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17. 우리나라 성주도씨 종당(宗堂), 치경당(致敬堂)
글·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프롤로그
대구 서쪽 금호강 경계에‘서재(鋤齋)’라는 동네가 있다. 동쪽과 남쪽은 와룡산, 서쪽은 궁산[궁미산], 북쪽은 금호강으로 막혀 있어 20여 년 전만해도 대구시민들에게는 낯선 곳이었다. 지금은 새 도로와 다리가 건설되고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는 등 상전벽해, 신도시로 변신했다. 마을 중심에 작은 동산(東山)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 유서 깊은 문중유산이 있다. 용호서원·치경당·정렬각이 그것이다. 이 유산들은 모두 성주도씨 문중유산인데 그 중 치경당은 우리나라 모든 성주도씨의 성지(聖地)라 할 수 있는 유적이다.
성주도씨 제일 큰집, 대구파
우리나라 도씨(都氏)는 성주도씨(星州都氏) 단일본이다. 성주도씨 득관조(得貫祖)는 고려개국공신으로 알려진‘도진(都陳)’이고, 기세조(起世祖)는 고려에서 전리상서를 지낸 ‘도순(都順)’이다. 득관조 도진은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할 때 팔거현[지금의 대구 칠곡] 지역의 토성 호족장으로 통일대업에 공이 있었다. 이에 태조는 도진에게 벼슬과 함께 칠곡부원군에 봉하고, 팔거현을 식읍(食邑)으로 하사했다. 팔거현은 신라시대에는 수창군의 4현 중 하나로, 고려시대에는 경산부[지금의 성주]의 속현이었다가, 조선시대에 칠곡도호부로 승격됐다. 성주라는 본관은 1752년(영조 28) 처음 족보를 편찬할 당시, 팔거현이 성주목에 소속된 것에 유래한 것. 이러한 까닭에 과거에는 성주도씨를‘팔거도씨’라고도 불렀다.
종족의 본거지였던 팔거를 떠나 지금의 서재로 처음 입향한 이는 성주도씨 16세(世) 대종손 우후공(虞侯公) 도흠조(都欽祖)다. 그가 서재로 입향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480년 전인 1540년대로 추정하고 있다. 팔거현이 퇴락하자 문중을 다시 일으켜 세울만한 좋은 터로 하빈현 도촌(島村)을 선택한 것인데, 도촌이 바로 지금의 서재다. 서재를 선택한 것은 팔거에서 남쪽으로 금호강만 건너면 되는 가까운 거리였고, 와룡산과 금호강을 끼고 있어 산수와 문물이 아름답고 풍요로웠으며, 당시 이 지역이 자신들의 성씨와 발음이 같은‘도촌’이었다는 점도 작용했다. [도촌은 성주도씨 입향 후‘도촌(都村)’으로 불렸다] 이후 도촌은 서재(鋤齋)라는 호를 사용한 도여유라는 인물의 등장으로 세상 사람들로부터‘서재공 마을’또는‘서재’로 불렸고, 지금까지 480여년의 세월동안 성주도씨 대종파 세거지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대구파 양대산맥 서재계·서촌계
팔거 지역의 호족이었던 성주도씨는 세가 확장됨에 따라 32개 파로 분파되었다. 이중 큰집인 대구파는 다시 22개 파로 분파되었는데, 백파(伯派)인 서재(鋤齋)계 용호(龍湖) 문중과 서촌(西村)계 병암(屛巖) 문중이 대표적이다. 서재 입향조 도흠조는 아들 넷을 두었다. 첫째‘도원국(都元國)’과 둘째‘도원결(都元結)’은 서재에 정착해 서재 계보를 이었고. 셋째‘도원량(都元亮)’은 임란 직후 서재에서 와룡산 너머 마을인 서촌[성서 용산]에 정착, 서촌계보를 이었다. 넷째인‘도원례(都元禮)’는 지금의 군위에 정착했다.
서재와 서촌. 두 마을에서는 조선시대 대구를 대표하는 걸출한 인물을 여럿 배출했다. 서재계에서는 양직당(養直堂) 도성유(都聖俞)·서재 도여유(都汝兪)·지암(止巖) 도신수(都愼修)·휘헌(撝軒) 도신여(都愼與)·명애(明崖) 도신행(都愼行)·죽헌(竹軒) 도신징(都愼徵) 등이 있으며, 이 중 도성유·도여유·도신수 세 분은 서재 용호서원에 제향된 인물이다. 서촌계에는 참판공 도원량·취애(翠厓) 도응유(都應兪)·일암(逸庵) 도언유(都彦兪)·낙음(洛陰) 도경유(都慶兪) 등이 대표적이며, 도응유·도경유 두 분은 용산 병암서원에 제향되었다.
