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덤 |
저 친구는 20사단에 있다 광주로 출동했었는데 이런 말을 하더군요. 간첩은 실제적으로 있었다. 잡고보니 조그마한 미니권총을 음부엔가 어디엔가 감춰뒀었다고 한다. 이후에 이게 진실이 아니단건 알았지만 그런 유언비어가 군 내에도 많이 돌았던 것 같습니다. 누가, 왜, 그런 유언비어를 퍼뜨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그 친구 이런 얘기도 하더군요. 지나가던 사람들을 잡아다가 두들겨 패면 때론 잘못될때도 있어서 실신하거나 그러면 일처리가 복잡해지니까 얼굴에 깜장 칠해서 두건 하나씌워놓고 쏴버리면 그만이었다고 하더군요. 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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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덤 |
그리고 폭도들도 총을 가졌는데 군인들이 지나가다 집에서 창문으로 사람들이 밖의 군인들을 훔쳐보다 고개를 조금 내밀었을 때 폭돈줄 알고 쏴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나중에 넝마주의나 거렁뱅이 등이 남아있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실제적으로는 훨씬 더 죽었다는 거죠! 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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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
위스덤님, 20사단은 20일에 광주에 진입하여 그 다음날 퇴각하였습니다.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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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덤 |
또 다른 저의 동료는 공수부대에 있다 낙하 했는데 괴로워 하면서 이런 얘기들을 하더군요. 다 술을 멕이기도 했다. 내 동료들은 적으로 몇 사람 이상씩은 죽였다. 그런데 난 참 감사하는게 있다....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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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
위스덤님, 혹시 20사단을 공수부대로 착각하신 것은 아니신지.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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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덤 |
사실관계는 잘 모르겠지만 양평에 있다 파견된 그 친구는 하루만 있다 퇴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당시에 하사로 있었는데 지금도 살아 있으니...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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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bat |
전라전라 광주광주 5.18 5.18 슨상슨상......때만되면 나오는.....짜증나니 그만합시다.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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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덤 |
공수부대를 얘기하는 건 또 다른 친구입니다.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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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
위스덤님,20사단은 하루만에 퇴각하였고, 21일 오후부터 27일 새벽 사이 군인은 단 한 명도 광주에 없었습니다.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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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덤 |
근데 참 역사학도님 질기십니다. 지금와서 왜 이런 글들을 계속해서 올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희 고모도 광주에 살고 계신데 당시의 상황을 아주 생생하게 말씀해 주시더군요. 무고한 옆집 사람도 잡혀 죽었구요. 우리나라 군대라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더군요. 나중에 국민학생들 가르치기가 가장 곤혹스러웠다고 하더군요. 참고로 저희 고모부는 초등학교 교사입니다. 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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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
위스덤님, 공수부대에는 실탄이 지급된 사실이 없습니다. 만일 님이 정직하시다면 님의 친구 부대 소속을 말해 보세요. 광주사태 당시 광주에서 공수부대에는 실탄이 지급된 사실이 없습니다.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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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
무고한 옆집 사람도 잡혀 죽었다면 증언을 해주시면 되겠군요. 사건에는 장소와 시간이 있습니다. 위스덤님, 언제인가요?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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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덤 |
저는 사실관계는 잘 모르겠습니다. 20사단에 있다 광주에 파견됐던 친구는 지금 교회의 장로로 있고 아주 절친한 친구입니다. 저도 당시에 군에 있었는데 우리는 얼마후 곧바로 전역했고 당시에 그 친구는 교회도 다니지 않았는데 그때의 상황들을 자세하게 얘기하더군요. 그리고 공수부대원이었던 친구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마 목사로 목회를 하고 있을겁니다. 그친구의 그늘진 얼굴과 눈빛이 아직도 기억이 나네요. 본인들만 동의를 한다면 밝히지 못할 이유도 없습니다만 지나간 상처 더 들춰내서 뭐하겠습니까? 그분들은 그런 일 때문에 늘 속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요.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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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브이 |
역사학도님이나 위스덤님, 유언비어 인지는 모르겠으나, 광주사태 당시 총상으로 인한 사망자를 보면, M-16 에 맞아서 죽은 사람은 별로 안되고, 칼빈 소총에 맞아 사망한 사람이 더 많다던데,, 혹시 진실을 아시나요?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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蛙弄슨상 |
과거사도 파헤치는 마당에 유독 광주사태만을 금기시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이젠 역사의 한부분으로 생각할 때도 되었습니다. 광주사태라고 했다고 뭐라고 하실 분이 있겠지만 그건 개인적 주관에 의한 것입니다.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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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 |
http://study21.org/518/video/515.htm 의 자료중 5월 19일 버스의 압사 사진이라고 올리 있는 것을 보니 ㅠㅠ MBC가 19일 방화???? 제가 보기엔 적당한 짜집기에 카더라군요. 적당히 합시다. 국회청문회도 하고 이제까지 많은 사료들이 나오고 있지만 이런식의 얘기는 들어본적도 없군요. 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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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덤 |
저는 총으로 쏴 죽였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가 그 친구를 만난게 84-5년 정도였던 것 같은데 좀 과장해서 얘기했는지는 모르겠지만(그 친구는 과장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데) 적어도 대여섯명 이상씩은 죽였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그 친구는 많이 괴로워 했었습니다. 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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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
네, M-16 사망자는 총 45명입니다. 따라서 군인 총에 죽은 시민군 수는 최대로 45명입니다. 그런데, 시민군도 M-16 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시민군 오발 사고를 빼면 그 수는 줄어듭니다. 더구나, 시민군이 6차례 교도소 습격하여 생긴 사망자가 군인총에 의한 사망자 전부입니다. 그리고, 5월 27일 도청진압 때 역시 시민군이 선제 사격했었지요.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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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 |
