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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시흥 관곡지(官谷池)를 찾아서 ④
- 강희맹(姜希孟)선생 묘소와 신도비(神道碑) -
관곡지 향토유적을 두루 살핀 다음 우리는 연꽃테마공원 근처의 강희맹 선생 묘소와 신도비 를 찾았습니다. 이 분에 의해서 관곡지가 있었으니 그냥 지나치면 도리가 아닌 것이라 찾아 보자고 했습니다. 점심은 이미 기울었으나 이번 지나치면 기약이 없을 듯하여 백우거를 몰 았습니다. 그곳은 연꽃테마공원 직전 연꽃마을아파트 뒷편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정 표가 있어 금방 찾을 수 있었습니다.
연성문(蓮城門)
이 문은 연성재(蓮城齋) 삼문인데 기둥에는 진주강씨문량공휘희맹재사(晉州姜氏文良公諱希 孟齋祠)라고 되어 있어 강희맹선생의 사당임을 알수 있습니다.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연성재(蓮城齋)
강희맹(姜希孟 1424~1483) 선생에 대하여
『강희맹(姜希孟) 선생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보관은 진주(晉州)이다. 자는 경순(景醇)이 며 호는 사숙재(私淑齋)ㆍ운송거사(雲松居士)ㆍ국오(菊塢)ㆍ만송강(萬松岡)이며, 시호는 문 량공(文良公)이다. 세종의 이질(姨姪)이고, 지돈령부사 석덕(碩德)의 아들로서 화가 희안(希 顔)의 동생이다.
조선 세종 29년(1447) 별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종부시주부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이어 돈녕부판사, 우찬성 등을 거쳐 성종 14년(1482) 좌찬성에 이르렀다.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 로서 경사(經史)와 전고(典故)에 통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관인적 취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 고 농촌사회에서 널리 전승되고 있던 민요나 설화에도 남다른 식견으로 관인문학(官人文學) 의 틀을 스스로 깨뜨려 버리는 면도 있었다.
그리고 소나무ㆍ대나무 그림과 산수화를 잘 그렸다고 알려져 있는데, 현재 일본의 오쿠라 [小倉] 문화재단에 『독조도(獨釣圖)』가 남아 있다.
문집으로는《금양잡록(衿陽雜錄)》ㆍ《촌담해이(村談解頤)》와 할어버지와 아버지 및 형 희안의 시를 모아 편찬한 《진산세고(晉山世稿)》가 있다. 이 밖에 서거정(徐居正)이 성종 의 명을 받고 편찬한 《사숙재집(私淑齋集)》(17권)이 전한다. 세조 때《신찬국조보감》ㆍ 《경국대전》, 성종 때 《동문선》ㆍ《신증동국여지승람》ㆍ《국조오례의》ㆍ《국조오례 서례》등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글을 옮기면서 몇 가지 바로 잡음 -
옆모습. 국오문(菊塢門)
국오(菊塢)는 선생의 호입니다.
들어갈 수 없으니 담 밖에서 찍었습니다.
문량공사우(文良公祠宇)
신도비(神道碑) 모습
신도비는 옛날, 종이품 이상의 벼슬을 지낸 사람의 묘소 근처 길가에 세웠던 비(碑)입니다. 그들의 치적을 알리려 했던 비석이지요.
한글창제 도움비
『세종대왕 한글 창제 협찬 공신 용비어천가, 동국정운 해설하신 대학자 호조참의 겸 황해도 관찰사 인수부윤, 인순부윤 중추원부사 진주 강부사 희안 어르신님 모신 단』
인재공(仁齋公), 문량공(文良公), 숙헌공(肅憲公)의 신도비
인재공(仁齋公)은 강희맹 선생의 형인 강희안(姜希顔)이고, 문량공 (文良公)은 강희맹 선생 이며, 숙헌공(肅憲公)은 선생의 아들입니다.
진주강공휘희안신도비(晉州姜公諱希顔神道碑)
인재공 강희안(仁齋公 姜希顔)에 대하여 1417(태종 17)~1464(세조 10).
