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라는 숫자의 의미부터 알아보아야 한다.
이 우주의 구조는 그리 복잡하지 않으나 번뇌에 의하여 많은 가지가 벌어지면 그 가지에서 생각하고자 하므로 복잡하고 거대한 모습으로 보이게 되어 실체를 파악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불경에 의하면 간단해진다.
우선 중생의 눈에 드러나는 물질이라는 것과 그 물질을 느끼는 정신으로 나뉘게 된다. 다시 말하면 몸과 마음 즉 신심이라는 것이니 몸은 정신에 가장 가까운 '물질'이고 마음은 몸에 가장 가까운 '비물질'로서 물질의 존재성을 판가름하고 물질에 대한 정의를 내리며 '나'를 설정하는 능력이다. 즉 정신이다.
이 두 가지 가운데 물질이란 다시 네 가지로 나뉘는데 흙과 물, 불, 바람이니 알고 보면 모든 물질은 이 네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흙도 물을 함유하고 온도 즉 불을 함유하며 온도에 의하여 대류하는 바람을 갖고 있으며 아무리 순수한 물이라 해도 역시 눈에 보인다면 극미한 흙이지만 빛을 반사하는 정도의 흙을 함유해야하는 것이다. 그리고 온도와 수중의 공기를 가지고 있다. 역시 불도 그러하기에 흙은 재와 불꽃의 색(그을음)으로 남으며 물은 그을음과 어울려 연기를 만들고 바람은 불꽃이 지속되도록 산소를 공급하므로서 존재하게 된다. 역시 바람도 그러하다. 이렇게 네 가지 자체가 서로를 함유한다면 다른 물질이란 것은 말 할 것도 없이 당연하게 네 가지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마음이라고도 하고 정신이라고도 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말하면 셋으로 나뉜다.
우선 물질이라는 네 가지를 알아보는 견정 즉 감각이라는 것이지만 물질로 이루어진 감각인 몸의 오관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꿈을 보고 듣는 감각을 말하는 것이다. 정신이 없다면 눈알 자체만으로는 세상을 볼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정신의 감각이 몸과 분리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견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감각한 것을 인식하고 기억시키고 망각시키는 능력이 있는데 이것을 '식정'이라고 한다. 눈으로 보지만 무슨 색인지 알려면 배우고 익혀서 아는 기억이 있어야 색의 이름을 말 할 수 있게되는 것이다. 그리고 눈만 있다고 자기 집을 찾아갈 수는 없는 것이고 자기 집의 위치와 모습, 주소, 방향 등을 기억해야만 되는 것이므로 모든 행위는 견정과 식정이 반드시 어우러져야 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생각이다. 즉 좋고 싫고, 여기와 저기, 이것과 저것, 거리와 방향 등을 알 수 있는 기준점이 곧 생각인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은 항상 중간을 유지하고 있어야 본성을 잃지 않는 것이다. 이 말은 생각의 시간과 장소는 언제나 바뀌면 안 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생각하는 시간은 항상 '지금'이고 장소는 항상 '여기'가 되는 것이다. 만약 생각의 시간적 기준점이 바뀐다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있을 수 없으므로 세월을 깨달을 수 없게되고 위치적 기준점이 바뀐다면 저기와 여기의 개념이 사라지므로 장소나 거리, 방향에 대한 개념은 사라지게 되므로 오고가는 자체가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마음, 정신의 공간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마음의 모든 능력이란 이 세 가지 즉 견정과 식정과 공성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불경은 온 우주의 실체를 드러내는 과학중의 과학이며 진실중의 진실이고 실제중의 실제인 것인데 너무도 무지하게 생각하고 미신적으로 사용하는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억만 분의 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물질의 요소가 네 가지(사대)이고 정신의 요소가 세 가지(삼대)이므로 온 우주는 결국 일곱 가지(칠대)의 '재료'로 이루어졌다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곱 가지는 허공 속에 허공이 들고 물 속에 다시 네 가지가 들어있듯이 각각에 일곱이 들었으므로 7*7=49 즉 우주의 '조화'는 마흔 아홉 종류가 근본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육신을 벗어나 사후세계를 가거나 새로운 육신을 얻기 이전에는 이승도 아니고 저승도 아닌 중음의 상태에서 스스로의 근본이며 우주의 근본인 49가지의 경치를 49일에 거쳐 맞이하게 되는데 그 시간적 공간을 인도말로 '바르도'라고 하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는 이승에서 살던 마음을 가지고 본래의 참다운 자기를 맞이하게 되는 것인데 만약 앞에 드러나는 경치가 자기 본연의 모습임을 깨닫는다면 해탈을 이루겠지만 이승에서 자기가 '몸'이라고 생각하던 어리석은 견식을 가지고 간 '마음'이라면 이미 몸이 없으므로 더 이상 무서워 할 이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무서워하고 싫어하며 도망을 치게되니 스스로가 스스로의 모습을 보며 스스로 심판을 받는 것이 된다. 