대선만 되면 나오니 아예 평소에 얘기 하시죠. 그렇게 얘기하시는것에 대해 자신하신다면 5.18 민주항쟁 희생자들을 위한 보상법이나 관련 규정들은 위법이니 헌법 소원을 하시던가 여기와서 뭐 하자는 것인지? 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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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브이 |
위스덤님, 저도 친구들로부터 ~카더라 하는 얘기는 질리게 들었읍니다. 자기 개머리판에 아구통 날라간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얘기 등등이요,,,, 전 그냥 웃고 말았읍니다. 그때 광주사태에 조금이라도 관계된 군인이었다면 한마디로 뻥에 뻥을 보태구, 이사람 한테 들은거, 저사람한테 들은것을 짬뽕해서 자기가 겪은거 마냥 말하는 사람들 많이 봤기 때문입니다.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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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
하마님, 518과 어용방송이 광주학살이라며 돌려왔던 동영상입니다. 그리고, MBC가 방화는 19~20일 양일간 있었습니다.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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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브이 |
역사학도님, 그럼 카빈에 의한 사망자 숫자도 있읍니까?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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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덤 |
당시에 진압군들은 남자들만 몇명씩 걸러가는게 보이면 무조건 쫓아가고 두들겨패고 그랬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도망다니다가 민가로도 도망을 치고 그랬는데 그러면 집집을 수색하기도 하고... 그래서 건장한 남자가 집에 꼭꼭 숨어서 돌아다니지도 못했다고 하더군요. 역사학도님은 매면 5월이 되면 광주의 어물전에 문어나 낙지가 남아나지 않았다는 얘기를 흘려보내서는 안됩니다. 저는 여러가지 정황을 봤을 때 진실은 보다 더 참혹하고 무자비했을거라 생각합니다. 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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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덤 |
카더라일 수도 있고 뻥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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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
위스덤님, 5월 19일 폭도들이 공수부대원 머리를 으깨어 죽이고, 5월 20일 밥차를 뒤엎은데 이어 공수부대원을 차로 깔아 죽였지요?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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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 |
역사학도님 적당히 합시다 그렇게 자신이 있으면 헌번 소원 하세요. 사실이 아닌 근거로 관련법을 만들었으면 문제 있는 것 아닙니까? 여기서 이러시지 마시고요. 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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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브이 |
역사학도님이 거짓말 한다고 생각치 않습니다. 다만, 하두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전 걸러서 듣는다는 말씀을 드린겁니다. 그거 일일이 다 믿자고 하면, 광주시민 하나도 남아나지 말았어야 하거든요.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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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브이 |
정정합니다. 역사학도님이 아니구,, 위스덤님,,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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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덤 |
그만하죠. 그친구들은 그런 얘기를 자랑삼아 하는게 아니라 많이 괴로워 하고 있죠. 괴로워하는 그들의 모습이 저는 가식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에게 그렇게 뻥을 칠 일도 없구요. 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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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oren |
이미 군에 의한 폭력은 5월 18일날 발생했습니다. 최초 사망자는 5월 18일 군에 의해 구타를 당하고 5월 19일 사망합니다. 역사학도님의 마치 광주항쟁이 5월 19일 부터 시작한 것처럼 생각하시는 것 같네요. 광주사람들은 이미 5월 18일날 군인들이 자신들의 적이라는 것을 알아버렸습니다. 그 이후의 일들이 계엄군에 의해서 발생한 최초의 사망자를 바꾸지는 못합니다.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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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브이 |
위스덤님 기분 상하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전 제 눈으로 본거 이외에는 잘 믿지 않는 성격이라,,, 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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蛙弄슨상 |
당사자들이 생존해 있는 상황에서 거짓은 통하지않습니다. 물론 무고한 죽임들 당한 사람들도 많겠지만 5.18에 대한 토론조차 막는 것은 뭔가 치부가 있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몇십년 동안 수많은 자료들을 접했던 국민 개개인이 판단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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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
qoren님 그것이 아니라 시위대가 5월 18일 오후 2시에 기동경찰 45명을 인질로 납치하자 광주시 당국이 광주향토사단에 순경 구조를 요청하여 순경구조가 오후 4시경에 시작된 것입니다. 제가 지금 외출하니 http://blog.daum.net/sionvoice 에서 계속 토론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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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
아직도 지나간 문제를 놓고,,, 답답하네요. 5.18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라는 사실은 이나라에 삼척동자도 알만한 사실인데 아직도 그걸가지고 딴지 거는 사람들이 있으니,,, 참~~~ 그리고 위에 '월간조선' 은 조갑제씨와 함께 아직도 당시의 군사정권을 옹호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언론인으로 보기 않좋네요. 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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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삼이 |
아직도 카더라 통신이 통할정도로 국민들이 멍청하다고 생각하는것 같네요. 속아도 한번속지 두번 속지는 않을것입니다. 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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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
전두환과 김대중간의 군사분쟁일 뿐이죠.이긴사람이 정의죠.전두환이 집권했으니 광주 폭동이 돼었다가 김대중이 집권해서 광주 민주화 운동이 돼었죠.앞으로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지만 이대로 굳어질 가능성이 크죠.일반인들은 거의 잊어가는 분위기 이고 광주 시민들도 이대로 끝나는게 이익이니 그냥 끝내자는 분위기...근데 개념없이 5.18 끄집어 내서 정치적으로 이슈화 하려는 사람들 때문에 오히려 역효과 나고 있는 듯 합니다.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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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
광주사태 별 관심 없었습니다만 대학들어가 학생회 주관의 OT가서 제일먼저 상영해 주는게 우선 군대의 인권문제 였습니다.영창들어가 개 취급받는 군인들 모습보고 그 당시 어린 맘에 두려움에 떨었죠.그 다음으로 보여주는게 그런식으로 인권유린을 당해 정서가 파괴된 군인들이 무차별로 광주시민을 학살하는 영화 였습니다.어린맘에 분노가 치솟죠.다 믿게 돼더군요.근데 막상 군대 가보니 다르네요.군도 사람사는 곳이고 재밌는 일도 많고 보람있는 일도 많았습니다.사고쳐서 영창도 가봤습니다만 군생활 늘어나는거 빼고는 밥도 맛있고 자신을 돌아볼 시간도 갖고 헌병들하고 친해지고 좋았습니다.다 개뻥이였던 것이죠.배신감 느껴졌습니다.그들이 뭐라 떠들든 그냥 피식 할 뿐이죠.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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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oren |
