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친 김에 (사)밝은마을이 꿈꾸는 "대안공동체 이야기"를 올립니다.
이 글모음은 이번 생명축제 때 홍익시장에 나온 책자로(호츠캐츠로 찍어),
황선진 선생님이 그 동안 썼던 글을 한데 모아놓은 것입니다.
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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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공동체 이야기
(사)밝은마을
들어가는 말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학습을 합니다. 인간 사회가 그때까지 이룩해온 성과를 온 몸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가꾸어 가기 위함입니다. 학습이 없으면, 이 세상에 생존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학습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기본적인 권리입니다. 마찬가지로, 교육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기본권 중의 하나입니다. 교육은 학습자의 기본권을 존중하면서, 학습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잘 안내하는 것이 정도(正道)입니다.
그런데, 인간 사회가 계급 사회로 되면서 교육권과 학습권이 지배층에 의해 제한되거나 박탈당하게 됩니다. 지배층이 자신의 지배 체제를 유지-강화하기 위하여 교육 시스템을 독점, 또는 장악하여 각 자연인의 천부적인 권리를 제한합니다. 이 점이 우리가 제도권 교육이라고 알고 있는 것의 계급적 본질입니다.
제도권 교육과 대안 교육 간의 핵심적 차이는 바로 이 지점에 놓여 있습니다. 현 체제를 유지-강화하기 위한 교육인가, 각 자연인의 자유와 기본권을 신장하려는 교육인가 하는 것이 본질적 차이입니다. 근대 이후 작금에 이르러서야 제한적인 범위에서나마 대안교육이 태동되고 있는 것은 국가와 자본에 대해서 어느 정도 자유로운 시민 사회의 힘이 비로소 생겼기 때문입니다.
대안교육이 단순히 교육에 머무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대안교육의 계급적 성격 때문입니다. 대안 교육은 본질적으로 대안 체제, 대안 사회를 지향할 수밖에 없으며, 대안 체제 속에서의 삶을 꿈꾸게 됩니다. 대안적인 삶을 지향하지 않는 대안교육은 맹목적일 가능성이 높으며, 대안교육 없는 대안 사회는 공허합니다.
대안의 삶을 추구하는 각 개인이 자유롭게 단결하는 대안 공동체는 대안사회로 가는 지렛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안 공동체 속에 자리 잡고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 바로 대안교육이 나아갈 길입니다.
<이야기 1 >
1. 세상이 바뀌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은 지금 세상의 질서가 변함없이 오래 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순이 극에 달하면, 그 끝도 가까운 법입니다. 지금 세상에서는 재화와 권력을 둘러싸고 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갈등, 폭력, 전쟁, 환경 파괴 등이 체제내화 되어 있습니다. 지구 상, 어디에서인가 전쟁이 벌어지고 있어야 현재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유지되는 실정입니다. 기상이변, 괴질 등의 궁극적 원인인 환경 파괴 없이 현 체제는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자본주의를 가장 두려워하는 이들이 바로 세계 독점 자본가들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현 자본주의 세계 체제를 확대 재생산하기 어렵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금융-군수-석유 등의 독점을 통한 일방적인 빼앗음은 거의 흡혈 수준입니다. 우리나라가 경험한 바 있는 IMF 관리체제는 그 결정판이지요.
한 국가를 넘어서 진행되는 세계적인 양극화로 인해 생존의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생존의 길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양극화로 정상적인 삶에서 배제된 사람과 생명은 현 체제로부터 벗어나는 길 이외에 달리 갈 곳이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모순이 극에 달한 기존 체제는 모순을 담보하는 세력에 의해 거꾸러지거나, 스스로 무너집니다. 제정 러시아는 타도되었고, 로마는 스스로 붕괴하였습니다. 지금 양쪽 힘의 관계나, 지구 자연 환경의 파괴 상태로 감안하면, 미국의 독점 자본을 정점으로 하는 세계 자본주의와 현대 문명의 앞날은 굳이 문명 예언가들의 말을 빌릴 필요도 없을 정도로, 어둡습니다.
2. 대안적 가치는 이제 덕목을 넘어 능력입니다.
