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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산성을 찾아서
문화재 분류 : 사적 제12호
시대 및 시기 : 백제, 6세기 전반
성격 및 유형 : 산성 유적
소재지 : 충남 공주시 웅진로 280
방문일 : 2022년01월18일
누구와 : 동네 지인들과 함께
지난 2021년 년말 공주를 갔다가 「무령왕릉 유적지」를 돌아보고 시간이 없어 공산성을 돌아보지 못하고 왔으므로 기회를 보아 다시 공주를 찾아보기로 했는데 예상보다 일정이 빠르게 잡혔습니다.
1박2일 공주여행 일정을 잡았는데 공산성은 제일 먼저 답사한 문화재 지역입니다.
아침에 서울을 출발해 12시경 공주에 도착한 우리는 미리 예약해둔 공주한옥마을로 가서 수속을 마치고 공산성에 도착한 시간은 13시40분경이었으며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15시10분 경까지 공산성을 돌아봅니다.
공산성은 백제 웅진기를 대표하는 왕성으로 백제의 대표적인 고대성곽으로 1971년도에 발견된 무령왕릉으로 인해 베일에 가려졌던 백제문화가 수면위로 떠오르며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곳 중 한 곳이기도 합니다.
백제의 본래 수도는 한성으로 지금의 풍납동 일대가 됩니다.
한성에서 오래 자리 잡고 있던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침략으로 인해 문주왕 원년인 475년에 한성에서 지금의 공주인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며 웅진기의 시작을 알립니다.
백제의 역사는 크게 3기로 분류합니다.
즉, 풍납동 일대에 수도를 정했던 한성기와 고구려 장수왕의 침략으로 한성을 버리고 남하하다가 공주에 정착한 웅진기, 그리고 공주에서 64년을 있다가 부여로 수도를 옮긴 사비기입니다.
공산성은 백제시대 웅진기의 왕성으로 백제시대에는 웅진성,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 조선시대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렸다고 하는데 쌍수산성에 대한 이야기는 이후 쌍수정에서 다시 거론하기로 합니다.
공주(公州)와 공산성(公山城)
조선 중기 때 실학자인 이중환의 텍리지에는 공주와 공산성을 어떻게 기록했을까?
「고을 북쪽에 작은 산이 강가에 자리 잡고 있는데 그 생김이 ‘公’(공)자와 같아 공주(公州)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었던 공주라는 지명의 유래로 공주의 옛 이름인 웅진(熊津)의 곰 웅(熊)에서 유래되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택리지에서는 웅진과 관계없이 공산성이 있는 산 형상에서 공주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기록되었다는 점입니다.
산성에 대해서의 기록은 택리지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산의 형세에 따라 작은 성을 쌓고 금강 물길을 해자처럼 둘렀는데 면적은 좁아도 지형은 견고하다.」
이러한 공산성은 천연적 요새로 북쪽으로는 금강이 흐르는 절벽지대로 외부에서 침입하기에 힘든 지형으로 방어하기에 좋은 곳이며 그밖 다른 방향으로 토성으로 견고히 쌓았다고 하는데 인조가 머문 이후 석성으로 개축하였다고 하는데 성곽의 총 길이 2660m 중 토성이 735m, 석성이 1925m로 대부분 석성으로 바뀐 상태입니다.
성곽 안에는 백제시대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의 유적도 많이 남아 있으며 2011년 공산성 발굴조사 때 백제시대 때의 무기류, 기와, 갑옷등 많은 유물과 밤껍질 등이 출토되었다고 하는데 이중 옻칠가죽갑옷과 철갑옷이 나왔는데 갑옷에는 제작 연대를 나타내는 645년이라는 글씨가 있어 학계의 관심을 받기도 했으며 밤의 고장 공주는 백제시대 때부터 밤의 명산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공산성의 답사는 정문격인 금서루부터 시작됩니다.
도로 옆 관광안내소에서 금서루로 오르는 길은 가팔라 갈 ‘지(之)’ 자 로 굽이진 길을 따라 올라야 하는데 입구로 들어서면 유네스코 마크가 새겨져 있는「백제역사유적지구」 입석을 만나게 되는데 「백제역사유적지구」는 백제시대의 문화를 대표하는 유산으로 세계유네스코에 등재되어 있는 우리 문화재로 공주에는 이곳 공산성과 무령왕릉 고분군 2곳이며, 익산에는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 2곳이 있으며 부여에는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능산리 고분군, 나성 4곳이 있습니다.
