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부활의 꿈 변산반도
백남오
어디론가 떠난다는 것은 설렘이다. 「메밀꽃 필 무렵」의 장돌뱅이 허생원이나, 운명적인 역마살을 타고난「역마」의 주인공 성기가 아니라도 우리는 떠나고 싶다. 꽉 막힌 일상에서, 숨 막힐 것 같은 현실에서 탈출하고 싶다. 냉혹한 현실의 원칙만 지배되는 직장을 벗어나 훌훌 떠난다는 일은 생각만 해도 행복한 일이다. 떠남의 시간이 비록 짧은 한 순간일지라도 엄청난 삶의 생기를 충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여행이 주는 묘미다. 그리하여 지금우리는 떠나는 것이다.
동마산병원 토요산인회, 아내가 포함된 열두 명의 회원, 나는 가이드의 자격이 된다. 2년 전, 환상적인 섬‘보길도’에 대한 감동이 너무 컸던지라 아직 그 여운을 간직한 채, 그때 그 사람 그대로 서해안의 비경‘변산반도’를 향한다.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갔더니
6월4일 토요일 하오 세시, 2박3일의 일정으로 마산을 출발한다. 아무런 예약도 없이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힘차게 시동을 건다. 명승지에 인파가 몰려 우리의 머리를 눕힐 공간이 없을 지라도, 그에 대한 걱정은 누구도 하지 않는다. 마냥 즐거움뿐이다. 남해고속도로를 완주하고 호남고속도로로 접어든다. 전북 고창읍으로 접어드는 산마루에 올라서니 서해평야 특유의 일망무제가 펼쳐진다. 멀리 평원 위로, 저 아득한 서해안 쪽으로 붉게 타는 저녁노을이 화려한 일몰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유달리 붉고 커다란 태양 밑으로 고창의 들녘이 낮선 이방인을 포근히 환영해 주는 풍광이다.
‘고창읍’에서 선운사 쪽으로 가는 길목인‘상갑리’일대는 길 주변으로 거대한 고인돌 유적지가 있다. 야트막한 산자락 밑으로 까만 고인돌들이 무려 5백여 개나 즐비하게 널려있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이 무덤군은 2천 5백 년 전부터 악 5백년간 이 지역을 지배한 족장의 가족묘역으로 학계에서는 추정하고 있다. 그러니까 청동기시대로 불리는 삼한시대 유물인 것이다. 그 앞으로 무더기로 피어있는 하얀 마가렛 꽃이 소녀처럼 풋풋하다. 이미 어둠이 몰려오는 시간이지만 무리지어 사진을 찍는다고 정신이 없다.
어둠이 완전히 내리깔린 시간,‘선운사’주차장이다. 이 고장 출신 미당 서정주 시인이 어서 오라고 반겨주는 것만 같다. 그의 시 「선운사 동구」 는 선운사 입구에 시비로 새겨져있다.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리 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디다.
시인은 동백꽃이 피기 전에 왔는데 우리는 꽃이 지고 나서야 선운사를 찾은 것이다. 쓸쓸히, 그 붉은 동백꽃이 다 떨어진 이제야 왜 왔느냐고 아쉬워하는 것만 같다.
모든 여관과 민박집은 이미 동이나 버렸다. 게다가 시장기까지 밀려온다. 일단 저녁식사부터 해결하기로 한다. 이곳 명물 풍천장어에 복분자술을 곁들여 만찬을 시작한다. 울산이 친정이라는 주인아주머니의 경상도 사투리가 그나마 집 못 구한 설움을 달래준다. 잔을 부딪치며 건배를 한다. 식사 후, 정읍시내로 이동하여 역사 앞, 목욕탕이 달린 여관에서 첫날의 여장을 푼다. 여행의 첫날밤은 누구나 잠 못 이루는 법. 낮선 곳에서의 객창감은 설령 내일의 일정을 포기한다고 해도 좋을 만큼 강렬하기 때문이리라.
다음 날, 변산반도. 한반도가 토끼의 오므린 형상이라면 그 뒷다리에 해당되는 부분이 변산반도다. 땅의 기운이 유달리 강한 곳으로 알려진 곳. 1988년, 19번째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곳. 예부터 풍수지리가 들이 좋은 피난처로 정해놓은 십승지지의 하나인 명당. 고려조에는 정교한 고려자기의 생산지로서 찬란한 민족문화의 꽃을 피운 곳이기도 하다.
