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 등단 안영숙 시인 첫시집 '나는 여기 있습니까' 출간했습니다.
◉출판사 서평
안영숙 시인의 첫시집 『나는 여기 있습니까』(작가마을)가 ‘사이펀 현대시인선’ 19번으로 나왔다. 안영숙 시인은 제주출생으로 현재는 강원도 철원에서 유튜브 ‘유연의 문학TV’를 운영하면서 창작활동을 펼치고 있다. 2019년 《문학고을》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나 자신의 모더니즘 문학세계를 확장하고자 2023년 《사이펀》 신인상으로 재등단을 하였다.
안영숙 시인은 이번 첫시집 『나는 여기 있습니까』에서 젊은 시인의 자의식을 마음껏 펼치고 있다. 대상에 대한 관조적 시각이 시인 특유의 ‘낯설게 하기’의 언어적 교감을 풍성하게 만든다. 그 교감의 서정적 어조들은 시인이 보고 느낀 바를 다양한 이미지들로 변용시킨다. 그 변용의 대상은 모두 시인이 체험하고 느낀 사실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그 육화된 이미지들을 시인은 여러 겹의 시각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여 내보인다. 그러한 세계를 통해 시인은 또 하나의 견고한 자신만의 詩城을 채워간다 할 것이다. 하지만 독자들에게는 이미지의 결이 좌충우돌하는 느낌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제 갓 등단한 신인임을 염두에 둔다면 오히려 신선하다. 신인에게 독자들이 기대하는 것은 ‘불완전한 창의성’이다. 그런 점에서 안영숙 시인은 앞으로가 무한 기대되는 시인임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안영숙 시인의 첫 시집 『나는 여기 있습니까』가 주목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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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서평
시인이 보는 세상에서 결락缺落해 있는 것들은 결코 온전히 되돌리거나 채워질 수 없는 채로 남아 있다. 한계는 한계대로, 틈은 틈대로 남겨두는 것이 어쩌면 지혜의 하나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시인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존재들 사이에서 서로 밀치고, 막혀 있고, 통하지 못하는 관계성에 대한 성찰은 결국 자아의 성채를 더욱 견고히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시인은 ‘나’의 새로운 인식으로 상승한다. “스쳐 지나가는 모든 것의 중심은 나”라는 단언에서 시인은 그 마음의 단면을 드러낸다. “나조차 세상이 되고 시간이 되어 나로 흐르는/ 마술 같은 사이클의 감탄사를/ 후렴구로 흘려보내렵니다”라는 구절에서 그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이를 자기중심주의나 이기주의로 해석하면 안 된다. 세상의 중심이 나라는 사실은 모든 것을 주체적인 자신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흔들리지 않는 명료인 인식을 견지한 자아의 눈으로 세계를 해석하고 관조하려는 의지의 발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파편화되고 소통되지 못해서 각자 그로테스크한 형식으로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세상에서 시인이 바라는 점도 바로 그것이지 않을까. ‘나’를 잃어버리지 않고 ‘나’를 붙잡으면서 시간과 공간 속에서 흔들리는 모든 존재들의 솔직한 풍경을 보듬으려는 시인의 의지는, 결국 근대로 진입한 이후 단절되어 온 이 세계의 끊어진 마디마디들을 이어 붙이려는 시적 상상으로 나아간다. 이 과정에서 시인이 꿈꾸고 노래하는 세계의 맑은 표면과 속내가 밝고 환하게 드러나리라고 본다.
-정훈(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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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약력
시인 안영숙은 서강대언론대학원에서 수학하였으며 2010년 《문장21》 수필, 2019년 《문학고을》에 시, 2023년 계간 《사이펀》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강원도 철원에서 유튜브 <유연의 문학 TV> ‘시처럼 살자’를 운영하고 있으며 한민족통일문화제전 시부문 강원특별자치도지사상을 수상했다. 강원문인협회 회원이며 철원 ‘모을동비’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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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속의 시
땔감의 유서
나는 어떤 이의 손에
베어지고 찍혀졌다가
코끼리만 한 난로 속으로 갈등 없이 버려졌다
네모 속에서 네모바깥을 네모스럽게 내다봤다
사람들이 하나둘 네모로 끌리는 듯했다
언제 이렇게 해처럼 달아올라 후끈대는 혼돈 속에 두근거렸던가
아, 꽃을 낳았을 때
허공의 내부에서 눈꽃이 터져 나왔다
불빛은 서서히 어둠을 긁어내고
나의 골수는 명멸하는 밀실 끝에서 보풀이 일어났다
이대로 세계의 종점에 도달한 단면이 되는 줄 알았다
불의 씨앗이 반딧불이로 재생하며 재로 탈의하고
화장火葬한 세포에서 다시
아름드리나무가 달빛을 착의하게 되리란 걸
먼 우주로부터
극비의 고요가 떠드는 진실을 엿들었다
차츰차츰 눈발이 안검眼瞼을 덮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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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기 있습니까
나는 나를 볼 수 없습니다
나는 종결되었나요
봉분이 없는 마른 죽음인가요
물음표를 들고
어디에도 없는 나를 찾아 매일 공회전을 합니다
사람들과 대사를 볶고 뒤집고 있는 이가
안경 너머로 제 이름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교차하며 걷고 있는 양 허벅지는
어디로 가는지 용건이 없었고
나 몰래 내 규격 안에서 베개를 차지한 이가
나인지
신원조회가 필요합니다
거울 속의 보이지 않는 나는
더욱 완고한 덫입니다
안과 밖 접점의 상피조직 어디에도 나는 허전합니다
처음부터 없었고
나중에도 없는데
중간에만 있다는 것도 어불성설입니다
당신은 여기 있습니까?
