네. 인사를 허니까 떡 받고 앉였는디 중놈말이 뭐라 헌고니,
“암디 있는 그 부잣집에 성이 뭔디, 그 부잣집이 대사를 치는디, 그 집이 새각시가 젯밥을 채려서 묵으러 갑니다.”
아무날, 그 중이 아니라 호랭이여. 밥을 묵으러 갑니다 그러거든. 그래야 밥을 지었으면 묵어야지야 딱 떠나분단 말이여. 그런께 저 거식이 서울에 아따 그 금방 또 잊여분다, 내가 뭐라 그랬드라. 남사고, 응, 남사고가 아이 선생님,
“아 그저 그것이 사람인 줄 알았더니, 중인 줄 알았더니 호랭이 아니요. 호랭이다. 거 그 암디 그 젯밥을 채렸다고 묵으러 간다 안하냐 ?”
“아 그러면 사람이 살아야지 죽고 볼 것입니까 ?”
“아이 선생님. 그 연구해서 지를 갈쳐 주십시오 지가 가 막을랍니다.”
“니가 꼭 막겄냐.”
“예, 막것읍니다.”
“으흥 그래야. 그러면 그 집이 가서 그런 말을 니가 암통을 미리 해야 한다.”
“예, 헐랍니다. 그러면 무엇을 갖고 해야 할 것입니까 ?”
그런께,
“천지팔행겨을 읽어야 한다. 천지팔행경을 읽되 마당 한 가운데다가 허리상을 매고 정화수를 바쳐 놓고 너는 물래(마루)가 탁 앉여서 읽어야 한다.”
“예, 그럴랍니다.”
아이 이놈이 그냥 나와서 그집이를 갔네. 머리 치렁치렁 딴 총객(총각)이 곱다단 총객이떡 오그덩. 사랑에 떡 들어가서 영감한테 인사를 딱하고 인자.
“니 어채 왔느냐 ?”
“에, 암디 이런 서재에서 왔읍니다.”
“그럼 니가 누구냐 ?”
“예, 남사고입니다.”
“응, 선생님이 누구냐 ?”
“율곡 선생입니다.”
“그래, 어찌 왔는고 ?”
“예, 말씀이 있어 왔읍니다.”
“뭔 말이냐 ?”
“아무정께 집이 손녀를 여운담서요 ?”
“그런다.”
“손녀가 호식허게 되었어요. 첫날 저녁에 호식허게 되았는디 그것을 방지허기 위해서 제자 왔읍니다.”
“네, 이놈, 수슨 호식이 뭐이라냐.”
“아니오. 정말 틀림없읍니다. 그러면 그날 저녁에 일등 포수 한 여나뭇 허고 마을 사람을 싹 거동해서 대문 안에다가 전부 모야 씁니다. 호랭이가 못들어 오게. 그렇게 허고 방지를 허십시오. 그러면 저가 그날 저녁에는, 제가 와서 방지를 허겄읍니다.”
그런께 안될 소리라고 깨끄던. 깬께 정지서 정지일을 보든 자부께서,
“아부님 그러실 말씀이 아니오. 저 도령이 오직이 거식해서 알고 와서 그럴 것이요. 그런께 저 도령 허는 대로 헙시다.”
즈그 자부가 딸 임자가 그런 말을 허느니 어쩔 것인가.
“그러면 아무캐나 느그 알아서 해라.”
딱 인자 그런께,
“예. 아무날 아무시에 제가 옵니다.”
그러고 딱 가부렀거든. 그런께 인자 그 부잣집이는 대사날이라 포수를 일등 포수를 여나뭇 데려다 딱 문간안에다 총에다 불 탁 박어서 딱 작정하고 있고, 온 마을 사람들을 싹 소동해서 마당가에로 딱 정비를 했단 말이요. 그런떼 인자 신랑이 와서 예를 갖추고는 방을 싹 들어가서 저녁 밥을 먹은 연후에 인자 남사고사 떡 갔어. 가서 인자 마당에다 허리상을 딱 매고 허리상 우에다 정화수를 바쳐 놓고 물리에서 딱 마당을 내리다 봄시로 친지팔행책을 딱 피(펴)놓고 읽기 시작허네.
