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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왕 계보
1.온조왕(재위BC18~AD28) : (온조설에 따르면)고구려 동명왕의 셋째아들이자 백제의 시조이다.
BC 18년, 위례성에 나라를 정하고 나라이름을 백제라 하였다.
BC 16년, 말갈족이 침입해 왔으나 물리쳤고 백제는 그 군사력을 바탕으로 이듬해 동예와 동맹을 맺었다.
BC 11년, 말갈의 대대적인 공격이 이루어졌지만 식량이 떨어져 후퇴하다가 온조왕에게
500명이 죽었다.
BC 8년, 온조왕은 동예의 국경에 목책을 세웠는데 동예가 말갈과 함께 목책을 부수고 백제인 100명을 죽였다.
이후 백제는 동예와 동맹관계를 끊고 다시 목책을 세웠다.
BC 5년, 도읍을 위례성에서 한성으로 옮겼다.
BC 1년, 동예가 위례성을 함락시켰고 백제는 그 보복으로 동예를 공격했으나 폭설 때문에 계획이 좌절되고 말았다.
4년, 석두와 고목에 성을 쌓았고 6년에는 남쪽 경계에 목책을 쌓았으나 마한의 압력으로 철거하였다.
7년, 왕궁의 우물이 넘치고 말이 머리 하나에 몸이 두 개인 소를 낳자 온조왕은 이것을 길조라고 생각하여 합병계획에 들어갔고 9년에 마한을 멸망시켰다.
(삼국사기에는 9년에 마한을 정복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실제로는 고이왕 때 이르러 완전히 정복했다는 것이 정설)
그 후 대대적으로 대두산성, 탕정성, 고사부리성을 쌓았고 원산성과 금현성을 수리했다.
2.다루왕(재위28~77) : 다루는 지배자를 뜻하는 당시 말로 몽골어의 daru가 그 어원일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성격이 관대하고 후덕하며 위망이 있었다.
10년, 태자로 책봉되었고 28년, 온조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38년, 흉년이 들어 백성의 살림이 곤란하자 술의 양조를 금지시키고 지방을 친히 순시하며 빈민을 구호하였다.
또한 여러 차례 침입해온 말갈족을 격퇴하였으며 농사를 장려하여 백성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56년, 우곡성을 쌓아서 동북지방의 방비를 정비하였다.
63년, 낭자곡성(청주)까지 영토를 넓히고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신라가 이에 응하지 않았다.
64년, 신라의 와산성을 공격하였고 그 후 다시 신라의 구양성을 공격하였으나 격퇴 당하였다.
66년, 다시 와산성을 빼앗고 수비병 2백을 주둔시켰으나 곧 신라에게 다시 빼앗겼다.
75년, 신라의 와산성을 다시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나 이듬해 다시 빼앗기고 백제인 200명여명이 죽었다.
3.기루왕(77~128) : 다루왕의 장남으로 30년에 태자로 책봉 되었고 77년에 다루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85년, 신라의 변방을 공격하였다.
105년,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을 맺고 그 이후 두나라는 평화관계를 유지하였다.
125년, 말갈의 침입을 받은 신라에 원병을 보냈다.
삼국사기의 기루왕 치세에 대한 내용에는 천문이변, 지진, 가뭄, 태풍, 기상이변에 대한 간략한 기록이 대부분이다
4.개루왕(128~166) : 기루왕의 아들로 성격이 공손하고 품행이 방정하였다.
132년, 북한산성을 쌓았다.
165년, 신라에서 아찬 길선이 반란을 일으켜 백제로 망명하게 되었는데 개루왕은 도망친 길선을 정성껏 대접하며 신라에 돌려주지 않아 신라 정부에서는 백제와 대립하려는 세력이 늘어갔다.
(삼국사기에서는 "개루왕이 나라를 배신할 지도 모르는 길선을 데리고 왔으니 매우 어리석다."고 비난하였다.)
이후 신라군이 백제의 국경을 침략하여,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5.초고왕(166~214) : 개루왕의 장남으로 소고왕, 속고왕이라고도 한다.
선왕때 신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백제로 망명해온 길선의 송환문제를 계기로 이후 신라와의 대립은 계속되었다.
167년, 신라의 서쪽변경을 공격하여 2성을 함락하였으나, 신라의 반격을 받았다.
188년, 모산성을 공격하였고 이듬해 구양에서 신라와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190년, 신라 서쪽 국경에 있던 원산향을 공격하였고, 추격해오는 신라군을 와산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204년, 신라의 요차성을 함락시키고 성주인 설부를 죽였다.