「백제역사유적지구」 입석을 막 지나면 금서루입구 비석군이라는 안내판이 나오고 이어서 약49개나 되는 아주 많은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언제 이곳으로 옮겨 세웠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비석이 있는 길을 지나 한 구비 꺾이는 곳에 이르면 공주산성을 안내하는 입간판이 나는데 내용은 대부분 서두에 설명한 내용이며 2015년7월8일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주산성을 설명하는 입간판을 대충 읽고 가파른 길을 따라 조금 지나면 공산성의 정문격인 금서루로 접어듭니다.
금서루 입구에는 입간판이 있는데 내용은 이러합니다.
錦西樓
『공산성 금서루는 공산성 4개 성문가운데 서쪽에 있는 문루이다.
성안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지만 1859년에 편찬된 공산지의 문헌 기록과 지형 여건 등을 고려하여 1993년 복원하였다. 현재 문루는 원래 서문이 있던 자리에서 약간 남쪽으로 이동하여 지은 것이다. 금서루는 비록 새롭게 복원된 것이지만 조선시대 성문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금서루는 공산성의 정문이 아니면서 정문의 역할을 하고 있는 문으로 공산성 서쪽에 있는 2층 문루인데 1층은 출입문이며 2층은 그리 크지도 넓지도 않은 건축물이 있는데 이곳에서 성안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의 관리나 통제를 맡아 왔던 곳입니다.
1층 출입문 천장에는 서쪽을 상징하는 사신도 중 서쪽을 방위한다는 백호가 그려져 있는데 조선시대 대표적 왕궁인 경복궁에도 동서남북 4개 성문에 방위를 뜻하는 사신도가 그려져 있는데 동쪽에는 청룡, 서쪽에는 백호, 남쪽에는 주작, 북쪽에는 현무가 그려져 있는데 이곳 서문인 금서루에도 서쪽을 상징하는 백호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사신도는 조선시대의 특징으로 알았는데 금서루 출입문 옆에 설치한 안내판, 깃발이야기를 보면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 되어 있는 것을 보아 사신도는 조선시대 이전인 백제시대에서도 이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곳 사신도는 송산리 6호고분 벽화에 나오는 것을 이곳 공산성에서 재현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성곽 4대문 천장에 있는 벽화는 경복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1층 천장 백호를 보고 2층 문루로 올라서면 성안과 밖이 훤하게 볼 수 있어 방어와 시찰에 큰 도움이 되며 금서루 좌우 성곽을 따라 백호가 그려져 있는 노란색 깃발이 걸려있는데 안내지에는 답사코스가 들어서며 우측에서 좌측으로 돌아보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우리 일행은 좌측에서 우측으로 답사하기로 합니다.
이근남 형님과 뒤에서 천천히 성곽을 따라갑니다.
좌측 성밖으로는 토성과 석성을 합친 높이가 20여m는 되는 절벽이 이어져 있지만 성안쪽으로는 성벽 위 길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성벽을 따라 노란 황색 깃발이 걸려있는데 깃발에는 사신도가 그려져 있고 노란색은 우주의 중심이 되는 색으로 생각해 중히 여겼다고 하며 이 황색이 백제의 색이라고 하는데 성곽을 따라 걸린 깃발이 아주 멋있게 보입니다.
성곽을 따라 천천히 3~4분 걸으면 고도를 높이며 방향을 우측으로 바꾸는데 이곳에 데크쉼터가 나오는데 쉼터인 이곳에 안무정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있습니다.
안무정 정자에서 금강과 산세에 감탄하여 어깨춤을 추었다고 설명하는데 안무정은 정지산 정상에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없고 전설로만 전해진다고 합니다.
이곳이 안무정이 있었던 자리가 아니라면 왜? 이곳에 이런 안내판을 설치해 헷갈리기 하는지 이해가 안 되었는데 이곳을 지나며 또 다른 이야기 거리가 있는 안내판을 보며 공산성이 공주와 관련된 이야기를 알려주는 교육의 장소로도 이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금강을 보면 금강철교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공주 신시가지도 대부분 내려다보입니다.
시원하게 흐르는 금강을 보며 성곽을 따라 조금 지나면 멀게 공산정이 눈앞에 들어오는데 앞서간 미인3총사가 뒤따라오는 우리를 보고 손을 흔들어 대고 덩달아 우리도 손을 흔들며 답례를 하며 점점 다가가 공산정에 도착합니다.
