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영화제가 어느새 열 번째 행사를 연다. ‘9회 인권영화제’가 정식 타이틀이지만 5회와 6회 사이에 ‘다시 보는 명작선’으로 꾸민 5.5회 인권영화제(2001)를 개최한 바 있어 횟수로는 열 번째 영화제가 맞다. 영화제 초창기 사전 심의를 거부하고 영화를 틀다 정부 당국과 마찰을 빚고 급기야 서준식 인권영화제 집행위원장이 구속되는 일도 있었지만, 이제 다 지난 일이다. 더 이상 그런 염려는 안 해도 좋다. 그러나 인권영화제 상황이 나아졌다 한들 인권 상황이 나아진 건 별로 없다. 매해 이주 노동자의 인권, 감옥의 인권 같은 주제를 내세운 인권영화제가 올해 내세운 주제는 ‘어린이-청소년의 인권’이다. 단지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당해온 미성년자 인권 침해 사례와 청소년 노동 환경, 청소년 동성애자 차별 등을 다룬 작품 8편을 비롯, 그외 각종 인권 침해 현실과 극우 반동을 고발한 국내외 작품 32편을 언제나처럼 모두 무료 상영한다. 인권운동사랑방이 주최하는 영화제답게 장애인들을 배려하는 마음 씀씀이도 칭찬할 만하다.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수화 통역사를 배치하고 대다수 국내 작품에 한글 자막을 깔았으며 점자 자료집도 만들어 배포할 예정이다. 5월 20일부터 26일까지 일주일 동안 서울시 종로구 옛 허리우드극장 자리에 새로 문을 연 서울아트시네마에 가면 볼 수 있다.
상영작이 서말이어도 보아야 보배일 것이다. 자, 전 세계 영화 작가들이 포착해낸 세상의 추악한 이면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결심을 했다면 이제 여기, FILM2.0이 엄선한 필살 리스트를 참조할지어다. 부디 아는 만큼 보고 보는 만큼 행동하는 지행합일 영화 축제에 앞다투어 동참하시길.
※자세한 상영 일정과 그 밖의 궁금한 점은 인권운동사랑방(www.sarangbang.or.kr / 02-741-2407)으로 문의하면 된다.
<라이베리아: 함락 초읽기 Liberia: an uncivil war>
조너선 스택, 제임스 브라바존 | 미국 | 2004년 | 102분 | 다큐멘터리 | 해외 작품
라이베리아는 ‘자유의 나라’라는 뜻을 갖고 있다. 1821년 미국식민협회가 해방 노예 국가를 건설할 목적으로 세운 이 나라는 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 측 유일한 천연 고무 보급지이자 미국의 군사 기지로 큰 역할을 했다. 종전 후에도 경제적, 군사적 효용 가치 때문에 미국이 애지중지하던 이 땅을 냉전 종식과 함께 나 몰라라 하면서 내전이 시작되고 민초들의 지옥 같은 고난이 시작되었다. 2003년 여름, 이 살벌한 현장에 뛰어든 두 용감무쌍한 다큐멘터리스트가 각각 정부군과 반군을 나눠 맡아 입체적으로 현실을 기록했다. 목숨 걸고 근접 촬영한 결과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살육 현장을 남김 없이 보여 주는 이미지가 충격적이다. 지난해 암스테르담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특별심사위원상을 받은 것을 비롯, 국제적으로 호평받은 수작이다.
<작은 목소리들 Little voices>
에듀알도 카릴로 | 콜롬비아, 영국 | 2003년 | 19분 |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흑백 사진에 담긴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눈망울 위로 해맑은 미소 뒤에 숨겨진 끔찍한 사연이 오버랩된다. 오랜 내전에 휘말려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한 어린이의 가족 이야기다. 콜럼비아 어린이들이 직접 그린 그림 하나하나마다 3D 애니메이션 기법을 더해 새로운 비주얼로 만들어냈다. 얼핏 낭만적으로 들리는 기타 연주와 함께 흘러나오는 아이들의 순진무구한 내레이션이 실은 정말 눈물 없이는 듣을 수 없는 처절한 스토리를 담고 있어 가슴이 짠해진다. <작은 목소리들>과 함께 ‘애니메이션 모음’으로 상영하는 작품 중엔 제법 괜찮은 영화가 많다. 핵전쟁의 위험을 풍자한 <과도한 흥분 The Big Snit>, 종교가 달라 차별받는 아이들 이야기 <질서를 지켜라? Point of Order>, 아빠없이 홀로 서는 어린 소녀를 다룬 한국 작품 <누구세요> 등이 특히 볼 만하다.
<예스맨 The Yes men>
댄 올맨 외 | 미국 | 2003 | 83분 | 다큐멘터리 | 개막작
가짜 부시 대통령 사이트나 만들고 WTO(세계무역기구) 패러디 사이트나 오픈하며 소일하던 앤디와 마크에게 어느 날 초대장이 날아온다. WTO 사무국이 그들이 만든 사이트를 ‘진품’으로 오해한 나머지 세계 경제 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회의에 둘을 연사로 초청한 것이다. 이게 웬 떡이냐, 점잖은 어르신들 제대로 골탕먹일 작정으로 말도 안 되는 강연 주제를 생각해내선 핀란드로, 오스트레일리아로 바쁘게 돌아다닌다. 미래 노동자의 패션이라며 하필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 남자 성기 모양으로 디자인한 쫄쫄이 옷을 입고 진지하게 연설하는 그들을 정말 진지하게 바라보는 경제 전문가 양반들의 표정이 참으로 가관이다. 자기들을 조롱하는줄도 모르고 넋을 놓고 경청하는 이 글로벌한 해프닝에 원조 트러블 메이커 마이클 무어도 잠깐 얼굴을 내민다.