[역사학도님] 왜 기동경찰 이야기를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계엄군이 이미 17일 밤 12시 부터 광주에 투입되어서 전남대와 조선대에 있던 학생들을 체포하고 구타하기 시작했는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요~? 그리고 최초의 계엄군과 학생들의 충돌은 오전 10시경 전남대 정문에서의 투석전입니다. 역사학도님의 말씀은 마치 5.18 최초의 발발이 시위대에 의해서 기동경찰이 인질로 납치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 처럼 들리는군요. 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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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oren |
[2020님] 물론 군대도 사람 사는 곳이기 때문에 좋을때도 있겠죠. 하지만 야구방망이, 철제의자에 맞고 자그마한 실수에도 수시로 집합당해서 구타를 당하기도 했던 곳임에는 분명합니다.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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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구 |
광주에서 피해를 당한 사람들의 보상이 국가 전상자들의 보상과 형평성에서 문제가 되지 않아 생각해 봅니다. 광주가 현장이니 만큼 광주사람들의 피해가 막심했겠지요. 그런데, 그런 조사를 새로운 사실이 나타나면 해도 되는것 인데, 지금 막는다고 해도 언젠가는 다시 할수 있겠지요. 그럴때 새로운 사실이 나타난다면, 조사를 막은측이 어느쪽이 되었건 망가지는건 사실이지요. 아픈 역사를 어루만져질 사람이 이렇게 없다니 우리의 비극입니다.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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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
야구방망이 철제의자는 고등학교때 더 심하게 경험했습니다.거친 남학교라서요.그래도 뒷끝없고 화끈한 선생님들이라 싫진 않았죠.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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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수라. |
전지전능하신 위대한 영도자.. 위대한 영도자 앞에서 위대한 국민이 되게 해주신 위대한 여정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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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oren |
[2020님] 성격이 화끈하신듯~~^-^;; 사실 지나고 나면 그냥 쉽게 이야기가 되는 것 같더라구요. 고참한테 맞아서 이빨 두개 나가고 그랬습니다만 지금은 그냥 옛이야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고참한테 맞아서 턱뼈가 나간 제 후임도 그립구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다시 군대 가라고 하면 절대 싫습니다. 아직도 다시 군대에 재입대하는 꿈을 꾸곤 하지요..T^T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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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조선 |
아직도 이런주장을 하시는분이있다니... 자제분한테 어떻게 이런말을 할수있는지 궁금하군요... `어거지거짓말도 오래하면 통한다` <---이런거알려주시는겁니까???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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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수라. |
위대한 영도자 전두환 시대로 돌아가시려거든 오늘날 북한 김정일 체제로 가면 될것같네요.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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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면? |
역사학도님 지금 하시거자 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참으로 분열주의적입니다. 괜한 이야기거리 만들려 한다면, 그것은 군인이든 민간인이든 돌아가신 영령들에게 참으로 못할 짓 하시는 거구요, 아울러 전두환정권을 정당화 하자는 겁니까? 무엇입니까? 광주항쟁 파헤칠대로 파헤친 것이구요, 역사학도님 보다 더 많은 당사자들의 증언과 수사에 의해 정리된 내용입니다. 그 중에는 군 측에 유리할지, 불리할지, 민간에 유리할지, 불리할지 알수 없는 덜 파헤쳐진 부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유가 어떠하든 결론은 같습니다.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렇게 군이 아니면 전두환 정권이 억울한게 있다고, 역사학도님이 그리 잘아신다면, 하마님 말씀대로 법적조처를 행동으로 하십시오.. 이런 곳에서 또 분열획책하지 마시구요. 이건 아닙니다. 흥미위주의 이야기거리 만들려 하였다면, 그것은 더더욱 나쁜 행위입니다. 정말 화납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시는지,, 대책없이 악플다는 철부지 어린애도 아니실테고..답답하네요..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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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면? |
이글 추천하는 분들은 또? 어떤 분들인지.... 일해공원 설립지지자들이신가? 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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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제트 |
이글도 좀 있으면 운영자에 의해 삭제 될 것인데. 계속 삭제만 해서 될 일인지... 삭제가 계속 되는 글을 올린다면 제제를 해야 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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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
qoren님이 휴교령과 충정작전을 구분하지 못하시는군요. 휴교령은 전국 대학교에서 동시에 시행되었으며, 8명 1조씩 전국의 대학교에 공수부대원들이 파견되었습니다. 충정작전은 시위대가 오후 2시 기동경찰 45명을 납치하였기 때문에 광주시 당국의 요청으로 광주향토사단 사단장이 실시했던 것입니다.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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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oren |
[역사학도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광주를 향한 7공수여단 33대와 35대대는 이날 밤 12시를 전후해 전남대와 조선대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특전사병력을 군명령계통상 배속받은 31사단전투상보를 그대로 옮겨보자 "5월 18일 02시 26분 7공수 33 및 35대대 도착과 동시 96연대재배속 (충정명령 제 1호) " 학교점령 33대대 전남대 장교 38명 사병 2백 94명 33대대 1중대 등등 학교 체류자 체포 전남대 69명 조선대 43명 31사단 96연대는 사단잠정부대에 배속받아 호남신대 서원보건전문대 동신전문대 대건신대 서강전문대 성인경상전문대 기독간전 송원전문 대등 점령. 휴교령이 내려지고 공수부대가 투입된 것이 충정작전입니다.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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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
96연대가 31사 예하 부대라는 것 아시지요? 31사는 김대중의 사람, 광주 사람 정웅 소장이 지휘하는 광주향토사단이라는 사실 아시지요?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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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oren |
[역사학도님] 말씀 하시고자 하는 의도를 알수 있게 정확하게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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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
qoren님, 문교부와 내무부의 요청으로 계엄사가 휴교령 업무를 지원하였을 때 휴교령 집행을 위해 동원되는 공수부대원들을 어디서 재워라, 어디서 배식하라 지시하지 않습니다. 전국 각 지역 지휘관들이 자기 부하들 숙식과 배식 장소 정하는 것은 지역 사령관 재량이었습니다. 전남대와 조선대 운동장을 임시 막사로 정한 것은 광주사람들이 결정한 일이지 계엄사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는 말입니다.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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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oren |
[역사학도님] 그리고 위에서 말씀하셨던 경찰 40여명을 시위대가 납치한 것과 관련해서 정확한 내용이 기억나지 않아서 말씀을 안드렸었느데요... 아래의 내용을 한번 보시도록 하시죠~
18일 시위양상은 오후 4시 7공수의 금남로 시위진압시기를 전후해 파출소 등 공공기관에 대한 방화와 투석, 화염병의 등장, 경찰력이 시위대에 밀리 는등 적극적인 양상으로 변해갔다. 全斗煥 물러가라 金大中 석방하라는 정치구호가 시민들의 입에서도 자연스럽게 나오기 시작했다.