성곽을 따라 오며 금강과 주변 풍경을 보았고 공산정 주변 성곽에서 보는 풍경이 너무나 멋있으므로 공산정에 올라가 풍경을 살필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리고 공산정 옆 성곽 위에 2개의 안내판이 있는데 취리산회맹과 배다리와 금강철교에 대한 내용으로 최리산회맹은 오래전 신라와 백제 그리고 당나라사신 3명이 각 나라를 대표하여 친하게 지내자고 굳은 맹세를 하였는데 신라는 당나라의 힘을 빌어 백제를 무너뜨리고 나중에 당나라를 쫓아버린다는 속마음을 품었고, 당나라는 이러한 구실로 접근하여 우리나라를 통째로 삼키려는 생각을 했고 웅진, 그러니까 백제는 약소하므로 화친을 통해 나라를 지키려 했는데 결국 회맹이 깨지고 나당연합에 의해 백제는 망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또 하나의 안내판은 공주철교에 관한 배다리이야기로 오래전부터 금강을 건널 때 나룻배가 그 역할을 맡았는데 사람의 이동이나 물자의 이동이 많아지며 다리를 놓았는데 홍수에 떠내려가기를 반복했답니다.
그래서 고육지책으로 생각한 것이 작은 나룻배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배다리를 만들었는데 1932년 일제 강점기 때 배다리를 없애며 새로 설치한 다리가 지금은 금강철교라고 합니다.
앞에서 사진을 몇 장 찍고 미녀3총사는 성안 편안한 길로 근남형님과 필자 둘이는 성곽을 따라 가기로 했는데 내려서는 성곽길은 무척이나 가파르며 좁아 만만치 않습니다.
물론 혼자서여 아무리 경사가 심해도 문제는 없지만 형님이 최근 무릎이 아파 심한 경사길을 내려서는데 힘들어 하기 때문입니다.
경사진 성곽길을 내려서면 성곽에 오래된 느티나무 고목이 지나는 사람들에게 무사하고 즐거운 하루가 되라고 반갑게 맞아줍니다.
반가운 만남을 뒤로하고 조금 지나면 성문이 나타납니다.
공북루입니다.
拱北樓
『유형문화재 제37호인 공북루는 공산성 북쪽 문루로 금강 남쪽과 북쪽을 오가는 남북 통로의 주 출입문이다. 본래 공북루 자리에는 망북루가 있었는데 허물어져 터만 남아 있었다. 충청감영을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하면서 조선 선조때인 1603년 공산성을 크게 고쳐 쌓고, 이때 공북루와 옆에 월파당을 함께 지었다, 여러 차례 고쳐지었으며 월파당은 1954년에 철거되었다.』
공산성 북쪽문으로 2층 문로로 지어진 건축물은 1층 공북문은 공사를 하는지 접근을 불허하게 막았는데 1층은 출입문 형태라기보다는 망루형태인것 같았는데 천장에 북쪽을 상징하는 사신도인 현무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마루형태로 천장에는 현무가 없는 것 같았습니다.
현무는 상상의 동물로 쉽게 거북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겁니다.
그리고 공북문 옆에는 입간판 2개와 이야기안내판 2개가 설치되어 있는데 입간판은 공산성 왕궁관련 유적과 공북루에 대한 설명안내문이고 이야기 안내판은 깃발이야기와 바단강을 사랑한 선비들입니다.
공산성 왕궁관련 유적은 요약하면 이러합니다.
공북루 남쪽 넓은 터는 왕궁관련유적으로 2011~2017년 발굴조사를 했는데 웅진기 기와집터와 석축, 연못, 배수로 등등 여러 시설들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약900여평에 달하는 왕궁관련지에서는 벼루, 기와, 옻칠갑옷과 철갑옷, 말갑, 큰칼과 장식칼 등이 출토되었다는 기록입니다.
이곳은 오래전 성안마을이라고 부르는 마을이 있었는데 공산성복원을 위해 다른 곳으로 이주를 시키고 발굴작업을 했다고 합니다.
성안마을 터를 깊게 파 내려가면 오래전 퇴적층이 나올 것이고 퇴적층을 조사하면 공산성에 대한 예전의 역사를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굴삭기를 동원해 6m까지 파 내려갔지만 아무런 단서가 나오지 않아 연구위원은 이곳에는 유물이 없다고 판단하고 굴삭기 기사에게 공사를 중지하라는 신호로 팔을 들어 손바닥을 펴보였다고 하는데 굴삭기 기사는 계속 파 내려가라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다시 1m를 파내려갔는데 이곳에서 볍씨, 밤껍질 등이 나왔다는 것인데 사실 연구위원이 끝내라는 신호로 팔을 들어 주먹을 쥐어야 했는데 수신호를 몰라 손바닥을 편 것이 옛 역사를 알아내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를 합니다.
