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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현의 현대시 읽기
시와 환유·1
박대현(문학평론가)
환유의 개념과 의미 영역
환유(metonymy)는 두 대상의 인접성에 근거한 비유다. 이는 대상의 유사성에 근거한 은유와의 본질적 차이다.환유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기원전 1세기경 그리스 수사학자 트리폰(Tripon)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은유에 대한 최초의 언급(아리스토텔레스) 이후 3세기 정도 경과하고 나서야 환유 개념이 분화되어 나온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이해되고 있는 환유의 종류들은 그로부터 1세기가 흐른 뒤 퀸틸리아누스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다음과 같다.
① 내용물 대신 그릇을 쓰는 경우: “잔을 비우다”, “냄비가 끓는다”
② 행위, 생산물, 소유 대상 대신 행위자를 쓰는 경우: “워즈워스를 읽다”, “백석을 읽다”
③ 결과 대신 원인을 쓰는 경우: “그는 땀 흘리며 가족을 부양한다”, “얼굴에 세월이 가득하다”
④ 특성 대신 시간이나 장소를 쓰는 경우: “6.25에 버금가는 충격이다”, “청와대에서 새로운 정책을 발표했다”
⑤ 소유자나 사용자 대신 연관된 사물을 쓰는 경우: “메스를 들다”, “유니폼을 벗다”
그러나 위의 예들은 모두 죽은 비유로서의 환유다. 즉, 죽은 환유다. 시적 긴장을 제공하는 비유로서의 기능을 하지 않는다. 물론 은유 역시 우리의 언어와 사고를 포함하여 문화적 근간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대부분 ‘죽은 은유’다. ‘새로운 은유’는 창조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죽은 은유’에 비해서 훨씬 적다. 환유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은유와 환유는 거의 대가가 ‘죽은’ 비유에 속한다.그렇다면, 은유와 환유 모두 동일하게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와 사고의 기반을 이룬다고 할 수 있고, 또한 그것들은 대부분 ‘죽은’ 은유와 환유이며, 그 위에서 ‘새로운’ 은유와 환유가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은유와 환유는 시적 긴장의 발생이라는 관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은유가 서로 다른 개념 영역에서 일어나고, 환유가 서로 같은 개념 영역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이 그것이다.이 차이는 매우 중요한 것인데, 왜냐하면 은유가 서로 다른 의미 영역에서 의미의 충돌과 전이를 발생시키는 반면, 환유가 단일한 의미 영역 속에 있으므로 의미의 충돌과 전이를 발생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김춘수, 「나의 하나님」)라고 했을 때, “나의 하나님”과 “늙은 비애”라는 두 개념 영역 사이에서 다양하고 다중적이고 복합적인 의미 이해의 가능성이 발생한다. 그러나 “나는 백석을 즐겨 읽는다”고 했을 때, 백석은 곧 백석의 작품들을 말한다. 백석은 “백석의 작품들”이라는 단일한 의미를 지시한다. 시적 긴장을 유발하는 의미의 충돌과 전이를 발생시키지는 않는 것이다.
그래서 레이코프와 존슨은 은유의 중요한 기능이 한 사물을 다른 사물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방식으로서의 이해라면, 환유는인접한 개체를 통해 다른 개체를 대신하는 지시 기능을 갖는다고 말한다. 은유에는 두 개의 의미 영역이 있는 반면, 환유에는 한 개의 의미 영역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바로 이 때문에 은유에 비해 환유의 시적 긴장이 덜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수사학의 역사에서 은유에 비해 환유가 홀대되어 왔던 근본적인 원인이다.
2. 환유의 층위: 구조론적 환유와 의미론적 환유
환유를 지배하는 핵심적인 원리는 인접성이다. 김준오는 환유의 원리를 지배하는 인접성을 공간적·시간적 인접성과 인과관계의 논리적 인접성으로 보다 구체화한 바 있다.인접성을 환유의 기본 원리로 최초로 언급한 이가 로만 야콥슨이다. 로만 야콥슨은 구조주의 언어학을 토대로 환유를 시적 기능의 차원으로 본격적으로 승격시킨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은유에 비해 홀대되어 온 환유를 시적 기능의 중요한 자질로 본격적으로 격상시킨 것이다.
하지만 야콥슨이 설명하는 환유는 구조론적 환유와 의미론적 환유로 나뉜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한다.야콥슨의 환유는 그것의 원리가 되는 인접성이 의미론과 구조론 중 어디에 속하느냐에 따라 구분된다. 전통적인 의미의 환유는 일상의 구체적인 경험에 근거한 의미론적 인접성에 근거하는 반면, 야콥슨이 주목하는 환유는 주로 문장들의 구성성분 결합에서 발생하는 구조론적 인접성에 근거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구조론적 환유와 의미론적 환유를 통합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낸다. 먼저 야콥슨이 설명하는 구조론적 환유를 보도록 하자.