210년,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여 적현성과 사도성을 축조한 후 동부의 민호를 이주시켰다.
214년, 군사 천명으로 말갈의 석문성을 공략하여 쟁취하였으나 말갈의 날랜 기병으로 인해 술천지역까지 침범 당하였다.
6.구수왕(214~234) : 초고왕의 장남으로 귀수왕이라고도 하며 키가 7척에 풍채가 빼어나 비범했다고 한다.
216년, 말갈이 적현성을 침범하였으나 성주가 굳게 지켜 막았고 왕이 기병 8백명을 이끌고 적을 추격하여 사도성 아래에서 크게 이겼다.
218년, 신라의 장산성을 포위하자 이사금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여 백제군이 패하였다.
222년, 신라의 우두진을 공격하여 5000명을 격파하였다.
한재와 수재에 대비하여 제방을 수축하고, 농사를 권하여 민생의 안정을 꾀하였다.
7.사반왕(234) : 구수왕의 장남으로 사비왕, 사이왕이라고도 한다.
구수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나이가 어리고 무능하다는 이유로 초고왕의 아우인 고이왕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8.고이왕(234~286) : 구이왕, 고모왕이라고도 하며 초고왕의 아우이다.
(하지만 초고왕의 아우라 하는 것은 연대상으로 모순되기 때문에 고이왕은 구수왕과는 온조계 왕실 내의 서로 다른 지파 출신으로 추정된다)
그는 재위 기간 중 괴곡, 봉산을 중심으로 자주 신라와 충돌했다.
246년, 위나라가 낙랑군, 삭방과 함께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는 틈을 타서 백제는 낙랑군의 변방을 공격하였다.
또한, 한나라와 낙랑군, 대방군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대방군을 선제공격하여 대방태수를 전사하게 한 사건의 배후에도 고이왕이 이끄는 백제의 힘이 작용하였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260년, 고이왕은 기존의 좌우보 체제를 개혁하여 내신좌평, 내두좌평, 내법좌평, 위사좌평, 조정좌평, 병관좌평의 6좌평을 두고 왕명 출납과 창고 관리, 의례 제정, 형벌 제도, 군사 업무를 각각 분담시켜 맡아보게 했다.
또한 좌평, 달솔, 은솔, 덕솔, 한솔, 나솔, 장덕, 시덕, 고덕, 계덕, 대덕, 문독, 무독, 좌군, 진무, 극우 등 16품의 관등 체계를 정비했으며, 관직 위계에 따른 복장제를 마련하여 6품 이상의 관원은 자색 관복, 11품 이상은 다홍색 관복, 16품 이상은 청색 관복을 착용하게 하였다.
형벌로는 재물을 받은 관리와 남의 것을 도둑질한 자에게는 3배를 징출케 하는 동시에 종신 금고에 처한다는 엄격한 법령을 내려 기강을 바로잡았고 이러한 지배체제의 정비를 통해 왕권을 강화시켰다.
이는 고이왕이 죽은 뒤에도 지속되어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4백 년간이나 백제의 기본 제도로 유지되었다.
이렇듯 고이왕은 모든 관제를 마련하였을 뿐 아니라 부락정치나 다름없던 정치체제를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로 발전시켰고 영토를 확장하는 데도 진력하여 한강유역을 완전히 장악하여 건국 태조와 같은 업적을 남겼다.
9.책계왕(286~298) : 고이왕의 아들로 청계왕, 책찬왕이라고도 한다.
체격이 크고, 의지와 기품이 걸출하였다.
286년, 수도인 위례성을 수리하고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하여 아차성과 사성을 수축했다.
298년, 한군이 맥인과 함께 침입하자 왕이 직접 나가서 방어하다가 전사하였다
10.분서왕(298~304) : 책계왕의 장자로 어려서부터 외모가 준수하고 총명하여 부왕의 총애를 받았다.
304년, 낙랑군의 서쪽 현을 공격하여 이를 점령하였으나, 그해 낙랑군의 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었다.
11.비류왕(304~344) : 기록에 따르면 구수왕의 차남이자 사반왕의 동생이다.
(그러나 재위 시기로 보아 구수왕의 아들로 보기는 어렵다)
분서왕이 죽자 그의 아들이 아직 어려서 비류가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서 즉위하였다.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으며 성품은 인자하고 너그러웠다.
그는 오랫동안 민간에서 생활하였으므로 서민의 실정을 잘 알아 선정을 베풀었다.
312년, 신하를 보내어 백성의 질고를 살피고, 홀아비, 과부, 고아, 늙어서 자식없이 외롭게 지내는 자를 도와주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자활할 수 없는 자에게는 곡식을 매인당 3섬씩 주었다.