그리고 진흙 속에서 가죽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이 가죽 조각들은 갑옷으로 철이 아닌 가죽에 옻칠을 해서 코팅을 해서 만든 갑옷으로 1400년동안 잠들어 있던 백제의 문화가 마침내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창 발굴이 이어지던 중 가죽에 붉은 글씨로 行貞觀十九年 四月二十一日라고 나타났는데 행 정관19년 4월21일로 이는 당나라 태종의 연호로 서기645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는데 의자왕 재기5년이라는 것인데 이시기에 이곳에서 대 전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는 어릴 때 백제 의자왕은 매매일 나라는 다스릴 생각없이 3000궁녀들의 치마폭에 쌓여 술만 먹다가 나당연합군에게 죽임을 당하자 3000궁녀는 부여 낙화암에서 강물로 뛰어 내려 죽었다고 배웠는데 이제 이런 것을 토대로 의자왕은 마지막까지 싸우다 패한 것으로 역사를 다시 기록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錦江
금강은 비단강입니다.
강이 비단을 깔아 놓은 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나오는 공북루 이야기입니다.
「성(城) 북쪽에는 공북루가 있다.
상당히 웅장하고 화려하며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어 경치가 좋다.
선조 때 유근이 충청감사가 되어 공북루에 올라 시를 지었다.
이전생략
蘇仙赤碧今蒼碧(소선적벽금창벽)->소동파는 적벽에서 놀고 나는 창벽에서 놀며
庾亮南樓是北樓(유양남루시북루)->유량은 남루에 오르고 나는 북루에 올랐네.」
이후 생략
유근의 서경집에 수록되어 있는 이 시는 상당히 길어 공북루 관련 2귀절만 옮겼습니다.
그리고 위 시에 나오는 소동파는 중국 송나라 시인이자 정치가로 이름은 소식으로 소동파가 황주에서 귀양살이하며 적벽에 나가 노닐던 모습을 시로 옮긴 것이며 유양은 진나라 정승으로 무창을 다스릴 때 아전들이 달밤에 남루에 올라 시를 읊는 중에 유양이 나오자 자리를 피하려하자 유양은 이를 말리며 함께 시를 읊었다고 합니다.
깃발이야기는 금서루 이야기와 같은데 사신도 중 서쪽에는 백호의 깃발이 걸려 있었는데 이곳 공북루가 있는 곳은 북쪽을 상징하는 현무가 그려진 황색깃발이 걸려 있습니다.
현무 황색깃발이 있는 성곽길을 따라 오르막으로 올라서면 움막의 시설물이 보입니다. 이건 뭐야? 하면서 떠올리는 게 서울의 서빙고나 동빙고 같은 얼음 창고가 생각납니다.
앞에 안내판이 있어 자세히 보니 공산성 얼음 창고라는 입간판이 있는데 내용은 겨울에 얼음을 잘라 이곳 석빙고에 두고 여름철이 이용하였는데 일제강점기 때는 한약재를 보관하는 창고로, 한 때는 누에알을 보관하는 잠종창고로도 이용되었다고 합니다.
얼음 창고가 있는 고지대에서 내리막길 성곽을 따라 내려서면 우측으로는 절이 있고 좌측 강변 쪽으로는 문루가 아닌 건축물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점점 아래로 내려서면 건축물 앞에 돌로 축조한 인공 연못같이 보이는 시설물이 있는데 아주 깊어 보였는데 물이 없는 것으로 보아 연못은 아닌 듯해보였습니다.
안내판을 확인하니 절은 영은사이고 강변 쪽 건축물은 만하루라고 되어 있는 누각입니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조선 영조 때인 1754년 충청감사 김시찬이 지었다고 하는데 만하루에 대한 기록은 고종 때인 1871년에 편찬된 호서읍지에 거론된 것으로 보아 고종 때까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후 홍수로 붕괴되었다고 하며 지금의 건물은 1984년 새로 지은 것이 것이라고 합니다.
만하루를 지나면 가파른 성곽길이 한동안 이어지며 고도를 올립니다.
동쪽으로 이어지던 성곽이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높은 곳에 작은 안내판들이 보입니다.
