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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소중한 당신! 원문보기 글쓴이: 시냇물
0. 소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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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마리아 신심에 투철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신심의 신학적, 영적 근거를 마련하여 교회 안팎으로 큰 영향을 끼친 분들을 "마리아의 종"이라고 불러왔다. 이런 분들 가운데에서 동방 교회의 에프렘, 베르나르도, 루도비꼬 마리아 그리니옹 드 몽포르, 알퐁소 리구오리 그리고 막시밀리안 꼴베 등이 가장 돋보이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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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 에프렘(St. Ephrem of Syrian, 306-37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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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교회의 위대한 박사인 성 에프렘은 서기 306년경, 메소포타미아의 니시비스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부모는 이교의 사제였다. 그러나 양친이 크리스챤으로 개종함에 따라 18세 때에 세례를 받았으며, 즉시 니시비스의 성 야고보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덕을 닦았고, 그 후 이 학교의 책임자로서 주교를 수행하여 325년의 니체아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그후 그는 성 바실리오와 친한 친구로 지내면서 그를 따라 에집트 수도자들을 찾아보기도 했는데, 338년에 부제품을 받고 사제가 되었다. 363년에 황제 요비안에 의하여 니시비스가 페르샤의 수중에 들어가자, 그는 수많은 신자들과 함께 로마 땅인 에데싸로 피신하여, 그곳에 신학원을 세웠다. 그는 여기서 수많은 시를 비롯한 신학적 저술을 집필했고, 신자들에게 직접 설교도 하였는데, 그의 시가 너무도 아름다웠기에 "성령의 하아프"라는 칭호를 얻었다. 에프렘은 373년에 에데싸에서 서거했고, 1920년에 베네딕도 15세 교황에 의해 교회 박사로 선언되셨다. 성 에프렘은 자신의 저서 대부분을 시리아어로 서술했는데,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은 원어에서 아르메니아어 혹은 희랍어로 번역된 역서 몇 가지가 있다. 그는 성서적 근원을 밝히는 비중이 큰 저서들을 비롯하여 성서주석, 교의 및 수덕 생활에 관한 작품들을 남겼고, 이단들, 특히 아리아파와 영지주의에 대한 반박문 그리고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도 훌륭한 글을 남겼다. 성 에프렘은 특히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대한 신심이 투철하였고, 마리아 신학의 본질을 파헤쳤을 뿐만 아니라,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단언하였기 때문에 "무염시태의 증인"이란 칭호도 얻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아름다운 찬미가를 지었고, 이를 공식 예식에서 사용하였으며, 신앙 교육에도 효과적으로 활용하였다. 자주 인용되는 그의 마리아 찬가 한 소절을 우리말로 옮겨본다: "예수여, /당신의 모친은 홀로, / 가장 아름다우신 분,/ 당신이 티없으시니,/ 모친 또한 흠없으시도다." 이 성시 안에, 성 에프렘이 마리아의 무염시태를 표현했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 사실 그는 이 싯귀 하나만으로도 마리아 박사라는 칭호를 얻을 만하다. 성 에프렘은 성자를 낳으신 마리아를 성서에 근거하여 신심으로 발전시킨 위대한 영성가이자 신심가로서의 모델로 칭송 받고 있다. 그의 마리아 찬미가는 늘 읽고 묵상해도 싫증나지 않는다.