327년, 내신좌평으로 있던 우복이 북한산성을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토벌하였다.
337년,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수교하였다
12.계왕(344~346) : 분서왕의 장남으로 그 뒤를 이어 즉위할 예정이었으나 나이가 어려 사반왕의 동생인 비류왕이 제11대 왕위에 올랐고, 비류왕이 죽은 후에야 즉위하였다.
타고난 자질이 강직하고 용감하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였다.
비류왕이 41년간 재위하였기 때문에 그는 즉위한 지 3년 만에 죽었다.
13.근초고왕(346~375) : 비류왕의 차남으로 조고왕, 초고왕이라고도 하며 4세기 중반에 백제를 크게 발전시킨 왕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체격도 아주 크고 용감했기 때문에 둘째 아들이었지만 차기 왕으로 지목되었다.
369년, 마한을 정복하여 전라도 영산강 이북 지역을 차지하였고, 탐라를 복속시켰다.
같은해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군사 2만 명을 이끌고 치양성(황해도 배천)에 쳐들어오자 왕태자인 근구수를 보내 고구려군을 크게 무찌르고 5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371년, 왕태자와 함께 고구려군을 대동강에서 물리치고 옛 대방의 대부분을 점령하였으며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또한 낙동강 유역의 가야 연맹에 대해서도 종주권을 확보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지금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강원도 그리고 황해도의 일부까지 차지하여 강력한 고대 국가의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한반도의 패권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근초고왕 때 중국의 요서 일대 및 산둥 반도, 일본 큐슈에 세력을 뻗었다고 주장한다.)
근초고왕은 영토 확장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부자 세습 제도를 확립했다.
372년, 중국 동진에 사신을 보내 국교를 맺고, 양자강 이남의 남조 문화를 받아들여 백제의 문화를 발전시켰다.
또한 백제의 위대함과 왕실의 존귀함을 알리고 국가 체제를 굳건히 하기 위한 목적으로 박사 고흥에게 명하여 백제의 역사책인 서기를 저술하게 하였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고사기, 일본서기 등 일본 옛 기록에 의하면 백제는 아직기 등을 일본에 보내 학문과 각종 문화를 전파하였고 왜왕에게 칠지도를 하사하였다고 한다.
14.근구수왕(375~384) : 근초고왕의 아들로 이름은 수, 귀수, 근귀수, 귀류, 구소 등이 있다.
태자 시절부터 부왕을 도와 정복활동을 벌였다.
369년, 고구려 고국원왕이 보병과 기병 2만명을 거느리고 와서 진을 치고는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약탈하자 치양성에서 싸워 이들을 격퇴하고 추격해 수곡성까지 영토를 넓혔다.
377년, 군사 3만으로 고구려의 평양성을 침공하는 등 국력을 신장하였다.
또한 중국, 일본과도 국교를 맺어 중국의 제반 문물을 일본에 전하였다.
특히 일본에서 백제에 사람을 보내어 학자를 구하였는데 이에 왕은 손자 진손왕과 함께 왕인을 일본에 보내면서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가게 하였으며 왕인은 일본 태자 스승이 되었다
15.침류왕(384~385) : 근구수왕의 맏아들로 불교를 공인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하였다.
즉위하자 중국 진나라에 조공을 바쳤으며, 호승 마라난타가 백제에 왔을 때 왕궁에 영접하였는데 이것이 백제에서 불교 전래의 시초이며 백제에서는 이 때부터 불법을 시행하였다.
385년, 한산에 절을 창건하였고 재위 1년 만에 사망하였다.
16.진사왕(385~392) : 근구수왕의 차남이자 침류왕의 동생으로 성품이 강하고 총명하며 지략이 많았다.
침류왕이 죽자 태자 아신의 나이가 어렸으므로 그가 대신 즉위하였다.
390년, 달솔 진가모에게 명하여 고구려의 도곤성을 함락시키고 200명을 포로로 잡았다.
392년, 4만군사를 거느린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공격으로 석현성과 관미성 등 10개 성이 함락당하여 백제가 크게 불리하게 되었다. 진사왕은 이를 탈환하려고 구원에 출전했다가 행궁에서 병사하였다
(일본서기에는 진사왕이 왜왕에게 무례하게 대하여 백제인들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17.아신왕(392~405) : 침류왕의 맏아들로 아방왕, 아화왕이라고도 한다.
부왕이 죽었을 때에는 나이가 어려 숙부 진사왕이 즉위하고, 8년 후 진사왕이 죽자 왕위를 이었다.
