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는 연인과 함께 부여로 가보자.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였던 부여는 참담한 멸망을 겪어야 했던 백제의 아픔을 간직한 곳이다. 부소산성과 낙화암, 고란사 그리고 정림사지와 궁남지, 부여박물관. 이번 여행의 코스이다. 서울에서 하루 코스로 조금 빠듯한 듯하지만 괜찮은 코스이다.
백제는 기원전 18년 한강 이남의 위례성이란 곳에 처음 도읍을 정하고 국가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 한강 이남의 위례성은 아직도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의 하남시라는 설이 있고, 몽촌토성이라는 설도 있고 최근 발굴이 결정된 풍납토성이라는 설도 있다. 어쨌든 한강변에 도읍을 정했던 백제는 고구려에게 밀려 도읍을 남쪽인 공주로 옮긴다. 당시의 이름은 웅진성으로 역시 북쪽으로 금강을 끼고 있어 위례성과 지리적 여건이 비슷하다. 그러다 다시 더 남쪽으로 내려가 부여(당시 이름은 사비)로 도읍을 옮긴다. 이 역시 백마강(실은 금강의 다른 이름이다) 변에 있는 곳으로 계속 고구려와의 전투를 의식한 방어형 도읍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660년 부여에서 고구려가 아닌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의 화를 당했다. 이번 여행의 첫 기착지인 부소산성이 바로 백제의 멸망을 지켜본 마지막 왕궁의 자리이다.
서울에서 부여로 가려면 국도를 이용해야 한다. 앞으로 천안-논산간 고속도로가 개통되면 공주와 부여도 고속도로권에 편입되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다 천안나들목을 나와 국도를 이용해 공주를 거쳐 부여로 가야 한다. 천안나들목을 나서자마자 좌회전한 뒤 다시 만나는 사거리에서 또 좌회전하면 1번 국도를 타게 된다. 이 1번 국도를 타고 10~20분쯤 달리면 1번 국도와 32번 국도가 갈라지는 삼거리를 만나는데 여기서 공주 방향으로 향하는 23번 국도인 우측길로 간다. 이 길을 계속 달리면 공주에 닿게 되고 공주부터는 다시 부여로 향하는 40번 국도를 타면 된다. 길이 새로 뚫렸고 이정표가 잘 되어 있어 길도 좋고 찾기도 쉽다. 40번 국도를 타고 가다보면 부여 초입에서 논산에서 들어오는 4번 국도와 길이 합쳐저서 부여 시내로 들어가게 된다. 시내로 조금 들어가다 보면 길 오른쪽으로 부소산성 관광주차장이 나온다. 경부고속도로 서울 궁내동 톨게이트에서 약 3시간 거리이다.
백제의 마지막 왕궁이었던 부소산성(扶蘇山城)은 아름다운 산길이 조성되어 있고, 유명한 낙화암과 고란사 등의 볼거리와 유적들을 품고 있는 곳이다. 부소산은 높이가 100m 조금 넘는 낮은 산이어서 걷기에 그리 피곤하지도 않다. 정문인 사비문을 지나면 바로 왼편으로 백제의 궁궐터로 추정되는 곳이 있다. 왕궁이 있던 자리라기엔 좀 좁은 공간인데, 돌축대와 잔디밭만 있어 몰락한 왕조의 쓸쓸함이 느껴진다.
왕궁터를 뒤로 하고 반대편으로 난 산길을 오르면 본격적으로 부소산성을 오르게 된다. 부소산성은 소나무숲이 울창해 계절에 관계없이 아름다운 산길을 걷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길을 따라 걷다보면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이 삼충사(三忠祠)이다. 백제 멸망 당시 의자왕에게 충성을 다했던 세 충신인 성충, 흥수, 계백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1957년 건립된 것으로 매년 10월 백제문화제가 열릴 때 이곳에서 삼충제를 지낸다.
삼충사를 지나면 차례로 영일루(迎日樓), 군창지(軍倉址), 수혈적거지, 반월루(半月樓), 사비루를 만나게 된다. 모두 이층 누각이고 군창지는 이 자리에서 불에 탄 곡식이 발견되어 이곳이 산성 내의 군량을 비축해 두던 곳으로 추정되는 자리이다.
사비루를 지나면 좁은 산길을 내려가 낙화암과 고란사를 만날 수 있고, 고란사 아래로는 구드래 나루까지 가는 유람선 선착장이 있다.
낙화암(落花巖)은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할 때 백제의 궁녀 삼천명이 이곳에 와서 백마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는 곳이다.
