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 에세이 ⑪
아흔아홉 명의 사람들
홍일표
미술 비평가 제리 살츠
누구나 크고 작은 상처가 있다. 뉴욕타임즈의 미술 비평가로 활동 중인 제리 살츠 역시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온 인물이다. 열 살 때 어머니가 투신자살했고, 장례식조차 치러지지 않았다. 이후 새어머니에게 허리띠로 맞으며 학대를 당했고, 결국 학교를 꼴찌로 졸업한 날 집을 나왔다.
예술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그는 스스로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여 마흔한 살까지 트럭 운전사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런 그가 아내 로버타 스미스와 지인들의 격려 덕분에 미술 비평의 세계에 입문하게 되었고, 2018년 퓰리처상 비평 부문을 수상했다. 그가 쓴 책은 뉴욕타임스와 LA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현재 그는 뉴욕 현대미술관, 구겐하임 미술관, 하버드대, 예일대 등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그가 쓴 『예술가가 되는 법』(처음북스, 2020)을 뒤늦게 읽었다. 부제는 「내 안의 창조력을 깨우는 63가지 법칙」. 제목 그대로 예술가뿐 아니라 창조적인 삶을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책이다.
화가 김상유
1926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나 평양고보를 졸업하고 월남한 사람, 평소 말이 없고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던 사람, 검은 테 안경을 쓰고 허름한 옷차림을 하고 다니던 사람, 미술대학에 다닌 적 없이 독학으로 동판화 작업을 익힌 사람, 화랑에서 작품이 팔리지 않아 곤궁하게 살던 사람, 1980년 어느 날 판화 작업을 중단하고 유화를 그리겠다고 선언한 사람, 평생 학연, 지연 없이 외톨이로 살면서 절제된 이미지로 한국적 정서를 표현한 사람, 이름이 알려진 후 요즘엔 화랑에서 고기도 사서 보내준다며 좋아하던 사람, 1990년 제2회 이중섭미술상을 수상하고, 2002년 마지막 전시회 두 달 후 홀연히 세상을 떠난 사람, 불모지였던 국내 판화 분야의 개척자였던 사람. 그가 2024년 작품 회고집 『그리고 새긴 이, 김상유』로 22년 만에 우리들 곁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정란 시인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지난해 작고한 이정란 시인의 남편이 아내의 유고를 모아 비매품으로 출판한 책 『가슴밭에 두고 온 말들』. 읽는 동안 눈물이 몇 번 핑 돌았다. 췌장암 투병 중 통증을 참아가며 쓴 글들은 고인이 이승에 남긴 마지막 육성이었다.
“살 순 없을까? 이 사랑을 영원히 ---. 이 행복을 영원히 가질 수 있도록 정말 살 순 없을까?”
책을 다 읽고 나서 한동안 마음이 저리고 먹먹했다. 암세포가 복강에 퍼졌다는 의사의 말을 들은 후에도 생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던 고인의 모습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아프게 다가왔다. 그토록 살고자 했던 이정란 시인은 지난해 9월 12일 영면하였다.
이정란 시인은 언어가 가닿지 못하는 사유의 지점을 시적 언어로 짚어내는 개성적인 어법을 통해 독특한 시의 세계를 구축하여 규정이나 법칙을 벗어나는 ‘예외’의 길을 걸어왔다. 그 길은 식어가는 별의 행간에서 빛의 뼈대를 찾아 나선 고독하고 지난한 여정이었다. 시집 『눈사람 라라』『이를테면 빗방울』에서는 카타스트로피 같은 지각변동을 통해 언어의 경계를 넘어서는 시적 충격을 경험하게 했고, 마지막 시집 『나는 있다』에서는 “나는 지금 수십억 년 동안 나를 빠져나가는 중”이라는 시구로 존재와 우주를 사유하게 하는 깊은 울림을 남겼다.
국회의사당에 게시되어 있던 그의 시 「돌탑」은 2008년 모 정당의 대표가 국회 연설 중 낭송하여 널리 알려졌고, 요즘에도 여러 분야의 독자들에게 자주 회자되고 있는 작품이다.
이정란 시인은 시집 『나무의 기억력』, 『눈사람 라라』, 『이를테면 빗방울』 등을 펴냈고, 마지막 시집 『나는 있다』를 2023년에 출간했다. 그는 『시로여는세상』 창간 당시부터 14년 동안 편집장, 부주간을 역임하면서 잡지의 초석을 마련하여 오늘날의 『시로여는세상』이 있게 했다.
성윤석 시인
모두가 알고 있는 것들에게 한 방 먹이는 시인. 공부도 하지 않고 재능도 없으면서 시인이니, 선생님이니 불리면서 문학은 없고 문학의 외연만을 넓히는 인간들에게 분노하는 시인.무리를 짓지 않고 혼자 사유하며 혼자 견디는 것이 시라고 말하는 시인.
이른 아침 페이스북에서 성윤석 시인의 글을 읽고 모처럼 상쾌해졌다. 정부 산하 기관과 지자체에서 문인들에게 이런저런 창작 기금을 지원하고 있는데 자기는 후배들을 위해 아예 신청을 안 한다, 일 년이라도 먹을 게 있는 사람이라면 양보하라는 내용이었다. “니들이 다 가지려고 하니까 세상이 이리 된 거여” 윤슬처럼 반짝이는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시단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 싶어 신선했다.