대안적 덕목은 그것을 내면화하는 일이 바람직하다는 차원을 넘어서, 밝고 행복한 삶을 위하여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능력입니다. 앞으로의 세상에서는 대안적 가치에 따른 대안적 삶이야말로 생존에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리라는 전망입니다. 생태, 평화, 자유, 평등, 개방 등의 대안적 가치를 내면화 하였는가에 따라서 다가 오는 세상에서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이 좌우될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물질을 중심으로 하는 현대 자본주의 문명사회에서의 경쟁력은 다가오는 세상에서는 오히려 생존의 방해물로 전락할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질서가 피라미드형 종적 위계체계로부터 소우주들의 횡적 네트워크 체계로 전환하고 있으며, 점점 가속도가 붙고 있습니다. 종적 위계체계 안에 한 분자로서의 가치관을 내면화한 사람과 소우주로서의 가치관을 내면화한 사람은 네트워크 체계에 적응하는 정도가 분명 큰 차이를 보일 것입니다. 이를테면, 경쟁을 내면화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평등한 교류나 연대에 제한적으로 임하게 되고, 이는 정보력의 제한을 가져오고, 이는 곧 생존력의 제한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3. 대안공동체는 기존 체제의 수명이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대안적인 삶을 모색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단결하는 모임입니다. 즉, 자본주의 현대 과학기술 문명에 대한 대안을 찾고, 이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뜻을 공유하는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다양한 갈래가 있기는 하겠지만, 탈(脫)-비(非)-반(反) 자본주의 이념을 분명히 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4. 대안공동체의 유형은 가족, 소모임, 친목회, 단체, 종교 조직, 사회운동단체 등 사람들의 다양한 모임 형태를 포괄합니다. 개별 단체도 있을 수 있고, 단체 연합의 형태를 띨 수도 있습니다.
5. 정착형 공동체 및 유목형 공동체
정착형 공동체는 기존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특정 지역에서 인간 삶의 대부분이 있는 자립형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흔히 공동체라고 하면, 이 유형을 일컫기 마련이지요. 이와는 달리 변화하는 세상에 발맞추어 유목형 공동체를 꿈꾸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현대의 많은 사상가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정보 과학 기술을 바탕으로 유목(nomad)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유목형 공동체는 이러한 시대를 반영합니다. 그러면서도 지역 근거지를 갖는 것은 정착형 공동체의 장점을 흡수하면서, 유목의 베이스캠프 역할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유목형 공동체는 특정 지역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공동체 구성원은 농촌과 도시에, 그리고 국경을 넘어 다양한 곳에 두루 편재합니다. 일이 있는 곳에 신속-유연하게 달려 갑니다. 그리고 공동체 구성원이 머무르는 곳이 바로 공동체가 있는 곳입니다.
6. 대안공동체는 물질을 구성의 원리로 삼지 않습니다. 인본(人本)주의와 생명 중심주의에 입각하여 공동체를 운영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을 비롯한 만물의 뿌리인 본성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입니다. 지금은 교육, 문화, 정치, 영성 등, 특정 분야의 일로부터 출발을 하고 있으나, 우리 삶의 모든 영역으로 그 활동이 확장되고 있으며, 공동체 간의 단결과 협동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7. 대안 공동체는 국가를 넘어서는 삶을 일굴 필요가 있습니다.
현대 자본주의 과학기술 문명사회에서 사는 우리들은 국가를 떠난 삶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국가는 인류 역사의 일정 발전 단계에서 발생하여 일정 단계까지 유효한 조직 형식입니다. 인터넷의 발달로 인하여 개개인의 정보-기술 능력과 이를 앞세운 개인-집단간의 연대는 국경을 넘어선 삶의 영역을 더욱 넓히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세상에서는 탈(脫)-비(非)국가적인 사고와 행동이 점점 그 깊이와 폭을 더 할 것입니다. 대안공동체는 국가를 넘어서는 사고와 행동을 적극적으로 모색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가를 넘어서지 않는 대안은 실제로는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이와 함께 기존 체제의 대안을 모색하는 개인 및 공동체의 국제적인 연대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대안 공동체들이 연대하는 힘은 점차 국가의 규정력을 넘어서는 삶을 부분적이나마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쉽게 기존 체제에서 자본주의 거대 개별 기업이 국가를 넘어서는 것에 비견하면 될 것입니다. ‘대안 공동체의 국제적인 연대’는 어떤 의미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러한 연대는 민족별, 또는 동북아와 같은 소지역별로도 가능할 것입니다.
8. 대안공동체는 각개주의(各個主義)를 원칙으로 합니다.
디지털 시대의 공동체는 구성원의 의지-능력-개성-자질-노력-형편 등에 따라 차별성이 흔쾌하게 존중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됩니다. 물질을 기준으로 획일적인 참여 방법이 적용되는 조직은 대안 공동체가 되기 어렵다고 판단됩니다. 대안 공동체는 각개주의(各個主義)의 원칙이 적용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각개주의는 목표를 같이하는 사람들이 각각 자신의 처지에 맞게 이를 실천하는 일을 생명으로 합니다.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폐해를 모두 지양하고, 양쪽의 장점을 취하는 변증법적 종합이 바로 각개주의입니다.