야콥슨은 소쉬르의 연합관계와 통합관계를 각각 계열체와 통합체라는 개념으로 수용하여 문학의 구조를 언어학적으로 규명한다. 그는 계열체와 통합체의 구성 원리를 ‘선택’과 ‘결합’으로 규정했는데, 계열체의 선택은 등가성·유사성·상이성 등에 근거하며, 통합체의 결합은 인접성에 근거한다고 분석했다.나아가 그는 이러한 유사성과 인접성을 각각 은유와 환유를 생성하는 핵심 원리로 주목했다.
그런데 야콥슨은 여기서 특이하게도 선택의 원리를 의미론적 관계로 이해하는 반면에, 결합의 원리는 구조론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다. 은유와 환유의 기본 원리를 이해하는 층위가 의미론과 구조론으로 서로 어긋난다. 다시 말해 은유의 원리인 ‘유사성’은 의미론적 관계에 충실한 반면, 환유의 원리인 ‘인접성’은 의미론적 관계가 아니라 문장의 결합 관계라는 구조론적 관계로 보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야콥슨은 환유를 구조론적 관계에서 발생한 개념으로 이해하면서 ‘문법적 환유’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여기서 ‘문법적 환유’는 운율, 언어유희(paronomasia), 혼성어(portmanteau), 중복법(polyptoton), 구문 생략 등 문장의 통합체를 이루는 모든 구성성분의 인접성에서 발생하는 시적 효과에 관여하는 구조적 특질이다.그에 따르면, 이와 같은 통합체(문법적 환유)가 문학의 의미론적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이처럼 야콥슨은 구조론적 차원의 문법적 환유가 발생시키는 시의 특질을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환유를 구조론적 차원을 벗어나게 하여 의미론적 차원으로 도약시킨다. “시적 기능은 등가의 원리를 선택의 축에서 결합의 축으로 투사한다. 다시 말하여 등가성이 배열의 구성 요소로 승격된다”는 진술이 그렇다.
야콥슨의 이 진술은 은유의 시적 효과가 환유의 시적 효과에 통합되어 변주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런데 시행은 선조적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시는 구조론적으로 통합체(환유)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어서, ‘선택의 축’(계열체)이 ‘결합의 축’(통합체)으로 투사된다는 진술은 당연한 것이다. 「시와 은유·1」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는, “사람은 혼자 펄럭이고”(강은교, 「자전·1」)를 다시 살펴보도록 하자.
김준오가 상세히 설명하고 있듯이, “깃발의 움직임≒사람의 움직임”은 유사성(등가성)에 기반한 의미론적 관계의 은유를 이룬다. 이를 구조론적 관계의 통합체(환유) 차원으로 펼쳐낸 표현이 바로 “깃발은 사람이다”가 된다. 이 문장은 “깃발≒사람”이라는, 계열체의 유사성에 근거한 두 선택지를 통합체(문법적 환유)로 배열한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선택의 축’(계열체)이 ‘결합의 축’(통합체)로 투사되는 효과로서의 시적 기능을 이해할 수 있다. “깃발(≒사람)”이 통합체(“깃발은 사람이다”)로 실현될 때 의미의 충돌과 전이가 발생한다. 은유에서 발생하는 의미의 충돌과 전이는 구조론적 환유 없이는 실현되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김준오는 여기서 더 나아가 “사람은 혼자 펄럭이고”를 가져오는데, “깃발은 혼자 펄럭이고”와 “사람은 혼자 몸부림치고”를 대각으로 연결한 것이다. “사람”과 “펄럭이다”의 결합은 의미(이미지)의 역동성을 더욱 증가시킨다. 야콥슨의 환유가 구조론에 머물지 않고 의미론으로 나아가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3. 라캉의 정신분석학과 환유의 위상
은유와 환유의 기능을 정신분석학적으로 규명한 이는 라캉이다. 그는 ‘증상은 은유이고 욕망은 환유’라고 말한다.그에 따르면 욕망의 흐름은 기표와 기표 사이를 미끄러지는 환유의 형태로 나타난다. 욕망은 결여(lack)를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기표로 미끄러진다. 돈을 벌면 명예를 욕망하고, 명예를 얻으면 권력을 욕망하는 식이다. 결여는 채워지지 않는다. 돈, 명예, 권력 등은 사실상 텅 빈 기표(시니피앙)다. 그래서 기표들의 연쇄를 따라 계속 미끄러지는 욕망의 형식이 바로 환유다. 이를 라캉의 환유 공식으로 드러내면 다음과 같다.
