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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과 이신칭의
성경말씀: 롬1:16-17
16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그 복음이 믿는 모든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이기 때문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그리스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믿음에서 믿음까지 계시되어 있나니 이것은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2017년 10월 31일은 루터의 종교 개혁 500주년, 전 세계적인 기념 대회, 의미 확인
예수님의 초림, 신약 교회의 형성 및 파급 이후 온 세상을 가장 크게 바꾼 사건, 이 일과 함께 성경
번역, 프로테스탄트들의 정상적인 자유 시장 경제(자본주의) 체제, 르네상스를 통한 인간 양심의
해방, 천주교 독재의 우울한 암흑시대가 밀려나기 시작함
배경
초대 교회 성도들에 대한 심한 박해, 콜로세움 등 비참하게 죽임, 그런데 핍박이 심하면 심할수록 성도들과
교회가 더 늘어남, 많은 황제들이 핍박이 소용없음을 보고 결국 대음모자 콘스탄틴 대제(272-337)는
313년의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 공인, 그는 306-337년까지 31년 동안 왕 노릇, 심히 악한
자: 자기 부인과 아들을 살해함, 세례가 구원으로 믿음, 죽는 순간 세례받음
이 당시 아리우스 등의 이단 교리가 생기자 325년 니케아 종교 회의를 소집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함
즉 교회의 일을 국가가 나서서 처리하면서 국가 교회가 형성되기 시작함: 종교와 정치의 결합
국가 교회: 로마 제국 통치를 위한 어쩔 수 없는 방편, 과거 우리나라도 국가교회(불교, 유교 등)
지금의 이슬람 국가들, 종교가 정치 위에서 나라를 치리함, 신정 정치
어거스틴의 등장(354-430), 히포의 감독(주교), 교회와 하나님의 대리자인 교황이 전 세상을 다스리는
왕국 제시, 무천년설, 교회가 세상을 다스리는 모델 제시 하면서 로마 교황의 세상 통치 체제 확립
양심의 자유를 부르짖는 도나티스트들을 교회와 국가가 무력으로 진압함
결국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가 아니라 교회교가 탄생하게 됨: 교회가 구원을 주고 유지함(요람에서 무덤까
지)
로마 교황의 세력 확장
콘스탄틴은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이전함(이스탄불): 황제가 거기 거함
로마에 근거를 둔 서방 교회, 카톨릭, 콘스탄티노플에 근거를 둔 동방 교회, 정교회(orthodox)
동방 교회는 세속 권력이 교회 위에 있음
그러나 로마 중심의 서방 교회에서는 로마 주교의 권위가 치솟기 시작함: 반달족, 훈족 등이 침입함,
왕은 속수무책, 로마의 주교인 레오 1세가 이들과 협상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 시작함.
결국 서로마 제국은 AD 480년경 붕괴하고 패권이 로마 교황에게 돌아감
이러면서 교황의 권위가 높아졌지만 867-1049년까지는 여러 명의 교황 암살, 세속 권력에 굴복함
그러다가 다시 교황권이 세상을 통치하게 됨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 11세기 중반 그fp고리오 7세 등장, 교회 권력 강화,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는 반발함, 교왕의 파면, 어쩔 수 없이 교황과 화해할 필요, 1076년 겨울, 교황은 이탈리아
북부 카노사 성에 있었고 하인리히는 거친 옷과 맨발로 1077년 1월 25일 카노사 성문 앞에 도착함,
떨면서 3일 동안 고백성사를 한 뒤 들어감. 교회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함
계속해서 세력이 올라가 1200년경에는 이노센트(인노첸시오) 3세 등장, “교황은 태양, 황제는 달”
“교황의 권위: 1198년 10월 30일 토스카나의 귀족 아케르부스에게 보낸 편지 《우주의 창조주처럼》
(Sicut Universitatis Conditor)
우주의 창조주께서 하늘의 궁창에 두 개의 큰 빛물체를 세우실 때, 낮을 주관하는 더 큰 빛과 밤을 지배하는
작은 빛으로 하셨다. 마찬가지로 그분께서는 하늘이라고 불리는 보편(카톨릭) 교회의 궁창에 두 개의
