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여정남과 박정희 시대
정운현, 다락방, 2015.12.10, 505쪽
여정남열사 평전이다.
우선 일지를 먼저 올립니다.
*일지 484-502
1944. 5. 7 대구 중구 전동(현 남일동)서 출생
1956. 2. 대로 종로 초등학교 졸업
1959. 2. 경북중학교 졸업
1960. 2. 28. 대구 2.28 학생 의거 참가.
1960. 4. 19. 4.19혁명
1961. 5. 16. 박정희 소장 일파 군사 쿠데타
1962. 2. 경국 고등학교 졸업(43회)
1962. 3. 5. 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입학
1964. 6. 3. [6.3사건]서울대 등 한일회담 반대 시외
1964. 6. 27. 한일회담 반대 시위로 여정남등 9명 ‘정지조건부 퇴학’처분
1964. 8. 14.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1차 인혁당 사건’ 발표
1965. 1. 20 1차 인혁당 사건 1심 선고
1965. 4. 경북대 학생서클 정사회(正思會) 결성
1965. 6. 27 군입대
1967. 12. 15. 병장 만기제대
1968. 3-5 경북대 학생서클 정사회 가입, 활동.
1969. 6. 25.
1970. 4. 경북대 학생서클 정진회(正進會) 가입(1971. 4월까지 활동)
1971. 4. 22. 민주수호 경북협의회 결성, 운영위원으로 참가. [공동대표: 최해청, 박삼세, 유한종, 주병환, 김순덕. / 총무위원장: 강창덕, / 선전위원장 겸 대변인: 이재문, / 청년위원장: 정만진, / 운영위원: 김종도, 이백희, 김호일, 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하재완, 나경일, 백정호, 우종수, 이태환, 강창덕, 이재문, 정만진, 여정남, 임구호. (178-179)]
1971. 4. 25. ‘정진회 필화사건’으로 구속(반공법 위반)
1971. 9. 1. 대구지법에서 보석으로 석방.
1971. 10. 15. 위수령 선포, 8개 대학 휴업령 발표.
1971. 10. 16. 경북대, 여정남 등 4명 제적 처분
1972. 10. 17. 박정희 정권 비상계엄 선포후 유신헌법 제정.
1972. 11. 유신헌법 반대 집회로 구속(포고령 위반, 징역 6월, 집유1년)
1973. 10. 2. 서울대 문리대생 300여명, 최초의 반유신 시위. [서울대 문리대 70-72학번인 나병식, 정문화, 황인성, 이근성, 정찬용, 도종수 등이 주도한 것으로(189)]
1973. 11. 5. 경북대 학생데모 주도(반독재민주구국선언문 작성)
1973. 12. 24. 함석헌 등 ‘헌법개정청원국민운동본부’결성, 여정남 상경함.
1974. 1. 8. 대통령 긴급조치 1, 2호 발표.
1974. 3. 21. 경북대 반유신 시위.
1974. 4. 3.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명의 유인물 배포와 함께 서울시내 각 대학서 반유신 시위(긴급조치 4호 발표)
1974. 4. 17. 긴급조치 위반으로 피체.
1974. 4. 20. -6. 8. 중앙정보부서 50일간 조사 받으면서 수차례 고문당함
1974. 4. 25.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 신직수 중앙정보부장, 민청학련 사건 및 ‘2차 인혁당 사건’ 발표.
1974. 5. 27. 민청학련 사건 주모자 54명 정식 기소, 재판 회부.
1974. 7. 9. 비상고등 군법회의 제1부 (검사 송종의)에서 이철, 유인태, 여정남등 7명 사형 구형.
1974. 7. 11. 비상보통군법회의 제2심판부(재판장 육군중장 박현식). 인혁당 피고인 21인 중 서도원, 하재완 등 7명에게 사형 선고.
1974. 7. 13. 비상보통군법회의(재판장 육군대장 이세호) 피고인 48명 중에 서도원, 도예종, 여정남, 이철, 유인태 등 27명에 대해서는 항소 기각, 나머지는 원심파기 판결.
1974. 12. 6. 조지 오글(한국명 오명걸) 목사 추방.