금남로에서의 시위가 일진일퇴의 공방을 거듭하자 일부 시민과 학생들은 수백명씩 무리를 지어 태평극장과 光州공원을 중심으로한 光州천일대, 통행 인이 많은 공용터미널일대, 동명동.지산동등 주택가 일대에서 산발적인 시 위를 계속했다. 시민들이 가세한 시위는 서울의 봄 당시의 대학생들만의 시 위와는 달랐다.
오후 4시40분 시위대 3백여명이 지산동파출소에 투석한 뒤 방화하고(전교 사 작전일지), 오후 5시에는 전경 40여명이 시위대에 붙들리기도 했다. 경 찰관이 시위대에 붙들린 것은 光州항쟁 기간동안 이때가 처음이다.
시위대는 전경을 붙잡아두고 경찰버스에 불을 지르는등 기세를 올렸다. 경찰력이 시위대에 밀리기 시작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를 전후해 동명동.지산동. 산수동파출소가 잇따라 피습당하고, 흥분한 시민들은 光州시장 관사에도 돌 을 던졌다. 시민들의 분노가 어울린 적극적인 공세가 시작된 셈이다. 당시 全南大 총학생회 홍보부차장이었던 李광호씨(당시 21세)의 증언.
농장다리쪽에서 경찰차를 포위한 시위대가 40여명의 전경을 인질로 잡았다. 우리는 경찰의 허리끈, 방석모, 곤봉등을 빼앗은후 그들을 앞세우고 약1km 가량 떨어진 장동로터리로 갔다.
이들을 넘겨주고 대신 연행학생들을 석방시켜 달라고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장동로터리에 도착했을때 공수들이 곳곳에 무리지어 있었다. 우리제의에는 대꾸도 않고 곤봉을 휘두르 며 진압에 나섰다. 도망치기에 급급했던 우리는 그때 경찰인질을 놓치고 말 았다 (한국현대사 사료연구소편, 光州5월민중항쟁사료전집에서 발췌)
혹시 광주시의 요청으로 광주향토사단이 투입되었다는 구체적인 근거가 있으시면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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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oren |
[역사학도님] 그러니까 계엄사는 그냥 공수부대만 배속했을 뿐이지 모든 명령은 " 김대중의 사람, 광주 사람 정웅 소장" 자신이 알아서 내린 것이며 5.18은 정웅 소장의 명령에 의해서 촉발되었다고 주장 하시는 건가요~?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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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
네, 윗 증언은 5월 18일 광주시장이 내무부장관에게 보고한 내용과도 일치합니다. 광주시 당국은 정웅 소장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내무부장관에게 보고하였습니다. 5월 18일은 시위 진압의 주체가 광주시로 이해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내무부에 보고가 되자 김종환 내무부장관도 5월 15일 유시민 시위대가 시민 버스 탈취하여 순경들 깔아죽였던 일도 있고 해서 신현확 총리를 통해 군부의 지원을 요청해 놓고 있었지요. 5.17비상국무회의에서 그 약속이 되었기에 내무부가 5월 18일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광주 순경 구조 필요성을 알려 주었습니다. 정웅 소장은 계엄사 지시를 받지 않고 독단적으로 충정작전 명령을 내렸으나,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내무부장관을 통해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양해해 주었던 것입니다. 여하간 그날은 시위진압의 주체는 광주시였고, 정웅 소장은 지역 치안유지를 위해 충정작전 명령을 내렸습니다.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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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철호 |
제가 1984년도에 당시 육군소령이 자기가 겪은 광주사태이야기라며 말하는 얘기를 들은적이 있습니다. 광주사태 당시는 공수부대 대위였다고 하더군요. 그 사람은 호남출신이었는데 그사람이 하던 얘기는 위 역사학도님의 발제글과 거의 같은 내용입니다. 본인은 그때 아무런 목적없이 하는 그 사람의 얘기가 지극히 자연스런 상태였고 또한 호남사람이 말하는 것이어서 그이후는 그사람의 말과 다른말은 잘 안들어오더군요. 본인 개인은 위 발제글의 내용을 믿습니다. 역사학도님 건필하십시요. 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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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oren |
[역사학도님] 자꾸 상황을 정확하게 말씀 하지 않으시는데요... 5월 18일 오전에 계엄군이 투입되어서 전남대에서 1차 충돌이 있은 후 그때부터 3시경까지는 공수부대가 투입되지 않았었습니다.