큰 권위를 세우셨다. 낮을 향한 것 같이 영혼을 다스리는 더 큰 것과 밤을 향한 것처럼 육신을 다스리는
작은 것, 이는 교황의 권위와 왕의 권력을 말한다. 달은 자기 빛을 태양으로부터 얻으며 질과 동시에
크기에서도, 위치에서와 역할에서도 더 작다. 이와 같이 왕의 권력은 교황의 권위로부터 자기 품위의
광채를 얻는다. 교황을 바라보는 것에 헌신할수록 그만큼 더 밝은 빛에 휩싸이게 되며, 그 주시함에서
돌이키면 돌이킬수록 그만큼 광채를 더 잃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유럽의 대다수 국가들은 로마 교황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결국 국가교회 형성
천주교의 대형 프로젝트
예루살렘 탈환을 위한 십자군 전쟁: 수많은 사람이 죽고 돈을 뜯어감
루터 당시 베드로 성당 건축: 이들은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여기며 베드로가 로마에서 죽은 것으로
말하고 기념함
콘스탄틴 시대에 예 베드로 성당 건축, 교황권의 위용을 자랑하기 위해 1505년 교황 율리오 2세는 옛
건물을 헐고 새로 지음, 85년 뒤인 1590년에 완공됨
많은 돈이 필요하게 됨: 면죄부, 교회가 죄를 용서해 주는 서류
면죄부: 세례 이후에 범한 죄들은 고해 성사를 통해 용서받을 수 있으나 신적인 공의가 요구하는
잠정적인 형벌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형벌은 현세나 또는 내세 즉 연옥에서 감당해야
한다. 그런데 면죄부는 참회하는 죄인에게 이 땅에서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이러한 형벌을
면하게 해 주는 수단을 제공했다.
루터의 독일 상황: 테젤이라는 사람이 면죄부 판매, 위협과 사기로 많은 돈을 긁어모음
면죄부를 파는 사람이 도시에 이르렀을 때에 우단과 황금빛 천 위에 놓인 칙령 즉 교황의 공적 인가서인
면죄부가 그 앞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모든 사제와 수도승, 시의회 의원, 학자, 총장 및 모든 남녀가
그를 만나기 위해 깃발과 촛불과 노래를 부르며 큰 행렬을 지어 나왔다. 그때 종이 울리고 오르간이
연주되었으며 그들은 그와 함께 본 교회로 갔다. 이때에 십자가가 교회 중앙에 놓였고 교황의 깃발이
나부꼈다. 한마디로 말해 그들은 마치 하나님을 영접하는 듯했다. 십자가 앞에는 돈을 받기 위해
만든 큰 쇠 금고가 놓였으며 사람들은 여러 방법으로 면죄부를 사도록 권유받았다.
이때 테젤은 연옥에서 영혼을 괴롭히는 마귀들의 그림을 가져왔으며 돈 궤 위에 쓰여 있는 말을 자주
반복했다고 한다.
“돈이 상자 속에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순간 고통당하는 영혼은 연옥에서 구원받습니다.”
카톨릭의 예배: 미사, 미사를 집번하기 위해 돈을 요구함
“많은 돈을 내면 대미사, 적은 돈을 내면 소미사, 돈을 내지 않으면 무미사!
왜 암흑시대인가?
1. 성경이 없다. 카톨릭 교회의 금서 목록
2. 미사라는 예배를 라틴어로 드림
3. 사제를 통해 고해 성사, 유아 세례를 통해 교회와 연결되고 교회가 하라는 대로 하야 구원
4. 이런 상황이 무려 1000년 이상 지속되었기에 세속 역사가들도 중세 암흑시대라고 한다.
5. 종교 개혁은 시대적인 요구, 루터가 아니라도 누군가가 해야만 할 상황, 루터 등장, 63세
루터(1483-1546)의 등장
1517년 10월 31일, 목요일 정오 무렵 34세의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는 자신의 조교를
데리고 비텐베르크 성당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비장한 각오로 95개 논제로 알려진 라틴어 토론문을 게시판 중앙에 게시했다. “우리의 주님이시며 선생님이
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마4:17)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신자들의 삶 전체가 회개하는 삶이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로 시작되는 이 문서는 교회개혁의 선언서이자 대헌장이었다.
면죄부 No: 95개 조항 중 27째 조항은 돈이 모금함에 떨어지자마자 영혼이 연옥으로부터 도피한다는
것을 반대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섭리: 이 작은 ‘게재’ 사건이 ‘종교개혁’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변혁사건의 시작이었다. 곧 사태는
심각하게 돌아갔다.