9. 대안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양서류(兩棲類)의 삶을 견지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대안공동체는 기존 체제와 대안 체제를 유유하게 오며가며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기존체제를 유지하려는 힘과 대안체제를 일구려는 힘의 정세에서 볼 때, 그러한 판단이 섭니다. 대안체제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대안 체제는 뿌리를 내릴 것입니다. 기존 체제와 양적, 질적 측면에서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며, 결국에는 기존 체제를 대체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안적인 삶을 추구하되, 한 쪽에서의 삶만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아니 기존 체제를 완전히 벗어나는 일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대안의 가치관을 내면화하면서, 대안체제를 강화하려는 노력을 하면, 기존 체제 안에서의 경쟁력은 부차적인 성과물로 주어질 것입니다. 또한 기존 체제 안에서의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는 이들과의 연대, 협력을 위해서도 양서류로서의 삶은 필요합니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기존 체제와 대안체제를 능동적이고 유연하게 넘나드는 삶을 영위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점차 기울어져 가고 있기는 하지만, 기존 체제는 대안공동체 구성원들의 인생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할 것입니다. 신자유주의 세계 자본주의, 현대 과학 기술문명, 국가 등은 앞으로도 상당한 기간 동안 인류의 삶을 규정할 것입니다. 이와 함께 대안적 삶이 가능한 대안 체제의 비중도 나날이 높아질 것입니다. 어떤 이는 기존 체제를 벗어나 온전히 대안 체제 속에서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대안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대안 학교 교사, 생태 건축가, 발효식품 생산/유통 전문가, 명상-수련가, NGO활동가, 자연염색-옷 생산/유통 전문가, 자연치유 전문가, 애니메이션-무용-디자인-소설 등 예술가, 정치가, 기업인 등 인간 삶의 모든 영역으로 진출이 가능합니다.
<이야기 2 공동체 민주주의 >
1. 공동체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공동체입니다. 이에 비해 사람들의 단순한 모임은 그냥 집단이라고 할 수 있지요. 육체적 욕망에 이끌리는 삶을 넘어 좀 더 바람직한 밝은 삶을 꿈꾸는 사람들은 공동체를 이루어 그 꿈을 실현하려고 합니다. 기독교의 산상공동체, 불교의 쌍카, 우리 겨레의 솟터, 부도, 간디가 이야기하는 아쉬람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민중의 생존권과 사회의 민주화, 민족 자주 등을 목표로 활동을 해 온 전통적인 사회운동 등의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또한 90년대 이후 새롭게 환경-생태-소수자 등의 신 사회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또한 구체적 운동의 형태를 띠고 있지 않더라도 소모임, 친목회 등으로 밝은 사회를 바라며 꿈틀거리는 수없이 많은 움직임들이 있습니다. 위와 같은 흐름들 중에서 탈(脫)-비(非)-반(反) 자본주의의 입장을 분명히 하는 모임을 포괄하여 대안공동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자 합니다.
2. 개체 민주주의와 공동체 민주주의
우리는 서양식 사고의 영향으로 민주주의라고 하면, 개체민주주의를 넘어서는 개념이 없습니다. 그런데 화백회의를 몇 년 간 실제로 해 보면서, 화백회의는 공동체 민주주의의 산물이라는 점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삶의 단위가 공동체이었으며, 공동체를 떠나는 삶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할 수도 없었을 터입니다. 아시아, 특히 동북방 아시아 종족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전된 민주주의는 바로 공동체민주주의입니다. 공동체 내부에서 만인일치로 의사를 결정하였고, 공동체를 넘어서는 연합체들의 회의에서도 만인일치로 의사결정을 하였습니다. '화백에서 하는 회의, 또는 화백들이 하는 회의'는 공동체를 전제로 합니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하는 회의, 그리고 모든 사람이 하늘이며, 태양이라고 생각하는 공동체 안에서는 한없이 열려 있는 어울림의 원칙이 적용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만인일치(萬人一致)로 결론 나는 것이 바람직하겠지요. 아래 4번 항목에서 제시하는 모울도뷔에 임하는 마음가짐을 살펴보면 이 원칙을 구현하기 위해 얼마나 세심한 노력이 있었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공동체 민주주의는 단순하게 과거에 흘러간 역사적 유물이 아니라 오늘에 되살릴 필요가 있는 ‘오래된 미래’입니다. 실제로 ‘공동체 민주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현대 문명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대안을 찾기 위해 과거를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얻어졌습니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고 할 수 있지요.