낙화암 위에는 백화정(百花亭)이란 작은 정자가 하나 있고, 백화정 아래 암벽 위에 난간을 만들어 놓아 바위를 타고 조금 내려갈 수 있다. 백화정은 1929년 건립된 정자로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낙화암이란 이름은 후세 사람들이 백마강으로 떨어지는 삼천궁녀를 꽃에 비유해 부른 이름이고, 삼국유사에는 타사암(墮死岩)이라 나오고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아도 백제 멸망 당시 실제로 이곳에서 사람들이 몸을 던져 자살한 것은 사실인 것 같으나, 궁녀 삼천 명이 자살했다는 사실은 좀 믿기 어렵다. 의자왕이 말기에 방탕하고 사치한 생활을 했다고는 하나 아무리 많아도 궁녀의 수가 삼천 명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많은 궁녀들이 이곳에서 죽었다는 의미의 숫자일 것으로 추정된다.
고란사(皐蘭寺)는 낙화암 아래 백마강변에 있다. 낙화암과 고란사가 있는 이 일대는 온통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사실 절이 들어설 만한 자리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터가 좁다보니 고란사는 큰 법당과 요사체 그리고 범종각이 절의 전부이다. 그러나 고란사에서 바라보는 백마강은 멋진 경치임에 틀림없다.
이 고란사는 절 자체보다 고란초와 고란약수가 더 많이 알려져 있으며, 또 유명한 낙화암이 바로 위에 있어 찾는 사람도 많다. 고란초는 고사리과에 속하는 식물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유독 이곳에서만 볼 수 있다고 한다. 고란사 뒤편 바위에 붙어 자생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바위에 붙어 있는 고란초를 찾기는 어렵다. 대신 법당 뒷편에 고란초에 대한 설명이 있는 액자가 걸려 있는데, 액자 가운데에 있는 좀 지저분해 보이는 것이 고란초라고 한다. 고사리라기보다는 이끼에 가까워 보인다.
고란약수는 고란사 법당 뒤에 있다. 다른 약수와는 달리 바위 밑에서 물이 나와 고여 있는 형태이다. 좀 깊은 곳에 고여 있어 손잡이가 긴 국자 모양의 용기로 떠서 마셔야 한다. 이 고란약수에 고란초를 띄워 마시면 한 잔 마실 때마다 삼 년씩 젊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이 약수를 너무 많이 마셔 갓난아이가 되어버린 할아버지의 이야기도 곁들여서 전해지는데, 속설은 어디까지나 속설일 뿐이다. 또 백제의 왕들이 이 물을 즐겨 마셨다는 말도 전해지는데, 실제 물맛은 별로 특이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여기까지가 부소산성의 전부이다. 부소산성의 정문인 사비문에서 고란사까지는 천천히 구경을 하며 걸으면 1시간 남짓한 거리로 다시 돌아나갈 일이 좀 걱정되는 거리이다. 하지만 걸어나가지 말고 유람선을 타는 것을 권하고 싶다. 고란사 아래 유람선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타면 구드래나루까지 약 15분 정도가 걸린다. 유람선을 타면 낙화암의 본 모습을 볼 수 있고 또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다리품을 팔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구드래 나루에서 부소산성 앞 주차장까지는 1.5km 거리로 약 20분 정도를 걸어야 한다. 이 길을 걸으며 나루 바로 뒤에 있는 구드래조각공원을 둘러볼 수도 있다. 구드래조각공원은 1983년부터 강변 지역을 다듬어 1996년부터 여러 조각가의 작품을 전시하는 조각공원이 되었다. 대부분의 다른 조각공원과 같이 아직 조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울창한 숲이나 세월의 흔적 등은 찾아볼 수 없지만, 깨끗하게 잘 꾸며 놓아 산책하기에는 적당하다.
다음 기착지는 정림사지이다. 부소산성 앞 관광주차장에서 나와 우회전하여 조금만 가면 사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정림사지와 궁남지 이정표를 따라 좌회전한다. 좌회전하여 잠깐 달리면 길 왼편으로 정림사지의 담장이 보이고 이 담장이 끝나는 지점에 작은 사거리가 있는데 여기서 또 좌회전하면 정림사지 입구이다. 별도의 주차장은 없고 입구 도로변에 주차시설이 되어 있다.
정림사지(定林寺址)는 다른 폐사지와 마찬가지로 너른 공터에 작은 사각형 연못과 유명한 정림사지 오층석탑이 서 있을 뿐이다.
정림사지가 유명한 것은 국보 제9호로 지정된 정림사지 오층석탑 때문이다. 이 탑은 목탑에서 석탑으로 옮겨오는 과정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어 석탑의 변화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라 한다.