문제는 역사학도님이 말씀하시는 경찰의 납치 시간이 2시경이라고 하시지만 다른 사람들의 증언은 5시경입니다. 그리고 공수부대는 4시경에 시내 일원에서 진압작전을 진행했구요. 따라서 역사학도님이 말씀하시는 것 처럼 경찰병력이 납치되어서 정웅소장이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서 작전명령을 내린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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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브이 |
저도 남이 하는 얘기는 잘 믿지 않지만, 광주사태 당시에 제 외가가 전부 광주에 살고 계셨습니다. 이모님들, 사촌 형님들께서 광주사태를 피해서 저희집에 잠시 머무르셨는데, 그분들 얘기도 진압군 보다는 광주 시민들에게 잘못이 더 있었다고 얘기 했었읍니다. 허지만 그분들은 한곳에서 단편적인것만을 봤기 때문에 그 분들이 말이 정답이라고 말할수는 없는거지요. 광주사태는 아직 미완의 사건입니다. 언젠가는 다시 다루어질겁니다.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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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
qoren님, 물론 2시반에서 3시경입니다. 님의 말대로 5시경이라 하면 충정작전이 더욱 정당회되지요. 경찰과 공수부대가 힘을 합해도 시위대에 밀려 순경들이 납치되는 상황이라면 그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상식적으로 시위진압이 정당화되는 경우입니다.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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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oren |
아..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요~~ 공식적인 시내 중심가에서의 진압작전은 4시 이지만 그 1시간여 전부터 이미 공용터미널 및 시내 곳곳에서 진압작전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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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
qoren님, 그것은 5.18측에서 자기네에게 유리하게 말하기 위해 주장하는 것이구요. 충정작전은 갑자기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병력 소집을 한 후에 합니다. 병력 소집은 충정작전 시작되기 2시간 전에 있었으나, 두시간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정웅 소장으로서도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통화하고, 또 전교사 윤홍 장군과 통화하면서 상황을 보고 진압을 결정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으니까요.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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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oren |
[역사학도님] 시간을 다시 정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후 1시30분 2군사령관 작전지도차 내방 *오후 3시 계엄군 장교 38명 사병 2백94명 투입, 시내 진압작전 실시(7공수) *가톨릭센터 33대대 충장로 35대대 *학생회관부근 페퍼포그 차량 1대전소(전교사 작전일지) *오후 3시40분 7공수 33대대 가톨릭센터 투입, 가두데모대 강력저지 및 분산(31사단 전투상보 및 특전사 전투상보) *오후 33시50분 7공수 35대대 충장로 출동(특전사 충정작전보고) *오후 4시 33대대 금남로 이동 35대대 충장로 이동(특전사 충정작전보고) *오후 4시30분 33대대 작전완료 1백3명 체포, 31사단 헌병대에 인계(특전사 충정작전보고) *오후 4시48분 전투교육사령부에 제 11여단 선발대 도착, 장교 45명 사 병 2백13명(전교사 작전 상황일지)
자꾸 곡해하지 마십시오. 경찰병력이 시위대에 의해서 납치되지 않았어도 이미 그 전에 시내에서는 공수부대들에 의해서 진압작전이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상황을 제대로 모르고 있을수도 있으니 혹시 2시반에서 3시경에 경찰이 납치되었었다는 증언이나 기록이 있으면 제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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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esar74 |
역사학도는 어제 구속된 지만원박사님이 홈피관리라자고 합니다. 그 스승의 그 제자죠. 아니 그사장에 그 종업원이라고 해야 하나.. 특기가 게시판에 분한일으키고 헛소리하기,동문서답하기, 불리해지만 자기가 쓴 발제글 삭제하는 찌질이 반공주의 청년입니다. 대답들 해주지 마세요. 찌질이 퇴치의 최고 약은 무플입니다.2007-08-04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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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와 |
태권브이님의 광주사태는 아직 미완의 사건이라는 말에 동의 합니다. 다시한번 객관적으로 재조명하여 밝혀져야 합니다. 우리들이 모르는게 엄청날 수 있어요. 광주시민도 그리고 참가한 일선 군인들도 피해자입니다. 가해자는 누구일까요? 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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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esar74 |
저번에도 자기가 발제글 올리고 토론하다가 불리해지자 자기가 올린글 삭제해서 답글 수십개(제가 올린거 몇개 포함) 삭제해버린 악질 찌질이 입니다. 이렇게 길게 토론해봐야.. 저 찌질이 맘에 않들면 바로 전체 삭제해 버림니다.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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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
qoren님, <오후 3시 계엄군 장교 38명 사병 2백94명 투입, 시내 진압작전 실시(7공수)>이런 일지는 불가능합니다. 본래, 7공수 33, 35 대대는 충정작전을 위한 병력이 아니라, 전라도 각 지역 대학교 휴교령 집행을 위한 병력이었습니다. 전라도 각 지역에 산발적으로 흩어져 대학 정문 앞에서 경비하는 이들을 임시 변통으로 불러들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깐, 먼저 소집이 있고 소집 후에 작전명령이 있습니다. 소집을 충정작전과 동일시하시면 좀 곤란하지요. 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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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
caesar74님, 저는 단 한번도 제 글을 삭제한 적이 없습니다.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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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esar74 |
그럼 역사학도랑 저번에 토론에 글 날린 사람은 관리자? 귀신? 아님 누가 해킹해서? 그때 보니 다른 분들도 역사학도 취미가 불리하면 글날리기 라고 허던데... 누가 역사학도님을 스토킹하면서 글을 날리나 보죠? 그럼 그때 토론방 글은 누가 날린겁니까? 그때 열받았음.. 거의 실시간으로 토론중 토론방 발제글을 날리다니... 글구 다른 몇몇분들도 역사학도님한테 그런거 당한적 있다던데.. 뻥인가요?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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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oren |
[역사학도님] 제가 저 위에 "5월 18일 02시 26분 7공수 33 및 35대대 도착과 동시 96연대재배속 (충정명령 제 1호) " 학교점령 33대대 전남대 장교 38명 사병 2백 94명 " 라고 했는데요~~~ 제가 찾은 내용은 저것인데 그럼 역사학도님께서 알고계신 구체적인 병력 이동 명령이나 작전 일지가 있으시면 제시해주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그 근거가 확실하다면 믿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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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
qoren님, 그럼 7공수 33, 35대대가 어느 지역에서 온 부대인지 알고 계시는지요?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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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브이 |
caesar74님, 아마도 관리자님이 지우신듯 합니다. 이글도 어쩌면 관리자님에 의해서 지워질지도 모릅니다. 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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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esar74 |
qoren님> 역사학도의 전형적인 수법입니다. 자기는 답변못하고 질문한 사람에게 아주 디테일한것의 증거 제기를 요청하죠. 그리고 답변을 해주면 당시 신문이나 뭐 그건거 20,30년전꺼를 보여달라고 합니다. 극우도 아니고, 그냥 문어대가리 추종자인데.. 수법은 전형적인 빨갱이 토론 수법입니다. 무풀이 최고의 응징책입니다.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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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esar74 |