루터가 쓴 95개 논제의 토론문: 95개 논제는 곧바로 독일어로 요약되어 벽보 형태로 인쇄된 뒤 독일
전역에 배포되었다. 두 주가 못되어 독일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한 달이 못되어 유럽 각처로 번져갔다.
구텐베르크 인쇄술이 발명된 지 70여년이 지난 때였다. 인쇄술은 루터의 사상을 전달하는 매체였다.
인쇄술이 없었다면 종교 개혁 불가능, 주님 이후 약 1450년이 지나서 드디어 책을 인쇄할 수 있게 됨
앙베르는 인쇄술을 “하나님의 준비”라고 불렀고, 루터의 친구 중 하나는 종교개혁 당시 ‘천사가 심부름
꾼인 것 같았다’고 이야기하였다. 루터의 다른 문서들도 인쇄술의 은혜를 입었다.
독일 전역에서 개혁의 불길이 타오르던 1520~1530년 배포된 소책자는 630여 편이었는데, 이 기간에
판매된 독일어 책 가운데 3분의1 이상이 루터의 글이었다고 한다. 당시 독일 인쇄소 70여 곳 가운데
45개 인쇄소가 루터의 저서를 출판한 것으로 집계될 정도다.
루터의 소책자는 15판, 20판, 1524년까지 약 100만부가 배포됨(베스트셀러)
곧 격한 토론이 일어났고 개혁의 불길은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 갔다. 가장 놀란 이는 다름 아닌 루터
자신이었다. 처음부터 이런 개혁을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루터는 오늘 우리가 이해하는 종교 개혁(Reformation)을 의도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면죄부
판매 등 당시 교회가 가르치는 잘못된 주장들에 대해 학문적인 토론을 의도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작은 시작이 교회를 개혁하는 거대한 역사로 발전했다.
1521년 1월 3일 교황은 칙서를 내려 루터를 파문함.
하나님의 인도: 그 당시 독일에는 독일 황제 선거권을 가졌던 일곱 사람의 제후가 있었는데 이 중 한
명이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이다. 이 사람은 비텐베르크 대학의 설립자이기도 했다. 그는
자기 대학의 교수인 루터를 보호해 주면서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정치적 손실을
감수하며 루터를 보호해 줬다. 그 덕에 루터는 바르트부르크성에서 보호받을 수 있었다. 프리드리히는
루터에게 최상의 대우를 해 줬고 그를 보호해 줬다. 그 당시 독일 황제 카를 5세는 루터파 이단을
박멸하려고 결심하고 있었지만 대립하고 루터에게 유리한 여러 상황으로 인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루터의 생애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 작센안할트 주, 아이슬레벤(Eisleben)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
다. 그 다음날 베드로 교회에서 영세를 받았는데, 그날이 성 마르틴(St. Martin of Tours)의
날이었기 때문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라고 불리게 된다.
루터의 가족은 곧 만스펠트로 이사하였고 그는 18살 때인 1501년, 법률가가 되려고 에르푸르트 대학에
입학했고 1505년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1505년 바로 그해 7월 2일 에르푸르트 근방에서 무시무시한 벼락이 옆에 떨어지는 순간 루터는 땅으로
엎어지면서 광부들의 수호성인을 부르며 소리질렀다.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 성 안나여, 저를 도우소
서! 저는 신부가 되겠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2주일 후인 7월 17일 에르푸르트에 있는 어거스틴파
수도원에 입단했다.
짧은 수련의 과정을 마치고 만 24살인 1507년 2월 27일에는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리고 수도원장이었던
스타우피츠의 천거로 1508년부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 대학은 1502년에
설립된 신설 대학이었다. 그 이후 루터는 자기 생애의 대부분을 비텐베르크에서 보냈다.
만29세인 1512년 10월 루터는 비텐베르크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신학을 가르칠 수 있는 교수
자격을 얻었다. 이때부터 루터는 성경 신학에 대한 강의를 하였다.
루터는 대학 동쪽에 위치한 수도원의 작은 연구실에서 숙식하며 연구했다. 이곳에서 구원에 관한 심각한
고민과 갈등을 경험하였다. “내가 구원받았는가? 고행과 수행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발견할 수 있을까?