성주도씨 성지(聖地), 치경당(致敬堂)
서재마을 동산 남서쪽 용호서원 바로 아래에 치경당(致敬堂)이 있다. 치경당은 현재 묘소가 전해지지 않는 성주도씨 기세조 도순, 3세 대구파 전서공(典書公) 도유도(都有道), 3세 성주파 판서공 도유덕(都有德) 3위를 추모하고 제향하는 공간이다. 본래 3위에 대한 제향은 흥선대원군 서원철폐령 이후 복원된 용호서당[용호재]에서 봉행하다가, 1970년 경술보(庚戌譜) 발간 때부터 치경당에서 모시게 됐다. 지금의 치경당은 1984년 중수한 건물로 치경은 선조 공경하기를 지극히 한다는 의미다.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치경당은 전면으로 반 칸 퇴 칸과 좌우로 반 칸 규모의 협칸을 두고 있다. 가운데 두 칸은 대청이고, 좌우 각 한 칸씩은 방인데, 동쪽 방은 종족 간의 화목을 돈독히 한다는 돈목재(敦睦齋), 서쪽 방은 재계(齋戒)의 의미를 담은 재숙사(齊宿舍)다. 대문인 재현문(在見門)은 가운데 1칸만 솟을대문이고 좌우 각 1칸은 대문간 방이다. 재현은 재계를 지극히 하면 마치 선조가 곁에 있는듯하다는 뜻을 담은 것. 지금도 매년 한식일 봉행되는 치경당 향사에는 전국에서 100여 명이 넘는 종원들이 참례하고 있으며, 청하에 있는 2세조 묘소도 참배하고 있다. 한편 용호서원 입구 산길어귀에는 3인의 열부를 기리기 위한 정려각인 정렬각(旌烈閣)이 있다. 정렬각은 조선후기 조정에서 내린 각기 다른 세 개의 정려각을 하나로 합쳐 놓은 것. 효부이자 열부로서의 부덕을 보인 성주도문의 세 며느리인 ‘아주신씨·월성최씨·순천이씨’부인이 정렬각의 주인공이다.
에필로그 - 쾌재정언(快哉正言), 도하(都夏)
하빈현 출신 성주도씨 중에 도하(1418-1479)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세종 때 사마시, 세조 때 문과별시에 장원을 한 인물로 서거정 이후 대구 출신으로는 과거를 통해 첫 출사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조선 중기 대구부사(1584-1590)를 지낸 초간 권문해 선생의 초간집에 도하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전한다.
도하는 대구 하빈현 사람이다. 집은 가난했지만 학문으로써 고을에 이름이 알려졌다. 그러나 20여 년 동안 공부를 하면서 과거시험을 보았으나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1458년(세조 4) 가을 어느 날, 세조가 성균관을 둘러본 뒤 별시문과시험을 시행하기로 했다. 그런데 시험일까지는 불과 7일 밖에 남지 않았다. 도하가 겨우 서울에 도착하여 시험장인 성균관 문밖에 도착하니 막 날이 밝으려 했다. 하지만 시험장의 문은 이미 닫힌 뒤였다. 도하는 문틈으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 시험보기를 청했는데, 이 소리를 세조가 듣고 왕명으로 시험을 허락하였다. 이때 시험장의 선비들이 도하를 비웃으며 말하기를 “저런 미천한 유생도 합격방에 이름을 올리려하는가!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급제하지 못하겠는가!”하였다. 시험문제는 시무책이었다. 일필휘지로 써낸 도하의 답이 세조의 뜻에 딱 부합했다. 도하는 장원으로 합격하고 그 자리에서 왕명으로 특별히 정언(正言)에 제수되었다. 도하를 비웃던 시험장의 선비들은 다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관원이 합격방문을 가지고 도하의 집을 찾아가 알리려고 할 때 도하는 붓을 들고 종이에다 다음과 같이 썼다. ‘집을 떠난 지 7일 만에 장원급제하고 특별히 정언에 제수되었으니 쾌재쾌재(快哉快哉·기쁘고 또 기쁘도다)로다.’ 이에 세상 사람들은 도하를 일러 ‘쾌재정언’이라 칭했다. [한국고전종합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