『선생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서화가로 세종 때 여러 서책의 편찬 및 번역사업에 참여했 다. 시ㆍ서ㆍ화 삼절(三絶)로 불렸으며, 특히 남송과 명의 화풍을 받아들인 그림을 남겼다. 본관은 진주. 자는 경우(景遇), 호는 인재(仁齋). 이조판서를 지낸 석덕(碩德)의 아들이고, 좌찬성 희맹(希孟)의 형이다. 1 438년(세종 20)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1441년 식년문과에 급 제하여 사섬서주부(司贍署主簿)로 벼슬길에 올랐다. 이어 돈녕부주부ㆍ이조정랑ㆍ부지돈 녕부사(副知敦寧府事) 등을 지냈다. 1443년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훈민정음〉을, 1445년 최항(崔恒) 등과 더불어〈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주해했다. 또한 1444년 신숙 주(申叔舟) 등과 같이 〈고금운회(古今韻會)〉를 번역했으며, 1447년에는 신숙주ㆍ성삼문 (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동국정운(東國正韻)〉의 편찬에도 참여했다. 사헌부 장령ㆍ지사간원사 등을 두루 거치고 1454년(단종 2) 집현전직제학이 되었다. 이해 정척(鄭 陟)ㆍ양성지(梁誠之) 등과 함께 팔도 및 서울의 지도를 제작하는 데 참여했다. 이듬해 세조 가 즉위하자 인수부윤(仁壽府尹)으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원 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봉해졌다. 1456년에는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신문을 받았으나, 그는 관계하지 않았다는 성삼문의 진술로 화를 면했다. 이어 1463년 중추원부사(中樞院副 使)가 되었다.』 -백과사전에서-
오른쪽이 숙헌공 강귀손(姜龜孫)의 신도비
숙헌공 강귀손(姜龜孫, 1450~1505)에 대하여
『강귀손(姜龜孫). 세종 32년(1450)∼연산군 11년(1505), 자는 용휴(用休), 시호는 숙헌(肅 憲), 본관은 진주, 증조는 동북면도순문사 강회백(姜淮伯), 조부는 지돈령부사 강석덕(姜碩 德), 아버지는 좌찬성 강희맹(姜希孟), 어머니는 호조참판 안숭효(安崇孝)의 따님 순흥안씨, 배위는 군자감정 송요년(宋遙年)의 따님 은진 송씨이다.
성종 10년(147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재감정이 되고, 1486년 중시에서 이등으로 급제하여 상주목사로 나갔다. 이후 장례원판결사ㆍ부제학ㆍ이조참의ㆍ승정원동부승지ㆍ 좌승지ㆍ도승지를 거쳐 연산군 3년(1497)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다.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대사헌으로서 추국에 참여하여 김일손(金馹孫) 등 사림파의 처벌을 가벼이 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해 형조판서, 이듬해에 이조판서가 되었으 며, 1502년에는 진원군(晋原君)에 봉해지고 이듬해 병조판서로 재임 중 세자책봉주문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좌찬성에 올랐다. 1505년 우의정이 되어 하등극사로 다시 명나라에 가 던 중 평안도에서 병으로 죽었다.』 -옮긴 글-
묘역 안내도
비각 우측 묘역입니다.
여기가 강희맹 선생의 묘역입니다.
묘소는 전 혼자서 올라갔습니다. 오늘날 관곡지를 있게한 어른이시기에 여기까지 와서 묘 소 참배를 하지 않고 간다면 도리가 아닐 듯 해서 일행을 대표하여 참배하고자 올라갔습니 다. 이런 기회는 다시 오기 어렵습니다. 선생의 묘소는 계단 위에 있습니다.
강희맹 선생의 묘소는 이 묘소 위에 있습니다.
이 묘비명을 읽어 보니 증가선대부호조참만봉선천군진주강공진창지묘(贈嘉善大夫戶曹參判 封善川君晉州姜公晉昌之墓)로 되어 있고 그 옆에 배증정부인한양조씨부좌(配贈貞夫人漢陽 趙氏祔左)로 되어 있어 선생의 후손인 듯 합니다.
강희안 선생 묘
강희안 선생의 묘비
묘비에는 의정부좌찬성진산군문량공강공지묘(議政府左贊成晉山君文良公姜公之墓)라 되어 있네요. 세월이 흘러 글자가 많이 마모되었지만 이렇게 읽혀집니다. 감사의 재배를 올렸습 니다.
묘역은 봉분을 중심으로 가운데 묘비가 있고, 그 앞에 상석(床石)과 향로석(香爐石)이 있으 며, 한 단 아래 좌우에 문인석(文人石) 한 쌍이 서 있습니다. 이 묘역에 배치된 석물들은 다 른 묘역에 비해 간소합니다. 상석 바로 앞에 놓이는 장명등(長明燈)도 없고 망주석(望柱石) 도 없습니다. 아마도 간소하게 하라고 유언을 내리지 않았을까? 성품이 청렴 결백한 분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문인석(左)
문인석(右)
이번 장마에 수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집중호우는 비켜 갔는지....
상석 및 향로석
강희맹선생 묘 및 신도비 안내문. 경기도기념물 제87호
소재지 : 경기도 시흥시 하상동 산2번지
『조선 세종ㆍ세조ㆍ성종 대 활동했던 문신 사숙재 강희맹(私淑齋 姜希孟, 1424~1483)과 부인 안씨의 합장묘이다. 강희맹은 진주(晉州) 강씨로 조선 초기 시ㆍ글씨ㆍ그림으로 유명 한 강희안(姜希顔)의 동생이다.