하나님과의 화평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 다른 사람들은 이에 대해 아무 걱정 없이 사는가? 온
유럽 전체에서 이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 고해 성사, 금욕이 소용없다.
이유는 무엇? 그 당시 천주교 사회의 특징: 내 힘으로 내 공로로 얻는 능동적인 의
그런데 성경의 의는 하나님이 입혀 주시는 수동적인 의(롬10:2-3)
고민을 하자 수도원장은 마침 로마에 어거스틴파 사절을 보내야 했으므로 1510년 가을에 그를 보냄
그 당시 로마 순례는 큰 의미, 수많은 유적, 유해, 칼릭스투스 성당 지하: 40명 교황 유해, 76,000명
순교, 그런데 로마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교황과 교황청의 부패, 추기경 등 고위 성직자들의 사치와
타락, 성지라고 부리는 곳에서 매춘, 음란 행위, 성지가 아님을 확인함
그는 마지막으로 로마의 라테란(라테라노) 성당 방문. 베드로 성당을 짓고 있었고, 그 당시 로마 교회의
중심, 콘스탄티의 기부로 교황이 거하기 시작해서 약 1000년 동안 교황이 거하던 곳
스칼라 상타(거룩한 계단), 빌라도에게 심문 당할 때 예수님이 올라갔던 계단, 천사가 로마로 옮김
이 계단에는 특별히 예수님의 땀이 묻은 특별 계단이 있다. 더 많은 죄가 용서됨.
루터는 고행을 통해 예수님의 은혜를 누리리라고 믿고 계단을 기어오름, 아무 변화가 없다. 피멍이 들
정도로 애를 쓰면 올라가도, 특별 계단도 아무 효력이 없음
10년 전에 나도 거기에 감, 지금도 기어오르는 사람들이 많음
그 이후 그는 1513-1515 시편, 1515-1516 로마서, 1516-1517까지 갈라디아서, 1517-1518
히브리서 강해, “하나님의 의란 무엇인가?” 루터는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하였다.
루터의 탑 체험: 교수로서 루터는 비텐베르크에 있는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살았다. 그 수도원의 탑 속에
난로가 딸린 그의 연구실이 있었는데 그는 그곳에서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 연구실의 이름을 따라
루터의 경험을 ‘탑 체험’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루터가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다고 해서 ‘복음적
해방’이라고도 한다. 사실 이 근본적이며 개혁적인 이신칭의 교리를 깨달았던 탑 체험이 언제 일어났는
지는 정확하지 않다. 대다수 교회사 학자들은 1513년에서 1515년 사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지만,
또 다른 학자들은 사실상 1517년 이후에 발생했다고도 한다. 분명한 것은 루터가 하나님의 의에
관한 이해를 하면서 그 매듭을 푼 장소는 강의 준비를 위해 제공된 수도원 내 탑 안에 있는 자신의
따뜻한 공부방이었다는 것이다.
루터는 로마서를 강의하면서(1515-1516) 복음에 대한 근본적인 자각과 통찰력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로마서 1장 17절을 주해하면서 ‘하나님의 의(義)’는 수동적인 의로움,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값없이 주신 ‘덧입는 의’(imputed grace)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신칭의’ 혹은 ‘이신득의’
이 깨달음은 루터에게 있어서 그리고 그 당시 루터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혁명적 진리였다. 루터는 후일
이 때의 발견을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이러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을 때 마치 새롭게 태어난
것과 같은 감격을 체험하였으며 천국으로 향하는 문이 활짝 열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오류는 선행을 열매가 아닌 구원의 조건으로 삼는 것이다. 하지만 루터는 인간은
선행을 통해서 더 나은 사람으로 되거나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선행을 해도 여전히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의인은 선한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의로 산다는 것, 즉 인간은 선행이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붙잡게 되었다. 그는 복음을 참으로 이해하였다.
루터의 보름스 제국 회의
엄청남 핍박, 국가의 황제가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려 함
1521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는 보름스에서 제국 회의를 소집하고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를
소환해 루터의 견해를 심의하려 하였다.
