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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善德女王, ? - 647년, 재위: 632년 - 647년))은 신라의 제27대 여왕이다. 성은 김(金), 휘는 덕만(德曼)이다. 진평왕과 마야부인(摩耶夫人)의 장녀이다.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그녀를 신라의 새 왕으로 추대하고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호를 올렸다.
즉위한 해인 632년에 관원들을 전국 곳곳에 파견하여 백성들을 진휼(賑恤)하게 하고, 633년에는 조세를 면제해주는 등 일련의 시책으로 혼란스러웠던 민심을 수습하였다.
고구려와 백제의 신라에 대한 침공이 빈번히 발생하기 시작해 나라의 존립이 위협을 받는 상황이 발생하자, 이를 막는 한편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동맹을 맺어 외교적 방어선을 구축하는 공격적인 외교술을 펼쳤다.
더불어 민생의 안정에 주력하여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도록 하는 구휼정책을 활발히 추진하였으며, 첨성대를 건립하여 농사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 그녀가 백성들을 얼마나 인자하게 아끼고 사랑했는지는 지귀(志鬼)의 설화에서도 알 수 있다. 당시 선덕여왕을 흠모하는 백성들이 많았는데 지귀는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선덕여왕이 영묘사를 행차할 때 그녀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선덕여왕이 이를 보고 그의 가슴 위에 자신의 팔찌를 놓고 떠났다. 지귀가 잠이 깨어 이를 알고는 마음에서 불이 나 영묘사(靈廟寺)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또한 불교 또한 널리 장려하여 신라인들을 정신적으로 단결시켜 삼국 통일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분황사, 영묘사 등 절을 많이 건립하고 불경을 연구시켜 불교의 일대 부흥을 가져왔다. 특히 선덕여왕은 웅대한 호국의 의지가 담긴 거대한 황룡사 9층 석탑을 세웠다. 황룡사 9층 석탑은 높이 80m의 거대한 탑으로 이를 모두 9층으로 한 뜻은 이웃의 9적을 물리쳐서 복속시키기 위해 나라 이름을 새겨넣은 것이다.
647년 상대등 비담(毗曇) 등 진골 귀족들이 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구실로 반란을 일으키자 김춘추와 김유신으로 하여금 진압하게 하였다.
선덕여왕은 평소에 자신을 도리천, 곧 낭산 남쪽에 장사지내라고 하였는데 훗날 왕릉 아래에 사천왕사가 세워지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인간 세상의 한가운데에 수미산이 있고 그 위에 6천이 있는데 중턱에는 사천왕천, 꼭대기에는 도리천이 있다고 한다. 신라가 곧 불국토라는 관념에 비추어보면 선덕여왕은 서거 후 도리천에 승천하여 곧 신과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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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善德女王, ?~647]
1
성 김(金), 휘(諱) 덕만(德曼), 호 성조황고(聖祖皇姑). 시호는 선덕이다. 진평왕(眞平王)의 맏딸. 어머니는 마야부인(摩耶夫人) 김씨. 진평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백성들의 옹립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634년(선덕여왕 3) 연호를 인평(仁平)이라 고치고 분황사(芬皇寺)를 창건, 635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주국낙랑군공신라왕(柱國樂浪郡公新羅王)에 책봉되었다.
638년 10월에 고구려가 칠중성(七重城)을 공격해 오자 11월에 이를 격퇴하였으며, 642년에는 백제의 의자왕에게 미후성 등 40여 성을 빼앗겼다. 이어 백제가 고구려와 모의하여 당항성(唐項城)을 빼앗아 나당(羅唐)의 통로를 끊어버리자 여왕은 이 사실을 당나라에 호소하였으며 이어서 백제에게 대야성(大耶城)이 함락되자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643년에 다시 고구려 ·백제의 침입을 당나라에 호소하고 원군을 간청하였으며 이듬해 김유신(金庾信)으로 하여금 백제에게 빼앗긴 성을 회복하게 하였다. 645년에 당태종이 고구려에 원정하자 원군을 보냈으나 다시 백제에게 서변 7성을 빼앗겼으며, 647년에 비담(毗曇) ·염종(廉宗) 등이 여왕의 무능을 구실로 모반하였으나 곧 진압했지만 이 해에 여왕은 신병으로 죽어, 유언에 의해 낭산(狼山)에 장사지냈다.
