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베 Jean Désiré Gustave Courbet (1819-1877)
12. 리얼리즘 미술 사실주의[寫實主義, realism])와 인상파의 태동(모네)
사실주의가 하나의 미학적 용어로 의도적으로 쓰이게 된 것은 19세기 중엽 프랑스에서였습니다.
즉. 자연과 현실생활이 제공하는 모델을 사실 그대로 정확하게 묘사하는 데 바탕을 두는
프랑스의 사실주의 주창자들은 아카데미의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갖고 있는 인위성을 거부하고
예술작품이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려면 동시대 의식이 필요하다는 데 생각을 같이했습다.
그들은 중하류층의 서민들과 평범한 사람들, 보잘것없는 사람들, 꾸밈 없는 사람들의 삶과 모습,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문제와 관습 및 도덕관을 묘사하려고 애썼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그때까지 무시당했던 동시대의 삶과 사회의 모든 측면, 즉 심적인 태도,
물리적 배경, 물질적 조건 등을 재현하는 작업에 진지하게 몰두했습니다.
지금은 보기 힘들지만 제가 중고등학교 다닐때 까지만 해도 왠만한 이발소 혹은 가정집에는 밀레의 이 그림벽에 걸려있었죠.
아마 대한민국이 가장 많이 아는 유럽의 미술작품중 하나일겁니다. 전원적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이 그림이 사실은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하는 고된 노동과 민중의 고단함을 표현하려한다는 의도가 있었슴을 우리는 인식하지 못햇엇습니다.
아마 당시(6~70년대) 노동운동이 한창이던 그때 박통이 이 그림의 진실을 알았다면 분명 전국의 모든 밀레그림은 철거 당햇을
겁니다..그나마 다행이죠,,정권관계자들이 그림에 대해 무지했던것이..ㅎㅎ
Théodore Rousseau The Fisherman, 1848-9. 바르비죵파의 루소 작품
바르비죵파
바르비종파는 1830년대 테오도르 루소, 샤를 프랑수아 도비니, 장 프랑수아 밀레를 비롯한 여러 화가들이
그 지방의 특징적 풍경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프랑스 바르비종에 정착하면서 형성되었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독특한 화풍과 서로 약간씩 다른 관심사를 갖고 있었지만 자연의 웅장하고 위풍당당한 측면보다
소박하고 평범한 측면을 강조하여 묘사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감상적이고 통속적인 그림에서 벗어나 면밀한 관찰을 바탕으로 형태를 충실하게 묘사했습니다.
쿠르베 Jean Désiré Gustave Courbet (1819-1877)
바르비죵파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가입니다.
사실주의 미학을 의식적으로 선언하고 실천한 최초의 화가는 귀스타브 쿠르베 였습니다.
쿠르베는 그의 그림을 통해 이상화에 대해 강력히 반대했고, 평범하고 동시대적인 것에
예술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특히 그는 일상생활상을 솔직하게 묘사하는 것이 진정한 민주적 예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쿠르베가 농부들을 미화시키지 않고 대담하고 거칠게 제시했다는 사실은 당시의 기존미술계에
격렬한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Gustave Courbet. Burial at Ornans. 1849-1850. Oil on canvas. 314 x 663 cm. Musee d'Orsay, Paris.(쿠르베 / 매장)
“나는 천사를 본 일이 없다” (쿠르베)
The Sleepers
1866
Oil on canvas
Musée du Petit Palais, Paris. (쿠르베 / 슬리퍼스)
“민중에게 진정한 회화를 제시하고 그들에게 진실한 역사를 가르칠 목적으로 예술은 갱신되어야 한다...
예술가들은 진실을 그리기 위해 현재 시간으로 열린 시선이 필요하다. 머리가 아니라 눈으로 바라보아야만 한다” (쿠르베)
William Bliss Baker (1859~1884 미국)
Fallen Monarchs (1886)
William-Adolphe Bouguereau(부그로 1825-1905 프랑스)
The Birth of Venus(1879)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아카데미 회화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던 인물 입니다.
신화와 알레고리를 그린 그림들로 크게 인기를 끌었는데, 그의 작품의 특징은 매우 정교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실적 표현과 감상적인 주제 해석입니다.