f(S...S')S ≅S(-)s
위는 널리 알려졌듯이 환유의 구조를 드러내는 라캉의 환유 공식이다. f는 함수(function)를, S와 S'는 기표(시니피앙; signifiiant)를 나타낸다. (S...S')는 S와 S' 사이에 발생하는 시니피앙의 연쇄를 의미한다. 즉, 좌측 항의 f(S...S')S는 시니피앙의 연쇄로부터 발생하는 기표 S를 뜻한다. 그리고 결국 이 공식은 좌측 항의f(S...S')S는 우측 항의 S(-)s와 일치한다(≅)는 의미다. 여기서 우측 항의 s는 기의(시니피에; signifié)를 뜻한다. S와 s 사이의 (-)는 기표S와 기의s를 가르는(단절을 의미하는) 부정의 의미다. 그러니까 우측 항의 S(-)s는 좌측 항의 f(S...S')S의 결괏값임에도 불구하고, S(기표)에 결코 s(기의)가 들어설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 공식에 따르면, 욕망의 추동은 결여(lack)를 메우기 위해 시니피앙의 연쇄를 끊임없이 시도하지만, 기표의 텅 빈 중심 때문에 최종적인 기의(의미)의 포착이라는 욕망의 충족에 도달하지 못한다.
기의의 궁극은 진리다. 모든 기의는 궁극적인 진리를 지향한다. 예컨대, 사랑이라는 진리를 생각해 보자. 라캉이 제시했듯이 “사랑은 태양 속에서 웃는 자갈”과도 같은 시구 속에서 사랑의 의미를 재창조할지라도, 그것은 나르시시즘적 환상에서 비롯되는 정신적인 증상에 지니지 않는다. 이 은유는 실재의 공백을 시니피앙으로 가림으로써 허구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고착시키는 환상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증상으로서의 은유다.이 문장만으로는 결코 사랑의 의미가 온전히 충족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에 관한 수많은 은유들이 지속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며, 그럼에도 그 수많은 은유들은 시니피앙의 연쇄로서의 환유 구조로 되돌아가고 만다. 어떤 말로도 어떠한 표현으로도 사랑은 충족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사랑에 관한 은유는 또 다른 은유를 찾아서 환유 구조의 시니피앙 연쇄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은유와 환유를 무의식의 두 축으로 설정하며, 은유와 환유의 위상을 재정립한다. 은유라는 증상이 고착되는 지점 아래에는 언제나 욕망의 환유적 흐름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수사학의 역사는 환유보다 은유의 기능에 보다 주목했다. 하지만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은유만큼이나 환유를 주목한다. 욕망의 환유적 연쇄가 멈추지 않고 작동함에도 불구하고 채울 수 없는 근원적 결여를 일시적으로 봉합하고자 하는 증상이 은유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환유는 근원적 결여를 가리는 증상으로서의 은유를 끊임없이 밀어 올리는 욕망의 근본 구조로 작용한다. 여기서 우리는 환유보다 은유를 더 중시한 수사학의 역사와 다른 라캉의 관점을 보게 된다.
라캉에 따르면 환유는 인간 욕망의 근본 구조이고 은유는 근원적 결여를 봉합하는 증상이다. 은유는 진리의 부재를 진리의 존재로 뒤바꾸는 도착적인 증상이다. 진리의 존재라는 환상의 “현혹적인 상”에 고착되는 것이 바로 은유다.그래서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시니피에에 대한 시니피앙의 우위뿐만 아니라 은유에 대한 환유의 우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은유에서 환유로의 우위 관계의 역전은 진리 중심의 세계관을 전복시킨다. 정신분석학에서 은유의 몰락은 이 세계에 절대적 진리라는 것이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환유의 위상이 제고提高된다.
4. 은유와 환유의 정치 수사학
정치 이론과 무관한 라캉의 이론을 정치적으로 사유하기 시작한 이들이 라캉 좌파(Lacanian Left)에 속한 일군의 철학자들이다. 라캉 좌파의 대표적 철학자인 슬라보예 지젝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성취된 진리는 그 자체를 파괴한다; 완성된 진리는 전체주의로 변모한다. 그러므로 진리의 윤리학은 강제될 수 없는, 명명불가능한 실재를 존중하는 윤리학이다.
이와 같은 라캉 좌파의 논리를 정치에 적용하면, 민주주의조차 완성된 진리에 기반한 체제가 될 수 없음은 당연하다. 오히려 민주주의는 “확실성이라는 표지의 해체”에 기반해야 한다. 민주주의가 확실성, 즉 실정성이 아니라 부정성(negativity)에 기반해야 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전체주의로 전락하는 것은 순식간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 요구되는 진리로서의 이데올로기는 역설적이게도 공백으로서의 이데올로기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제국/식민, 백인/흑인, 남성/여성, 이성애/퀴어 등의 이항대립에 작용하는 우열 관계라는 ‘확실성의 표지’를 해체한 곳에서 형성된다. 민주주의는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는 수직적인 은유의 세계관이 아니라 절대적 진리가 비어 있는 수평적인 환유의 세계관을 추구한다. 이것이 은유와 환유가 정치의 수사학으로 나아가는 이론적인 근거가 된다.