"참고로 우리 옛말을 통해서 이를 살펴보겠습니다. '제비'란 요즘 말로 한다면 '총회'를 가리킵니다. 무슨 총회일까요? '비'는 원래 '뷔'로서 '이끄는 이'이며, 선비의 '비'와 같습니다. 즉 '비'는 각급 공동체의 지도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제'는 '모두'라는 말입니다. 한자어의 諸도 그 음가를 빌려 쓴 것입니다. 따라서 제비는 각급 지도자총회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옛 조선의 공동체대표자총회를 가리키는 말이 곧 제비인 것입니다. 옛 조선에는 제비 말고도 '비'(지도자)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높은 국가최고지도자회의를 '도뷔'라 했습니다. 즉 나라의 의사는 '제비'를 통해 결정되며, 그 집행회의는 '도뷔'에서 했던 것입니다.이제 나라는 여러 개의 공동체로 구성되는데, 우리말로 그것을 '무치'(한자로는 물길)라고 했습니다. 무치는 무쇠나 무싯날의 '무'처럼 일상성을 나타내는 '무'와 남성지도자를 가리키는 '치'의 결합어로서, 그것은 마을(모라)의 의사결정체이기도 했으며, 마을 자체를 가리키기도 했습니다. 무치(모라)는 집들로 구성되는데, 그 집의 지도자는 '아부지'였습니다. '밝음으로 이끄는 이'라는 뜻의 아부지, 그리고 그들이 모여 이룬 마을 차원의 '무치', 또 무치의 대표들이 모이는 나라 차원의 '도뷔', 모든 아부지들의 모임인 '제비' 등이 순차적으로 기능하였습니다. "(이상 한국학연구소장 박현 선생의 강의록 중에서)
3. 원탁회의와 화백회의가 살아 숨 쉴 수 있는 사회적 토대에 대하여
3-1. 원탁회의와 화백회의는 단순한 회의 기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문화입니다. 그리고 그 문화를 가능하게 했던 사회적 토대가 있습니다. 사회적 토대 없이 원탁회의와 화백회의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우리들이 무턱대고 누릴 수 있는 문화가 아닙니다. 생명축제에서 쓰인 구호대로 “누구나 화백회의를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화백회의를 할 수는” 없습니다.
3-2. 사회적 토대에 기초한 상부구조로서의 문화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유물사관’에서 이야기하는 토대-상부구조의 개념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과학적 사회주의를 구성하는 핵심 이론 중 하나가 토대-상부구조입니다. 한 마디로 이야기하자면, 법률·정치·종교·문화 등의 상부구조는 토대, 즉 하부구조에 조응해서 형성된다고 하는 이론입니다. 인간이 그 생활을 사회적으로 영위할 때 그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존재하는 사회관계, 즉 물질적인 생산력에 상응하는 생산관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러한 생산관계의 총체인 사회의 경제적 구조를 ‘토대’라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토대와 상부구조를 포괄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사회구성체입니다.
3-3. 여기서 이야기하는 사회적 토대는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에서의 경제적 사회구성체에서의 토대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인디언 사회와 같은 사회구성체, 또는 고구려-백제-신라 중기 때와 같은 사회 구성체이면 원탁회의와 화백회의와 같은 문화가 깃드는 데에 좋은 조건일 것입니다.
3-4. 여기서 이야기하는 토대의 핵심은 마음이 이끄는 공동체입니다. 옛날 우리 사회에 존재했던 뷔더(부도)나 솟터(소도)등이 바로 그러한 공동체이지요. 또한 리더십이 ‘밝은 사람’에게 있는 사회가 그러한 공동체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공동체는 사람을 하늘로 아는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입니다. 물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일시적으로, 또는 국지적으로 그러한 사회가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하늘 사람이 되는 것을 목표로 구성된 공동체에서는 일상적으로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나아가서 대안 체제를 구축하려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에서 꽃을 피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3-5. 화백회의에 대하여 가르침을 얻은 이후 기회만 있다면, 어디든지 달려가 화백회의를 실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에 비하면 요즈음은 무척 신중한 편입니다. 화백회의를 하려고 하는 모임의 성격을 살피고 있지요. 위에서 말한 공동체로의 진입 정도가 깊을수록 원탁회의와 화백회의는 제 기능을 발휘합니다.
4. ‘모울도뷔’에 임하는 마음가짐
① 모두가 자유롭게 자기 의사를 내놓는다.