여왕은 내정에서는 선정(善政)을 베풀어 민생을 향상시켰고 구휼사업에 힘썼으며 당나라의 문화를 수입하였다. 자장법사(慈藏法師)를 당에 보내어 불법을 수입하였으며, 첨성대(瞻星臺) ·황룡사 구층탑(皇龍寺九層塔)을 건립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선덕여왕 3가지 일화>
첫번째 이야기는 향기 없는 모란에 관한 일화이다. 어느날 여왕에게 당나라 태종(太宗)이 진홍·자색·백색의 모란이 그려진 그림과 그 씨앗 3되를 보내왔다. 여왕은 그림을 보고 "이 꽃에는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씨앗을 뜰에 심게 했다. 과연 꽃이 피어서 질 때까지 향기가 나지 않아 여왕의 예언이 들어맞았고, 신하들이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하고 묻자, 여왕은 그림에 나비가 없는 것을 보고 알았다고 하며, 그것은 배우자 없이 홀로 사는 자신을 업신여긴 비유라고 말했다.
두번째 이야기는 개구리 울음을 듣고 전쟁의 조짐을 미리 알아차린 일화이다. 636년(선덕여왕 5) 겨울, 궁성 서쪽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 많은 개구리가 모여들어 삼사일을 계속 울어대자,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여왕에게 물었다. 그러자 여왕은 급히 각간 알천(閼川)과 필탄(弼呑) 등에게 정병 2,000명을 데리고 서쪽 교외로 나가 여근곡(女根谷)을 찾아가면 반드시 적병이 매복해 있을 것이라며 쳐부술 것을 명했다. 각간 등이 군사를 이끌고 그곳에 가보니 부산(富山) 밑에 여근곡이란 골짜기가 있고, 그곳에 500명의 백제군이 숨어 있었다. 이에 이들을 모두 죽이고 남산에 숨어 있던 백제 장군 우소와 백제의 후원군까지도 모조리 무찔렀다. 이 일을 신하들이 궁금히 여기자, 여왕은 "개구리는 눈이 불거진 모양이 성난 형상이니 군사의 상징이고, 옥문이란 여근(女根)이며, 여자는 음(陰)인데 그 색은 희고 흰색은 서쪽을 상징한다. 그래서 적군이 서쪽에 있음을 알았고, 남근(男根)은 여근 속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으므로 쉽게 잡을 것을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세번째 이야기는 여왕이 자신의 죽을 날을 예언한 일화이다. 어느날 여왕은 신하들에게 "내가 아무해 아무달 아무날에 죽을 것이니 도리천에 장사하라."고 일렀다. 신하들이 도리천이 어딘지 몰라 물으니 낭산(狼山)의 남쪽이라고 했다. 여왕의 말처럼 그달 그날에 세상을 떠나자 신하들은 낭산의 남쪽 양지쪽에 장례했다. 그 후 10여년 뒤에 문무왕(文武王)이 선덕여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웠다. 불경에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했으니, 선덕여왕은 자신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라는 절이 창건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실제로 당 태종은 선덕여왕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노골적으로 무시하며 신라 사신에게
「.... 그대 나라는 부인(婦人)을 임금으로 삼아서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으니
이는 임금을 잃고 적(敵)을 받아들이는 격이라 해마다 편할 날이 없다. 내가 친족
한사람을 보내 그대 나라의 임금을 삼되 혼자서 갈 수는 없으므로 마땅히 군사를
보내어 보호케 하고 그대 나라가 안정함을 기다려 그대의 자수에 맡기려 하니..」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네이버 지식in
진평왕이 딸이 아닌 아들로 태어났다면.. 하면서 탄식?했다더군요.
당태종의 말은 참 웃겨죽겠어요 ㅋㅋㅋㅋㅋ
당 태종 세민 오빠 님 아들 고종 몰라?