탈식민주의 이론가 호미 바바는 은유와 환유를 정치의 수사학으로 적극적으로 전유한다. 그는 피식민자(피지배자)가 제국의 식민자(지배자)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거점으로 환유를 주목했다. 제국의 식민자는 지배의 정당성을 위해 피식민자에게 제국주의적 동일성을 강요하는데 이것이 나르시시즘적 위치에 놓인 은유다. 동일하지 않은데 동일하다고 간주하는 것이 나르시시즘 환상에 근거한 은유다. 하지만 완전한 동일성은 식민자의 권위를 상실케 하므로 피식민자에 차이로서의 결핍(혹은 열등성)을 기입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이 바로 공격적인 위치에 놓인 환유다. 은유의 동일성에 추방당한 피식민자들은 제국의 식민자에게 지배당해야만 하는 열등한 존재, 즉 ‘현존의 환유(들)’로 전락한다.하지만 ‘환유’는 역설적으로 피식민자가 식민자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정치적 실존의 근거로 기능한다. 제국을 향한 피식민자의 모방 욕망이 환유의 축을 따라 저항과 반란의 충동(drive)으로 전환되면서 은유로서의 동일성 효과가 분열되기 때문이다.
정치의 수사학에서 은유가 진리의 존엄과 특권을 생성하는 장치라면, 환유는 진리의 자리를 고정하지 않고 연쇄적인 이동으로 미끄러지게 하는 장치다. 그래서 제국/식민지, 백인/유색 인종, 남성/여성, 이성애/퀴어 등으로 위계화된 세계관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탈중심주의 시학에서 환유는 필연적으로 요청될 수밖에 없다. 김혜순의 다음 진술은 환유적 세계관을 중심으로 한 시학의 의미를 선명히 드러낸다.
시에서 환유적 정황들을 즐겨 구사하는 것은 은유적 이미지를 즐겨 구사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그것은 단순히 어떤 수사를 즐겨 쓰느냐의 차이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관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은유적 이미지를 즐겨 구사하는 시인은 시 안에서 살아 있는 주체로서 자신을 가동시키는 시인이라 할 수 있고, 환유적 정황을 구사하는 시인은 시 안에서 시인 자신이 시적 주체가 되기를 포기한, 아니면 시적 주체의 자리를 타자에게 내어준 시인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시인들의 시에선 오히려 존재의 충만보다는 존재의 결여가 소리친다.
김혜순의 말처럼 오늘날의 시인들은 “환유적 정황”들을 즐겨 구사한다. 은유적 이미지들은 진리에 고착되거나 진리를 추구하는 세계관에 종속된다. 은유적 세계관의 시인은 진리를 추구하는 확고한 주체성을 지니는 경향이 있다. 진리의 추구와 확신은 주체의 선명한 윤곽 없이는 불가능하다. “살아 있는 주체로서 자신을 가동시키는 시인”이란 바로 그런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서정시의 주체는 자신의 정서와 내면, 세계의 중심을 형성하는 자아로서의 위상을 갖는다. 시적 자아가 슬프면 이 세상도 슬프고, 시적 자아가 황홀하면 이 세상도 황홀한 것으로 형상화된다. 이것이 전통적 서정시의 자아, 또는 주체다. 조동일이 서정시의 특징으로 ‘세계의 자아화’를 말한 까닭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자아(주체) 중심의 세계관은 타자의 세계를 자아 중심적으로 재단하고 왜곡하고 억압한다. 진리의 기준을 자기 자신, 즉 자아(주체)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혜순은 시적 주체의 자리를 타자에게 내어준다. 시의 주체는 존재의 충만이 아니라 존재의 결여(lack)가 소리치게 된다.
은유의 언어 체계는 야콥슨의 선택의 축(세로축)을 따라 형성되듯이, 수직적 세계관을 형성한다. 즉 가정되거나 고착된 진리를 중심으로 위계화된 질서가 존재하는 세계다. 환유의 언어 구조는 야콥슨의 배열의 축(가로축)을 따라 형성되는데, 수평적 세계관을 형성한다. 라캉의 환유 공식이 암시하듯, 그것은 끊임없이 미끄러져 갈 뿐이다. 환유적 세계관은 기존의 중심을 형성하는 진리에 종속되지 않은 채, 새로운 가능성을 수평적으로 탐구한다. 하나의 진리에 고착되지 않고 진리의 다수성을 수평적으로 사유하는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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