이곳이 사진 찍기 좋은 곳, 유식한 말로 포토존으로 이곳에서 이근남 형님을 모델로 사진을 찍어봅니다.
그리고 이곳에는 ‘서거정의 공주10경’이라는 안내판이 있는데 내용은 서거정이 집현전 학사시절 공주로 여행하며 공주의 금강의 물놀이, 고마나루의 밝은 달 등 아름다운 경치에 흠뻑 빠져 「공주10경」이란 시를 썼으며, 인조 때 공주목사 신유도 공산성의 공북루와 영은사, 고마나루, 봉황산 등을 주제로 「공주10경」이라는 시를 남겼다고 합니다.
공주10경은 계룡산 갑사, 공주 금강, 공산성, 고마나루, 무령왕릉, 마곡사, 동학사와 은선폭포, 석장리 풍경, 금학생태공원이라고 하는데 필자도 석장리 풍경과 금학생태공원은 가보지 못한 곳입니다.
공주10경중 하나인 공산성에서 또 다른 공주10경인 금강을 바라보며 잠시 여유를 갖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곽을 따라 다시 걸어갑니다.
얼마 가지 않아 산성 중앙으로 나 있는 길과 성곽 길이 만나는 3거리에서 우리 일행인 미녀3총사와 다시 만납니다.
잠시 떨어져 있었는데 무슨 할 말이 많은지 이야기로 꽃을 피웁니다.
그리고 우리 일행은 성곽길을 따라 걷기시작했고 조금 경사진 길을 따라 오른 곳은 광복루였습니다.
光復樓
『공산성 광복루는 공산성 동쪽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누각이다.
공산성안에 주둔하던 군대를 중군영의 문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지금의 위치로 옮기고 누각의 이름을 웅심각이라 하였다.
1945년 광복이후 공주시민들이 힘을 모아 보수하였다.
이듬해인 1946년에 김구, 이시형 등이 공주를 방문하여 이곳을 둘러 본 후 광복을 기념하기 위해 광복루로 고쳤다.』
위 안내문의 내용을 보면 군대를 지휘하던 지휘부였으며 본래의 위치도 이곳이 아닌 공북루 근처에 있었으며 누각의 이름도 해상 루라고 하였는데 일제강점기 때 본래 위치를 떠나 이곳으로 옮겨지으며 누각의 이름도 웅심각이라 바꾸었다고 합니다.
광복루는 2층 누각인데 아래층에도 평상이 있어 쉬어 가기는 편하겠지만 누각의 본래 형태에서 벗어나 있어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우리 일행은 누각 앞 긴의자에서 미녀삼총사가 사진을 찍기도 하고 평상에 누워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광복루 기둥을 잡고 포즈를 취하기도 하면서 잠시 시간을 보냅니다.
광복루를 보고 다음 답사지를 성안 중앙 임류각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임류각 우측에 작은 건물이 보이는데 건물안에는 멀리서도 식별이 가능한 비석이 3개가 나란히 세워져 있습니다.
임류각을 보기 전에 가까이 가보니 「공산성 명국 삼장비」라는 안내 입간판이 있는데 안내판 내용은 이러합니다.
공산성 명국 삼장비
『「공산성 명국 삼장비」는 정유재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1598년에 명나라의 3장수 이공, 임제, 남방위가 왜군에게 피해를 많이 받은 공주에 돌아와 머물면서 주민들을 보호한 업적을 기린 송덕비이다. 「공산성 명국 삼장비」는 1655년 금강변에 세웠으나 홍수로 매몰되자 1613년에 다시 세웠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비석에 있는 왜구라는 글자를 지우고 공주읍사무소 뒤뜰에 묻어버렸지만 1945년 광복이 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비각안에 있는 비석을 보면 작은 글씨에 글자도 무수히 많았으며 마모도 일부 심한 듯 보여 멀리서 읽기는 어려워 보였습니다.
「공산성 명국 삼장비」를 보고 바로 옆에 있는 임류각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임류각은 동성왕 때 왕궁에 지은 누각으로 왕과 신하들이 연회를 베풀던 장소로 추정하는 곳으로 입간판 안내문은 이러합니다.