그리고는 그 어리석음의 정도에 따라 다시 몸을 받으려면 자궁(어머니가 될 사람의 자궁)으로 들어가 숨어 있다가 어머니가 결혼을 하면 아버지의 정자가 자기의 몸을 만드는 씨앗이 되어 새로운 몸을 받게 되는데 만약 도둑질을 많이 하던 사람이었다면 밤에 다니는 습관과 몰래 훔치는 습관 때문에 쥐의 자궁으로 들어가 생쥐가 되고 게으르고 공부하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오직 그 정신만이 남았기에 소의 자궁을 스스로 선호하게 됨으로서 송아지로 환생하게 되는 것이다. 자궁에는 누구의 자궁이라는 표시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오직 자기의 업보대로 가게 되는 것이므로 누구도 부모를 탓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자궁을 빌려주고 육신의 씨앗을 주어 세상을 보게 하므로 감사에 감사를 해야할 뿐이다.
이러한 과정이 49일 동안 일어나므로 사실은 매일 매일 망자의 영혼을 불러서 망자가 처해있는 실정을 하나하나 보듯이 설명하면 망자는 자기가 직면하고있는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므로 49재를 집도하는 자에게 믿음을 갖게된다. 그럼으로써 그가 인도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면 될 수 있는 한 해탈을 하게 하여 윤회가 없는 천상에 들게 하지만 이승에서 남을 의심하고 스님을 무시하며 아집이 강한 자였다면 역시 49재를 집도하는 스님도 믿지 않을 것이므로 결국 지옥, 아귀, 축생의 악도(삼악도)만을 벗어나도록 안내해서 인간, 아수라, 천상(윤회하는 천상)에라도 들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과 49재의 이치, 그리고 망자가 보고있는 경치를 똑 같이 볼 수 있는 고승이 아니라면 모두가 헛일이며 오히려 귀신이 되도록 부추기는 꼴이 된다. 귀신이란 이승을 못 잊고 이미 스스로의 몸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승을 집착하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니 만약 스스로도 해탈하지 못한 스님이 망자를 불러 제삿밥이나 주고 제물에 탐하는 마음을 망자에게 보여준다면 당연히 이승에 대한 집착을 끊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결론은 이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살아 있다고 하는 시간에 미리미리 스스로의 위대함과 마음의 이치 즉 우주의 이치를 깨닫지 못한다면 절대 마음과 뜻대로 다음 생애를 맞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늦지 않게 도를 닦아야 하는 것이다. 영원히 이렇게 흘러가므로 이 길을 닦는 것이니 당연히... 누구나... 제일 먼저 해야할 일인데 다음은 생각도 안하고 우선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영혼을 어리석게 만든 다음에 그 몽롱하고 악해진 마음으로 길을 닦겠다고... 도를 닦겠다고 하니... 그래도 그런 사람은 조금 나은 것이지만 불도를 아예 모르거나 아니면 욕하고 훼방하며 가는 사람들이야... 그렇기에 무명이 가장 큰 죄라고 하는 것이며 또 모르고 짓는 죄가 더 크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이 글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쓴 것이지만 특히 어리석은 욕심으로 49재를 종용하거나 선전하여 돈을 버는 스님 아닌 스님들이 많이 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쓰는 글입니다.
불자님들이여! 자손들에게 천도재나 49재를 부탁할 것이 아니고 스스로 해탈하고 스스로를 이승에서 천도하고 당당하게 다음 생을 맞이합시다. 이것은 이론으로만 하는 말이 아닙니다. 석가모니께서 수도 없이 하신 말씀이 머리에 불을 끄듯이 하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정말 다급하고 간절한 일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사이비 스님이 없는 세상이 될 것이고 불도가 과학보다 존중받는 세상이 될 것이며 어리석은 자들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편을 갈라놓아 서로에게 분노하며 미워하는 세상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곳의 이름이 '불국토'가 되는 것입니다. 나무석가모니불
승. 이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