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길목에서/백양로
삶의 길목에서 나의 인생항로 백양로를 떠난 지도, 어느덧 50여 년 세월이 흘렀다. 2023년 올해는 "연세대 졸업50주년기념 재상봉행사"가 총장공관에서 열린다. "누가 '세월이 강물처럼 흐른다'고 하였던가?"
바람처럼 파도처럼 미친 듯이 밀려오는 세월을 발 벗고 가슴으로 막아보려고 해도, 어찌 흐르는 세월을 막을 수 있겠나! 세월의 무게 앞에 머리는 반백이 되고, 얼굴은 주름살로 더덕더덕 삭으러들었다. 저 하늘에 빛나는 해와 달, 별만이 예전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나를 반겨주며 내 영혼을 달래 준다.
내가 다녔던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는 해방되던 해인, 1945년 10월 6일 본관에 있던 문과대학에서 태어났다. 1950년에는 첫 졸업생 44명이 배출되었다. 아! 정치외교학과, 일제 강점기라면 꿈도 꾸지 못할 우리 민족에게는 귀한 학과다. 연세대는 8.15 해방이 되자마자 신생 독립국가에 필요한 정치인과 외교관 양성을 위해, 발 빠르게 정치외교학과를 신설하였다. 1958년에는 미 제5공군의 지원으로, 광복관이 건립되어 그리로 옮겨졌다. 이제 70주년이 되었고, 졸업생도 5,000여 명이나 된다.
내가 대학에 들어갈 때인 1969년은, 대입 예비고사가 최초로 도입된 해이기도 하다. 다행스럽게도 관악산 바라보는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합격하여, 내 삶의 길목에서 중요한 인생항로인 백양로를 밟게 되었다. 특별히 특기가 없는 나는 정치학을 전공하면, 최소한 국회의원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그것은 한갓 허망한 꿈이라는 것을 정치학개론 첫 시간에, 이 모교수의 말을 듣고 금방 깨달았다.
“정치외교학과는 정치인이 된 후에 필요한 학문을 가르친다.'그럼 국회의원 되는 방법은 가르쳐 주지 않는 거로구나.'
나는 속으로 너무 실망스러웠다. 동기생들이 자기소개를 할 때에는 거다다 장래 되고자 하는 부푼 꿈을 내비치기도 하였다. 지금은 그 꿈이 모두 실현되었기를 기대해본다. 세월이 한참 흐르고 보니, '정치가가 되려면 권력으에 미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설쳐 돼야 한다.'는 것을 안 배워도 알거 같다.
대학교 다닐 때에는 정문인 백양로를 들락날락하며, 넓은 캠퍼스에서 스나무밭 청송대에서 낭만과 꿈에 부푼 젊은 시절을 보냈다. 나는 그 시절가를 이용해 등산부, 외교문제연구회 동아리에 참여했다. 한번은 경희대에서 개최한 문교부장관 연두교서 발표회에 참석하여, 장관처럼 모의 연설도해봤다.
3선 개헌 반대, 유신반대, 교련반대 데모로, 어떤 때에는 한 학기 동안 후교령으로 학교 가는 것도 힘들었다. 졸업논문쓰고도 지도교수 못 만나 애를태운 적도 있었다. 데모는 정외과가 선봉장이다. 한번은 시위진압경찰에 밀려 이대 근처 대로변 도랑에 빠진 적도 있었다. 그때 꼬리뼈를 다쳐 엄청 고생했었다. 신촌 주막집에서 막걸리 먹고 돈이 없어, 붙잡히지 않으려고 서로빨리 나가려 했던 일도 생각난다.
친구 중에 사당동에서 딸기와 장미밭을 경작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 집에는 자주 놀러가기도 하였다. 공부의 폭을 넓힌다고 법학과나 문과대학에서 형법과 중급독일어, 성격심리학, 헤겔철학 강의 등을 듣는 바람에, 학점은 썩 좋지 않았다. 다른 학과 학생에게는 점수를 잘 주지 않는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정법대 건물인 광복관 앞에 있는 벤치에 앉아 수업시간을 기다리던 시절이 엊그제 같아 보인다. 그런데 파도처럼 밀어닥친 세월은 반백의 방파제마저 무너뜨렸다. 대학 2학년 때, 고등고시 예비시험(당시는 고시는 대학졸업자만 응시 가능)에 합격하였다. 그래서 졸업 전에도 고시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광복관 화백실 공부방에서 공부하며 데모도 하였다. 연고전이 있는 날 명동은 우리 연대의 맥주 파티장이기도 하였다. 맥주 값은 옆자리에 앉아 있는 선배들의 몫이었다.