臨流閣
『임류각은 백제 제22대 동성왕 때 왕궁 동쪽에 지은 누각이다. 높이가 15m가 되는 건물로 왕과 신하들의 연회 장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80년 공산성 발굴조사 과정에서 고층 누각으로 확인되어 1993년에 2층 누각으로 다시 세웠다. 현제 임류각은 백제건축 양식인 하앙식을 재현하여 세웠으며 단청 문양은 무령왕릉에서 나온 장신구와 무덤방의 벽돌에 남겨진 무늬를 활용하였다.』
필자는 이곳에서 안내문을 대충 읽어 알지 못했는데 단청문양이 무령왕릉에서 나온 장신구와 벽돌문양을 활용했다고 하니 당시 곳곳을 잘 볼 걸 후회도 나기도 했는데 사진을 다시 보니 단청이 참으로 특이하기도 합니다.
임류각은 산성내 어떠한 건축물보다 웅장하고 귀티가 났으며 지붕의 형식이 팔작지붕으로 맞배지붕이나 우진각지붕에 비해 격이 한 차원 높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건물이 큰 만큼 현판도 컸는데 현판은 우공 이일권님이 썼으며 현판을 보면 육안으로도 이일권이라는 이름과 기축년 초가을 이라는 글씨를 알 수 있는데 임류각의 현판은 2009년에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임류각 우측 대형 입석에 동성왕과 임류각에 대한 안내문이 있는데 이 안내문에는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 의하면 서기500년 동성왕은 ‘연못을 파고 기이한 금수를 길렀다.’고 하며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본다.’는 뜻으로 임류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본다.‘ 문구로 임류각의 위치에 대해 사진 찍기 좋은 곳이라고 부르는 여왕봉에 임류각이 있었을 것이라는 설이 대두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우리 일행은 공산성 중앙에 난 길로 내려서기로 하고 혼자서 성곽을 따라 외곽으로 돌기로 하고 영동루로 향합니다.
광복루 아래 있는 영동루로 가면 깃발이야기 안내판과 영동루 입간판이 있는데 내용은 이러합니다.
迎東樓
『공산성 영동루는 공산성 4개 성문가운데 동쪽 문루로 백제시대 성벽이 축소되면서 만들어 진 것이다. 1980년 발굴당시 문터와 문 양옆에서 문을 지탱하고 있던 받침돌을 확인하였다. 조사에서 얻은 자료와 1859년에 편찬된 공산지의 기록을 바탕으로 1993년에 조선시대 일반적인 성문의 모습으로 다시 세웠다. 문루의 이름을 알 수 없어서 2009년 시민 공모를 거쳐서 영동루라 지었다.』
우리는 이 안내문에서 알 수 있듯이 공산성 동쪽 문의 이름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었는데 시민 공모로 영동루라는 이름을 새로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영동루는 동쪽에서 맞이하는 누각이라는 뜻으로 1993년 기록을 바탕으로 복원되었습니다.
공산성을 처음 지을 때는 당연히 이름이 있었을 것인데 많은 전쟁을 겪으며 자료가 소실되었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영동루 1층 문으로 지나면 천장에는 예상했던 것과 같이 동쪽을 지키는 사신도 중 하나인 청룡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문 밖으로 나가면 공산성 관련 터인 만아루터가 있습니다.
또한 영동루를 중심으로 양 옆 성곽을 따라 황색깃발이 걸려 있는데 이 깃발은 청룡이 그려진 깃발로 동쪽을 상징하는 사신도입니다.
일행들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혼자서 성곽 길을 따라 갑니다.
성곽 길은 한없이 추락하며 고도를 한동안 급격하게 내립니다.
그리고는 먼 곳에 문루가 나타났는데 보나마나 공산성 남문임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가깝게 접근하니 예상했던 대로 공산성 남쪽 문루인 진남문입니다.
진남문 엎에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깃발이야기 안내판과 진남루를 설명하는 입간판이 있는데 이러합니다.
鎭南樓
『공산성 진남루는 공산성의 남문이자 정문이며 조선시대에는 삼남의 관문이었다. 공산성은 사방에서 문터가 확인되는데 그중에 남문이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는 성문이 남아 있었지만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아있었다. 이에 1993년 동문터에는 영동루를 서문터에는 금서루를 다시 세웠다. 진남루는 여러 차례 고쳐지었지만 그 위치와 모습은 본래의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 있는 성문은 1971년에 전부 해체하고 다시 세운 것이다.』
안내판 글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공산성의 정문을 서문인 금서루가 정문으로 생각했는데 안내판에 의하면 이곳 남문인 진남루가 정문이라는 것인데 그러고 보니 금서루로 들어설 때 너무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약간은 의구심도 있었지만 사람들이 제일 많이 드나드는 금서루가 정문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하긴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만 하더라도 남문인 광화문을 정문으로 두었고 정궁이나 마찬가지로 여겨졌던 창덕궁도 남문인 돈화문이 정문이었으니 진남문이 정문이라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닙니다.
