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지명밟기운동본부
#역사소년신새날
의정부를 다시 품다. (1) ‘사료를 중심으로 한 의정부 지명유래의 해석’
'의정부'라는 명칭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어떤 역사적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일까?
의정부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알고 싶어 하는 내용이죠.
의정부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성계와 이방원이 만나서 화해한 사건 때문에
그런 이름이 지어졌다고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료를 중심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다릅니다.
태종실록에 보면 태종 2년 12월 8일.
이성계와 이방원이 화합한 곳은 황해도 금천의 금교역으로 명확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야사로 떠도는 이야기 역시 한양 살곳이 다리에서 화합한 것으로 전해진다는 겁니다.
아~. 이렇게 되면
교육의 변방이요, 문화의 변방이요, 경제의 변방이지만
그래도 왕과 연결된 역사가 있는 도시라는 생각에 뼈를 묻어보려고 했는데,
아~. 이렇게 되면 몽땅 나가리가 되는 느낌적 느낌?
'30리를 가서 누원점에 도착했는데 이성 형이 쉬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성 형과 함께 하니 먼 길 떠나는 마음이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십리를 더 가서 의정부점에 도착하였는데 이성 형은 서오랑점으로 바로 가고 나는 역을 찾아 다시 십리를 가서 녹양역에 묵었다. (하략)'
이글은
정조 11년 그러니까 서기 1787년에 함경도 군관으로 부임하러가는 노상추라는 사람의 일기의 내용입니다.
당시의 의정부(義正部)는 지금의 의정부(議政府)와 한문이 다르기는 하지만
이때 처음 의정부라는 지명이 등장한다는 것이 사료를 중심으로 한 향토사학자 홍정덕의 주장입니다.
여기에 힘을 더 실어주는 내용이
1796년(정조 20) 승정원일기에 「楊州 直谷(곧은골)坪[평-들]과 議政府坪으로 달려가 農事을 살폈다」는 기록이 있으니
이성계와 이방원이 의정부에서 화합을 함으로써 의정부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이야기는
시간적으로도, 의미적으로도 완전히 물 건너가는 건데요.
그렇다면
지금 의정부 시내 행복로에 세워진 '이성계' 동상은 어찌해야 하며?
호원동 전좌마을의 '이성계와 이방원의 상봉지' 표석은 어찌해야 한단 말입니까?
그래서 썩은 동아줄이라도 하나 잡아 보려는 마음으로 질문 하나!
정조때 '의정부점'이라는 말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인가?
세상에 그렇게 형성되는 말이 있기나 한 것일까?
그건 아닙니다.
의정부 지명에 보면 발곡초등학교 옆에 본둔야라는 지명이 있고,
그 뒤로 해서 영석고, 306보충대, 솔뫼중이 있었던 옛지명은 둔야면입니다. 좀 더 오래된 지명은 둔배미이고요.
'둔야' '둔배미'란, '주둔한 군대가 경작하는 논배미'로 屯田·屯土는 본래 '軍用 경작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이 지역의 이름을 빌려서 해석해 보면
정부기관 議政府가 경작하는 衙門屯 (아문둔)이 우리 지역에 있었고,
그 '議政府가 경작하는 衙門의 屯을 가리키는 말‘이 줄어 '議政府'라는 지명이 만들어졌다라는 것이죠.
그래서 각 편린들을 모아 정리하여 해석해보면 지금의 의정부시라는 이름은
‘의정부라는 기관에 올릴 곡물을 경작하던 곳’이라는 뜻이다. 이런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아. 이렇게 정리가 되면 의정부를 겨우 60년밖에 안사는 저로써는
우리 아이들에게 의정부가 정말 자부심 넘치는 곳이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은데 막막하기만 합니다. 그려.
저자: 신동명
교육학박사
전국지명밟기운동본부 총재
전 영석고 제4대 총동문회장
의정부 영석고 6회 졸
의정부 경민중 9회졸
의정부 중앙초 55회 졸
63년 의정부 출생
저서: 역사소년 신새날, 토론활동교과서, 행복한 수다가 치매를 예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