1975. 1. 6. 주한외국인 선교사 60인 대통령, 대법원장에게 무죄 탄원.
1975. 2. 여정남을 제외한 이철, 유인태, 김지하 등 민청학련 관련자 대부분 감형 또는 형집행정지 석방(인혁당 관련자는 제외)
1975. 2. 24.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인혁당 진상조사 결과 발표.
1975. 2. 25. 김지하, 동아일보에 ‘고행, 1974’ 연재(3회)
1975. 4. 8. 대법원(재판장 민복기) 상고 기각.
1975. 4. 9. 여정남 등 사형수 8명 사형집행.
1975. 4. 30. 제임스 시노트(한국명 진필세) 신부 추방.
1982. 12. 25. ‘인혁당 재건휘 사건’ 관련 생존자 전원 출소.
1988. 3. 2. 전형 면제 특별사면.
1989. 4. 9. 4.9 통일 열사 추모제 개최(경북대 대강당)
1993. 11. 3. 민청학련 계승사업회 창립.
1994. 4. 9. 민청학련사건 20주년 기념식 및 인혁당 추모제(서대문 독립 공원)
[1995년 6월 경북대 교정에 세워진 ‘여정남 추모비’를 경찰이 이적표현물이라며 압수해버렸다.(443)]
1998. 11. 9. ‘인혁당 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 (공동대표 이돈명 변호사, 문정현 신부) 결성
1998[9]. 3. 형 종료 후 10년 경과로 자동복권
2000. 10. 27. 제5회 인권영화제에 인혁당 다큐영화 ‘4월9일’ (감독 김태일 제작, 푸른영상)출품.
2001. 3. 17. 의문사위원회, 장석구 사건 직권 조사 개시
2001. 12. 7.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 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명예 회복 및 보상 신청
2002. 9. 12. 의문사 위원회. “1.2차 인혁당 사건은 중앙정보부의 조작극”이라고 발표.
2002. 12. 10. 인혁당 사형수 8명 유가족 서울 형사 지방법원에 재심 신청
2004. 11. 2. 국정원 과서사 진실규명위, 인혁당 재건휘 사건 조사 개시.
2004. 12. ‘민청학련, 인혁당 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정화영, 부위원장 유진숙) 결성
2005. 4. 8. 명동성당에서 인혁당 희생자 30주기 추모제 개최.
2005. 12. 7. 국정원 과서사 진실 규명위, 중앙정보부의 ‘인혁당 재건위 사건’ 조작, 과장 인정.
2005. 12. 27. 서울 지법, 인혁당 재건위 사건 재심 결정.
2006. 1. 23. 민주화보상심의위, 인혁당 관련자 16명 민주화 유공자 인정.
2006. 12. 8. 민주화보상심의위, 인혁당 관련자 5명 민주화 유공자로 추가 인정.
2007. 1. 23. 서울지법, ‘인혁당 사형수’ 8인에 대한 재심서 무죄 선고. [‘제2차 인혁당 사건’(일명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재심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
2007. 8. 21. 법원, ‘인혁당 사형수’ 8인 유족(46명)에 국가 배상 결정.
2008. 1. 법원 인혁당 관련자 전창일 등 14명 재심 공판서 무죄 선고.
1. 23 재판부는 전창일 나경일 등 9명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461)
2008. 9. 법원, 인혁당 관련자 이성재 등 2명 재심 공판서 무죄 선고.
2009. 2. 26. 여정남 모교 경북대에서 명예 졸업장 받음.
2010. 4. 10. 경북대 캠퍼스에 ‘여정남 공원’ 조성 및 추모비 제막.
2010. 8. 18. 여정남 유가족 경북대에 ‘여정남 장학금’ 1억원 전달
2013. 4. 13. 여정남 기념사업회 창립총회
2013. 11. 서울고법, 1차 인혁당 사건 재심서 무죄 선고.
2014. 12. 23. 제인 시노트 신부 선종(85세)
2015. 5. 30. 대법원, 1차 인혁당 사건 무죄 확정.
2015. 11. 민청학련, 인혁당 진상규명위원회, 청년 여정남과 박정희 시대(정운현, 사랑방, 2015)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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