진남문은 다른 문과 달리 2층으로 지은 것이 아니고 지형적으로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축대를 쌓은 곳 위에 단층 문을 올려놓은 형태입니다.
또 다른 문과 다른 점이 있는데 남측을 상징하는 사신도가 그려지지 않았다는 점인데 남측을 상징하는 사신도는 주작으로 붉은 봉황을 말하는데 광화문 출입문 천장에 잘 그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진남루 천장에는 주작이 그려져 있지 않지만 진남문 양 옆 성곽을 따라 봉황의 황색 깃발이 걸려 있습니다.
진남루를 보고 주작 깃발이 걸려 있는 성곽을 따라 조금 지나면 우측으로 넓은 공터가 나옵니다.
이곳은 어딜까? 생각하고 올라가보니 이곳이 왕궁터입니다.
남쪽으로 옛 연못이 있고 옛 연못 주변으로 무척이나 오래되었을 것 같은 왕벚나무가 6그루가 있는데 늙기는 했지만 봄철이 되면 주먹만한 왕벚꽃이 피어 왕궁터를 화려하게 만들 것 같습니다.
넓은 공터 중간 우측으로는 건물이 있었던 구역을 표시했고 좌측으로는 목곽고 구역을 표시했는데 목곽고는 나무로 지은 지하창고를 말함이라고 합니다.
공터 북측으로는 지형적으로 높은 곳이라 계단이 설치되어 잇고 계단을 오르면 단층으로 된 날씬한 정자가 있는데 이 정자가 쌍수정입니다.
쌍수란 2그루의 나무를 의미하는데 백제시대를 거치고 고려시대를 거치며 공산성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온 역사가 수백년인데 2그루의 나무로 인해 성의 이름이 쌍수산성으로 바뀌게 되었던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 쌍수정에 대해 어떨게 기록했을까요?
「옛날 인조께서 갑자년(1624년) 이괄의 난을 피해 이곳으로 행차하셨다.
산 위에 한 쌍의 나무가 있어서 임금께서 매일 이 나무에 개대어 북쪽에 있는 궁원의 들판을 바라보셨다.
하루는 날듯이 달리는 기병이 이르렀기에 전황을 물었더니 승전을 알렸다.
임금께서 크게 기뻐하시며 한 쌍의 나무에 통정대부라는 벼슬을 내리셨다.
훗날 관아에서 산위에 작은 정자를 세웠으며 나무는 말라 죽고 정자만 있다.
성안에는 군량미를 쌓아두고 병기를 갖추어 놓아 중요한 요새로 자리 잡았다.」
위에서 궁원이라 함은 한양의 궁궐이 아니고 지금의 정안면이 되는 곳 지명으로 궁원이 있는 방향이 북쪽으로 북쪽에 한양이 있어서입니다.
참고로 이괄의 난이란 광해왕 때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구테타를 일으켜 왕이된 인조는 반란을 일으킬 때 크게 공을 세운 이괄을 공적을 낮게 평가해 2등공신으로 책봉하고 평안도에 부임케하자 이에 앙심을 품은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인조는 목숨을 지키기 위해 도성을 버리고 공주의 공산성으로 도망친 사건으로 인조는 1624년 2월14일~18일까지 5일동안 공산성에 머물렀는데 이런 일을 기화로 산성의 이름은 공산성에서 후일 쌍수산성으로 바뀌게 됩니다.
택리지에는 인조가 머물 때는 정자가 없었는데 후일 정자를 세웠다고 기록하였지만 또 다른 기록에는 인조가 공사성을 떠나기잔 이미 정자가 있었다고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쌍수정으로 오르는 계단 아래는 2개의 안내판이 있는데 하나는 쌍수정에 대한 안내판이고 다른 하나는 인절미에 대한 유래를 기록한 안내판입니다.
인절미의 유래에 대해 알아볼까요?
광해왕이 국정을 다스리다가 인조임금이 모반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했는데 구테타를 일으킬 때 함께 참여하고 공을 크게 세운 이괄은 한 것도 없는 사람들은 높은 자리를 받았는데 이괄은 위험을 무릅쓰고 싸워서 공을 크게 세웠는데 받은 자리는 형편없는 자리였다.
