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의 불교용어
우리 영화중에는 불교를 소재로 한 영화도 적지 않다. 그 중에는 유명한 스님을 소재로 한 영화도 있고, 깨달음의 길을 찾는 영화도 있지만, 절만 배경으로 한 단순한 오락영화도 있다. 잘 알려진 작품으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우담바라', '아제 아제 바라아제' 등의 영화가 있다. 최근 영화인 '달마야 놀자'는 오락 영화로 분류되겠지만 폭력배의 교화를 애쓰는 스님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래서인지 스님들이 단체로 관람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이들 영화의 제목들은 불교에서 나온 말이지만 대중예술이라는 오락성에 묻혀 그 뜻을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꽤 깊은 의미가 담긴 이 용어들은 알든 모르든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데, 이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1989, 감독 배용균)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 장난스런 답변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우리?잘 아는 유명한 인사들은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답했을까 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것은 역사의 필연이다", 데카르트는 "과연 달마는 동쪽으로 갔을까? 이것부터 회의해보자", 갈릴레이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게 아니라 지구가 서에서 동으로 자전한 것이다", 콜럼버스는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동쪽으로 계속가면 서방정토에 갈 수 있었다", 그리고 김영삼은 "달마가 머여? 누가 타던 말이여" 라고 답했을 거라는 우스갯소리이다. 물론 재미삼아 만든 이야기이다.
달마는 인도 출신의 승려로 6세기 중국으로 건너가 소림사의 동굴에서 매일 벽을 향해 앉아 9년 동안이나 좌선 수행을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달마는 부처의 이심전심(以心傳心)의 가르침을 중국에 처음 전했다고 한다. 달마의 가르침은 수행을 통해 마음속의 부처를 찾으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는 당시 불교계에는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즉 달마의 가르침으로 깨달음의 체험과 실천하는 수행이 중시되면서, 경전 연구에만 치우쳐 있던 당시의 불교에 새로운 변화를 불러왔다.
달마가 뿌린 씨앗은 곧 퍼져 나가기 시작하여 6조 혜능에 이르러 선종이 마침내 골격을 갖추고 완성되었다. 그리하여 달마는 수행을 중시하는 종파인 선종의 시조로서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다. 달마가 인도로부터 동쪽으로 간 까닭은 곧 '내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달마로부터 시작된 선종은 신라 말 우리나라에 전해지고, 불교계의 주류로 발전해옴으로써 오늘날 우리 불교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사진2115> 동굴에서 수행하는 달마대사. 달마는 인도 출신의 승려로 6세기 중국에 건너왔다. 달마가 인도로부터 동쪽으로 온 까닭은 곧 '내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을 전하기 위해서였으며, 이로써 달마는 수행을 중시하는 종파인 선종의 시조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사진은 송광사 대웅전에 그려진 벽화.
우담바라(1989, 감독 김양득)
영화도 영화지만 몇 년 전 새 천년을 맞이할 즈음에, 불상에서 우담바라꽃이 피었다는 뉴스가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불상에서 아주 작은 꽃으로 보이는 것이 발견되자, 이것을 우담바라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극락에서나 핀다는 꽃이 이 땅에 피어난 셈이다. 그 때문에 불교 신도는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를 보기 위해 절에 몰려들었다. 이 상서로운 일을 기념해 사찰에서 플래카드를 내 걸기도 했다. 그러나 곤충학자들에 의해 그것이 풀잠자리 알이라는 것이 확인됨으로써 우담바라꽃이 피었다는 것은 작은 소동으로 끝났다.
식물학상으로 우담바라는 우담화인데 무화과속에 딸린 한 종이라고 한다. 지금도 인도 등지에서 자라며 열매는 식용으로, 잎은 코끼리의 사료로 쓰인다. 꽃받침에 가려져 꽃이 밖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흔히 꽃이 피지 않는 나무라고 한다.
불교 경전에 우담바라는 3천년 만에 한 번씩 꽃이 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우담바라는 석가모니나 지혜의 왕 전륜성왕과 함께 나타난다고 적고 있다. 따라서 우담바라는 흔히 '부처님을 의미하는 상상의 꽃'이라 하여 상서로운 일이 생길 징조로 받아들여져 왔다.
세상사 복잡하고 살기 어려운 이 시대에,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기고 나아가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를 바라는 보통사람들의 소박한 희망은, 곧 우담바라가 피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닐까?
아제 아제 바라아제(1989, 감독 임권택)
'아제 아제 바라아제'는 불교의 경전인 「반야심경」에 나온 구절로 수행자들이 깨달음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외우는 주문이다. 이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행적을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의 과정으로 보아 이러한 제목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주문의 내용은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한 부처의 가르침을 요약한 것이라고 한다. 주문의 전체 문장은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이다. 불교에서 주문이란 부처의 가르침과 지혜를 담고 있는 참다운 말을 뜻하며, 번역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도 고대 인도어 소리 그대로 암송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보통 사람들은 이것이 대단히 신령스러운 마술적 주문으로 생각하고 엉뚱한 기대를 하기도 한다. 무언가 당장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불교적인 관점으로 보면 아직 깨달음이 부족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풀이해 보면 '아제'란 말은 '가다'란 뜻이다. '바라아제'는 '저 언덕으로 가다'란 뜻이다. '바라승아제'는 '저 언덕으로 온전히 가다'란 뜻이며, '모지'는 원래 '보리', 즉 '깨달음'을 의미한다. '사바하'는 '완성하다, 성취하다, 이루다'의 뜻이다. 따라서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는 "가자, 가자, 저 언덕으로 가자, 저 언덕으로 온전히 가면, 깨달음을 이루리라!" 라는 뜻이다. 즉 수행과 실천을 통해 영원한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자는 의미이다.
이와 함께 마치 마술사의 주문인양 잘못 알려진 "수리 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가 있다. 이는 남을 욕하거나 거짓말을 하는 등 입으로 지은 죄를 없애는 주문이다. 그 뜻을 현대식 표현으로 풀이하면, "행복하십시오, 행복하십시오, 지극히 행복하십시오, 그 행복이 영원하십시오"라고 할 수 있다. 즉 다른 사람에게 칭찬과 축복의 말을 함으로써 그 동안 입으로 지은 죄를 깨끗이 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