세종 29년(1447) 24세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의정부에서 일반정사를 처리 하는 좌찬성에 이르렀다. 박학다식하며 공정한 정치를 편다는 평을 받았다. 유교경전과 역 사, 중요한 의례에 밝아 신숙주 등과 함께 『세조실록』과 『예종실록』을 편찬하였으며 『동문선』ㆍ『동국여지승람』ㆍ『국조오례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그림에도 재주가 있어 그가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는『독조도(獨釣圖)』가 현재 일본에 남아 전하고 있다.
52세 때인 성종 4년(1475) 관직에서 물러나 장인 안숭효가 준 약 1만㎡의 땅을 근거로 금양 (衿陽. 조선시대 시흥의 행정지명)에 와서 살게 된다. 이곳에서 『금양잡록(衿陽雜錄)이라는 중요한 농서(農書)를 썼다.
강희맹의 묘역 구조는 봉분 앞에(封墳) 앞에 묘비(墓碑)ㆍ혼유석(魂遊石)ㆍ상석(床石)ㆍ향로 석(香爐石)을 놓고, 상석 앞에 좌우에 문인석(文人石)을 1쌍 세웠다.
신도비(神道碑)는 종2품 이상의 공신이나 훌륭한 학자에게 허용되었던 것으로 묘의 아래에 가까이 세웠다. 신도비는 서거정(徐居正)이 비문을 짓고 박증영(朴增榮)이 글씨와 전액(篆 額)을 써서 성종 19년(1488)에 건립되었다.』
묘 아래 건립된 묘각
비각(碑閣). 박증영(朴增榮)의 글씨. 경기도기념물 제87호
강희맹 선생 신도비
『신도비(神道碑)는 종2품 이상의 공신이나 훌륭한 학자에게 허용되었던 것으로 묘의 아래 에 가까이 세웠다. 신도비는 서거정(徐居正)이 비문을 짓고 박증영(朴增榮)이 글씨와 전액 (篆額)을 써서 성종 19년(1488)에 건립되었다.』
이번에 관곡지를 찾아 연꽃도 감상하고 관곡지 향토유적을 찾고 더불어 관곡지에 처음 연꽃 을 심은 강희맹 선생의 묘소와 신도비를 찾아 역사를 더듬어 보니 보람찬 하루를 보낸 것 같 습니다.
점심 시간이 이윽히 지나 출출한지라 인근 물왕저수지가 있는 쪽에서 식당을 찾아 쌈밥을 먹고, 식당 앞 마당에 몇 채의 원두막 같은 평상이 있어 셋이서 이런 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커피와 식혜를 뽑아다 먹기도 하고 혹은 눕기도 하며 여유를 부리는데, 갑자기 세찬 소나기 가 한 바탕 지나기도 했습니다. 묘법님은 실로 오랜만에 여유있는 정취를 느낀다고 흐뭇해 하시기도 했습니다.
끝까지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우 _()_
☞ 흐른는 곡은 목정배 작사 박범훈 작곡 김성녀의 노래 '연잎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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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유적답사까지 한 기분이 듭니다. 가고 싶어지는군요. 지금쯤 연은 더욱 더 만개했을 것 같은데 _()_
이날 하루 앞서 정수님은 왕릉답사하셨지요 이번 기회로 강희맹 선생 가문에 대해서 알아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蓮城은 선생이 관곡지에 연을 심은 것에서 유래하여 이 지역을 연성이라 한 것임을 전 장에서 밝혔는데 강씨 문중은 연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가문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만개했을 것 같은데 이번 일요일은 태풍인 온다니 태풍에 아무리 柔軟不澁이라고 해도 적잖히 타격이 있을 듯 합니다. _()_
연꽃도 보고, 유적지도 답사하고, 맛나는 점심과 차, 시원한 평상에서의 여유로움 정말 즐거운 하루였습니다._()_
오랜만에 갖는 여유로움이었습니다. 시간에 쫓기지 않으니 참 좋았습니다. _()_
좋은 유적지를 보셨군요.좋은 하루였다니 기쁨니다_()_
예, 연은 강희맹선생으로부터 연유했고 저는 연으로 인하여 강희맹선생을 알게 되었네요. _()_
우리 조상님 이시네요 멀리서나마 연단지와 유적지를 돌아보니 꼭한번 가보고 싶네요 잘보았습니다 _()_
비니초는 진양 하씨와 진주 강씨는 같은 조상이라며 조상님 뵈어서 좋다고 하더군요.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