동료들의 의견: 가지 말라. 죽는다. 틴데일, 얀 후스의 죽음, “보름스의 지붕 기왓장만큼이나 많은 마귀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해도 나는 그곳에 가겠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1.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옛 원수 마귀는 이 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2.내 힘만 의지 할 때는 패할 수 밖에 없도다 힘 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 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3.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 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적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 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아멘
1521년 4월 2일 비텐부르크 출반, 4월 16일 보름스 도착, 20,000여 명의 군중
회의에서 황제, 추기경 등은 그가 쓴 책들의 내용을 철회하라고 요구함, 하루 연장 요청
그 다음 날 4월 18일, 황제 앞에서 의연하게 답변함
“성경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나는 교황들과 교회 회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이 둘은 오류를 범하여 왔고 또 서로 엇갈린 주장을 펴왔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해서 행동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현명한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여, 이 몸을 도우소서, 아멘.”
영국의 역사학자 토머스 칼라일은 루터가 보름스 제국회의에 죽음을 무릅쓰고 출두한 일을 유럽 역사상
최대의 장면이며, 보름스 국회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이 장면을 인류의 근대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지옥 그 자체에 정면으로 도전하고자 했던 루터의
행위는 두려움 없는 최고의 용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황제 등이 루터를 죽이려고 하였으니 프리드리히 선제후가 사람들을 보내 4월 24일 그를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피신하게 하였다.
이단으로 몰린 루터와 그의 독일어 성경
이단으로 정죄된 이후 죽음에 직면해 있던 그는 이름을 ‘융커 외르크’로 바꾸고 바르트부르크 성에 은거하면
서 에라스무스가 1516년 편집한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단 11주만에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1521년
가을, 시대와 상황을 막론하고 가장 경이롭게 여겨지는 이 업적은, 루터가 암흑의 시대에 희미한
불빛 아래서 병약한 몸과 싸우며 이뤄낸 것이었다. 그 뒤 구약이 나왔다.
그의 말: “젊은 나는 에어푸르트 대학 도서관에서 성경을 처음으로 보았다. 나는 완전한 성경 전체를
읽는 큰 즐거움을 가졌다.당시로서는 가져본 적이 없었던 기회였다!”
“밖으로 나가 가정의 아낙네들, 거리의 아이들, 시장의 보통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봐야 한다.
그들이 어떻게 말하는지 잘 보았다가 그런 식으로 번역을 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내 말을 이해할
수 있고 내가 자기들에게 독일어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가 성경 번역을 중시했던 것은 성경에 대한 무지가 교회 부패의 근본 원인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루터역이 완역되어 나온 것은 1534년이다. 루터는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그의 번역을 계속 개정하였으며
1534년부터 1546년 사이에 열한 번이나 개정을 거듭했다. 마지막 판은 그의 사후에 나온 것이다.
25년 동안 개정
루터 요약
1.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학의 출발점이자 최종 권위로 받아들였다.
2. 그의 신학은 보통 ‘십자가의 신학’이라고 불린다. “참된 신학과 하나님 인식은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 있다” 하나님이 대신 해 주시는 것, 그 이전에는 사다리를 타고 지붕에 올라가듯이
하나님을 추구하였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 천국으로 기어오르려는 인간들의 노력을 영광의 신학이라고
보았다. 이것으로는 구원 불가능
3. 이신칭의 평생 설교
4. 국가 교회 유지, 반 유대주의, 자유 교회의 침례교도들 핍박
5. 500년이 지난 지금, 루터파 교회는 다시 타락하여 미국의 루터교회는 천주교와의 일치 선언
교훈
1. 광야의 목마른 사슴처럼 애타는 심정으로 주님을 갈망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은혜를 베푸신다. 구원받기
위해 성화되기 위해 애타게 주님을 찾아야 한다.
2. 교회가 영혼의 자유를 억압하면 안 된다. 중세 암흑시대의 교회교, 그리스도가 왕이시다.
3. 교회와 개인의 부흥은 성경에서 온다. 종교 개혁자들의 힘은 언제나 성경에서 나왔다. 종교 개혁자들이
사용한 다수 사본, 프로테스탄트 사본, 킹제임스 성경, 루터 성경
4. 종교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종교가 아니라 복음으로 돌아와야 한다.
5. 인쇄술의 발명, 이 시대에는 유튜브 등의 소셜 미디어 발명, 복음 전파의 가장 유용한 도구
6. 역사를 잊는 민족 혹은 사람은 망하게 되어 있다. 모세의 신명기 “기억하라.”
롬1:1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