그의 치세기간에는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응하기 위하여 부심하였는데 패수, 수곡성 등 국경지대에서 고구려군과 싸워 번번이 패하였다.
397년, 태자 전지를 일본에 볼모로 보내어 일본과 화친을 맺었다.
398년, 쌍현성을 쌓았고 403년에는 신라를 공략하였다.
송서,양서등의 기록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이 요동일대를 점령한 시기에 백제가 요서지역에 영토를 획득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기 백제는 광개토대왕의 공격을 받아 58개성을 빼앗기는등 어려운 상황에 있어 사실로 보기 어렵다)
18.전지왕(405~420) : 아신왕의 아들로 이름은 여영, 영이며 진지왕이라고도 하였다.
394년,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397년 볼모로 왜국에 갔다.
405년, 아신왕이 죽자 그의 가운데 동생 훈해가 섭정이 되어 태자의 귀국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전지왕은 귀국 도중 막내동생 설례가 훈해를 죽이고 왕을 자처한다는 소식을 듣고 해도에 머물렀다. 그 후 해씨 세력은 내분을 일으킨 설례를 죽이고 진지왕을 즉위시켰다.
같은 해 전지왕은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고, 408년 상좌평의 직제를 처음으로 제정하여 여신을 이에 임명하였다.
(해씨세력에 맞서 이복동생인 여신을 상좌평에 앉혀 권력의 편중현상을 예방한 것으로 보인다)
416년, 동진의 안제로부터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진동장군 백제왕에 책봉되는 등 동진과 긴밀한 외교관계를 유지하였다. 일본과의 우호 관계 역시 긴밀히 하여 야명주를 보내온 일본의 특사를 후히 대접한 뒤 비단 열 필을 보냈다.
19.구이신왕(420~427) : 423년, 425년 송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그 이후에도 매년 사신을 파견하는 등 송나라와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이것은 고구려가 북조와 동맹관계를 맺고 세력을 확장하려는 데에 맞서는 외교정책의 일환으로 파악된다
20.비유왕(427∼454) : 구이신왕의 맏아들로 외모가 아름답고 언변이 좋았다.
(삼국사기에서는 전지왕의 서자라는 설도 있으나 분명치 않다고 기록하고 있다.)
428년, 4부를 순시하고 가난한 백성에게 곡식을 내렸다.
429년, 사신을 송나라에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433년, 434년 신라에 사신을 보냈으며 434년 신라가 사신을 보내면서 양금과 명주를 선물로 보내왔다.
440년, 또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고 조공을 바쳤다.
비유왕은 국제 외교 관계를 통해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맞서려 했고, 특히 평양성으로 도읍을 이전한 고구려에 대항하여 신라와 나제동맹을 체결하고 왜와의 관계도 굳건히 지켜 백제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힘을 썼다.
21.개로왕(455~475) : 이름은 여경, 경사로 근개루왕이라고도 하며 바둑을 잘 두기로 유명하였다.
개로왕은 고구려를 선제 공격하고 군사 요충지에는 방어를 굳건히 하여 고구려를 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또한 송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서로의 관계를 재확인 하였고, 신라와의 나제동맹도 지켜나갔다.
472년, 고구려의 남하정책을 막기 위해 북위에 원병을 청했으나 오히려 북위가 이 사실을 고구려에 알려주어 고구려 장수왕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장수왕은 백제를 염탐하기 위해 승려 도림을 첩자로 보냈고 도림은 개로왕을 찾아가 고구려에서 죄를 짓고 왔다고 속였는데 바둑을 잘두던 도림은 바둑을 몹시 즐기는 개로왕에게 많은 환심을 사는데 성공하였다.
그 후 개로왕은 도림의 꾐에 빠져 급하지도 않은 방대한 토목공사를 일으켜 국가 재정을 낭비하였으며 귀족세력들을 배제한 왕족 중심의 집권체제를 추구하여 백제 내부의 결속력을 약화시켰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계획적인 침입을 받고 성 밖으로 도망치다 붙잡혀 죽었으며, 위례성을 빼앗겼다.
(도미 설화- 백제 사람 도미의 아내는 얼굴이 아름답고 절개가 있어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았다. 이 소문을 들은 개루왕은 도미의 아내를 얻기 위해 도미와 내기에서 이겨 얻으러 왔다고 속이기도 하고 옥반지를 줘서 유혹하고 부하를 시켜 데려오게 했지만 그녀는 월경 때문에 몸이 더럽다는 핑계로 도망쳐 나왔다. 개루왕은 결국 도미의 눈을 뽑고 먼 곳으로 버렸다. 도미의 아내는 도미가 그리워 강가에서 울고 있었는데 한 배가 떠밀려오자 그 배를 타고 어떤 외딴 섬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그 곳에서 도미를 발견하고 둘은 고구려로 도망가 서로 행복하게 살았다.)