관리자분들이 글 지우면 삭제 이유를 써주시지 않나요? 토론중인걸 그냥 삭제도 하나요? 글구 당시 다른분들도 역사학도와 토론중 토론방이 날라간 경험이 있다고 토론하지 말라고 충고하셨습니다. 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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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oren |
[역사학도님] 현재 제가 알고 있는 7공수여단의 이동 경로는 전북 익산 금마에서 대전, 광주, 전주로 배치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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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
caesar74님, 병력 이동은 매우 중요한 사항이기 때문입니다. 여태껏 대다수의 사람들이 유언비어로만 알고 있쟎아요.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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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천사 |
caesar74님 관리자님이 지운걸로 알고있습니다... 토론중 끼어들어 죄송합니다^^;;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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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esar74 |
하여간 여기에서 "역사학도"를 영구 추방했으면 합니다. 군사토론방에서 항상 전두환 반한군에 의한 광주학살을 미화하고 정당화하는 글만 올려서 난장판을 만들고 있습니다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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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
qoren님, 그렇습니다. 그러면 전북 금마 7공수여단의 위수지역을 아시는지요? 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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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esar74 |
아름다운천사>님 그렇다면 역사학도의 토론 발제가 여기 게사판에 맞지 않는다는 거 아닌가요? 아님 너무 심한 분란을 일으키던지. 오죽하면 삭제를 하겠습니까? 이 토론도 당시 토론과 큰 차이가 없는데 관리자분 점심먹고 오면 삭제당하겠군요.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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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
caesar74님, 국군의 명예는 군의 사기에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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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oren |
[역사학도님] 위수지역은 잘 모르겠습니다. 근데 위수지역이 무슨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제가 역사학도님 질문에 답변을 했으니 위에서 제가 질문드린 경찰병력의 시위대에 의한 납치 상황에 대한 관련 자료를 제시해주시기 바랍니다.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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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esar74 |
역사학도님> 당시 한국군대는 반란군의 지휘를 받는 군대입니다. 지금 누가 쿠테타 일으키면 우리 시민들은 그냥 있어야 하나요? 여기 비밀분들이 앞장서서 일어나 반란군을 쳐부술겁니다.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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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
부대에는 위수지역 혹은 관할 지역이 있습니다. 위수지역이 있는 부대를 자대라고 하지요. 그런데 공수부대에는 위수지역이 없습니다. 단지 배속을 받을 뿐이지요. 광주 지역 사령관이었던 김대중의 사람, 광주사람 정웅 소장이 마련해 놓은 주둔지에 도착하는 순간 간 31사에 배속됩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해 96연대에 배속되어 있었는데, 그 이유는 경계근무는 96연대에서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배속된 이후의 일거수 일투족 행동은 김대중의 사람, 광주사람 정웅 소장의 명령에 따라 행해집니다. 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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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esar74 |
역사학도님>답변해주세요. 오늘 쿠테타가 일어나면 우리 시민들은 뭘해야 합니까? 장군님을 대통령으로 받아드릴까요? 아니면 주변 군부대를 털어서라도 반란군을 제압하고 다시 민주정부를 세워야 할까요?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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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esar74 |
아.. 그때 김대중이 군부까지 움직였구나... 해외추망명에 가택연금에 감옥에서 70년대를 보냈는데.. 별걸 다 했군. 일단 정웅소장이 김대중사람이라는데 구체적인 증거를 보여주세요. 보여주면 믿죠. 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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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
caesar74님, 지금 5월 18일 충정작전 명령의 주체가 누구였느냐에 대하여 qoren님과 중요한 토론을 하고 있으니 우선 이 주제에 집중할까요?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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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esar74 |
역사학도>님 제 질문은 아주 간단하거든요. 10초면 답변 가능하신데 바쁘시더라도 답변해주세요. 역사학도님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토론을 하는지를 알아야지요. 진짜 충정인지 아니면... 나쁜 의도인지..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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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esar74 |
전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지만 시민에게 권력을 받지 않고 총으로 권력을 잡은 반란군은 누구보다 증오합니다. 왜냐면 그런 반란군이야 말로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 최고의 적이기 때문입니다. 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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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톨 |
정웅 소장은 5.18 이후에 군에서 물러납니다. 정웅 소장이 광주 진압에 헌신적이었으면, 과연 곧 바로 군에서 잘리게 되었을까요 ?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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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
caesar74님, 1996년 5.18검찰은 광주사태 당시 충정작전은 정웅 소장이 단독으로 결정해 내린 명령이라고 판단하고 보고하였습니다. 과거사위가 5.18검찰의 판단을 뒤집어엎을 근거를 여태껏 못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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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
도톨님, 5.18 이후에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천 정의 총기와 이십 삼만 발의 탄약을 난동자들에게 탈취당한데 대한 책임을 지고 5월 22일부로 직위해제된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5월 18일부터 5월 21일까지는 충정작전의 주체가 광주향토사단이었다는 사실입니다.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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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oren |
[역사학도님] 결국 그 말씀을 하고 싶으셨던 거군요. 그렇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이야기 해주시면 얼마나 깔끔하고 좋습니까~?
어쨌든 7공수 33,35대대가 31사 96연대에 배속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배속을 받고 난 이후에 계엄사령부에서는 일체의 지시가 없었나요~? 아니죠. 그때 당시의 명령전달체계는 "李熺性 계엄사령관-->尹興禎 전교사사령관-->鄭雄 31사단장-->7공수 33대대와 35대대 "로 이어집니다.
물론 계엄군을 시내에 투입하기로 의견을 제출한 사람은 정웅소장이죠. 역사학도님의 말씀처럼 정웅이 미리 명령을 내린 후 보고 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최종결정과 그 이후의 군의 대응, 그리고 그 이전에 미리 준비한 상황은 정웅 소장의 영향력 밖의 사안이죠.
이대목에서 鄭雄 31사단장에게 곤혹스런 사실이 나타난다. 공수부대의 시위진압을 끝까지 반대한 의로운 군인이란 칭호로 국회의원까지 당선됐던 鄭31사단장은 기실 5월 18일 오전에는 계엄사의 명령계통에 따라 충실히 공 수부대의 錦南로 투입을 지휘한 장본인인 것으로 검찰은 밝히고 있다.