수십 년 동안 '살롱전'에 정기적으로 작품을 전시했고 한동안 당대의 가장 유명한 프랑스 화가가 되었으며 회화에서 정통성을 주장하며 '살롱전'에서
인상파를 비롯한 실험적인 화가들의 작품을 몰아내는 데 앞장섰급니다.
현대의 비평가들은 부그로를 독창적 시각과 기법상의 대담성을 갖지 못하고 매끈하고 판에 박힌 인간의 모습을 그린 화가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Honoré Daumier(도미에 1808~1879 프랑스)
The Imaginary Malady(상상의 병)
그의 그림은 실랄하고 현실적이며 직설적입니다.
이상화시키지도 않고 꾸미지도 않으며 그저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데 모든 촛점을 맟춥니다.
19세기 프랑스의 정치·사회를 풍자한 시사만화와 드로잉으로 특히 유명합니다.
그의 그림은 그가 생존했을 당시에 거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근대미술에 인상주의 기법을 도입하는 데 이바지 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사실주의라하면 있는 그대로를 사진기와 같이 똑같이 재현하는 기술적인 측면만을 보려하지만
사실주의는 외형적 사실성 만큼 내용의 사실성도 중요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 진실을 드러내는 쟝르가
바로 사실주의 입니다.
Nikolai Ge(1831-1894:러시아)
Golgotha
골고다 또는 갈보리 언덕이라고도 칭하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힌 그곳..19세기형 종교화라고 할수 있습니다.
머리를 뒤로 젖힌채 손으로 뺨을 감싼채 슬퍼하시는 그리스도와는 달리
무언가를 보며 공포에 질려 눈이 동그래진 죄수의 모습,,그가 본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우측의 죄수는 체념한듯 땅을 바라보지만 많이 경직되어 보입니다.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모습,,우리를 대신해 피 흘리신 그분,,아멘
Portrait of Alexei Potechin (니콜라이 게 / 알렉세이 포테신의 초상)
이작품을 그린 작가가 위의 골고다를 그린 같은 작가라면 믿을수 없으시겠죠?
두 그림 모두 같은 작가의 그림입니다. 마치 사진 같은 극사실주의의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Winslow Homer (1836-1910 미국)
The Bridle Path, 1868
사실주의-아카데믹 화풍과
새로운 화풍의 충돌 그리고 인상파의 탄생(마네를 통하여보는)
Édouard Manet (마네 1832~1883 프랑스)
태동하는 19세기 중엽 세계 미술의 중심지는 프랑스 파리였고,
모든 화가들의 꿈은 관전(官展)인 살롱전(le Salon de Paris)에 작품을 출품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2년에 한번씩 열리다 나중에는 매년 열리게 됐던 살롱전은 화가들이 자신을 세상에 알릴 수 있고
그림을 팔 수 있는 몇 안되는 기회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워낙 신청자가 많다보니 출품을 위해서는 심사위원들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했고,
국립 미술 아카데미와 과거의 수상자들로 구성되는 심사위원들은 워낙 보수적이어서 전통을
벗어난 모든 새로운 시도를 배척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네는 '풀밭위의 점심식사'를 내놨다 보기좋게 거절당하고 맙니다.
하지만 나폴레옹 3세는 살롱전 낙선자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그들에게도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게
되고, 1863년에 열린 '낙선자 전시회(le Salon des refuses)'가 그것입니다.
세잔느와 피사로를 비롯한 미래의 인상파 화가들이 이 낙선자 전시회에 참가합니다.
<풀밭위의 점심식사>가 엄청난 스캔들을 일으킨 것도 낙선자 전시회를 통해서이며.
‘새로운 회화수법’으로서의 근대적 표현의 첫 사례는 마네의 작품인 《풀밭위의 점심식사, 1863》,
《올림피아:Olympia, 1863》라고 할수 잇습니다.
The Luncheon on the Grass(1862-1863) 마네 / 풀밭위의 식사
인상파의 대가였던 마네는 이 그림에서 고전적 양식과 사실주의적 기법을 비교적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녹음이 우거진 풀밭 위에 나체의 여인과 반라의 여인, 정장 차림의 남자 2명을 병치시키고 있습니다.
여성을 자연과, 화가인 남성을 문명과 동일시하는 근대의 남성우월사상이 그대로 반영된 작품이라고 하여
페미니즘의 공격대상이 되고 있으며. 파리 인상파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전까지,아니 '올랭피아'가 그려지던 당시에도 누드화에는 신화 속의 인물들이,그것도 이상적인 나체들로 그려져야 했으며,에로틱한 느낌이 물씬물씬 풍겨나야 했다.