<이반검열>
이영 | 한국 | 2005년 | 20분 | 다큐멘터리 | 어린이·청소년의 인권
이반검열이란 여학교에서 학내 동성애자를 색출해 정학이나 퇴학 등 각종 징계를 내리는 정책을 가리키는 말이다. 머리가 짧다고 징계, 여자끼리 손잡았다고 징계, 스킨십 정도에 따라 단계별 징계…. 단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차별받는 것도 억울한데,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는 건 더 억울한데, 게다가 단지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3중 차별 받는 건 더 억울하다. 여성영상집단 ‘움’이 만든 이 다큐멘터리는 사회적 소수에 대한 이해와 관용을 가르치는 대신 오히려 앞장 서 차별과 격리를 조장하는 대한민국 학교 당국의 부당한 처사를 고발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안티폭스 Outfoxed: Rupert Murdoch's journalism war>
로버트 그린왈드 | 미국 | 2004년 | 80분 | 다큐멘터리 | 해외 작품
루퍼트 머독은 위성 TV 네트워크 9개, 케이블 채널 100개, 신문 176개, 출판사 40개, TV 방송국 40개, 할리우드 영화 스튜디오 1개를 소유한 그야말로 언론 재벌이다. 전 세계 인구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47억 명이 매일 어떤 형태로든 이들 매체를 보거나 듣거나 읽는다. 그러니 그 파급력이 어마어마할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 일찌감치 DVD로 나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는 이 다큐멘터리는 ‘공정하고 균형잡힌(Fair and Balanced)’ 시각을 내세운 폭스뉴스채널이 사실은 얼마나 불공정하며 동시에 균형따윈 전혀 잡히지 않은 언론임을 정교하게 파헤친다. 주로 지난 미국 대통령 선거 보도를 중심으로 조지 부시 대통령을 당선시키려는 극우 언론 폭스뉴스 제작진의 갖가지 간교한 술책이 도마에 오른다. 전직 폭스뉴스 제작진, 익명을 요구한 기자, 미디어 전문가를 인터뷰하고 방대한 실제 뉴스 화면을 총동원하는 집요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정의 Justice>
마리아 라모스 | 브라질 | 2003년 | 100분 | 다큐멘터리 | 해외 작품
훔친 차에 마약을 싣고 가다 붙잡힌 청년, 그 청년의 국선 변호인, 그 청년의 아내, 그 청년의 임신한 여자 친구, 그 청년의 사건 담당 판사, 또 다른 마약 딜러, 그의 변호인, 그의 가족…. 끝도 없이 이어지는 각종 사건 관계자들이 잠깐씩 모습을 드러내는 이곳은 브라질의 대표적 메트로폴리스 리오 데 자네이루의 법정이다. 내레이션도 없고 이렇다할 참고 자료도 제시하지 않지만 그냥 지켜보기만 해도 브라질 사법 체계의 모순이 은근히 전해져 오는 다큐멘터리다. 할리우드영화에 등장하는 법정과 달리 아무런 드라마와 극적 반전도 일어나지 않는 지루한 일상을 롱테이크로 담아냈다. 지난해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그랑프리를 받은 만큼 작품. 보는 재미 보다는 남는 의미로 평가해야 할 영화다.
<골럽 Golub: The Late Works are the Catastrophies>
제리 블루멘털, 고든 퀸 | 미국 | 2004년 | 80분 | 다큐멘터리 | 해외 작품
베트남 전쟁과 중남미 국가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개입을 노골적으로 비판해온 미국의 대표적 반전 화가 레온 골럽이 지난해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전쟁과 학살로 얼룩진 현대사를 전통적인 잔혹극으로 표현한 독특한 화풍으로 유명해졌다. 일평생 반골 기질을 꺾지 않고 일획이 만획이요 만획이 일획의 경지에 이른 그림을 그려댄 레온 골럽의 마지막 20년이 이 다큐멘터리에 담겨 있다. 일찍이 80년대 제작해 둔 다큐멘터리에 2004년 사망 전 모습과 작품 활동을 추가해 다시 편집했다. 좁은 캔버스에 머물지 않고 전 지구를 화폭 삼아 자기 철학을 펼친 위대한 화가의 감동적인 인생 역정을 엿볼 기회다.
<우리 사이>
한현주 | 한국 | 2004년 | 23분 | 극영화·다큐멘터리 | 어린이·청소년의 인권
어린이, 청소년 인권을 이야기하면서 정작 당사자인 어린이가 직접 제작에 참여한 영화는 32편 출품작을 통틀어 이게 유일하다. 어린이들이 알게 모르게 겪는 인권 침해 사례를 아침, 점심, 저녁의 세 시퀀스로 나누어 찍었다. 실제 엄마와 자녀들이 머리를 맞대고 시나리오를 쓰고 함께 연기하고 같이 촬영했다. 부모가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상처 받는 아이들의 심정을 솔직하게 담아낸 기획이 눈길을 끈다. 10여 분짜리 극영화도 극영화지만 거의 같은 길이로 만든 메이킹 필름이 더 볼 만하다. 대본 연습하다 가슴에 사무친 엄마의 말 한마디가 떠올라 눈물 짓는 아이에게서 어린이 인권 침해의 심각성을 짐작하게 된다. 완성도만 따지면 필수 관람 리스트에 낄 엄두도 내지 못하겠지만 참여도만 따지면 필수 관람 1순위에 올려야 마땅하다.
김세윤 기자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