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이사명연무분별 ( 理 事 溟 然 無 分 別 )
理: 이치 이 / 事:일 사 / 溟: 어두울 명 / 然 : 그러할 연 / 無: 없을 무 / 分 : 나눌 분 / 別 : 나눌 분
이理와 사事가 드러나지 않아 분별함이 없으니
< 설잠스님 >
이理를 설하고 사事를 설함에 비로 천 가지가 있더라도 "깊고 깊은 참성품과 자성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참성품의 이치는 미묘한 작용이 끊임없고, 참성품의 사事는 법과 법이 항상 원융하도다.
.이理는 근본, 본체. 한마음 , 하나..라고도 하고
사事는 현상, 작용이라고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물로 말하면
理이는 축축한 습기, 습도를 말하고
事사는 얼음으로도 나타나고
이슬로도 나타나고 안개로도 나타나서
여러 가지 형형색색으로 나타나는 것이 입니다.
본질계 현상계라고도 얘기를 하는데,
본질이 바로 물의 습기라면,
현상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나니까.
사事를 현상계(작용)라고도 합니다.
그러면 이理(근본)라고 하는 것은 생사를 초월해서,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고,
큰 것도 없고 적은 것도 없고,
일체 현상계를 초월한 영원무궁한 그런 세계를 말합니다.
그게 理이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생사와 고통과 윤회를 다 초월한 본질의 세계는 현상을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이 冥然명연이라는 말은 불이, 둘이 아니다. 이런 뜻입니다.
不二불이라는 말이 그게 바로 冥然명연입니다.
하나가 된다. 둘이 아니다는 뜻입니다..
< 설잠스님 >
동쪽 숲이 빽빽함에 남쪽 산이 우뚝함은
보현의 경계에 문수의 면목이요
덩쿨 잡고 정상에 올라 병을 쥐고
연꽃을 따는 것은 문수의 지혜에 묘용이다.
연기緣起할 때에 분명코 자성이 없으되 자성이 없는 데서
언제나 연기緣起하나니,
대체 자세히 알기나 하는가
"하나의 지위가 일체의 지위를 구족함이니
색色도 아니고 심心도 아니며 행업行業도 아니로다."
근본자리(理)를 문수의 지혜로 표현하셨고
작용(事)을 보현의 실천행으로 표현 하셨습니다.
문수와 보현이 둘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연기(緣起)라 함은 '이것이 있으므로해서 저것이 있다'는 의미로
경계의 대상은 독단적으로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작은 것은 상대적으로 큰것이 있기에 작다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고
높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낮은 것이 있기에 높다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기(緣起)는 현상계의 차별적인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고
이러한 차별적은 세계는 특정한 자성이 없기에
천차만별의 묘용으로 작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딸이 되었다
이모가 되었다 직원이 되었다
부모가 되었다 하면서
상대에 따라 찰나 찰나 작용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고정된 자성이 있다면 상대에 따라
유연하게 작용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묘용(事)에 조작이 전혀 개입되지 않을 뿐더러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理와事가 원융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理事는 (하나)
색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고 행업 아니면서도
색도 되고 마음도 되고 행업도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理와 사事
무無와 유有가 둘이 아니면서
질서 정연하게 움죽거리고 있습니다.
내가 이 순간 이렇게 생생하게 움죽거리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