선생님 말씀이 ‘만약 니가 읽다가 한 자라도 더듬는 날엔 너도 죽고 다 죽어. 그러니까 더듬지 말고 쭉 읽어라.’ 그랬단 말이여. ‘예, 염여 마시오.’ 가서 인자 천지팔행경을 딱 피 놓고 읽는디 한참 일 편을 읽고 이 편을 들어 가니까 어디서 산이 무너지느 소리가 나드니 천금대호가 마당에 뚝 떨어지네 그리야. 뚝 떨어진께 포수 뭐 마을 사람, 쥐도 개도 암 것(아무것)도 없이 싹 어디로 가불고.
그래 인자 단지 남사고 혼자 인자 팔행경을 읽고 있어. 호랭이가 딱 마당에서 안들 드러다 보고 앉졌는디 방에서는 오줌 매럽네, 똥 매럽네 야단이고 호행이가 새게 젠께 그러제. 그래 막 듭때(드립다) 읽는데 이 편을 읽고 삼 편차 들어가는디 인자 시간이 넘어 가그덩. 호랭이란 놈이 밥 먹을 시간이 넘어가면 못 먹는 것이여. 아 인자 삼 편 거지반(거의) 끝나고 사편차 들어 가는디 호랭이가 슬쩍 가부러. 그래서 경을 딱 끝내고는 방문을 열고 들온께 들어와서 본께 신부가 그냥 자물쐐부렀어(까무러쳐 버렸어).
그래서 인자 지름을 믹이고 사지를 주므르고 해서 그 부인이 신부가 살었단 말이시. 살아 나왔는디 그때사 인자 제대로 첫지 인자 이놈은 인자 글을 읽은 남사고는 경을 읽고는 서당으로 핑 와부렀는디, 와부렀는디 율곡선생님이,
“너 이리 오너라.”
도복(도포)을 입고 도복 및에다가 딱 숨겨부러. 조금 있은께 그놈이 왔네. 뭐 방에 들오도 안허고 물리에서 막 선생님한테 포악을 하네.
“선생님, 저를 저를 밥을 못 먹게 하시니 저는 죽어야 쓸 것이디 어떻게 죽어야 허겄습니까 ?”
허고 포악을 하고 악을 쓰네. 아 이어거 그런께 선생님을 율곡선생님은 홀리기만 허제. 인제,
“너 이놈. 어디라고 니가 와서 그러냐.”
고 그냥 야단을 허제.
“그럼 선생님 저 죽는 것 볼랍니까 ?”
“아 니가 죽으면 죽었지 어쩔 것이냐 ?”
“그놈 내 놓으시오.”
그랴. 그놈이나 콱 씹어 묵을란다고 내 놓으라고 그래. 인자 만약 도포를 안 덮었으면 대번에 차갈 놈이여, 딱 덮어 부렀은께 그러제.
“여그 없다. 그놈 집이 가서 물어 가든지 그렇지 않으면 개를 물어 가든지 돼야지가 있으면 돼야지를 묵든지 해라 !”
“아니오. 그놈 집에 가도 안헐랍니다. 내 놓으라고.”
그래 막 홀개로 뭐라 한께 저놈이 어기 가도 안허고 서당 마당에서 죽을라니께. 보시오 악을 막 목오리것 쓰더니 서당 마당에가 쭉 뻗으러진디 천금대호여.그러니까 남사고를 떡 내놓고,
“야 이놈아, 큰 경악했다. 저것이 백두산 신호(神虎)다, 다름이 아니고 백두간 신호여. 백두산 신호를 니가 안 죽여부렀냐.”
그러드라요.
〔 미력면 설화 20 〕 T. 미력 1 뒤
덕림리 덕래마을, 1986. 5. 18. 최덕원 조사
김동엽, 남․82
□ 두 위패 모신 제사
* 대단한 구연력을 가졌다. 아무런 부담없이 들을 수 있도록 구연했다. *
율곡선생이 자기 친구가 돌아가셨는디 그 이듬해 첫 소상이 돌아왔어. 그래서 조문을 갔네. 갔는디 영(靈)에가서 입곡을 할라고 들어다본께 영우(위)에가 제게 친구가 앉여 있는 것이 아니라 패랭이 쓴놈이 앉여 있는 말이시. ‘하하, 이거 우리 친구가 어쩐 일일가,’ 그러나 입곡을 못하고 생인하고 이런 이약(이야기) 저런 이약 하고 앉였는데, 자기 친구가 떡 그때사 들어 와. 잘근 도복에 잘 입은 친구가 들어오더니 영 우를 삐긋 들여다본께, 패향이 쓴 놈이 못 들어가고 큰 방으로 딱 들어가부리네. 그래서 ‘무슨 이유가 있구나.’ 그러고는 저녁에 같이 놀고는 오실라 하면서 뭐이라 한고니 생인을 불러갖고,
“자네 집이 뭔 이유가 있네. 자네 아부지 신도가 오셔갖고 영 우에가 패랭이 쓴놈이 앉여 있으니까 방으로 들어 가겠어.
