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못갚으면 부도 대신 은행 대출연체로 넘겨
경기 최악 상황에서도 부도 급증않는 '착시'
중소 건설업체 A사는 극심한 불황으로 돈줄이 거의 말랐지만 회사는 멀쩡하게 돌아가고 있다. 자금 사정을 보면 진작 부도가 났을 상태에 빠져있다.
하지만 부도 처리되지 않고 회사가 굴러가고 있는 것은 전자어음 덕분이다. A사 관계자는 "예전같으면 하청업체들이 어음 들고 회사를 찾아와 한바탕 난리를 쳤고 벌써 부도가 났을 것"이라며 " 하지만 전자어음 제도 덕에 회사가 간판을 내리지 않고 있다"고 했다.
지난해 9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경기 침체가 심해지면서 기업들이 극심한 자금난에 빠지고 있다. 줄도산 사태가 났던 11년 전 IMF외환위기 대 못지않은 불황인데도 부도업체 수는 좀처럼 늘지 않고 있다.
과거엔 돌아오는 어음(종이어음)을 막지 못하면 곧바로 부도처리됐는데, 요즘은 '전자어음'이라는 온라인 결제수단이 확산되면서 쉽게 부도처리가 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전자어음이란 은행이 납품업체에 미리 납품 대금을 대출해준 뒤 나중에 구매업체에게 돈을 받아서 사후정산하는 방식인데, 구매업체가 제때 납품 대금을 은행에 지불하지 못할 경우 부도처리 대신 연체 처리가 된다. 이런 과정이 전산으로 이뤄진다고 해서 전자어음이라 불린다.
이처럼 전자어음 '덕분에' 어음 부도율이 크게 올라가지 않으면서 중소기업들의 자금사정이 그다지 나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착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부도처리가 되지 않아 연명은 했지만 회생이 어려운 이른바 좀비(zombi.살아있는 시체)기업'이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11월 기업회생정차(옛 법정관리)를 신청한 신성건설도 전자어음으로 한달 정도를 버텼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전자어음은 거래기업이 대금결제를 못하면 연체만 늘어나 은행에 부담이 되고 있다"면서 "종이어음처럼 부도 같은 제재 수단이 없어 문제"라고 말했다.
◆중소기업 부실 가려져
중소기업의 부실은 심각하게 악화되고 있다. 18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은행권의 중소기업 부실채권은 작년 말 1.9%로 1년 전(0.99%)의 두 배 수준으로 높아졌다. 반면 가계대출 부실채권 비율은 같은 기간 중 0.54%에서 0.53%로 오히려 낮아졌다.
과거 기업주도 지표로 활용돼온 어음부도율을 보면 현재 우리나라 기업들은 별로 문제가 없어 보인다. 어음이나 자기앞수표 등 당좌거래를 기준으로 하는 어음부도율은 지난 1월 0.04%로 작년 1월(0.03%)과 별 차이가 없다. 갈수록 경제상황이 나빠지고 있지만 전국의 부도기업 수는 지난 1월 262개로 작년 12월(345개)보다 오히려 줄었다. 이같은 현상은 종이어음 거래가 줄어들고 전자어음 활용이 확산됨젼서 나타난 것이다. 전자어음을 통한 대출금액은 도입 당시인 2000년 870억원에 불과했으나 2008년 16조2642억원으로 급증했다. 이에 비해 하루 평균 종이어음 교환규모는 1999년 16조6896억원에서 지나내 9조7940억원으로 크게 감소했다.
다른 시중은행 관계자는 "어음부도율은 기업 부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죽은 지표가 됐고, 이젠 기업대출 연체율을 봐야 기업 상황을 제대로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은행권의 기업 대출 연체율이 치솟고 있다.
금융감독원이 18일 발표한 '국내 은행의 대출채권 연체율'현황을 보면 , 가계대출 연체울과 중소기업 대출 연체율의 차이는 평소 2배 미만이었지만 최근 3배로 벌어졌다. 중소기업 대출 연체율은 1년 새 거의 2배인 2.67%로 뛰어올랐다. 특히 자동차와 조선 등 1차 협력업체들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부실이 하청업체로 번지고 있다. 지난 1월 기업회생절차에 들어간 쌍용자동차의 경우 5개 1차 협력업체가 부도를 내 하청업체들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조선업도 퇴출이 확정된 C&중공업 등 일부 중소 조선사의 협력업체 자금난이 확산되고 있다.
◆"부실기업 퇴출시켜 건실한 기업살려야"
전문가들은 전자어음 의 착시 현상이 기업 구조조정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강석훈 성신여대 교수는 "퇴출될 기업이 분간되니 않는 것은 건실한 기업에 돈이 제대로 돌도록 하는데 장애물이 될 수 있다"며 "퇴출될 기업을 빨리 퇴출시켜 중소기업 구조조정의 불확실성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자어음에 대한 보완책 마련도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전자어음이 흑자 도산을 방지하는 순기능도 있지만 결제를 안하고 버티는 경우엔 고스란히 은행부실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김종창 금융감독원장은 "전자어음을 거래하고 있는 기업이 대금을 결제하지 않고 책임을 지지 않는 건 문제가 있다"며 "금융상 불이익을 강구하고 있으며 3월말까지 개선안을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