대학교 4학년 때에는 여름방학에 친구와 같이 경북 청도군 적천사 도솔암에 고시 공부하러 간 적도 있다. 대학교 졸업식 날 고시와 겹쳐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쉽다. 그렇게 나의 인생항로는 졸업식장에도 참석못한 채, 백양로를 떠나야만 했다. 나의인생항로백양로 연정 24기다. 고시를 더 보기 위해서는 군대를 연기해야 하는 다급한 상황도 있었다. 다행히도 전문대학원인 서울대행정대학원(졸업하면 주사)에 합격하였다. 마침내 1974년 제15회 행정고등고시에도 합격하고, 군대도 해군장교 (정훈관)로 복무하게 되었다.
그동안 국세청과 상공부에서, 국세, 산업통상, 무역, 에너지 업무를 담당하였다. 공직생활을 통하여 훈·포장도 받았고, 말년에는 짬을 내어 박사학위도 받았다. 공직생활 중 결혼도 하였다. 정외과 은사 추헌수 교수가 주례라고 MBC 아나운서의 사회로, 프레스센터에서 혼례도 올렸다. 그리고 1남 2녀 애들도 낳았다.
나로서는 공직생활이 참 보람이 있었던 것 같다. 시류를 못 다 돈과 명예 권세는 얻지 못하였지만, 몽테뉴가 말하는 "명예를 얻기 위해 양심을 버리지 않는” 공직생활을 하였다. 행복한 삶, 누구나 바라는 소망이다. 나의 행복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는 불행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몽테뉴의 말이 새롭게 다가온다. 그만큼 행복한 삶은 쉬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한 달에 한번 모이는 동기모임에 가끔 나갔지만, 저들마다 바빠서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졸업 25주년 행사에는 부부동반으로 참석하여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그때만 해도 모두가 직장생활로 출창인 때였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어느덧 사회의 은퇴자가 되었다. 이 시기에 시인과 수필가, 문학평론가로 데뷔한 것 참으로 잘한 것 같다. 이제 시즌수, 수필 한 편을 내 인생의 흔적으로 남길 수 있게 되었다.
은퇴자가 하는 일정 중 하나는 병원에 가는 일이다. 가끔 세브란스병원에 갔을 때면, 짬을 내어 광복관 앞에도 가봤다. 윤동주 문학 동산에도 가보청송대 소나무 숲길을 걸어보기도 하였다. 그윽한 청송대 숲길, 내가 대학다닐 때하고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다. 어쩌면 변한 것이 있다면 내 마음과 모습이다. 저기 백양로를 걸어가는 활기찬 대학생 젊은이를 바라볼 때면, 더욱 그런 것 같다.
지금은 삶의 길목에서 나의 인생항로인 백양로엔 은행나무가 심어져 있고, 백양목은 딱 한그루만 남아 있다. 그래도 내 머리 속엔 나의 인생항로의출발지인 백양로는 영원히 남아있을 거다. 어쩌면 이 수필과 백양로 시 한수로 역사 속에 새겨질거다.
<백양로>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 믿고 소 팔고 논 팔아등록금 대주시던 부모님의 은덕 가슴에고이 간직한 채
백양로 캠퍼스에 날개를 펴고 청운의 꿈을실현하리라는 굳은 의지 되새기며"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건학 정신으로 형설의 공을 쌓고 쌓았던학창시절
때로는 캠퍼스를 박차고 거리로 나가 자유를달라고 외치고때로는 청송대 푸른 숲속에서 낭만을 즐기며
연고전이 열릴 때만큼은 어깨동무하고목청이 터져라응원가를 부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버린 시간의 조각들
백양로를 뒤로 한 채 연세대 나왔다고 우쭐대며 조국과 사회에 몸 바쳐왔던 지난 50년 세월
눈앞에 보이는 재물과 권세, 명예다 얻겠다고 발로 뛰던 혈기왕성했던 젊은 날의 모습이제는 다 역사의 뒤안길로 내려놓고
백양로를 다시 찾은 졸업 50주년 동기생들 머리는 백발이 성성하고 얼굴엔 잔주름이 더덕더덕 쌓여 있는 모습세월의 무상함에 눈시울이 발갛게발갛게 달아오른다.
이제 꿈에 그리던 반백의 졸업 50주년을, 그리운 얼굴들과 함께 즐거운 두음으로 맞이하게 되었다. 나는 졸업 50주년이 새로운 출발이라 생각하며, 특양로를 걷고 청송대도 다시 힘차게 걸어본다. 그런 마음에서 연세대 건학정신을 다시 되새겨 본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성경말씀(요한복음 8:31~32)을 바탕으로 진리와 자유의 정신을 체득한 지도자를 양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