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소시집|김왕노
사랑의 비망록 외 4편
내게 심하게 개 비린내가 났다.
불결해 비루먹은 듯 벅벅 긁다보니
얼굴에 피가 나고 흉측해졌다.
나는 짖었다.
나도 견딜 수 없는 구취를 풍기며
산산이 부셔져라 적막아 하며
내가 짖으며 지키던 것은 홍수에
죽은 돼지 같은 사랑의 추억
짖을 때마다 진물이 뚝뚝 떨어지는
썩어문드러진 얼굴로
나는 나를 짖었다. 너를 짖었다.
숨이 턱턱 막혀 가며
누가 저놈의 개 당장 죽여야지해도
짖으므로 얼굴이 너덜너덜해져도
내가 나를 죽이기 전 네게 죽으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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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멀리 가고 싶은 것과
빅토르 최 알아, 그의 혈액이라는 음악이 흐르는 곳으로 가고 싶어. 싱아가 있는 신선한 아침도 좋지만 갈 때는 푸른 포도를 잘 먹는 노란 앵무새를 데려가면 좋은 곳
그의 음악에 젖어 뜨거운 일상을 보낼 그 먼 곳으로
식물성 꿈을 꾸는 착한 눈을 데려가도 좋아. 착한 눈을 찾아 문턱을 넘어오는
아무르 장지 뱀도 철철철 우는 북방여치도 데리고
빅토르 최가 부활하면 더욱 좋고 그렇지 않으면 빅토르 최의 노래에 미쳐
그가 두고 간 생에 미쳐 그곳에 주저앉아 알량한 생을 탕진해도 좋고
비 부슬부슬 내리는 날 나와 함께 멀리 가고 싶은 것과 함께 낙엽이 뚝뚝 지는 빅토르 최의 무덤에 가면 좋겠어
꿈의 성역인 그곳 꿈을 다산하는 그곳 빅토르 최의 혈액이 흐르는 곳, 음악의 블루홀인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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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밥
눈물로 밥을 지었습니다. 된장 뚝배기에 눈물의 간이 버들치처럼 돌아다녔습니다. 오늘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나는 눈물로 고봉의 밥을 지었습니다. 눈물의 밥이 뜸 들 때까지 어머니가 지어주셨던 눈물의 밥, 찰기 흐르던 고봉의 밥을 생각합니다. 어머니 청춘을 뚝뚝 분질러 넣은 불로 밥을 짓던 어머니, 어머니 눈물 밥이 그리울 때 어머니처럼 눈물로 밥을 짓습니다. 어머니가 새벽 부뚜막에 백년 우물물을 정화수로 떠놓고 먼 타관 공사판으로 떠난 아버지의 무사를 눈물로 빌었듯이 내 군대생활 내내 촛불처럼 사위어 가시며 나의 무사를 눈물로 빌며 눈물 밥을 지었듯 눈물 밥을 짓습니다. 내 눈물 밥이 어머니 눈물 밥의 경지에 이르기엔 한참 멀었지만 눈물로 밥을 짓습니다. 밥이 뜸 들 때까지 어머니를 한참 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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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블랙홀
흡입의 충동이 네 안에 빽빽하다. 그러나 굿모닝 블랙홀, 너와 거리를 좁히고 싶다는 감정은 금물, 너의 반경에 접어들면 올 몰락이란 참사, 너는 불가사리의 변형, 거대한 아가리가 몸이고 네 속이 다 위장인 블랙홀, 그래도 굿모닝 블랙홀, 허공의 싱크 홀인 블랙홀, 거대한 흡입력을 가진 굿모닝 블랙홀, 빨려들면 헤어난다는 것은 불가해, 내 존재란 내 안에서 짜부라 질대로 짜부라질 티끌, 내 본질이 먼지였음을 자각시킬 굿모닝 블랙홀, 모호한 것이 생이고 사랑이고 청춘이라지만 네 안으로 빨려들면 확실시 되는 가벼운 존재란 실체, 블랙홀이 화이트 홀로 몸바꿈으로 우리가 환원될 때까지 미미한 존재라는 것, 그래도 굿모닝 블랙홀, 반동의 힘을 얻을 밑바닥이 있을 거라는 것, 원점으로 돌아올 방편이 결국 너에게 있을 거라는 믿음. 굿모닝, 굿모닝 블랙홀, 절대 포기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너는 절망일 수 없어, 굿모닝 블랙홀, 블랙홀이라 불러보는 가공할만한 파괴력의 네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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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위리안치圍籬安置
1.