② 자기 의사를 내놓되 자기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낮춘다.
③ 자기를 낮출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자기의 참모습을 돌아본다.
④ 아울러 남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에게 이야기한다. 즉,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잡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신의 의견을 밝힌다.
⑤ 그것도 겉으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 몸을 거칠 뿐, 몸에 의해서 이끌려가지 않는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⑥ 자신의 의견과 다른 이야기가 나오면 그 이야기를 가지고 거꾸로 자기 자신 속에서 '아, 나는 이런 부분이 없었구나, 나는 이런 부분이 다르게 되어 있었구나.' 라고 되돌이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막아가고, 그 치우친 걸 막아 가는 방법을 통해 자기 삶의 정신적 영역을 넓혀 간다. 그래서 마침내 크게 원만해지려고 하는 것이 모울도뷔의 원칙임을 자신이 속에서 뚜렷이 한다.
⑦ 자신을 낮추지 않으면 자신의 이야기가 좀 더 존중되기를 바라고, 또 자기의 생각이 좀 더 정당한 논리적 근거를 갖추고 있음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그런 어리석은 욕심을 버리고 자기가 하고 있는 생각이 다만 이렇다는 것을 최선을 다해 말하면 족하다.
⑧ 그렇게 하려면 '나를 위해서 이것을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버린다. 정말 전체 공동체를 위해서 자신을 이익이 되게 하는 생각을 다 버리는 '버림'이 필요하다. 이러한 '버림'이 이루어짐으로써 지켜지는 것이 공동체이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신의 입장과 자신의 이해관계를 버리는 것이다.
⑨ 그렇게 하려면 공동체 전체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한다. 공동체가 곧 외형적으로 팽창된 자신의 또 다른 몸임을 자각하고 믿으며, 이 팽창된 몸을 전제로 해서 자기 성찰을 한다.
⑩ 외형의 팽창이 외형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곧 내가 되기 때문에 "그 커진 나를 통해 안으로도 나를 더 깊게 하고 더 섬세하게 해나갈 수 있다"라는 것에 대한 믿음과 실천이 필요하다.
⑪ 자기 자신만을 주장하는 작은 나에 대한 과감함 포기가 훨씬 더 넓은 나를 이룬다는 것에 대한 믿음, 그리고 좀더 구체적으로 그러한 것들을 준비해나가는 열성, 그런 열성에 있어서 조금씩 감정에 어긋나더라도 자기 자신을 충분히 자제할 수 있는 예법이 필요하다.
⑫ 마음속에서 다른 사람의 주장을 누르기 위해서 안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각과 주장을 살려 주려고 애를 쓰는 마음가짐으로 자기 주장을 내놓는다.
<이야기 3 인간을 넘어-인간과 함께, 3차원을 넘어-3차원과 더불어 >
인간을 넘어-인간과 함께
대안공동체에 참여하는 존재는 과연 인간뿐일까요? 언젠가부터 우리는 세상을 인간 중심으로 바라보는 습성이 생겼고, 지금은 그 습성이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우리말 ‘사람’에 대해서 그 근본 뜻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람’은 ‘사 +라 +ㅁ’ 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사’는 우리말에서 ‘밝음’을 의미하는 두 어소 중 하나입니다.(또 한 어소는 ‘아’입니다.) ‘라’는 ‘태양’을 의미합니다. ‘ㅁ'은 인격(人格)형, 또는 물격(物格)형 접미사입니다. 결국 ’사람‘은 ’인격화된 밝은 태양‘, 또는 ’생명을 가진 밝은 태양‘이라는 뜻으로서 예부터 인간만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인내천(人乃天)‘을 제대로 풀이하자면, ’생명이 곧 하늘‘입니다. 이런 점에서 북미원주민의 지혜를 우리에게 나누어주고 있는 서정록 선생의 다음 글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셋째, 인디언들의 회의방식은 사람중심이 아니라 생태적 차원, 또는 생명적, 우주적 차원의 회의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북미 인디언들이 생각하는 민주주의에 대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서구의 민주주의는 인간중심의 회의방식입니다. 오직 인간만이 참여하여 투표하고, 회의를 합니다. 그러나 북미 인디언들이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자연의 모든 동식물이 다 함께 참여하는 민주주의입니다. 마치 큰 나무가 있으면 그 아래 사람도 와서 쉬고, 벌레도 오고, 새들도 오고 짐승도 와서 쉬었다가는 것처럼 말이지요. 인디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생명(영혼)을 갖고 있고, 영적으로 평등하며, 거미줄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디언들의 회의방식에는 사람만이 아니라 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동물과 식물, 자연의 존재들이 모두 참여하는 형태로 진행됩니다. 물론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지요. 그러나 인디언들은 회의할 때 그들이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회의를 하는 것입니다. 회의의 내용이 다음 세대나 자연의 다른 존재들에게 부당하게 해가 된다고 할 때는 지체 없이 폐기하는 것도 그 때문이고요.”