백제시대의 탑으로는 익산의 미륵사지탑과 이곳 정림사지탑이 중요하게 여겨지는데, 미륵사지 석탑이 형태면에서 목탑의 형태를 잘 따르고 있는 반면, 정림사지 석탑은 목탑의 형태에서 석탑의 형태로 한 단계 발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런 추정의 결과로 정림사지 석탑은 7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미륵사지 석탑보다 후대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런 학술적인 접근을 차치하더라도 정림사지 석탑은 한눈에 보아도 경쾌하게 잘 생긴 탑임을 알 수 있다. 높이 8.33m의 탑으로, 옥개석의 끝 부분이 살짝 말려 올라간 형태인데, 경쾌한 듯하면서도 강인한 느낌을 준다. 또 이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백제 멸망의 치욕을 안고 있는 탑이기도 하다.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이 탑의 1층 탑신부에 자신의 전공을 기록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으로 제대로 조사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이 탑을 소정방이 세운 것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고 또 탑의 이름도 평제탑(平濟塔, 백제를 평정한 탑)으로 알려져 있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 뒤로는 공사중인(2000년 2월 현재) 건물이 있다. 그 건물 안에는 보물 제108호인 정림사지 석불좌상이 있다. 공사중이라 보기는 아주 불편하다. 이 석불좌상은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훼손이 심한 편으로, 머리 부분은 없어져서 다시 만들어 얹어 놓은 것이라 한다.
다음 코스는 백제 임금의 연못이었던 궁남지이다. 궁남지(宮南池)는 약 1만여 평 크기의 연못으로 연못 가운데에 둥근 섬이 있고 그 섬 위에 포룡정(泡龍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포룡정이 있는 섬까지는 경복궁의 향원정과 같이 살짝 무지개 형태를 하고 있는 긴 다리가 있다. 연못 주변으로 멋진 버드나무 길이 조성되어 있고, 연못의 형태가 자연스런 굴곡을 이루고 있어 아주 아름다운 연못으로 손꼽힌다.
이 연못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궁의 남쪽에 있는 연못이다. 즉 백제의 궁이었던 사비성(지금의 부소산성) 남쪽에 있는 왕을 위한 인공 연못이다. 634년, 서동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알려진 백제의 무왕이 만든 것으로 경주의 안압지보다도 약 40년 정도 앞선,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연못이라 한다. 이 궁남지가 있는 자리에는 백제의 별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아직 자세한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 궁남지도 원래는 3만여 평 규모의 연못이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1960년대 복원시 현재의 모습으로 축소 복원된 것이라 한다.
궁남지는 이 연못을 만든 백제의 무왕과 깊은 관계가 있다. 무왕은 우리에게 친숙하게 알려진 '서동과 선화공주'의 서동이다. 신라에 가서 아이들에게 '선화공주는 밤마다 서동을 안고 잔다'는 내용의 서동요를 부르게 해서 결국 선화공주를 차지한 그 서동이 바로 무왕이다. 그리고 이 무왕과 선화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다. 무왕이 태어나기 전부터 궁남지 자리에는 연못이 있었는데, 무왕의 어머니가 그 연못가에 살고 있었다.
어느날 갑자기 연못에서 용 한 마리가 나타나 서동의 어머니가 의식을 잃었는데, 그후 태동이 있고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서동, 즉 무왕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연못 가운데 정자 이름도 포룡정(泡龍亭)이 되었다. 후에 서동은 백제의 왕이 되었는데, 이 사실로 미루어보면 용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백제의 임금이 와서 서동의 어머니와 정을 통했고 결국 임금의 서자인 서동을 낳은 것이라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여기까지 돌면 시간을 봐야 한다. 시간의 여유가 있으면 국립부여박물관을 들러보자. 그렇지 못하면 다시 왔던 길을 돌아 상경하면 된다. 부여를 돌아보면 어쩔 수 없이 신라의 도읍이었던 경주와 비교를 하게 되는데, 쓸쓸함과 안타까움이 교차되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번 가족여행 코스는 아이들에게 좋은 역사 교육이 될 수 있는 코스라 할 수 있다.
부소산성의 입장료는 어른 2000원, 학생 1100원, 어린이 1000원이고, 주차료가 2000원이다. 유람선 승선 비용은 어른 2200원, 어린이 1100원이다. 정림사지의 입장료는 어른 1000원, 청소년 600원, 어린이 400원이며, 주차료는 없다. 궁남지는 무료.
첫댓글 거시기한 계백장군 동상을 보러 함 가야제..........좋은자료 감사합니다...낙화암,정림사지,부소산성,고란사까지 가 보았는데 오래되어 기억이 아물하네요,,기회되면 꼭 다시 가고싶은곳이네요.^-^
ㅎㅎ 쥔님! 함 가보세요.95년 대간첩 작전했던 저의 흔적도 있거든요.
부여에 사시는님 있으몬 5월달에 한번 실행해보겠구먼..ㅎㅎㅎ 울님들중에 부여 사시는분 안계시겠제요^-^
ㅎㅎㅎ그러게요..우리 사촌형부가 부여에서 예비군 중대장 하시는데...한번 기회되면 꼭 가봐야 겟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