식아, 잘 있느냐지금 나는 예산 예당저수지 출렁이는 물로 얼룩진 마음을
풀뿌리처럼 하얗게 씻어보는데저수지를 건너오는 바람은 호된 노정이었는지 거침 숨을 몰아쉰다.현실이 얼마나 힘들기에 먼 섬으로 유배 가서컴퓨터도 없고 핸드폰도 빼앗겨 누구에겐가 온 편지를
읽고 또 읽고 지난 신문 한 쪼가리도 아껴 읽고 싶다는 식아
유배가 끝내 돌아오지 못한 길이라서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우리 동네 복출이형이 그리운데식아, 손톱 밑을 파고드는 소금물에 절린 대창 같은 일이 있었느냐.너를 생각하는 나의 머리는 봉두난발로 망나니 칼춤 앞에 모가지 같고처음 작두에 오른 발처럼 아슬아슬하게 걸어가는 나날인데차라리 사방이 탱자나무 긴 생가시가 위협하는 위리안치로혼자서 밥 끓여먹으며 생피에 붓을 적셔자산어보를 쓰듯 신 혁명론 한권 쯤 쓰고 싶구나.고삐를 조일 수도 늦출 수도 없는 날 뛰는 세월 앞에
끝없이 허둥대는 나는 일엽편주고 파란만장이라 내 살을 파고들어
뼈까지 치려는 어둠이지만 난 한발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
무모한 사람이 되었다.
이러다가 다친다고 친구가 세상이 울고불고 난리치지만
멀지 않아 출사표를 던지고 내 꿈의 재물이 되더라도
시퍼렇게 간 낫을 꼬나들 수밖에 없다.
2.
식아, 깊은 물을 바라보고잦아드는 물을 바라보니 마음도 잦아들고 비로소 수면에 어리는 꽃도 보이고, 멀리 가는 구름과 새도 보이고발밑에서 헤엄치는 물고기, 내 머리 위로 떠올라 밤을 밝히는 볍씨 같은 별 몇 개와 벌써 친해져고봉으로 쌀밥을 담아 밤하늘로 잘 먹으라며 고수레도 하고 싶구나.내 이 시간들이 피가 마르고 뼈가 타는 시간이지만결코 접어버릴 수 없는 시간 이 고립무원의 시간, 고립에 고립을 더해 현대판 고려장 같더라도내 서러움이 더해 가는 밤이면마음을 환히 켜 미완이었던 시에 매달리다가 지치면신 혁명론 초안을 잡고먼 훗날 출소하듯 이곳에서 나가다가 눈부신 햇빛에 잠깐 휘청해도 좋다.
식아, 네가 살다가 얼마나 힘들면 유배, 圍籬安置, 형벌을 말하고안빈낙도를 그리워하느냐.사방으로 뻗힌 길이 도리어 길이 아니라 사방에서 조여 오는숨통을 조여 오는 오랏줄 같아도 식아, 유배란 네 시를 읽으면창밖이 벌써 희부옇게 밝아오는 새벽이 왔으므로
우리 개벽의 빗장을 벗기려는 듯 몸부림치다가위리안치(圍籬安置)를 그리워하며 날 뛰던 피도 삭아
녹두꽃 질 때 봉준이 우리 봉준이 부르며 피눈물을 거두고
죽창이라도 새파랗게 깎아 꼬나들고
어깨춤 추는 날이 새벽 닭 홰치는 소리로 오리라.
어서 나오라, 깨어나라 봉창을 다급하게 두드리리라.