"숙명의 나무에서 딴 하와의/ 쓰디쓴 열매대신, / 마리아는 달디단 열매를 우리에게 주시니,/ 온 세상은 마리아의 열매로 환희에 젖네.// 동정의 나무가 포도를 생산하니/ 그 즙은 달콤하고,/ 고생한 이들에겐 기쁨 안기네.// 하와와 아담은 생명수를 맛보고,/ 위안 찾아 헤맸으나/ 돌아온 건 불안에 움츠렸을 뿐.// 거룩한 몸, 아름다운 영혼, 고귀한 정신,/ 마음은 완전한 사랑뿐이니,/ 정결하고 충실한 티없는 마음이/ 고통에 시달리어도/ 마리아는 모든 덕이 충만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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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 베르나르도(Bernard, 1090-115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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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르나르도는 그당시 씨토회가 주축이 된 마리아 운동의 기수였다. 부르군디의 가족 성(城)인 폰텐느 레 디죵에서 일곱 자녀 중의 셋째로 태어난 그는 샤틸롱에서 수학하던 중, 모친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씨토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1113년에 입회하였고, 1115년 씨토회를 재창설하여 65개의 수도원을 세운 위대한 수도자였다. 그는 교황의 명에 따라 제 2차 십자군의 특사로 활약했고, 위대한 설교자로 인정받았으며, 수많은 편지와 아르마그의 성 말라키의 생애 등을 비롯하여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로랑땡 신부는 이렇게 평한다. "성 베르나르도는 마리아 신심의 아름다운 모델이다." 마리아께 대한 그의 주요 업적은 다음과 같다: 1) <마리아의 찬미가에 대하여>라는 글 속에는 4개의 강론과 성모 영보에 관한 복음 해설이 들어 있다. 성모 취결례 축일에 관한 강론 3개, 성모 영보 축일에 관한 강론 3개, 성모 성탄에 관한 강론, 성모 승천 강론 5개 (이중의 하나는 성모 승천 8부 축일용), 주의 봉헌과 할례에 관한 강론, 대림절 강론, 잉태축일에 관하여 리용의 참사 위원들에게 보낸 편지 174통. 성 베르나르도의 마리아 영성은 전례적인 것에 집중되어 있는게 특색이다. 그는 구원 계획의 맥락속에서 마리아를 보았고, 천주의 모친에게 지녀야 할 신심이 신자 생활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려고 애썼던 위대한 마리아의 종이었다. 그의 마리아 신심은 크게 두 줄기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마리아가 당신의 동의로 이루어진 강생의 신비이고, 다른 하나는 성모승천의 신비이다. 그에 의하면, 마리아는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만남 가운데 가장 친밀한 입장에 서 계신다. 마리아의 모성은 그녀의 평생 동정의 결과로서 일어난 것이다. 마리아의 겸손은 그녀로 하여금 펀주의 모친이 되게 하였고, 동시에, 여왕, 세상의 여왕, 중재자와 더불은 천상적인 중재자, 만민의 어머니, 죄인들의 사다리, 그리고 하늘의 문이 되게 하였다. 또 성 베르나르도는 동정 마리아께 대한 전 시대의 찬미가들을 전해주었으며, 수많은 마리아 신심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그의 이러한 신심과 학식 때문에 "꿀처럼 단 박사"라는 칭호를 얻었고, 1830년에 교회 박사로 선언되었다. |
3. 성 루도비코 마리아 그리니옹 드 몽포르(1683-17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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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도비코 마리아 그리니옹은 프랑스 몽포르의 어느 가난한 부모 밑에서 자랐는데, 18명의 자녀 가운데 막내였다. 18명의 자녀 가운데 3명이 사제, 2명이 수녀가 되었다. 그는 렌느의 예수회 대학에서 공부했고, 1700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루도비코는 랄러망 신부의 문하생으로서 프랑스 학파의 깊은 영성을 고스란히 물려받았고, 그의 스승은 슐피스회 제 2대 총장까지 역임하였다. 그는 1700년부터 죽을 때까지 순회 선교사로 활약했는데 서방 교회 10개 교구를 두루 다니던 중, 43세의 일기로 선종하였다. 그가 지도했던 "지혜의 딸 수녀회"와 "마리아 선교회"는 그의 선종후에야 발전하기 시작했고, 1947년 7월 20일, 비오 12세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루도비코는 사도 성 바오로와 같은 방법으로 다시 태어나는 은혜를 받은 듯한 인상을 준다. 