나는 증거가 없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나를 밀수하러 부유浮遊하겠습니다
통행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나는 ‘공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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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사 관찰 노트
-잡job 시리즈 2
이곳은 넌센스 공장
천장엔 프랑스 수도 이름이 벌떼처럼 붙어있고
줄줄이 매달려있는 무덤이 먼지 입은 선풍기 바람에 멀미를 하지
노린내가 깨진 벽 틈에서 진동하는데 정작
돼지들은 제육볶음으로 환생하여
우리들 뱃속에서 소화가 되는 거야
파눙*을 허리에 두른 수줍은 반라의 몸
때 낀 창가를 달리며 샤워를 끝낸 형광색 미소가 뚝뚝 떨어지곤 해
짜뚜론은 태국의 어린 사내
허리까지 오는 긴 생머리는 배냇머리 같아
지금쯤 빈 둥우리엔 앨범만 남아있겠지
분만사인 푸르바는 아들이 보고 싶대
녹슨 핸드폰 속에서 그리운 살덩어리 하나 꺼내
내 목구멍 속으로 울컥 밀어 넣어줬어
야간근무 석 달째
측은함을 꾹꾹 눌러 담은 도시락과 바나나 한 개
연신 고맙습니다가 눌변으로 잇몸에 들러붙고
푸르바의 푸르름은 밤길로 사라져 보름달로 차오르곤 해
네팔에서 온 밍마는 컴퓨터 공학도
히말라야를 넘어 항공료를 지불하고 도착한 강원도 철원의 돈사
당찬 포부는 트럭 따라 도살장으로 끌려가고
한탄강을 내려다보며 바그마티강 울먹이겠지.
볼펜만큼이나 무거운 프라이팬 놀이
햇볕에게 임대하고 싶은 건 보드만 한 도마나 거인용 냄비 대신
계륵 같은 잡념의 채나물들 꼬들꼬들 말려
소금 같은 비 내리는 날
아무렇게나 무쳐 먹을일이야
주방에선 발라드 음악이 한 솥 끓고
스마트폰 레시피로 요리사 된 시인이 만드는 케이푸드
수북수북 피어나는 밥 냄새 쫓아
서툰 인사말을 오물거리며 줄을 서겠지
*파눙: 태국 남성이 착용하는 전통적인 허리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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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목차
안영숙 시집 나는 여기 있습니까
목차
제1부
땔감의 유서
9시 뉴스의 실체
나는 여기 있습니까
어머니의 지우개
잠을 선동하는 트럭
오늘은 쉽니다
연애의 파산선고
폐가의 잔치 소리
연애소설의 구성 5단계
산 낚시의 꿈
라면의 파랑주의보
꽃이 피지 않는 바다
구두는 벗겨질 듯
강철꽃의 영원하지 않은 영원
개수공사
내가 발아한 섬
병든 치유
제2부
영어도서대여 팀장의 실직일기
돈사 관찰노트
카드수집가의 고상한 게임
철 떠난 이야기
엑스트라 배우의 꿈
아직 에어로빅 학원은 오픈 중
첫 번째 유치원, 그리고 마지막 유치원
파랑새와 지빠귀
장어즙을 팔아라
첫사랑 티코와 학습지 선생의 회고
운전학원 강사의 데생
캔디가 아닌 캐디
택배의 시간은 무겁다
주부라는 이름으로
제3부
당신의 수저
이상의 ‘날개’를 읽고
향수병에는 향수가 없다
도플갱어
가을 산행의 기특한 후유증
불면의 소란
삶을 건진 건지 죽음을 건진 건지
나와 타인의 감옥을 오가며
시작이 어려운 시작
아이덴티티
문자가 도둑처럼 사라졌다
대추 털이
목비처럼
이별을 앓는 밤
홀로 끄적이는 가을 정경
옛사랑
신발 찬양
제4부
살아있는 죽음은 탄생으로의 회귀
기다리면 올까요
내가 보내고 싶은 하루
달려갈 수 없는 길
모놀로그
길고양이에겐 길이 없다
열리지 않기 위한 문
외계인의 고백
외로움의 메커니즘
휴가
흐르는 모든 것의 중심은 나
백운계곡 흥룡사에서 한 해를 접으며
잠들 수 없는 나무
연꽃과 십자가
교회의 다락방이라도 좋다
해설/단절된 세계의 매듭을 찾으려는 시적 여정-정훈(문학평론가)
첫댓글 시집 출간을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