22.문주왕(475~477) : 개로왕의 아들로 즉위 전에는 부왕을 도와 상좌평으로서 국정을 보살폈다.
475년, 고구려의 침입으로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은 전사하였다. 이때 문주왕은 상좌평의 자격으로 신라에 가서 1만 원군을 이끌고 왔으나, 백제는 이미 패퇴한 뒤였다.
즉위하여 웅진으로 천도하고, 대두산성을 수리하는 등 국방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개로왕의 패전으로 한강유역의 중요지대를 잃었기 때문에 상당기간 동안 국력을 떨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중국과 일본 지역의 정세 변화에 따라 무역 활동도 침체되어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세력이 국정을 주도하였다.
476년, 탐라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477년, 당시 정권을 장악했던 병권좌평 해구가 보낸 자객에게 죽임을 당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성품이 부드러워 결단력이 부족하였으나 백성을 사랑하였고 백성 또한 그를 사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23.삼근왕(477~479) : 문주왕의 맏아들로 임걸, 삼걸왕이라고도 한다.
즉위했을 때의 나이가 13세에 불과하였으므로 군국의 정사 일체를 좌평 해구에게 맡겼다. 해구는 부왕을 죽인 원수인데 그에게 정사를 맡겼다면 당시 해구의 세력이 매우 강했던 모양이다.
478년, 해구가 은솔 연신과 공모하여 대두성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왕은 좌평 진남에게 군사 2000명을 주어 그들을 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다시 덕솔 진로에게 정병 500명을 주어 그들을 치게 하여 해구를 격살하였다. 연신이 고구려로 도망치자 그 처자를 잡아다가 웅진 거리에서 목베어 죽였다.
24.동성왕(479~501) : 문주왕의 아우인 좌평 곤지의 아들로 이름은 모대, 마모, 마제, 여대이다.
동성왕 때부터는 다시 백제 사회가 안정되면서 국력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개로왕의 직계가 단절되고 삼근왕도 일찍 죽자 진씨 세력에 의해 옹립되어 삼근왕의 뒤를 이었다.
동성왕은 귀족들에게 옹립되어 세력기반이 약했으며 왜에 오래 체류하여 국내 사정에도 어두웠기 때문에 신진세력을 중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그는 웅진이 새로운 왕도의 모습을 갖추도록 궁실, 임류각, 웅진교를 가설하고 방어시설을 구축하였으며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귀족들에게 작호를 수여, 지방을 다스리게 하여 지배력이 미치도록 하였다.
그러나 대규모 토목 사업과 거듭되는 자연 재해로 인해 민심이 이탈하기도 하였다.
484년, 중국 남제와 수교하여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으며, 485년에는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수교하였다.
488년, 백제를 침공한 북위의 기병을 사법명 등을 시켜 격퇴하였다.
493년, 결혼동맹을 맺어 신라의 왕녀를 왕비로 삼았다.
494년~495년, 두 해에 걸쳐 백제와 신라를 번갈아 침공해오는 고구려 군대를 신라와 연합해 격퇴하는 등 신라와의 동맹을 더욱 돈독히 다졌다.
498년, 공물과 세금을 바치지 않는 탐라국(제주도)을 정벌하고자 무진주(광주)에 이르렀다가 탐라국의 항복을 받고 그만두면서 탐라국을 복속시켰다.
동성왕은 백제의 혼란을 수습하는데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말기에 이르러서는 향락에 빠져 정치를 돌보지 않았다.
499년,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려 죽어나갔으나 궁궐의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구제하자는 신하들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500년, 웅진성 동쪽에 임류각을 짓고 사치스러운 정원을 만들었다. 또한 신하들이 간언하는 것을 귀찮아하며 궁궐의 문까지 닫아버릴 정도로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다.
501년, 사냥을 나갔다가 폭설을 만나 근처에서 머무르던 중 왕의 정책에 반발을 한 위사좌평 백가에게 살해당했다.
25.무령왕(501~523) : 동성왕의 차남으로 이름은 사마, 융이며 시호는 무령이다.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의 아들이며 동성왕의 배다른 형이라는 설도 있다.)
어릴 때부터 키가 크고 외모가 수려했으며, 성격이 인자하고 관대하였다.
501년, 백가가 보낸 자객에 의해 동성왕이 죽자 뒤를 이어 40세의 나이에 즉위하였다.