그는 사도처럼 악을 근본적으로 물리쳤고, 성령께 자신의 전 생애를 완전히 내맡긴 삶을 살았다. 그를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던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의한 사도바오로처럼, 영세 받은 때부터 동정녀의 손에 온전히 사로잡혀 있었다"고 말한다. 마리아와의 신비적인 일치가 그의 영성 생활의 핵심이자, 그의 선교사적 사도직의 원동력이었다. 이러한 신심에 불탔던 루도비코는 약 16,000마일을 선교 여행하였고, 수많은 마리아 관계 저술을 남겼다. 그가 쓴 164개의 마리아 찬가 원고는 모두 20,000행이 넘는데, 그 중에서 널리 애송된 것은 24개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안토니우스 토마스 O.P 신부가 다이제스트했던 "신비로운 장미"의 원본은 성 루도비코가 쓴 "지극히 거룩한 로사리오의 놀라운 비밀"이다. 이 저서에서 루도비코는 이 대중적인 신심인 로사리오에서 얻는 영적, 사도적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준다. 또 그리스도론적 영성의 종합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의 저서 "영원한 지혜에 대한 사랑"은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서 마리아 신심을 제시하여 끝맺고 있다. 그러나 그는 살아 생전에 빛을 본 인물은 아니었다. 그의 사후에 큰 성공을 거두었던, 루도비코의 마리아 관계 저서는 "마리아의 비밀"이라는 소책이다. 비록 소책에 불과하고, 또 영적 지도 형식을 띤 편지이긴 하지만,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일치 방법을 다룬 것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 다른 저서는 저 유명한 "복되신 동정녀께 대한 올바른 신심"이다. 50개국 이상에서 번역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이 책은 마리아와 함께, 마리아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생에 완전히 잠기는 영성 생활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몽포르 신부는 자신의 상상이 아니라 복음서에 확고한 기반을 둔 신심을 발전시켰다. 그는 예수님이 공생활 이전의 숨은 생활이 전적으로 마리아께 의존되어 있었다는 견지에서 우리들도 마리아께 의존해야 하는 모델을 찾아냈다. 그리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지체로 만드는 세례가 우리를 마리아의 잔려로 만든다는 이론을 전개했다. 또한 그의 봉헌 행위는 이러한 자녀 관계를 인정하고 사는 것으로 알아 들었다. 그리고 몽포르 신부가 영혼의 영적 자세를 설명했던 네 가지 요소는 다음과 같다. 1) 마리아를 통하여 성령께 마음을 열어야 한다. 2) 마음으로 생명의 모델과 일치한다. 3) 마리아 안에서 모성적 사랑을 알아본다. 4) 마리아께 대한 봉사에 전적으로 위탁하고, 마리아를 통하여 그리스도께 봉사한다. 그의 이런 태도는 한때 많은 반대를 받았고, 급기야는 설교권을 박탈당하기도 했다. |
4. 알퐁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Alphonsus Mary de Liguori, 1696-178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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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알퐁소는 1696년 9월 21일, 나폴리 근교 마리아넬리에서 태어났고, 1726년에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1732년에 속죄회를 창설했다. 1762년부터 1775년까지 산타 아가타 데이 고띠 교구의 주교로 봉직하셨고, 1787년 8월 1일에 빠가니에서 선종하셨으며, 1839년에 시성되셨다. 1871년에는 교회 박사, 1950년에는 윤리학자와 고백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셨다. 성모님께 대한 깊은 신심으로 일관했던 성인의 전 생애는 천주의 모친이신 마리아 어머니의 중재로 더욱 빛났는데, 성모님은 그를 중병에서 수차례나 일으키셨고, 초자연적인 발현과 상호 소통하는 은혜로 당신의 아들을 깊이 사랑하셨다. 이에 감사하는 뜻으로 성인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내게 일어난 모든 좋은 일들, 나의 회개와 성소 그리고 또다른 수많은 은혜들은 모두 당신의 것이옵니다. 