수사기록에 의하면 鄭雄31사단장은 尹전교사 사령관의 지시를 받고 오후 2시 5분 500MD헬기로 全南大와 朝鮮大를 방문, 주둔중이던 7공수 33.35대 대장에게 지금 시내 시위가 악화돼 경찰이 수세에 몰리고 있으니 오후 4시 를 기해 35대대는 금남로를 중심으로 좌.우측 도로를 차단하고 33대대는 도 청방면으로 압축하여 시위대를 해산시키라고 명령한 것으로 되어있다.
鄭 31사단장은 이 명령을 내려놓고 부대로 돌아와 尹전교사 사령관에게 오후 4시 군을 투입하겠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李熺性 계엄사령관은 光州현지의 전교사 31사단 명령계통에 군을 투입하라고 지시한 것과는 별도로 이날 낮까지 별도의 공수부대를 光州에 추가투입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린다.
오전9시부터 잇따라 보고되 는 7공수 33.35대대의 대학생 시위 진압소식을 접한 李사령관은 두 대대 병 력이 6백명에 불과해 추가병력이 필요하다고 판단, 金在明 작전참모부장에 게 1개공수여단의 光州증파를 지시하는데 金은 곧 공수부대의 수장 鄭鎬溶 사령관에게 추가투입부대 문제를 상의한다.
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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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esar74 |
광주향토사단은 대한민국 별동대였군요. 육군과 군수뇌부의 지휘를 받지 않는... 아.. 그래서 결국 전두환문어대가리를 책임이 없다? 그런건가요. 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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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
qoren님께서 방금 인용하신 자료 출처는 광주일보 민주항쟁 20주년 특집 25호 기사입니다. 좋은 자료인데요. 조금 객관적인 상황 설명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7공수 33.35대대는 충정작전을 위한 병력이 아니었습니다. 임시 방편으로 7공수 33.35대대를 정웅 소장이 동원시켰지만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였지요. 경계근무 병력을 충정작전에 동원시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 두 대대는 신속히 근무지로 복귀해야 하기에 충정작전을 담담할 병력이 필요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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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oren |
[역사학도님] 아~ 혹시나 저 내용을 곡해하실까봐 말씀드리는데요~~ 만약에 정웅이 작전명령을 내렸었더라도 계엄사에서 문제를 더 확대시킬 의도가 없었다면 군을 철수 시켰거나 했었겠죠.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었죠. 게다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군에 의한 총기 발포 사건은 그 이후이기도 하구요. 어쨌든 정웅 소장이 5월 18일 작전을 지휘했다고 하더라도 그 상위 지휘계통에 있는 사람들이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요.
( 그리고 죄송하지만 제가 급한 일이 생겨서 나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말씀해주시면 이따 들어와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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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
qoren님, 5월 18일 시위 진압의 주체는 계엄사가 아니라 광주시였습니다. 처음 며칠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현지 지휘관 정웅 소장과 광주시 당국의 판단을 신뢰해야 하는 입장이었을 뿐입니다.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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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톨 |
발 포와 관련하여 31사단에서도 여러 차례 검토됐다. 5. 18. 31사단에서는 무기고 접근자 발포 승인을 건의했다. 이에 대해 전교사는 복무규율에 의거해 지휘관 재량에 따라 실시토록 지시했다. 31사단은 주로 부대에 접근하는 시위대에 대해 발포할 것인가를 검토했다. 그런데 이때마다 31사단장은 상급부대인 전교사에 문의했고 전교사령관은 번번이 이를 금지시켰다. 5. 21. 09:05에 31사단 96연대 450여명이 교도소를 경계 중이었다. 시위대 1,000여명이 접근하자 31사단장은 문을 부술 경우 발포하라고 명령했으나 전교사령관은 이를 금지시켰다. 31사단장은 5. 21. 18:00에 발포명령을 취소한 뒤 어떤 경우라도 허가 없이 발포하지 말고 탄약 장전도 금지하라고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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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9. 광주고 앞에서 발포가 이루어졌음에도 전교사나 31사단은 전혀 상황보고를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발포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5. 20. 광주역 앞에서의 3공수여단의 발포가 있자 2군사령부는 실탄통제를 지시했다. 그러나 이 지시는 하급부대인 공수부대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오히려 이 지시가 내려간 뒤에도 전남도청 앞에 주둔중인 11공수여단에는 실탄이 분배됐다. 11공수여단은 5. 20. 밤과 5. 21. 아침에 중대장급 간부들에게 실탄을 분배했다. 이것은 상급부대와 공수부대의 보고계통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음을 반증한다. 그리고 실탄분배 및 발포와 같은 중요한 사안에 대해 공수부대는 상급부대에 보고하고 허가를 받지 않았다. 이것은 31사단의 사례와 비교해 볼 때 의문시된다. 31사단장은 발포를 요청할 때마다 전교사령관에게 보고한 뒤 승인 여부를 결정했다. 그러나 공수부대는 상급 부대인 31사단이나 전교사에는 실탄 분배와 발포 상황을 보고하지 않았다. 즉 상급부대 승인 없이 공수부대는 독자적으로 실탄을 분배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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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과거사 조사위원회 보고서 중 일부 입니다..... 공수부대가 31사단의 지휘를 정상적으로 받았다고 보기 어려운데요...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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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
도톨님, <5. 19. 광주고 앞에서 발포가 이루어졌음에도> 인용하셨는데, 발포가 있었나요? 시위대가 군인들을 불에 태워죽이려 했던 사건입니다. 당시 나이 18세의 김영찬은 군인들을 불에 태워죽이려 하다가 시민군 총에 다리를 맞았습니다. 군인의 발포가 아니었어요. 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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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
여기서도 과거사위의 깡통무식이 드러나는데요. <5. 19. 광주고 앞에서 발포가 이루어졌음에도>에서 시위대가 불에 태워 죽이려 했던 군인들은 공수부대가 아니라, 일반 광주 군인들이었습니다. 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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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메니아 |
언젠간 역사는 제대로 평가하겠지요. 왜 시민군들이(이 단어도 좀 그렇습니다만) 도청 지하실에 8만톤의 TNT를 설치하고, 교도소를 습격하고, 무기고를 습격해서 공수부대보다 먼저 실탄을 장전했는지에 대해서는 시간이 지나면 제대로 평가가 되겠지요. 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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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톨 |
역사학도님.. 그건 국방부에 물어보세요.. 위 보고서는 국방부 공식 보고서입니다.....