김왕노
경북 포항에서 출생. 1992년〈매일신문〉신춘문예 당선. 시집 『황금을 만드는 임금과 새를 만드는 시인』, 『슬픔도 진화한다』, 『말달리자 아버지』,『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 『중독』,『사진속의 바다』, 『그리운 파란만장』, 『아직도 그리움을 하십니까』『게릴라 (디카시집)』, 『이별 그 후의 날들 (디카시집)』, 『리아스식 사랑』,『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한국해양문학대상, 박인환 문학상, 지리산 문학상, 디카시 작품상, 수원문학대상, 한성기 문학상, 풀꽃 문학상, 2018년 제11회 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 좋은 시상, 시작문학상 등 수상. 축구단 글발 단장, 한국시인협회 부회장, 현재 문학잡지《시와 경계》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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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노트
내 시의 주인
평소에 이른 새벽에 일어나 시를 쓰다가 골프채를 들고 아파트 단지 옆에 흐르는 원천 천을 따라 뛰다가 다시 광교호숫가에 이르러 호수길 옆으로 빠져 산길을 달려 단풍나무가 아름다운 언덕에 이른다. 그곳에서 퍼팅 연습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온다. 골프채를 들고 가는 것은 내가 골프를 하려는 것이 아니므로 옛날 무의도 밤길 삼 십리를 걷는다고 홀로 나섰다가 멧돼지 떼에게 쫓긴 적이 있다. 그 때 나뭇가지를 휘두르며 무사히 달아난 적이 있다. 그 때 생긴 트라우마로 노루를 꿩을 만나는 산길이나 뜻하지 않는 것을 만날까 골프채를 들고 다닌다. 골프채를 들고 달려야 속이 든든하다. 이처럼 골프채를 들고 달리듯 나는 늘 시를 가슴에 품고 다닌다. 시가 내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동반자이자 내 생의 무기이다. 성실하지 않으면 시도 성실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올 해 정년을 했는데도 시를 품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사색도 열심히 한다. 새벽 일찍 일어나 뛸 때 가슴에 시가 있지만 또 다른 시의 영감이 가슴에 안겨 온다. 시와 뛰면서 풀꽃도 스치고 갑자기 수면을 박차고 튀어 올라 물의 뺨을 호되게 치는 거대한 잉어도 본다. 저수지 아래 수로에서 수초와 이끼를 먹는 오리와 작은 물고기를 먹는 소 백로가 어우러진 모습, 흑백이 어울린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 때의 감정이 내 시가 된다. 그리고 내 시의 내구력이 되고 내재율과 외형률을 이루는 것은 어릴 때 서정으로 나를 흠뻑 적셔준 영일만이다. 태풍이 온 광란하는 바다는 시에다 힘과 열정을 가져다주었고 고요한 바다는 순수와 바닷가에 반짝이는 이미지를 가슴에 담아주었다. 그리고 끝없이 철썩이는 파도는 내 시의 리듬이 되어주었다. 나는 내 시의 주인이 아니라 내 시의 주인은 내게 시를 가르쳐 준 이건청 교수님과 내게 시를 가져다주는 새벽의 호수와 아파트 단지를 맑게 울리는 새소리다. 지금껏 좋은 시를 보면 그 시에 감탄을 하지만 나는 왜 저런 시를 쓰지 못할까 자책하며 질투를 느끼며 시에 전념했다. 다른 시인의 시가 그 때는 내 시의 주인이다. 보이나 아득하고 손닿지 않는 별이 내 시의 주인이다. 가난이 내 시의 주인이다. 비참한 사회를 보다가 울먹이는 내 가슴이 내 시의 주인이다. 주체할 수 없는 속력으로 달리다가 전복하는 계절이 내 시의 주인이다. 부서지는 빗방울이 내 시의 주인이다. 시드는 물봉선화가 내 시의 주인이다. 결국 나를 둘러싼 사물과 자연과 사람이 주인이므로 나는 더욱 좋은 시를 써서 주인에게 당당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그
그는 시다. 풀꽃 잎에 맺힌 이슬이었다가 귀뚜라미 더듬이였다가 그는 시다. 밤새 하늘 변죽을 두드리는 우레였다가 포효하는 청룡백룡 이었다가 솟구치는 파도였다가 그는 시다. 그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가 생각난 듯 구름으로 흐르다가 새벽에 홰를 치는 닭이었다가 붕새였다가 가릉빙가였다가 벌새였다가 투명이었다가
그는 시다. 궁극의 시가 아니라 애초의 시인이고 시다. 그는 한편의 시고 두 편의 시고 시의 궁륭이고 시의 산맥이고 시의 판타지고 파노라마고 시의 블랙홀이고 화이트홀이다. 그는 시이자 시의 주인이고 시의 농부다. 그의 시는 산양의 시고 양촌리의 시다. 그는 시도 때도 없이 시다. 시시때때로 시다. 천상의 시인이나 지상에 나들이 중인 시인이다. 하늘의 꽃인 별이었다가 지상의 별인 꽃이었다가 그는 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