당신은 개가 모든 것 위에 당신 사랑하기를 바라시옵고, 또 원하시옵나이다. 이리하여 무한한 축복에 대한 감사르 돌려 드리기를 바라시나이다. 내가 항상 어디서나,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당신께 대해 말하고자 하며, 당신의 가장 아름답고 은혜로운 신심을 모든 영혼 안에 심고자 하는 것은 모두 이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영광> 중의 청원기도) 이러한 마리아 신심의 반향이자 증거로서 표현된 것이 그의 저 유명한 찬미가 "오, 내 사랑, 희망이여" 이다. 그러나 마리아에 관한 그의 가장 뛰어난 업적은 1750년에 두 권으로 간행된 "마리아의 영광"이다. 이 책은 그의 오랜 사제 생활의 산물이다. 그가 비록 개화된 나폴리인들을 잘 알았고, 또 무라토리와 얀세니즘의 영향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그의 마리아 신심을 수상쩍게 바라보는 이들이 많았지만, 성인은 그의 저서에 대한 논쟁을 무시해버렸다. 1권과 2권에서 그가 제시한 마리아 신심의 체계는 다음과 같다: 1) 마리아의 특권과 칭호를 강조한 교리적 부분, 그리고 교부들과 신학자들의 견해를 인용하여 마리아 신심의 이론을 뒷받침한다. 2) 대중적인 신심에 알맞는 실례 혹은 교회적인 이야기. 3) 마리아 교리를 마리아 신심으로 옮긴 기도문. 이로써 성 알퐁소는 마리아를 살아 계신 인격자, 사랑하올 어머니로 우리에게 제시하며, 마리아가 죄스런 우리들의 중재자이심을 강조한다. 절망을 딛고 일어나도록 우리를 도우시는 어머니, 우리를 인도하여 성사를 받게 하며, 크리스챤 사랑을 실행하도록 돕는 자애로운 어머니가 강조되어 있다. "마리아의 영광"은 지금도 대중적인 인기와 더불어 널리 읽혀진다. 지금까지 여러 나라 언어로 약 800판이 제작되었다고 한다. 성 알퐁소는 대중적인 신심에 영적인 깊이를 더하면서 신학적 기반을 튼튼히 한 공로가 높이 평가되고, 그의 방법은 사목적 활동에 적합하여 마리아 영성 계발에 박차를 가한 위대한 마리아 종으로 공경받는다. |
5. 성 막시밀리안 꼴베(Maximilian Kolbe, 1894-194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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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막시밀리아노 꼴베 신부는 폴란드의 즈둔스카볼라에서 태어났고, 콘벤뚜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여 막시밀리아노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1911년에 유기 서약을 발했다. 그는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의 사도요 신학자로 불리는데, 1917년에 이미 로마에서 "무염 성모의 기사회"를 조직하였다. 그 후 1918년에 사제로 서품된 그는 폴란드로 귀향하여, 월간 "성모의 기사"를 창간했고, 1927년에는 와르소에서 25마일 거리되는 곳에 무염 성모의 마을을 세웠는데, 그 후 이같은 명칭의 마을이 일본과 인도에서도 세워졌다. 기사회의 목표는 "무염 성모를 통하여 전 우주를 그리스도께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는 신문, 라디오, 잡지 등 온갖 대중매체를 활용하여 교묘히 위장한 무신론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는 무염성모께 대한 봉헌만이 유일한 치료약임을 설파하여 많은 호응을 얻었다. 꼴베 신부의 마리아적인 가르침은 루르드의 성모님이 가르치신 내용이 주축을 이룬다. 특히 그는 벨라뎃따가 마리아의 성명을 물었을 때, "나는 원죄없는 잉태"라고 하신 마리아의 응답에 매료되었다. 이것은 1854년에 교황 비오 9세께서 선포하신 원죄 없으신 잉태 교의를 표현한 것이다 (이 선포는 루르드의 성모 발현이 있기 4년 전에 나왔다). 이와 같이 하느님은 오묘하게도 이 신비를 계시하셨고, 꼴베 신부를 통하여 온 세상에 더 빨리 전파되게 하신 것이다. 그는 폴란드의 무염 성모 마을의 원장으로 있던 중,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인하여 체포되어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노동 수용소에 감금되었다. 그는 어느 죄수의 탈출로 인한 대가로 아사 감방으로 끌려가는 어느 기혼자의 절규를 듣고, 자신이 그 사람 대신으로 아사 감방으로 갔으나, 기적적으로 목숨을 연명하다가 결국은 석탄산 주사를 맞고 순교한 것이다. 그는 1971년 10월 17일에 시복되었고, 1982년 10월 10일에 시성되었다. (축일은 8월 14일) |
* 이곳의 내용은 [마리아사전], 최정오 역편, 계성출판사, 1990 에서 인용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