그런데 마네는 이런 관습을 거부하고 현실 속에서 실제 만날 수 있는 여성의 벗은 몸을 들이 밀어 누드화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였다.
모델이 창녀임을 당당히 드러내다
하지만 더 큰 소동은 이 여성이 창녀라는 데 있었다. '올랭피아'는 당시 창녀들 사이에 유행하던 이름의 하나였고,벨벳 끈 목걸이 역시 당시 무희나 창녀들이 애용하던 장식이었다.
그 뿐만 아니다. 머리에 커다란 붉은 꽃을 꽂은 것 하며 손으로 음부를 가린 모습에다, 당시 자유분방함과 난교를 시사하는 검은 고양이를 화면 가장자리에 배치해 둔 것을 보면 화가는
그림의 여인이 창녀라는 것을 굳이 의도적으로 강조한 듯 하다.
다시 그림을 보자. 흑인 하녀가 고객이 보낸 듯한 꽃다발을 들고 올랭피아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핀다.
그녀는 머리를 반듯하게 세우고선 차갑고 도도한 시선으로 화면 밖의 방문자인 자신의 고객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 그 고객은 또한 당시 파리의 귀족들과 부유한 시민들이기도 했다.
어쩜 저렇게 냉소적인 시선을
그들은 '올랭피아'에 이중으로 불쾌하였고 분노하였다. 먼저 아무리 누드라 할지라도 자신들과는 계층이 현격한 창녀의 있는 그대로의 벗은 몸을 감상한다는 건 어딘가 찜찜하고 불편하였다.
게다가 그녀의 눈초리는 다소곳하거나 애교스럽기는커녕 자신들과의 대등함을 넘어 오히려 위압적이고 냉소적이기까지 하니 화가 치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들을 거북하게 하고 당혹스럽게 만든 건 그림이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되돌아보게끔 하며, 매춘의 의미가 무엇인지 직시하게 한 데 있었다.
1860년대 파리에는 인구 100만 명당 3만 5천 명 가량의 매춘부가 등록되어 있었다. 당시 프랑스에는 공창제도가 있어 이 정도의 파악이 어느 정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파리에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여러 등급의 매춘부들이 활동하고 있었고,그 가운데 상당수는 등록이 되지 않아 전체 숫자는 상당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당연히 매춘에 대한 남성들의 수요가 그만큼 많았다는 것이고,매춘이 도시의 일상적인 사건이었음을 뜻한다.
마네는 이 공공연한 일상의 비밀을 '올랭피아'를 통해 담담하고 객관적으로 보여주며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폭로하였다.
결국 파리의 시민들도 자신이 '올랭피아'의 관람자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매춘산업의 주요 고객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불쾌감 속에서도 되새기지 않을 수 없었다.
끝으로 올랭피아의 팔찌에 달려 있는 조그만 둥근 부착물은 로켓(locket)이다. 이것은 그녀가 사랑하고 있는 다른 파트너가 있음을 의미한다.
바꾸어 말하면 관람자이자 고객인 남성은 그녀에게 돈을 지불하고 다가갈 것이다. 그리고 올랭피아는 애써 억지 미소를 지을지 모르겠으나 이내 표정은 일그러지고 괴로워할 것이다.
사실 그녀와 고객 사이에 성과 돈의 매매관계 외에 개입할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그러니 올랭피아의 저 냉소적이고 쏘는 듯한 시선을 어찌 비난할 수 있겠는가?
부산일보 -배철영 동의대교수 님 글에서 발췌
Jean-François Millet(1814-1875)
The Angelus, 1857-1859 (밀레 / 만종)
The Sower, 1850
Nikolai Yaroshenko(1846-1898)
The Prisoner, 1878
이러한 사실주의적이며 기존의 가치에 대한 반항적 시각은 이후 20세기 초반 사회주의와도
이루 결합하여 미국의 대공황기의 비참한 현실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사회사실주의로 발전 하기도 하고
독일에서는 그들 특유의 냉철하고 냉소적인 이성으로 신즉물주의 화가들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하지만 소련에서 맹렬하게 일어난 마르크스주의 미학과 결합된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삶을 충실하게 객관적으로 묘사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사실주의와 거의 관계가 없습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정직함'이란 국가의 이데올로기 및 선전의 필요성과 일치해야 했고,
용감하고 강인한 노동자와 기술자들의 초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대개 대상을 자연주의적으로 이상화하는
자연주의적 기법을 이용했습니다. 이런 그림에 묘사된 노동자와 기술자들은 하나같이 영웅적인 적극성을
보여주는 대신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부족하다. 즉 사실주의 기법을 이용한 자연주의 또는 이상주의적인
그림이라고 할수 잇겠죠..