그러니 그 이유를 누가 아냐 허며는 자네 어머니밖에 몰라. 자네 어머니를 보고 묻소. 물는디 자네 어머니가 꼭 안 갈쳐주면 ‘칼로 목을 베어서 지가 죽을랍니다..’ 그러고 칼을 옆에다 딱 놓고 야무게 모지게 물어봐야 갈쳐 줄 것이다. 그런디 만약 갈쳐줘서 그 신도가 패량이 쓴 신도가 딱 거식이라면 제사를 두위를 지내야 쓸 것이다. 문간에 막 들올 때 문간방이 있은께 문간방에다 한 점을 잘 채리고 또 한 위는 뒷문 안에 영 우에다 채리고 해 놓고 봐라. 나는 맹년에 또 오마.”
그래 놓고 왔단 말이여. 왔는데 그 이튼날 아침에 즈그 어머니가 방에가 앉였는디 즈그 어머니 앞에가 딱 앉더니,
“어머니, 어머니가 저를 꼭 낳습니까 ?”
그러거든.
“아이 이놈, 너 이놈 그거 뭔 소리냐 ? 내가 너를 낳았지 누가 낳을 것이냐, 이놈 !”
“아니요 진심으로 말씀 허시오. 그럴 이유가 있읍니다.”
“그러면 무슨 이유여, 이놈아. 당제 그러지 마라.”
“아이 꼭 어머니께서 안 갈쳐 주시면 불효한 말로 이 칼로 제목을 찔러 죽을랍니다.”
“어머니가 안 갈쳐두면 제가 살 필요가 있소.”
목에다 칼을 딱 대네 그려. 안되것어, 그놈 허는 것이 안되겠어. 그래서, “가만 있거라. 그런 것이냐. 나는 늘 애기를 딸만 낳튼댐이라(다음이라)어 정지 아그, 그 아그는 첫 애기다 아 애기가 한날 한시에 비쳐. 그러면 정치 것은 저짝방에서 비치고 나는 이방에서 낳게 되는디 나는 애기를 순산해 놓고 노니 여식이여. 그래서 ‘이것 또 여식이구나.’ 하고 한탄하고 있는 참에 저쪽에서 애기 소리가 나드라. 그러니까 저놈은 첫애기니까 첫애기를 낳고 나며는 산모는 정신을 가로나부러야. 그래서 얼른가보니까 니를 낳았드라. 그래서 안 갖조 와부렀냐. 바까서 키운 것이다. 그 죄빡에 없다.”
그런께,
“예, 알겠읍니다. 생아자도 부모요, 양아자도 부몬디 지 죽도록은 훌륭하게 어머님을 모시겠읍니다.
딱 그래 놓고는 인자 그 이듬해 제삿날이 돌아 왔는디 제물을 거룩하게 장만해갖고 문간에 막 들어올 때 뵈인 문간방에다 걸게 차려 놓고 영 우에다 닥 채려 놓고 있단 말이여. 있으니까 또 율곡선생이 오신단 말이여. 오신디 오셔서 본께 영 위에가 자기 친구가 딱 앉겄단 말이여. 그래서 입곡을 딱 허고는 앉었으니까 조깐 있은께 패랭이 쓴 놈이 오더니 문간을 드려다 본께 문간방에가 제물이 거드름허니 있은께 그리 쏙 들어가분단 말이여. 그래서 거그서 딱 말을 하는디 율곡선생이 뭐라 헌고니 그 생인을 보고,
“너는 니 생전은, 니 사후는 모른디 사후까장은 안되고 니 생전을 하루 저녁에 제사를 두위식을 지내라 !”
그러고 하겼드라네.
첫댓글 그 글을 딱 몬야 지어갖고 온 글을 딱 뵈임스로....고향사투리와 이자료보니 시집올때 아래아와 세모 들어간 고문체-할머니가 써주신 장담그는법 생각나네요.
아~~!! 夢寐難忘,,,,,, 관리자님 좋은 자료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