바다를 끼고도는 외변산은 아름다운 해안선을 따라 터를 잡은 바람모퉁이, 변산, 격포, 고사포 등의 해수욕장, 채석강, 적벽강 등의 절경이 이어지며 일몰 또한 장관이다. 내륙으로 자리 잡은 내변산은 산세가 제각기 방향을 뒤틀어 무질서하나 그 무질서가 파격미를 이루어 수많은 승지를 이루어낸다. 4백 미터 급들의 산들이 연이어진 사이로 계곡을 이루고 있는 모습은 중국의‘계림’과도 견줄만한 절경이다. 내소사, 개암사, 월명암 등의 천년고찰과 구암리 지석묘군, 유천리 도요지, 실학자 반계 유형원 선생 유적지 등의 사적지도 중요한 명소다. 또한 새만금, 부안댐, 곰소 젓갈항, 불멸의 이순신 세트장까지 작금의 관심사까지 안고 있는 곳이 변산반도다. 하지만 이 많은 유적지를 하루에 답사할 수는 없다. 지름길을 찾아야한다. 그것은 변산반도를 관통하는‘내변산종주산행’을 하는 일이다.
‘내변산’의 초입은 원암, 내변산, 내소사, 남여치 등 네 개의 국립공원 매표소중 어디에서 출발해도 좋다. 일반적인 종주의 개념은 내소사에서 남여치까지의 약 9Km구간이다. 5년 전 겨울, 이 길을 완주한 적이 있는 나의 생각으로서는 오늘 식구들이 통과하기엔 무리다. 가능하다해도 다섯 시간 이상은 소요될 것이다. 하지만 무조건 가자한다. 좋다, 가보자. 문제가 생기면 중간에서 빠지는 길도 있으니까.
10시 40분,‘내소사매표소’를 들어선다. 발걸음도 가볍다. 하늘을 찌를 듯한 전나무숲길이 마음을 풍선처럼 부풀게 한다. 넓고 시원한 입구는 편안하게 어루만지며 끌어안는 것만 같다. 이정표는 내소사 경내를 들어가기 전 좌측으로 안내를 한다. 조그마한 다리하나를 건너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진한 풀냄새가 코끝에 머문다. 시작부터 한바탕 치고 오르자 가슴이 탁 트이는 첫 번째 고개 마루다. 첩첩이 골짜기요, 보이는 것은 우뚝우뚝 솟아오른 산봉우리뿐이다. 바닷가 작은 반도의 4백 미터대의 산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웅혼함이다. 내소사가 환히 내려다보인다.
백제부활의 꿈 변산반도
내소사. 관음봉, 세존봉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곳에 아늑히 자리 잡은 사찰. 백제 무왕 때 혜구 두타스님이‘소래사’란 이름으로 창건한절. 백제가 멸망할 때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시주하였다고 하여‘내소사’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곳.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소생한다는 뜻을 가진 내소사. 그 내소사를 시야에서 멀리하며 다시 비탈을 오른다.
관음봉삼거리까지 1.2Km의 구간은 계속 오르막이다. 더구나 바위산이다. 바위산은 아름답지만 쉽게 지친다. 바위에는 땅에서 올라온 지기가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산중에 솟아 있는 평평한 너럭바위는 대체로 도인들이 수행하던 장소라고 보면 된다. 그리하여 변산 일대는 고래로부터 도를 향한 수행자들이 끊이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뒤로 멀리멀리 아득히 펼쳐지는 서해바다가 있기에 그 고통의 순간들을 씻어주고 애무해주는 것이다.
‘재백이고개’부터는 평지로 접어든다. 아기자기한 오솔길, 산상이 평원인 특이한 지형이다. 편안하고 아름다운 길이다. 송사리가 떼를 지어 다니는 실개천이 흐르기도 하고, 층층나무과에 속하는 십자모양의 하얀 산딸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곳도 지난다. 애절한 두견새의 울음소리는 가슴 후벼 파는 설렘으로 다가온다. 그렇게‘직소폭포’에 이른다.
직소폭포, 변산반도의 가장 중심에 해당되는 부분, 푸른 신록 사이로 시냇물이 흐르고 그 시냇물이 떨어지는 곳에 30여 미터의 하얀 물줄기가 떨어지며 폭포와 파란 소를 이루는 곳. 신록과 물줄기가 어우러진 모습이 원시적 환각의 무지개처럼 찬란하다. 폭포의 물줄기 밑 바위위에서 김밥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으며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한다.