참고로. 보고서 내용.....
광 주에서 최초의 발포는 5. 19.에 있었다. 5. 19. 16:50 광주시 계림동 광주고와 계림파출소 사이에서 시위진압에 나섰다가 멈춰선 장갑차를 시위대가 공격하자 11공수여단 63대대 작전장교 차○○ 대위가 M16을 발포했고,(195)
(195)주석 : 당시 11여단 63대대장 조창구 중령은 차○○ 대위로부터 보고를 받았다고 검찰에서 진술했다. 서울지검, 「조창구 2회 피의자 신문조서」, 5․18사건 수사기록 17권, 26454~26455쪽.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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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
도톨님, 518단체 공인 증언인 김영찬군의 증언이 여기 있습니다. 3시쯤 되어 군용트럭 1, 2대가 광고 쪽에서 오고 있었고, 사람들은 지나가는 군용트럭에 돌을 던지며 유리창도 깨버렸는데 별다른 반응 없이 그냥 차가 지나갔다. 조금 있으니까 청년들이 광고 쪽으로 몰려 내려갔다. 나도 그쪽으로 친구와 얼른 달려갔다. 가서 보니 광주고와 계림파출소 중간지역에 장갑차 1대가 보였다. 청년들이 짚단 5개 정도에 불을 붙여서 장갑차 밑에 던졌으나 더 이상 타 들어가지 않자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돌을 던져서 장갑차 앞에 붙어 있던 밖을 내다보는 유리로 된 장갑차 눈을 깨뜨리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깨지질 않아서 옆에 있던 청년이 안 되겠다면서 짚단을 뚜껑을 열고 집어넣어야겠다며 말했고, 나와 그 청년 둘이서 짚단에 불을 붙여 뚜껑을 열려고 하다가 열리지 않자 그냥 뚜껑 위에 올려놓고 동원예식장쪽 인도로 뛰어갔다. http://cafe220.daum.net/_c21_/bbs_read?grpid=14LzD&mgrpid=&fldid=8yGb&page=1&prev_page=0&firstbbsdepth=&lastbbsdepth=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contentval=0000jzzzzzzzzzzzzzzzzzzzzzzzzz&datanum=45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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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수라. |
역사학도// 당신 주장대로 폭도라고 치고.. 그럼.. 전두환은 뭐냐? 전지전능한 전두환 왕국을 창업한거요? 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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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메니아 |
이미 북한 특수부대 출신 사람들이 5.18때 심리전부대 400명을 비롯한 북한 특수부대를 파견하여 적극적으로 민중들을 선동했다는 기자회견까지도 했습니다. 곧 광주시민들은 북한에 이용당했지요. 당시 미국은 북한이 남한내에 민중봉기를 일으킨뒤 남침하려고 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부산과 제주도쪽에 항모 2척을 급파하여 대기시켜놓은 상태였고~ 물론 12.12군부들이 잘 했다는건 아닙니다. 민주화항쟁의 방법이 잘못되었죠.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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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meng |
총을 누가 먼저 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인간이 정권을 잡기위해 이딴 일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왜 남의 다리 긁는 짓을 하는지.. 예를 들어 노무현이 시위자들을 10시에 발포명령을 내렸던 12시에 발포 명령을 내렸던 뭔 상관인가. 광주시민들이 총기를 탈취하게 만든 그 짓꺼리가 문제 아닌가.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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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수라. |
전두환 왕국은 국민들의 6 10 역성 폭도들로 인해서 몰락했군요.. 6 10 역성 폭도들이 아니엿다면 전두환은 오늘도 통치하고 있을것이고 장자 상속 즉 전재국이 후계자로 추되되엇을건데 그렇죠? 전두환 역사학도씨..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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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톨 |
군인이 총 쏜 건 맞는거네요 ? 그런데, 왜 발포가 있었냐고 물으십니까 ? 게다가 쏘라고 명령도 없었는데, 쐈네요 ? 그러고서는 상급 부대에 보고도 안했네요 ?
당시 장갑차를 몰고 시위진압에 나섰던 11여단의 전투상보, 상급부대인 31사단과 전교사의 상황일지 등에는 5. 19. 발포에 관련된 어떤 내용도 찾아볼 수 없다. 11공수여단에서 상급부대에 보고를 하지 않은 채 발포 사실을 은폐한 것으로 판단된다.
공수여단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했네요 ? 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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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수라. |
총을 먼저 쏜것도 중요하지만요 총보다도 더 중요한것은 박달나무 곤봉으로 어른 아이 할것없이 공수부대 눈에 보이면 무차별적으로 폭행한것이 더 사람들을 화나게 했는데.. 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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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
도톨님, 검찰이 군대 행정에 무식하여 오기한 것 같은데요. 발포 명령이라는 것은 사병들에게 실탄 지급 명령이 있은 후에야 가능한 것입니다. 장교가 위급한 상황에서 공포탄 쏘는 것을 발포라고 하지 않지요.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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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갈치 |
역사학도님이 그 악명높은 시스템클럽 관리자? 흐미........... 맘에 안드는 글은 무조건 지워버리고. 지만원씨 구속되었는데 면회 좀 가보지 여기서 이럴게 아니라. 안타깝네요. 소송이 끊일날 없으니 말입니다. 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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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수라. |
역사학도/ 당신 역사를 잘 안다고 역사학도 이름 달고 있으신가 본데요.. 전두환은 체육관 선거후 곧바로 그러니까 1981년 1월인가? 에 미국 레이건 그때 레이건도 집권후 처음으로 전두환을 미국으로 불러들엿는데.. 왜 그랫는지 당신이 한번 말해보세요? 전두환이 레이건에게 뭘 줬는지... 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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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bat |
흠흠...모일사람 다~모였군.ㅎㅎ2007-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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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
아수라님, 전두환 대통령이야말로 진정한 직선제 당선 대통령 아니던가요? 1981년 국민이 전두환 후보를 대통령으로 하는 7년제 단임 5공화국 헌법을 국민투표로 통과시켜 준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 보셨는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