이처럼 대안공동체는 인간을 넘어서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가 참여하며, 그들이 인간과 함께 하는 공동체입니다.
3차원을 넘어-3차원과 더불어
앞서서 대안공동체는 물질을 기준으로 단결하는 모임이 아니라, 마음이 이끄는 공동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3차원은 구체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의 오감(五感)을 통해서 감지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오감만으로는 감지할 수 없습니다. 구체성을 갖추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과 마하 가섭존자의 이심전심(以心傳心)은 3차원을 넘어서 전달되는 경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대안공동체에 참여하는 기준은 물질을 포함하되, 물질을 중심으로 하지 않습니다. ‘구성원들이 공동체에 참여하고자 하는 의지, 형편, 자질, 노력, 정성 등에 따라서 그 차별성이 흔쾌하게 존중된다’는 원칙은 바로 이런 취지에서 나옵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이 구체성을 갖추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3차원과 더불어 공동체가 활동합니다. 대안공동체는 뜻을 중심으로 단결하는 모임이기에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특정 지역에 근거지를 갖되, 지역 공동체만을 지향하지는 않습니다. 더 나아가서 지역 등의 구체성을 갖추지 아니하는 사이버 공동체도 의젓한 대안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아예 회원 명부가 없는 공동체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제 조직이나 모임, 공동체는 3차원을 넘어서 존재합니다. 또한 사이버 공동체는 언제든지 오프라인 모임을 가질 수 있듯이, 3차원과 더불어 존재합니다.
<이야기 4 홍익(弘益, 또는 공동체) 경제 시스템 >
공동체 안에서 경제, 즉 재화의 생산-교환-분배 시스템은 어떠한 원칙에 입각하여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 공동체를 구성하는 각 개인은 모두 하나의 근원에서 비롯된 하나입니다. 구체적 형상은 다 다르지만, 뿌리는 하나입니다. 구체적 형상이 다 다를 뿐만 아니라, 성질도 다 다르고, 재능도 제 각각입니다. 형상과 성질과 재능이 각각 다름에 따라서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에 그 쓰임새도 각각 다릅니다. 각 개인은 그 쓰임새에 따라 자신의 직분을 수행하며, 생존에 필요한 재화를 얻습니다. 쓰임새에 따라 적재적소가 이루어질 뿐, 쓰임새의 차별은 없습니다.
■ 공동체를 구성하는 각 개인이 경쟁의 결과에 따라 차별적으로 재화를 분배받는 일은 제한됩니다. 될 수 있으면, 각 구성원의 필요에 따른 분배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공동체에 기여하는 것보다 분배를 더 많이 받는 일이 있을 수 있고, 그 일이 자연스럽습니다.
■ 공동체 구성원들이 하나의 일터에 있을 수도 있지만, 꼭 그러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 오히려 다양한 일터에 있으면서 공동의 뜻으로 단결하는 것이 더 보편적일 수도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 한 바, 특정 지역에 기반하는 정착형 공동체와 함께 유목형 공동체가 일반화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 생산수단을 공동으로 소유할 것인가, 개인적으로 소유할 것인가 하는 점은 공동체의 성격에 따라 신축성 있게 이루어집니다. 사회적 소유와 개인적 소유 중 어느 것이 주된 측면인가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에 입각하여 결정할 일입니다. 다만, 사회적 소유라 하더라도 구성원들의 실질적인 통제가 가능해야 할 것이고, 개인적 소유라 하더라도 상속이 가능한 소유 관계보다는 일정 기간 동안의 점유가 더 장려되어야 하겠지요.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로 경제적 평등을 도모하는 일보다는, 호혜시장의 원리로 사회적 평등을 추구합니다.
