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 이성계는 군사 쿠테타를 하여 조선을 건국하였다. 그리하여 쿠테타에 관한 글은 집권후 위험서적으로 간주하여 모조리 말살 시키고 말았는데 조선 철종때에 이르러 하나의 비서가 발견되어 당시 학계, 정계에 큰 충격을 주게된 사건이 발생되었다. 그것은 고려말의 충신이자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의 스승인 원천석이 지은 그의 스승 불훤재 신현의 전기 "화해사전" 때문이었다.
직필로 이름난 원천석의 글이기에 조선 왕조의 신하들이 위험 서적시 했고, 그보다 이 책이 충격을 준 것은 한국 이학계의 정설이 되어 온 동방 이학의 할아버지 포은 정몽주가 신현을 스승으로 부른 대목인데 정몽주가 신현의 문하생이면 정몽주의 위대한 유교적 지위가 떨어질뿐만 아니라 그의 무사문설(스승없이 독학하여 뛰어난 문장가가 됨)이 뒤집히는 결과가 되므로, 정통적 유종과 정씨 가문에서는 화해사전은 후인의 조작이라고 시위를 벌였다.
대단히 뛰어난 유학자의 후손들은 그들의 자랑스러운 선조의 무사문설을 주장함으로써 그 위대성을 돋보이게 하려는 경향이 짙었으며 그것은 하나의 전통이 되어 버린지 오래다. 우복 정경세의 훈손들은 서애 유성룡이 정경세의 사문이였다는 것을 완전히 부정하였고 여헌 장현광의 후손들은 여헌이 한강 정구의 문하가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 그 예이다.
그리하여 신현의 후손인 경상 관찰사 신석희가 "화해사전"에서 왕실에 거슬리는 부분을 삭제하여 만든 "불훤재실기"를 출판하려고 온잦 애를 다 섰으나 정계와 학계 그리고 정씨 가문의 육박시위 등 반대가 심해 뜻을 못이루었고 양반계급을 비판했던 문호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가 정승으로 있을때 이책을 출판하려 하였으나 또 실패하고 말았다.
철종 연간에 각 지방의 서원과 향교가 서로 호응하여 신현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추모행사로 사당을 건립하려는 움직임이 무르익었으나 그 역시 정치적 압력으로 저지당하고 말았다.
신씨 가문에서는 관권을 업고 덤벼드는 유림들로 말미암아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 이것은 이 설에 대한 보수적 반발이라기 보다 정치나 가문의 명예 때문에 진실이 말살되는 한 예라 할 수 있다.
화해사전 서문에서 원천석은 후세 사람들이 단지 신현의 이름이나 벼슬만을 알고 그의 행실이나 학문을 모르기 마련이니 이 책을 지어 군신 상호간에 고루 알리는 것이 제자의 임무로 안다고 말하고서, 스승이 상용하던 이학문답등 이학에 관계된 조항을 많이 수록하였다. (한국인의 민속문학 (주)신원문화사 이규태 지음 참조함)
한때 문정공 신현을 중시조로 하여 영해신씨로 지낸 평산신씨 판사공파(신득청)의 후손인 우리들은 조선초기 고려 구신의 소탕작전으로 멸문의 위기에 있을 때 제자이신 운곡 원천석님께서 멀리 창수 인량 까지 오셔서 판사공의 손자 신영석을 업고 고향인 원주로 피신시켜 멸문의 위기에서 구하고 지금은 위기의 시대니 관향을 영해로 고쳐 살다가 다시 좋은 세상이 오면 그 때 평산으로 다시 나오라고 하심을 모두 알고 있다.
(그리하여 1960년대 관향을 영해에서 원적인 평산신씨 판사공파로 돌아감. 일부 연락이 되지 않은 사람들은 아직도 영해신씨로 남아있음 -약500세대)
판사공 파조께서 고려가 망하였음을 아시고 두 임금을 섬길수 없다 하시고 동해바다에 뛰어드신지 오래 되었건만, 조상의 위대한 업적, 그리고 문정공의 제자가 쓰신 화해사전의 진실이 말살되고 과거의 영해신씨란 그 굴레가 아직도 가시지 않는구나.
역사는 강한자의 기록만이 역사가되고 약한자의 기록은 야설로 되고 만다. 고려말의 역사가 조선개국의 정당성을 만들기 위하여 여러번 수정되어 기록되듯이 현세에 광주민주화운동이 광주폭동으로 기록 되지 않았던가?.
우리 평산신씨 판사공파 후손들은 강해져야 한다. 그리고 훌륭한 학자, 위대한 정치가,
민주사회의 올바른 인재를 많이 배출하여 역사의 숙제를 우리가 먼저 풀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