산상의 호수를 지나간다. 산과 호수가 어울려 한바탕 초하의 향연을 벌인다. 변산반도의 중심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 월명암까지는 또 새로운 산 하나를 넘어가는 개념이다. 마지막 체력을 쏟아부어야할 때가 온 것이다. 반시간 쯤 오르자 좌측으로 시원한 전망대다. 미끄러움 방지를 위해서 쇠파이프로 얼기설기 울타리를 쳐 놓았다. 천혜의 비경이다. 지나온 산봉우리들이 나당연합군에게 패망하는 조국을 붙들고 통곡하는 백제의 장수들처럼 처연해 보인다.
월명암을 1.2Km남겨둔 지점의 봉우리에 올라선다. 멀리, 아련히‘낙조대’ 밑으로 월명암의 지붕이 보인다. 하얀 눈 속에 고적하게 묻혀있던 겨울 월명암과는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인간의 그 어떠한 화려한 옷보다 고매한 차림으로 갈아입은 자연의 아름다움이 경이롭다. 우거진 나무들은 잘 다듬어 놓은 녹색의 융단처럼 황홀하다. 포근하고 안락한 길이다. 쌓였던 피로가 모두 풀리는듯하다. 산상의 감미로운 산책로, 천상의 길을 걷는 기분도 이 같을지 모르겠다. 월명암은 이렇게 풍요롭고 기쁨으로 우리를 맞이해 준다.
월명암, 변산 제2봉 쌍선봉 아래에서 신라 신문왕 때 부설선사가 창건한 암자. 임진왜란 때부터 소실과 중창을 반복하다 1954년 원경스님이 중건한 것이 오늘의 월명암이다.‘부설전’에 얽힌 애잔한 전설과 함께 망월대에 솟는달, 운해, 낙조가 월명3경으로 알려져 있다.
확 트인 북쪽을 바라본다. 희끗희끗 수많은 암봉들이 꽃송이처럼 찬란하다. 나라 잃은 백제 민중들의 통곡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저 산봉우리 속에는 변산 최고의 봉우리‘의상봉’도 있다. 그 밑으로는 옛날, 패망 백제의 유민으로 태어난 진표율사가 팔다리가 떨어지는 고행 끝에 득도한 불사의방(不思義房)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한국 미륵신앙의 발원지이자 백제부흥군의 최후 저항지가 된 그 신비의 땅‘불사의방’말이다.
남여치매표소까지 2Km의 하산 길은 진득한 내리막이다. 망망대해의 서해안도, 평화롭고 옹기종기한 마을도, 모두가 한 폭의 그림이다. 모두들 지칠 시간이고, 거리지만 피곤한 기색하나 보이지 않는다.
저녁 다섯 시가 되어‘남여치매표소’에 떨어진다. 무려 여섯 시간의 대장정이었다. 내소사앞 주차장에 세워둔 차를 회수하여‘부안’으로 떠난다. 조용하고 따뜻한 부안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기 위해서다.
두 할아버지가 웨이터가 되어 운영하는 한 식당의 한정식은 깊은 맛과 운치가 있다. 하루의 일정을 정리하며 긴 산행의 하산 주를 마시는 일은 중요한 의식이다. 누구하나 낙오되지 않은 산행이었기에 그 무용담 또한 크고 진지하다. 소주 맛이 물맛이라며 사양도 없이 연거푸 잔을 비워댄다. 내일을 걱정하는 사람은 없다.
돌아가야 할 날이 밝았다. 아쉬움과 서글픔이 문제다. 누구도 입을 열려고 하지 않는다. 삶의 터전은 늘 냉혹하기 때문이리라. 하기야 그런 긴장감이 없다면 그 긴 세월을 버텨내기도 어려울 것이다.
오는 길에 88고속도로‘지리산휴게소’에 들른다. 기념탑위에서 바라본 6월의 지리산이 장엄하고 웅걸하다. 다져진 우정이 오래 지속될 수 있도록 말없이 지켜보는 것만 같다.
첫댓글 장엄하게, 웅장하게 때로는 비감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삶의 터전이 늘 냉혹하기에 휴식의 즐거움이 있음을 역설적으로 말씀하시고 싶으신거죠?
멋진 일행과의 재미있는 산행은 언제 읽어도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 옵니다.
역시 교수님의 산행기나 여행기를 읽다보면 내가 마치 동행한 느낌입니다. 너무 섬세하고 정갈합니다. 잃어버린 백제의 혼을 노래하여 주십시요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