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 essay
궁합
송창우
우연히 맺은 인연이다. 이웃 사무실 부부가 갑자기 이전하게 되어 인사차 와서 주고 간 화분이다. 나무도 사람처럼 환경이 바뀌면 향수병을 앓는다면서 원래 있던 곳에서 자라야 한다며 잘 키워달라고 부탁했다. 남편은 아내가 유독 천리향을 좋아해서 애지중지한 것이라 꼭 봄에 꽃몽우리를 맺게 해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뜻하지 않은 천리향과 동거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넙죽 받은 선물보다 느닷없이 시작된 한집살이가 잘 이어갈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천리향은 염려와 달리 무럭무럭 자라 주었다. 행여 손길이 달라진 것을 눈치 챌 까봐 매일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정을 듬뿍 담아 보살폈다. 출근하면 제일 먼저 서두른 일이 신선한 공기와 볕을 마음껏 쬐도록 하는 것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마음 졸이며 기다렸을 대견함에 대한 보상이랄까. 움츠러든 굳은 몸이 기지개를 켜고 하루를 시작하기에는 계단 난간은 안성맞춤의 장소였다. 그런 간절함이 닿았는지 애타게 기다리던 천리향이 꽃을 물었다. 송이마다 뿜어내는 꽃 향은 천 리를 갈 기세만큼 강했다. 갓 나온 보들보들한 이파리를 날개 삼아 분홍치마에 살짝 가린 하얀 눈망울이 특히 눈길을 사로잡았다.
어렵게 얻은 행운은 길지 않았다. 어느 날 아침, 사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밤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나무는 누렇게 말라 있었다. 늦가을이라 매섭게 추운 날도 아니어서 얼어 죽을 리는 만무했다. 화분을 아무리 살펴봐도 어제 퇴근 전 모습 그대로였다. 겉흙이 마른 듯하여 물을 조금 주고 영양제를 꽂아두고 간 것이 전부였다. 꽃을 피우느라 소진된 양분을 보충해 주고 싶은 의도였다. 흙 속에 묻고 간 노란 병을 뽑았다. 아뿔싸! 남아있어야 할 영양제가 모두 빠져나가고 빈 통뿐이었다. 밤사이 손쓸 사이 없이 과식으로 숨구멍이 막혀 타버린 것이었다.
식물도 꼭 사람 같아 숨을 쉬고 원활한 영양 공급이 되어야 수명을 유지한다. 잎은 따사로운 햇살을 모아 산소와 양분을 만들어 내려보내고, 뿌리는 물과 각종 미네랄을 흡수하여 잎까지 올려 보낸다. 이처럼 올려 주고 내려보내는 순환이 조화롭게 이루어져야 살 수가 있다. 사람 또한 혈관이 막히면 사경을 헤매거나 심하면 목숨을 잃기도 한다. 세상에 무엇이든 제 역할을 소홀히 하면 연을 이어가기 어렵다. 이렇듯 한순간 찾아온 위기를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해 서로 남으로 남는 경우도 허다하다.
때로는 필요 이상의 관심이 되레 해가 된다. 강둑에 핀 들꽃도 무심히 내버려 두면 잘 자란다. 섣부른 욕심이 천리향에 돌이킬 수 없는 해를 끼쳤다. 한 생명을 지켜주지 못한 아쉬움도 컸지만, 그분들에게 어떻게 알려야 할지 난감했다. 고민 끝에 변명의 여지가 없어 사실을 알렸다. “괜찮습니다. 선생님과 궁합이 맞지 않아 그럴 겁니다.”라는 수화기 속의 음성은 왠지 실망감이 짙게 배 있었다. 꼭 다시 좋은 소식을 전하겠다는 내 목소리도 잔뜩 가라앉았다.
한동안 연락이 끊겼다. 징검다리 역할을 하던 화목을 떠나보냈으니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묘목을 구해다 심어야지 하면서도 바쁘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시간만 흘러갔다. 까맣게 잊고 있던 지난 봄, 광양 매화마을을 찾았었다. 매년 하동을 오면서도 다리 하나 건널 생각을 하지 못하고 돌아서곤 했던 길이다. 그날따라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봄의 색깔은 너무도 달랐다. 아직 한기가 서려서인지 햇살에 일렁이는 섬진강의 찬 물빛이 깔린 하동과 달리 맞은편 광양은 산허리마다 고매한 매화가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매화가 뿜어내는 매혹적인 내음은 감미롭다 못해 은은함 그 자체였다. 매향에 푹 빠져 돌아오다 농원 앞에서 눈에 번쩍 들어오는 글귀가 시선을 잡았다. “천리향 묘목 팝니다.” 순간 나를 사로잡았던 봄날 흥취가 사라지면서 가물가물 잊혀 가던 천리향에 대한 원죄가 떠올랐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대뜸 어린 묘목 두 그루를 샀다. 이번에는 안타깝게 말려 죽인 그 불명예를 벗고 싶었다. 무엇보다 제대로 키워 그분들의 상실감을 회복시키고 싶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전문가의 손을 빌려 고운 화분에 담았더니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두 그루 중에서 한 그루는 입양을 보내고 풍만하면서도 단아한 자태를 가진 탐스러운 한 그루를 남겼다. 또 상처로 남을까 봐 키우는 방법도 배웠다. 결코 관리하기 수월한 나무가 아니었다. 온도에 민감하여 직사광선은 피해 주고, 건조하면 잎이 우수수 떨어지고 습하면 뿌리가 썩고, 거름을 많이 필요로 하며 통풍도 잘 돼야 하는 등 꽤 까다로운 생육 조건이 필요했다. 잘 적응하여 빨리 잔뿌리가 내리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도 처음보다 잎은 점점 더 윤기를 잃어 갔다. 점차 바닥을 향하는 잎사귀를 닦아도 주었으나 결국 뿌리가 썩은 나목이 되었다.
고사한 원인이 궁금했다. 마른 줄기를 잡고 천천히 뽑아 흙을 걷어냈다. 놀랍게도 어른 주먹 크기의 진흙이 뿌리를 감싸고 있었다. 화원을 운영하는 분이 손수 식재해주었기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성의 없이 화분에 옮겨 심은 결과가 빚은 참사였다. 이러니 뿌리가 썩지 않고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흙이 마르면 줄기차게 물만 주었으니 무지함에 탄식이 절로 나왔다. 이 기막힌 악연의 끝은 어디일지 가슴이 먹먹해졌다.
우연히 맺은 만남이지만 나와는 기운이 맞지 않았나 보다. 이상하게도 다른 식물과는 다르게 유독 천리향만 내 곁을 떠났다. 꽃말처럼 갑자기 생긴 행운은 없었다. 새로운 행운은 고사하고 오랫동안 지켜온 가정의 울타리를 허무는 쓰라림도 천리향을 보내며 같이 맞았다. 어긋난 궁합으로 홀로 선다는 것이 낯설고 익숙하지 않았다. 순탄하지 않았지만 지울 수 없는 지난 궤적을 벗어나 당분간 질퍽한 진흙탕 길을 헤맬 것이다.
밤사이 부풀어 오른 상념이 거미줄을 친다. 허기진 마음에 또 다른 연을 이으려 발걸음이 화원으로 향한다. 먼저 천리향에 눈길이 머문다. 걱정 가득한 눈으로 위로하듯 말을 건네 본다.
“다시 시작하는 거야.”
송창우| 2022년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