“속에서 혼자 꽃 핀 것들은 왜 / 이리 다들 붉은지” 「무화과」中
2022년에 출간한 성윤석 시인의 『그녀는 발표도 하지 않을 글을 계속 쓴다』는 한 편 한 편 아껴가며 읽게 하는 시집이다. 일상의 의미로부터 벗어난 바깥을 사유하고, “문장을 둘 데 없어/돌아와 삼켜버리”기도 하면서 시인이 향하는 곳은 고착된 진리의 반대편이다. 지면에 박히지 않고 휘발하는 시들이 대부분인 그곳에서 그는 ‘엎질러버린 문장’을 일상 ‘바깥’으로 쉼 없이 전송한다. 성윤석 시인은 1990년에 등단하여 시집 『극장이 많은 우리 동네』『공중묘지』『멍게』『사랑의 다른 말』등을 출간했다.
김용옥 시인
어느덧 김용옥 시인과의 인연도 30년이 넘은 것 같다. 김용옥 시인은 오랜 교직 생활을 접고 현재는 미술관에서 도슨트로 활동하며 시를 쓰고 있다. 한동안 적조했다가 김용옥 시인이 『시로여는세상』 발행인이 되면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지난해 가을에는 곽훈 개인전을 관람하면서 그간 밀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김 시인이 10여 년 만에 출간한 시집 『미술관 점경일지』는 도슨트 경험을 통해 얻은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1부의 시들이 그렇다. 시로 읽은 미술의 차원이 아니라 작품 너머의 세계까지 아우르는, 새로운 관점의 시편들이라고 할 수 있다. 주목할 만한 작품 중 ‘아직도 아버지 주소를 지우는 여자’ 「선녀」에서는 가부장 사회의 폭력에 희생양이 된 한 여성의 비극적 삶을 표현하고 있다. 2〜4부의 시편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낯선 번지’를 향해 떠나는 탈주의 이미지다. ‘중력의 무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떠남’의 중요한 동인으로 작용한다. ‘외발로 건너가는 그림자’가 당도할 곳은 ‘문득 환해지는 은수리 마른 들판’일 텐데 그곳에 등 하나 내다 거는 누군가가 시집 밖으로 조용히 걸어 나오는 중이다.
김대호 시인
다섯 시간 걸려 김천에 도착하여 일을 마치고, 직지사 인근 봉산로 600번지에 있는 ‘시남커피집’에 들렀다. 그곳에 시인이 있었고 시가 있었다. 커피집 주인이 10년 넘게 운영하고 있는 카페였다. 시와 시단 얘기가 오갔다. 시골에 살면서 좋은 시를 쓰는 시인이었지만 제대로 주목받지 못하여 안타까웠다. 시인들 중에는 조명은커녕 눈길 한번 받지 못하고, 사라지는 시인이 한둘이 아니다. 그런 시인들을 발굴하여 시단에 소개하고, 적극적으로 발표 지면을 마련해 주는 것도 잡지 만드는 이들이 할 일일 텐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커피집 주인은 수주문학상, 천강문학상을 수상하여 시단에 나왔고, 『우리에겐 아직 설명이 필요하지』 등의 시집을 냈다. 핸드폰에 그의 이름 ‘김대호’를 저장하고 헤어졌다. 그는 세계의 안쪽에 구멍을 내고, 꺼내 쓸 수 있는 빛이 아직 많이 남아 있는 시인이었다. 차가 밀려 다시 다섯 시간을 운전하여 서울에 도착하였다.
손진은 시인
나는 그를 만난 적이 없다. 오래전부터 책을 통해서 보았을 뿐 밥 한 번 먹은 적이 없다. 그런 그가 잊을 만하면 전화를 하여 반가운 목소리를 듣게 된다. 몇 해 전 『현대시학』 에 발표한 특집 원고를 보고 과찬하여 민망했고, 어제는 내 산문집 『사물어 사전』을 갖고 문창과 학생들에게 강의한 내용을 들려주면서 생각할 거리가 많아 반응이 좋았다는 말을 하였다.
통화할 때마다 시와 시단에 대한 대화를 길게 하는데 나는 주로 듣는 편이다. 목소리만 들어도 그가 문학에 대해 얼마나 열정적이고 빈틈없이 정확한 사람인지 짐작하게 된다. 어제는 영남대 김문주 교수의 지도를 받고 등단하여 시단에서 주목받고 있는 고명재 시인에 대한 개인사를 들을 수 있었다. 덕분에 고명재 시인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의 작품을 더 찾아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시인과 평론가로 활동하면서 경주대 문창과 교수를 거쳐 현재 대구교대 대학원 문창과 교수로 재직 중인 손진은 시인.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돌’이 그와의 첫 만남이었으니, 지면으로나마 이어진 그와의 인연도 어느덧 30년이 훌쩍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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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표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였다. 시집 『매혹의 지도』 『밀서』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 『중세를 적다』 『조금 전의 심장』 평설집 『홀림의 풍경들』 산문집 『사물어 사전』 동시집 『괴물이 될 테야』 등을 펴냈다. 지리산문학상, 올해의좋은시상, 매계문학상, 천상병동심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