■ 호혜시장(reprocity marcket)은 인류가 잃어버린 시장으로서, 밝은 미래를 위해서는 되살려야 할 시장입니다. 자본주의 교환시장은 이윤을 목표로 정글의 논리로 운영되는 시장입니다. 호혜시장은 나눔을 목표로 공생(共生)과 호혜(互惠)를 원리로 운영되는 시장입니다. 호혜시장에서는 국가 화폐보다는 공동체 화폐를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본주의 시장은 일대일 교환 관계 및 단일 화폐에 근거합니다. 이와는 다르게 호혜시장은 다(多) 주체 사이의 호환-순환관계 및 공동체 화폐에 근거합니다. 호혜시장에서는 교환시장의 국가 화폐가 격리시킨 생산과 소비(노동)의 틈을 좁힙니다. 호혜시장에 참여하는 사람은 생산자이면서도 소비자가 됩니다. 이윤추구를 일회적으로 유리하게끔 반복'해야만 잘 먹고 잘 살수 있기 때문에, 항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집요하게 일회적 이윤등락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 자본주의 경제 현실입니다. 이렇게 살다 보니 돈 많은 쪽으로 결국은 개미들의 재부는 흡수되고, 쉼 없는 이윤추구의 일회적 스트레스에 개미들의 몸과 마음이 모두 피폐해집니다. 호혜시장은 이를 막는 개미들의 자구책인 셈입니다. 일상 물자를 구매하고 소비하는 행위 자체가 다른 이를 돕는 일이 되고, 자신도 도움을 받습니다.
호혜시장에서 거래되는 재화 및 용역은 단순한 물건이나 서비스가 아니라 선물입니다. 호혜의 '사회적 경제적 관계'에서 자본주의적 물질과 재물은 더 이상 이윤과 축적의 도구가 아니게 됩니다. 재물과 물질이 '나를 살리고 서로를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선물(gift)로 그 본질이 바뀝니다. 선물이란 거기에 영혼이 담겨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영혼이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선물은 돌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마치 사람이 움직이며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듯이, 선물도 그렇게 관계를 맺고 사회적 순환을 하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선물을 받은 사람은 누군가에게 다시 선물을 하게 되고, 그렇게 선물은 돌고 돌면서 사회적 나눔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선물을 주는 사람에게 선물을 받는 사람은 “ 이미 ‘나’ 안에 있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 대안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빼앗지 못해 안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주려고 노력합니다. 주는 일과 착한 일은 그 일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보답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물질적인 보답이 아니라 정신적인 보답이지요. 최근 녹색평론 지에 실린 베르나르 리에테르의 다음 글은 우리에게 좋은 가르침을 줍니다.
“인류학자들은 호혜(互惠)적인 선물교환이 공동체의 기초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상업적 거래는 닫혀진 체계이다. 그와 대조적으로 선물은 열린 체계이다. 그것은 거래의 불균형을 낳고, 그 불균형은 장래의 가능한 거래로 바로잡아지는 것이다. 증여 과정은 금전적 교환이 하지 못하는 어떤 것을 창조해낸다....... 공동체(community)는 라틴어 cum과 munus(또는 munere)라는 두 말을 뿌리로 해서 나온 것이다. cum은 함께 (together), 서로간에(among each other)를 의미하고, munus는 선물(gift)을 의미하며, munere는 준다(to give)를 의미하는 동사이다. 따라서 community는 "서로 간에 주는 것"이다......"불교 승원의 규칙에 의하면, 비구와 비구니들은 돈을 받아서도 안 되고, 심지어 속인들과의 물물교환이나 거래에 종사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들은 전적으로 증여 경제 속에서만 산다. 속세의 후원자들이 승원을 위해 필요한 물자를 선물로서 제공하고, 승원은 그들의 후원자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선물로 준다. 이상적인 상황에서 이것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교환이며, 전적으로 자발적인 어떤 것이다. 이 경제에서 보답은 제공된 물자의 물질적 가치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물을 제공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의 마음의 순수성 속에서 이루어진다. 공동체는 정기적인 호혜적 교환을 통해 자양분을 얻지 못하면 쇠퇴하거나 사멸해버린다. 바로 이런 이유로 나는 공동체를 서로서로 선물을 존중하고, 그들의 선물이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 반드시 보답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사는 인간집단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이야기 5 대안공동체 문화의 핵심은 ‘하나 됨’입니다. >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갑(甲)과 을(乙)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인식 및 태도에 따라서 세 가지 유형의 사람이 있고, 그들이 영위하는 세 가지 유형의 문화가 있습니다. 갑과 을은 신(神)과 사람이기도 하고, 사람과 사람이기도 하고, 사람과 사람 이외의 생명이기도 하고, 사람과 자연이기도 합니다. 과거와 현재이기도 하고, 삶과 죽음이기도 하지요.
1)을은 갑이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2)을은 자신과 갑 사이에는 벽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갑이 을에게 일방적으로 베풀고, 을은 갑을 숭배하거나, 갑에게 복종합니다.