502년, 가림성에서 백가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정벌하였다.
503년, 고목성에 쳐들어온 말갈족을 물리쳤고, 달솔 우영을 보내 고구려의 수곡성을 습격하였다.
507년, 말갈족이 다시 고목성에 쳐들어오자 남쪽에 2개의 책을 세우고 장령성을 쌓았다.
512년, 고구려가 가불성과 원산성을 점거하고 약탈을 일삼자 군사 3000명을 이끌고 위천의 북쪽으로 진출해 크게 무찔렀다. 같은해 양나라에 조공하였다.
513년, 오경박사 단양이를, 516년에는 고안무를 일본에 보내어 백제의 문화를 일본에 전해주었다.
현존하는 인물화상경은 무령왕이 게이타이 천황에게 선물로 보낸 거울로 백제와 왜의 친밀한 사이를 증명한다.
523년 인우, 사오 등에게 명하여 한북주의 장정을 동원시켜 쌍현성을 쌓게하였다.
무령왕은 구귀족 세력을 등용하여 신구 세력 간의 균형을 유지하며 왕권을 안정화시켜 나갔으며 지방의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였다
금강유역과 호남평야를 개발하기 위해 수리시설을 확충하고 유민들을 귀농시키는 정책을 실시하여 유민을 정착시키고 농업 노동력을 확보하여 조세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는 무령왕릉에 묻혔는데 삼국시대 무덤들 가운데 최초로 주인과 매장 연도를 정확히 알 수 있는 무덤이며 이 무덤에서 나온 수많은 부장품은 오늘날 백제의 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26.성왕(523~554) : 무령왕의 아들로 이름은 명농이고 일본 역사에서는 성명왕으로도 호칭된다.
무령왕과 함께 백제의 영주라 일컬어진다.
523년, 부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며 그해 패수에 침입한 고구려군을 장군 지충으로 하여금 물리치게 하였다.
524년, 양나라와 국교를 강화하여 양 고조로부터 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수동장군 백제왕에 임명됐고 525년 신라와 서로 사신을 교환하였다
526년, 웅진성을 수리, 수성하였다.
529년, 고구려 안장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북쪽 변경에 있는 혈성이 함락되었다. 이에 성왕은 좌평 연모에게 명하여 보병과 기병 3만을 이끌고 싸우게 했지만 오곡원 전투에서 패하여 전사자가 2천여 명이나 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그 뒤 고구려에 대하여 신라와 공동으로 대처하였다.
532년, 금관가야가 신라에 항복하자 왕은 잔존 가야제국을 회유하여 표면상으로는 신라에 대하여 적대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실제적으로는 가야의 분할을 획책하였다.
538년, 대외 진출이 쉬운 사비성으로 수도를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개명하면서 중흥을 꾀하였다.
중앙의 22부, 지방의 5부 5방 제도를 이때 실시한 것으로 추측된다.
541년, 양나라로부터 모시박사, 공장, 화사 등을 초빙하고 열반경 등을 들여와 문화중흥을 이루고자 하였다.
550년, 고구려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서 고구려의 도살성을 쳐서 빼앗고, 이듬해에는 신라와 함께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유역을 공격하여 76년간이나 고구려에 빼앗겼던 군을 되찾았다.
552년, 일본에 노리사치계를 보내 금동석가상 1구, 미륵석불, 불경을 전하였으며 이 밖에 오경박사, 역박사, 의박사 등을 일본으로 보내 학술과 전문지식을 전수하였다.
553년, 백제가 병합하려는 한강 유역을 신라가 차지하자 신라에 보복하기 위해 이듬해 일본에 구원병을 청하는 한편 왕자 창(위덕왕)과 함께 친히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신라에게 대패하고 관산성에서 신라의 복병에 의하여 전사하였다.
27.위덕왕(554~598) : 성왕의 장남이며 이름은 창이다.
태자때부터 성왕을 도와 국정에 참여하였고 신라가 동맹을 어기고 한강유역을 장악하자 신라 정벌론을 펼쳤다.
많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의 강경론에 따라 성왕이 신라 공격을 결심하자 554년 자신이 선봉을 서서 관산성 공략에 나섰는데 성왕은 관산성을 공격하고 있던 태자 창을 위로하기 위해 밤길을 달려가다 신라군에게 급습을 당해 죽임을 당하였다.
이에 창은 죄책감에 시달리며 출가하여 승려가 되려고 하였으나 신하들의 강력한 만류로 그뜻을 굽히고 성왕의 삼년상을 치른 후 557년 정식으로 왕위를 승계하였다.