측천무후한테 휘둘렸잖아 ㅋㅋㅋㅋ
뭐뀐놈이 성낸다고 뒷일은 생각도 못했나보지 태종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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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대 선덕왕(善德王)의 지기삼사(知幾三事)
선덕왕의 이름은 덕만(德曼; 만曼은 만萬으로도 씀)이고 시호(諡號)는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 성(姓)은 김씨(金氏), 아버지는 진평왕(眞平王)이다. 정관(貞觀) 6년 임진(壬辰; 632)에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 지 16년 동안에 미리 안 일이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붉은빛·자줏빛·흰빛의 세 가지 빛으로 그린 모란[牧丹]과 그 씨 서 되[升]를 보내 온 일이 있었다. 왕은 그림의 꽃을 보더니 말하기를, "이 꽃은 필경 향기가 없을 것이다"하고 씨를 뜰에 심도록 했다. 거기에서 꽃이 피어 떨어질 때까지 과연 왕의 말과 같았다.
둘째는,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 겨울인데도 개구리들이 많이 모여들어 3, 4일 동안 울어 댄 일이 있었다. 나라 사람들이 괴상히 여겨 왕에게 물었다. 그러자 왕은 급히 각간(角干) 알천(閼川)·필탄(弼呑) 등에게 명하여 정병(精兵) 2,000명을 뽑아 가지고 속히 서교(西郊)로 가서 여근곡(女根谷)이 어딘지 찾아 가면 반드시 적병(賊兵)이 있을 것이니 엄습해서 모두 죽이라고 했다. 두 각간이 명을 받고 각각 군사 1,000명을 거느리고 서교(西郊)에 가 보니 부산(富山) 아래 과연 여근곡(女根谷)이 있고 백제(百濟) 군사 500명이 와서 거기에 숨어 있었으므로 이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백제의 장군(將軍) 우소(우召)란 자가 남산 고개 바위 위에 숨어 있었으므로 포위하고 활을 쏘아 죽였다. 또 뒤에 군사 1,200명이 따라오고 있었는데, 모두 쳐서 죽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않았다.
셋째는, 왕이 아무 병도 없을 때 여러 신하들에게 일렀다. "나는 아무 해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도利天) 속에 장사지내도록 하라." 여러 신하들이 그게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해서 물으니 왕이 말하였다. "낭산(狼山) 남쪽이니라." 그 날이 이르니 왕은 과연 죽었고, 여러 신하들은 낭산 양지에 장사지냈다. 10여 년이 지난 뒤 문호대왕(文虎(武)大王)이 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웠는데 불경(佛經)에 말하기를,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도利天)이 있다"고 했으니 그제야 대왕(大王)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 수가 있었다.
왕이 죽기 전에 여러 신하들이 왕에게 아뢰었다. "어떻게 해서 모란꽃에 향기가 없고, 개구리 우는 것으로 변이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까." 왕이 대답했다.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므로 그 향기가 없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것은 당나라 임금이 나에게 짝이 없는 것을 희롱한 것이다. 또 개구리가 성난 모양을 하는 것은 병사(兵士)의 형상이요. 옥문(玉門)이란 곧 여자의 음부(陰部)이다. 여자는 음이고 그 빛은 흰데 흰빛은 서쪽을 뜻하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 남근(男根)은 여근(女根)이 들어가면 죽는 법이니 그래서 잡기가 쉽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은 모두 왕의 성스럽고 슬기로움에 탄복했다. 꽃은 세 빛으로 그려 보낸 것은 대개 신라에는 세 여왕(女王)이 있을 것을 알고 한 일이었던가. 세 여왕이란 선덕(善德)·진덕(眞德)·진성(眞聖)이니 당나라 임금도 짐작하여 아는 밝은 지혜가 있었던 것이다.
선덕왕(善德王)이 영묘사(靈廟寺)를 세운 일은 <양지사전(良志師傳)>에 자세히 실려 있다. <별기(別記)>에 말하기를, "이 임금 때에 돌을 다듬어서 첨성대(瞻星臺)를 쌓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