이러한 영향으로 지금도 중국이나 북한등 공산권 국가에서는 리얼리즘한 그림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사실주의는 고대 그리이스나 로마의 예술에서도 쉽게 찿아 볼수 있습니다.
하지만 19세기의 사실주의가 이전과 다른 분명한 성질이라면 외형적인 복사나 아름다운 이상형의 추구가 아닌
아닌 현실과 진실에 뿌리내리고 있었다는 겁니다.
왜 사실주의미술이 일어났는가?
여러가지 학설이 있지만 제가 생각하는 원인 몇가지만 간단히 적어보면
1) 예술의 소유계층의 확대
이전에는 예술작품은 교회가 무지한 민중들에게 성서를 공부시키거나 교회의 권위를 세우려는 목적이거나
왕또는 귀족들이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한 한마디로 특정계층의 소유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서서히 교권의
세력이 약화되고(교황권위의 쇠퇴와 종교개혁등으로:신교의 등장) 곳곳에서 왕정이 무너지고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의 유럽장악으로인해 퍼진 평등정신의 확대, 그리고 부르조아계급의 경제력 상승으로 인한 미술품
구매력의 확대등으로 인해 화가들은 더이상 교회나 귀족들에게만 메이지 않을수 잇었습니다.
또한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자각으로 인한 의식의 변화등도 이시기 미술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수 잇습니다.
2) 과학 기술의 발달
아메리카 대륙 발견으로 인한 지동설의 확인과 17세기부터 급격히 발달한 인류 과학의 발달
그리고 증기기돤의 발명으로 인한 산업구조의 대 변화 특히 사진기의 발명(이미 1826년에 찍은 사진이 확인되었습니다)
등은 리얼리즘미술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며 이후 많은 화가드리 사진을 이용한 작업을 하게 됩니다.
3)예술의 반작용
계속 반복되고 앞으로도 반복되어 나올 말이지만 인류의 역사와 문화는 작용과 반작용의 반복 과정입니다.
철학을 바탕으로한 이상주의 국가였던 그리이스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인 로마인들에게 정복 당하고
그러한 로마인들도 자기 내부의 나태와 경직성때문에 스스로 무너졌듯이
로마시대의 화려한 미술이 그후 중세시기의 경직되고 엄격한 미술에 수백년간 빛을 잃었고 그어둠을 뚫고
화려한 르네상스미술이 탄생했듯이 사실주의 미술도 이전의 화려하고 섬세했던 바로크와 로코코미술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온것으로 해석 하셔야 합니다.
이러한 반작용의 법칙은 이후 계속 반복적으로 그리고 더욱 짧은 주기로 나타나며
더욱 다양하고 복잡한 미술사조를 탄생시킵니다. 이런걸 보면 사람들은 아마도 사람은 개구리인가 봅니다...청개구리,ㅋㅋ
4)인간본연의 사실추구 성향
원시동굴 벽화-특히 라스코 동굴-를 보면 사람은 분명 사물을 그대로 재현해 보려는 욕구가
기본심성에 깊이 심어져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어찌보면 사람은 추상성보다는 이러한 사실성에 접근해 잇을때 더욱 편안하고 안전하다고 느끼는듯 합니다.
이렇게 고전주의를 살펴 보앗습니다.
그리고 인상주의가 당시의 아카데믹한 화단의 반작용으로 인해 태동되는 사건을 모네를 통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예술의 작용과 반작용..기득권 세력과 이에 반발하는 세로운 세력과의
충돌과 합의를 통해 새롭게 만들어지는 또다른 예술형태.