성왕이 전사하여 나라가 불안한 가운데, 고구려군이 쳐들어왔는데 이는 성왕이 죽은 지 불과 3개월 만이었다.
고구려는 신라가 길을 열어주자 단숨에 웅진성(백제의 옛도읍, 군사적 요충지, 사미성에서 한나절 거리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까지 달려와 백제를 위협하였고 이에 위덕왕은 총력전을 펼쳐 가까스로 고구려군을 패퇴시켰다.
이러한 고구려의 침략은 신라가 길을 터준 결과였으므로 고구려와 신라가 연합하여 공격해올 것을 염려한 위덕왕은 오랜 동맹국인 가야에 밀사를 파견하여 신라에 빼앗긴 가야땅을 되찾고 이를 재건할 방법을 모색하였다.
582년, 백제군은 신라를 공격하였는데 원래는 그 사이 가야가 내부를 수습하고 신라의 뒤를 후리는 양동작전을 계획 하였으나 신라의 반격에 밀려 천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주함으로써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신라는 그 여세를 몰아 가야를 공격하였고 이로써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가야는 몰락하였다.
위덕왕은 중국의 진, 북제, 수와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친선을 유지했다.
수나라가 진나라를 몰락시킬 당시, 수나라의 전함 한대가 탐라에 표류해왔는데, 위덕왕은 그들의 배를 수리해주고, 선물까지 가득 함께 돌려보냈다. 수나라는 이 일로 백제를 매우 신임하고 굳이 사신을 보내고 조공을 바치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서를 내리기까지 하였다.
596년, 수나라와 고구려가 요동을 놓고 전쟁을 벌이자 위덕왕은 사신을 파견하여 고구려는 예의가 없고 오만한 나라라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다시 고구려를 친다면 백제가 도와주겠다는 제의를 했으나 양견은 아직 고구려를 재침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하여 위덕왕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백제가 수나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치도록 충동질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고구려는 즉시 병력을 동원하여 백제 국경을 노략질하며 보복을 감행하고 돌아갔다.
위덕왕은 한국 역사서보다 일본의 역사서에 더 자세히 알려져 있는데 일본의 쇼토쿠태자의 스승 아좌태자는 그의 아들로 597년에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알려졌다.
28.혜왕(598~599) : 성왕의 차남, 위덕왕의 동생으로 이름은 계이고 헌왕이라고도 한다.
위덕왕 초기에 왜로 가서 군사 5000명을 데려오는 역할을 하였다.
혜왕이 왕위를 계승했을 때는 이미 나라의 힘이 많이 약화되어 사회의 내부 문제들이 심화되고 있었다.
이전까지 귀족들의 활동무대로 경제적 이익을 취했던 황해 연안의 해상기지들은 고구려의 진출로 많은 타격을 입었고 그 후 신라의 진흥왕이 한강 하류 지역까지 치고 올라오면서 더욱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또한 수나라가 중국대륙을 통일하면서 중국에 있던 백제의 해상 무역기지들까지 힘을 잃게 되었으며 일본도 국가체제가 이루어지면서 백제의 영향권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결국 황해의 무역기지를 고구려와 신라에게 빼앗기고 중국과 일본 등에서의 경제 활동무대까지 잃게 된 백제 귀족들은 내부의 한정된 권력과 땅에 관심을 돌리면서 내분이 심화되게 되었다.
29.법왕(599~600) : 혜공왕의 맏아들로 이름은 선, 효순이다.
재위년이 불과 2년이었으므로 특별한 치적은 없으나 다만 불교를 매우 숭상하여 살생을 금하고 민가에서 기르는 매를 모두 방생하게 하였으며 사냥도구는 모두 수거하여 소각하였다고 전한다.
600년, 왕흥사를 창건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고 아들 무왕이 그의 뒤를 이어 30년 만에 왕흥사를 완공하였다.
30.무왕(600~641) : (삼국사기에 따르면)법왕의 아들로 이름은 장이며 아명은 서동이다.
(삼국유사 무왕열전中- 무왕의 어머니는 강가에 사는 과부였는데 어느날 강에서 검은 용이 나타나 과부와 통정해서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자라서 재주가 뛰어나고 용기가 있었는데 그가 백제의 왕위에 올라 무왕이 되었다.
북조의 북사中- 백제 위덕왕의 아들 무왕이 사신을 보냈다)
600년, 법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신라와 자주 충돌하였다. 재위기간 중 신라의 아막산성, 가잠성, 모산성, 늑노현, 주제성과 신라 북서쪽의 두 성과 서곡성, 독산성 등을 공격하였다.