이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키니 이것이 이괄의 난인데 이괄의 난 때 인조임금은 공주 공산성에서 6일동안 피신해 있었다고 하는데 밥맛이 있을 리 없었을 것입니다,
하루는 이 지방 누군가가 인절미를 해서 바쳤는데 인조는 맛있게 먹으면서 떡이름을 물었지만 떡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었고, 이에 인조는 “누가 해서 바친 떡이냐?“고 묻자 ”목천리에 사는 임씨가 올린 떡입니다.”라고 신하가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후 임절미라고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며 임절미는 인절미로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인절미는 공주의 대표적인 떡이라고 합니다.
雙樹亭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9호인 공산성 쌍수정은 충청도 관찰사 이수항이 영조 때인 1734년 인조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이다. 조선 제16대 왕인 인조는 1624년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 6일 동안 머물렀는데 당시 인조는 2그루 나무 아래서 난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인조는 난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자신이 개대었던 2그루 나무, 즉 쌍수에 정3품의 벼슬을 내렸다. 그 후로 공산성을 쌍수산성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수항이 관찰사로 부임해 삼가정을 세웠는데 이 건물이 쌍수정이다. 오늘날의 쌍수정은 1970년에 해체후 다시 세운 것으로 조선시대 쌍수정과 다소 차이가 있다.』
내용에 의하면 속리산 정2품소나무에 이어 2번째로 나무에 관직을 내린 것인데 참으로 어이없고 한심한 왕인 것 같습니다.
속리산 정2품송이야 왕이 지나가는데 나뭇가지가 왕의 행차에 방해가 되므로 나무 스스로 가지를 쳐들었다고 해서 높은 관직을 주었다고 한다하더라도 인조는 자기가 기댔던 나무라고 해서 높은 관직을 준다니, 참으로 이해안가는 왕입니다.
그런데 안내판 옆에 이야기 안내판이 있는데 이 이야기 안내판에는 2그루 나무에 금대를 걸었다고 했지만 정3품의 관직을 주었다는 내용은 없는데 어느 안내판 내용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계단을 올라서 쌍수정으로 오릅니다.
높은 위치에 있는 쌍수정은 정자의 띠가 낮으며 사방으로 비,바람을 막을 수 있는 시설이나, 앉을 수 있는 마루 시설도 없고, 맨땅으로 왕이 시간을 보냈다는 정자가 맨땅이라는 것도 이해가 안되는 부분입니다.
현판은 雙樹亭(쌍수정)이라 달렸는데 누가 쓴 것인지 아무런 표식도 없습니다.
쌍수정을 뒤로 한 바퀴 돌아 다시 성곽길로 되돌아갑니다.
성곽길 좌측으로는 공주 구도심이 내려다보이는데 공주는 생각보다 작은 도시라는 생각을 하며 5분 정도 가다보니 백호가 그려진 황색 깃발이 걸려있는 곳에 다다릅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금서루와 일대가 제법 멋있게 보입니다.
금서루 성문 밖으로 우리 일행이 내려서는 모습이 보이고 경사진 성곽길을 따라 내려서서 백호가 그려져 있는 금서루 서문을 빠져 나오며 공산성 답사가 끝납니다.
에필로그
공주10경 중 한 곳인 공산성은 「백제역사유적지구」인데 시설이나 관리상태가 너무나 미흡하다는 생각입니다.
안내판은 2중으로 설명을 하기도 하고, 성곽길은 외곽으로 낭떠러지기가 연속해서 이어지므로 추락의 위험요소가 항상 있으므로 아주 조심스러운 구간입니다.
산성이라면 성곽 위로 장대가 설치되어 있었을 것인데.....
처음부터 장대가 설치되어있지 않았다면 방어 목적이 없었다는 것이며 원래는 있었는데 예산이 없어 장대설치를 하지 못했다면 안내문에 이러한 사실을 알렸어야 했을 것입니다.
관람객들의 안전에 관한 사안으로 아주 중요한 일인데 이점을 공주시, 또는 문화재청, 한국관광공사 등에서 유년하시어 하루 빨리 안전장치를 설치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또한 문화해설사가 공산성 곳곳에 대기하고 있다가 관광객들이 원할 때 안내해설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공산성을 돌아볼 때는 햇볕은 없었지만 날씨에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는데 공산성을 구경하고 나오니 눈발이 날립니다.
공산성에서 가까운 곳에서 조금은 이른 저녁을 먹고 미리 예약해 놓은 숙소인 공주한옥마을로 갑니다.
방은 12평이니 무척 넓고 좋습니다.
이부자리도 충분하고 방이 얼마나 따끈한지 강추, 강추, 강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