우리는 드디어 인상주의를 향해 항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ㄱㄱ~~
첫댓글 그림밑에 작가명과 제목부분에 마우스를 대보시면 클릭할수잇는 부분이 잇습니다..그부분을 클릭하시면 그 작가에 대한 보다 상세한 내용과 다른 여러가지 그림들을 보실수 있습니다(문제는 온통 영어라는것,,ㅎㅎ)
저는 식견이 짧아 그림하면 사실주의와 거기에 낭만주의가 살짝 결합된 그림들이 좋대요. 인상파 그림까진 좋았는데 이제 피카소가 등장하면서부터 실력이 딸리기 시작하지요.그리고 밀레의 만종에서 바구니에 있는게 아기 시체라는 설도 있대요. 제가 보기엔 감자바구니 같은데요. 주위에도 감자 같은게 널려 있구요. 중고등시절엔 꾸르베 작품이 무척 야하다는 느낌과 혼자보다가도 얼굴이 빨개진 기억이 나네요. 배경지식이 없어서 제대로 감상을 못했나봐요. 미술 선생님도 서울대 출신인데 자기 좋아하는 화가 그림만 열심히 해주시곤 그냥 "그려"하고 넘어가신 기억이 나네요.부모 잘 만났으면 나도 좀 그릴텐데.......
말목 부상으로 걷기가 불편하다보니, 오히려 짬이 조금 나서 모처럼 둘러봤어요. 내가 있는 사무실 컴퓨터 환경은 외부로 정보가 노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때문에 카페는 아예 들어오지 못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내 경우에는 그사모의 진도가 너무 빠르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나마 주말마저 이리저리 쫓아다니다 보면 밤 늦게 잠시 카페에 들어오는데, 다른 카페도 다녀야 하기 때문에 그사모에서 여유있게 즐길 수가 없네요. ~코에게는 미안하지만 내 여건이 이렇답니다. *^^*
위대한 걸작에 대한 동경을 막연하게나마 품고 있던 이들이 막상 실물과 일대일로 대면하게 되면 순간적으로 강렬한 정신적 충격에 사로잡히는현상을 스탕달신드롬 이라한답니다 이들은 감성적이고 예민하고 감정에 충실한 사람들,,,또하나 미술의 고전 걸작들,특히 인체를 그린 명화,쿠르베 부그로 루벤스 의 살집이풍만한 여인들의 누드나 쎄미누드 상태로 근육질의 남성들과 어우러진 모습의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에로시티즘을 발산하는 그림들을 보며 느끼는 충동을 루벤스신드롬이라한답니다 ,이런 느낌은 작품의 양식이나 사조, 창작 배경을 아느냐 모르느냐 하고는 별개의 문제로 감상은 주관적인 감정의 운동이기 때문입니다,,,
상사병이 무섭다고 사랑하지 말라고 할수 없는것처럼 스탕달 신드롬이나 루벤스 신드롬이 무섭다고 미술감상을 말라 할수는 없는일,,사람이든 예술작품이든 대상에 들어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거기에 매혹당하는게 우리의 운명이며 그운명으로부터 말할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오늘 한겨레신문 이주헌님의 글중에서 인용 )
며칠을 걸러 몇번을 보아도 그림들이 주는 느낌은 그날 그날 다르게 느껴지기도 해요~밀레나 마네의 그림은 친숙하여 정감이 더 하고 쿠르베 그림에서 여인들의 모습에서 풍기는 부드러움은 평화가 느껴지기도 해요~여러 화가의 나신들 또한 수치스럽기 보다 자연스러운 여인의 미가 신비감 마저 주네요~니콜라이 게라는 화가는 처음 듣는데 골고타의 예수님의 얼굴에서 정말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신 수난의 비참함이 그대로 묻어나서 가슴이 철렁 내려 앉기도 하는군요~이제 점차로 그림들이 낯설지가 않아요~흥미로와지는데 너무 많아서 대충 보는 그림들이 아까와요~수고하신만큼 우리가 감상을 제대로 못해서~탱큐~^^
사실주의까지 흘러온 작품들을 보면 신으로부터의 탈출 같아요. 감히 내놓지 못했던 인간 내면에 감춰진 관능적인 감정을 적나라하게 다 묘사하여 가리워졌던 모든 걸 보여주니까요. 루벤스 신드롬에 걸릴 나이었음 좋겠네요. 나이를 먹어가며 자꾸 무디어져 감동이 자꾸 적어짐도 슬프게 하는 일중 하나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