또한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수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여러 번 고구려 공격을 청하였다.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한 뒤에도 친선 정책을 전개하였다.
624년,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당 고조로부터 대방군왕 백제왕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627년, 신라 침공을 시도하였으나 당이 백제와 신라의 화친을 권유했으므로 이를 중지하였다.
무왕은 관륵을 일본에 파견하여 천문, 지리, 역법 등에 대한 서적과 불교를 전달하였다.
630년, 사비 왕궁을 수리하였으나 가뭄으로 인해 중지하였다.
634년, 왕흥사를 창건하고 궁성 남쪽에 연못을 파서 왕의 유흥지로 삼는 등 토목공사를 자주 하였다.
밖으로는 신라 공격에 대비하여 자주 군대를 동원하였으므로 국력이 많이 소모되었다.
(서동 설화- 무왕은 왕자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어렸을 때 궁밖에서 홀어머니를 모시며 마를 캐는 서동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로 가서 서라벌의 아이들에게 마를 주는 선심을 쓰고 선화공주가 맛둥서방과 몰래 사귄다는 서동요라는 노래를 전해주어 부르게 하였다. 이 노래로 선화공주는 신라 왕실에서 쫓겨났고 선화공주와 서동이 만나게 되었다.)
31.의자왕(641~660) : 무왕의 맏아들로 의자는 휘로서 그는 왕의 시호가 없다.
632년,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효성과 형제애가 지극하여 해동증자라 일컬었다.
642년, 친히 신라를 공격하여 미후성 등 40여 성을 빼앗았고 이어 대야성을 함락시켜 신라에 큰 타격을 주었다.
643년, 고구려와 화친하고 당항성을 빼앗아 신라가 당나라로 가는 길을 막는 등 국위의 만회에 힘썼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의 연합을 꾀했으나 회담이 결렬되자 당나라와 군사 동맹을 맺어 삼국를 통일하려 하였다.
645년,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하고자 신라에서 원군을 징발하였고 의자왕은 이 기회를 노려 649년 신라의 7성을 습격하다가 김유신에게 역습을 당하였다. 그 후 백제는 이를 다시 빼았았으며, 655년에는 고구려와 함께 신라의 성 30개를 빼앗앗다.
이러한 의자왕의 노력은 57세를 넘기자 차츰 약해졌으며 사치스러운 주연을 매일 열어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그로 인해 총기가 흐려지고 방종해져 성충, 흥수 등 충신의 간을 무시하고 하옥하자 국정이 문란해져 갔다.
성충은 "육로는 탄현에서, 수로는 기벌포에서 막으소서."라고 유언 하였지만 그 말을 무시하고 여흥에 빠졌다.
(성충이 간하다가 옥사했다는 것은 의자왕의 귀족층 숙청에서 나온 이야기일 가능성이 있다.)
660년, 신라는 당나라와 밀계하여 반도 통일의 결심을 굳히고 나당연합군으로 백제를 협공을 하였다.
이에 의자왕은 기벌포에 기병 2만을 보냈지만 기벌포를 이미 지나쳐서 전멸하고, 탄현에는 계백을 5천의 군사와 보내 4번을 이겼지만 결국은 전멸하였으므로 백제의 방어선이 모두 무너져 내렸다.
수도인 사비성이 포위되자 태자와 함께 웅진성으로 피난하였는데 난세 지역인 웅진과 임존이 건재해 있어 장기전으로 갈 경우 백제에게 유리하였다. 그러나 쿠데타를 통해 의자왕을 배신한 웅진성 방령 예식에 의해 항복이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는 의자왕이 마지막까지 군대를 보내어 싸웠다 전해지고 술과 여흥에 빠졌다는 이야기는 없다.)
그 후 의자왕은 왕자들과 대신 88명을 포함하여 백성 1만2천명과 함께 당나라로 압송되어 그해에 병으로 죽었다.
백제가 멸망한 이후 각 지방의 저항 세력이 들고 일어나 백제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복신과 흑치상지, 도침 등은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주류성과 임존성을 거점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이들은 200개의 성들을 되찾고 사비성과 웅진성에 주둔한 당나라군을 공격하면서 4년간 저항하였으나, 결국 나당 연합군에 의하여 진압되고 만다.
이때 왜가 백제에 원군을 보내 나당 연합군과 백제-왜 연합군이 백촌강에서 격돌하였으나 백제-왜 연합군은 대패하였고 백제의 부흥운동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900년에서 부터 936년동안 백제라는 이름의 국가가 신라의 장군이었던 견훤에 의해 다시 세워지나(후백제) 역사가 짧고 연관성이 비교적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