3)을과 갑 사이에 벽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갑으로 넘어갈 수 있는 다리가 있습니다. 갑과 을의 뿌리는 하나입니다. ‘하나의 근원에서 비롯된 서로 다른 하나’입니다. 둘 사이에는 의지를 갖고, 발심(發心)하여, 노력하면 건너갈 수 있습니다. 특별히 사람이 신으로 넘어가는 다리를 ‘사다리’라고 합니다. ‘사’가 ‘밝음’을 의미하는 어소(語素)이므로, ‘사다리’는 ‘밝음으로 가는 다리’‘라는 뜻입니다. 신과 하나가 될 수 있는 바라밀인 셈이지요.
첫째 유형에서 셋째 유형으로 가는 길이 짐승됨으로부터 사람됨으로 가는 길이며, 낮은 차원에서 높은 차원의 삶으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는 위의 세 가지 유형의 사람과 문화가 서로 뒤섞여 있습니다. 하나의 사람 안에서도 때로는 혼재합니다. 대안 공동체는 세 번째에 해당하는 사람들로 구성됩니다. 또한 아직 그러한 인식 및 태도를 몸에 붙이지 못했더라도, 그러한 삶을 지향하는 문화를 영위하는 공동체입니다. 대안 공동체는 삶의 고비마다, 즉 관혼상제(冠婚喪祭) 및 세시풍속 등에서 하나 됨을 지향하는 문화를 꽃 피웁니다. 한두 가지 사례를 살펴보겠습니다.
동맹(東盟), 영고(迎鼓), 무천(舞天) 등의 우리 겨레 전래의 제천의식(祭天儀式)은 신과 사람의 하나 됨을 간절히 염원하는 행사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신을 '한님'이라고 불렀습니다. 한님과 하나 됨을 바라며, 한님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근본을 찾아 가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님과 자신, 자신과 다른 사람 등이 어울려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생의 최대 목표이었습니다. 고대 제천의식을 ‘오래된 미래’로 우리 당대에 중창하려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정월 대보름놀이에 직간접으로 참여한 회수는 헤아리면, 아마 십여 회 정도 될 것입니다. 대보름놀이가 이루어지는 곳을 찾아 가기도 하고, 직접 기획을 하기도 하였으며, 단체 중심으로 하기도 했고, 특정 마을과 함께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행사가 재미있기도 했고, 어떤 때는 전통 민속-민중 문화를 복원한다는 생각으로 뿌듯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무언가 공허한 느낌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즐거워도 무언가 알맹이가 빠진 듯 했습니다. 그러그러 몇 해를 더 보낸 뒤에야 공동체 없이 공동체 문화는 있을 수 없다는 실천적 자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지난 해 말입니다. 올해 대보름놀이는 그러한 자각을 딛고 기획되었습니다. 먼저 강화 지역에서 뜻을 같이하는 가정, 스무 집 가량을 모집하여 미리 지신을 밟았습니다. 그리고 보름날에는 뜻의 공동체 마을을 의미하는 젯상을 설치하고, 각각 집을 상징하는 조왕반, 촛불, 소원지 등을 진설하고 각각 집에 복(伏)과 복(福)을 불러 들였습니다.
정월 대보름놀이는 이 세상 모든 만물과 만물 사이의 하나 됨을 추구하는 공동체에 깃들었던 문화이었습니다. 제천의식이 음력 10월 상달 초삼일에 신과 하나 됨을 바라는 문화라면, 정월 대보름놀이는 구체적으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던 마을에서 ‘마을 사람들의 하나 됨’ 및 마을과 땅님(地神)의 하나 됨을 추구하는 문화입니다. 그러한 공동체 마을이 없는 대보름놀이는 내용 없는 형식이거나, 박제화 된 민속놀이일 뿐이었습니다. 공동체 문화의 사회적 토대는 공동체이며, 그것도 하나 됨을 지상 명제로 하는 '뜻'의 공동체입니다.
지금 온전한 의미에서의 지역(마을) 공동체는 어쩌면 공상 속에나 존재한다고 생각됩니다. 옛 마을 공동체의 상당 부분은 하나의 지역에 모여 사는 뜻의 공동체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역’이나 ‘혈연’보다는 ‘뜻’이 핵심 구성 요소입니다. 물질을 기준으로 단결하는 공동체는 한계가 있습니다. 뜻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야말로 진정한 공동체입니다. 그 중에서도 현대 문명의 대안을 추구하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하는 뜻의 공동체가 대안 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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