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생활에 적응되자 몸무게가 감당 못할 정도로 늘어났다.
입대 전 키는 172cm 몸무게 60kg이던 것이 군 생활 겨우 4개월 만에 69kg이 되었다.
군화를 신으려고 엎드리면 불룩 튀어나온 배 때문에 제대로 신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막사 출입구에 돋아 둔 방호벽에 신발을 올려놓고 끈을 묶다가 바로 위 동기에게 신나게 얻어터졌다. 아 군대란 아무리 적응하려 해도 적응이 안 되었다.
공병대대로 자대 배치를 받았을 때는 1986년 연말이었다. 동절기를 맞아 부대원들은 각자 자기가 맡은 위치에서 닦고 기름치고 정비하는 데 몰두하였다. 갓 신고식을 마치고 관물 앞에 꼼짝 않고 앉아 바쁘게 움직이는 내무반 병사들을 지켜보았다. 나도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간절했지만 왕선임이 아무도 날 건들지 못하게 하고서 한 자리에 부동자세로 앉혀놓았다.
“어이 이등병 사회에서 뭐 하다 왔어”
“이병 000 설계사무소에서 일했습니다.”
“어쭈구리 이 자식 봐라 그럼 그림 좀 그릴 줄 알겠네.”
며칠 뒤면 제대를 할 왕고참은 내게 이런저런 걸 물어왔다.
지금은 어떨라나 모르겠지만 당시 우리 중대의 제대병들은 소위말해 ‘추억 록’이란 걸 만들어 사회로 가기고 가는 걸 무슨 벼슬처럼 여겼다. ‘추억 록’이라고 해봤자 별것 없다. 그저 군대 생활 중에 찍은 사진들을 종이에 붙이고 사이사이에 적당한 그림과 글을 적어 꾸미는 게 전부다. 만화를 그릴 줄 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인정을 받았을 게지만 그런 병사를 찾기가 어디 쉬운 법인가. 꿩 대신 닭이라고 스케치 좀 한다는 나를 붙들고 불철주야 추억 록을 만들게 했다. 남들은 청소다 정비다 잠시도 가만히 앉아있질 못하는 와중에 난 왕선임 곁에 쪼그리고 앉아서 추억 록 제작에 열을 올렸다. 그런 내가 고마웠던지 다른 병사에게 px 심부름을 시켜 과자며 음료수를 대주었다. 그런 나를 가장 아니꼽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으니 바로 위 동기들이었다. 그냥 지나가면 될 것을 내 뒤통수를 후려치고 간다. 세면장에서 만나면 시멘트 바닥에 손가락 깍지 끼고 엎드려뻗쳐를 시켰다. 그것도 아니면 아무 이유 없이 트집을 잡고 못살게 굴었다. 그때마다 왕선임이 나서서 비호를 해주며 나를 건들지 못하게 막았다. 차라리 맞는 게 낫지 왕선임의 방패막이가 싫었다. 어차피 며칠 뒷면 제대할 병장은 이제 쓰러질 고목나무나 다름없다. 그러나 나머지 병사들은 앞으로 제대할 때까지 함께 할 사람들 아니겠는가. 그러니 어느 쪽을 택하는 게 현명한 지는 아무리 멍청한 이등병이라도 잘 안다. 중간에 끼어 이도 저도 못하는 내 신세가 참 처량했다.
밤새 눈이 많이 내렸다. 일조 점호를 마치자마자 중대원들은 당가와 삽과 싸리비를 들고 재집결하였다. 그날도 난 어김없이 왕선임의 호출을 받고 페치카 옆 뜨듯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추억 록을 만들었다. 밖에선 눈 치우는 소리와 군기당번들의 외치는 고함소리가 귀로 쟁쟁하게 들렸다. 얼른 밖으로 나가서 나도 저들 틈바구니에 끼어 한몫을 해야 하는데... 속으로 간절하게 생각하였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드디어 추억 록이 완성되었다. 이제 좋은 시절 다 갔구나 속으로 생각하는데 다음 기수에 해당하는 병장이 나를 붙들더니 자기도 추억 록을 만들어 달란다. 그럭저럭 이어진 추억 록 작업은 이등병 3호봉까지 이어졌다. 그러는 사이에 내 밑으로도 졸병이 들어왔다. 나를 괴롭히던 위 동기들도 이젠 귀찮아졌는지 이전보다 덜 했다. 그러다 상황실에서 날 데려갔다. 일종의 스카우트다. 단지 글씨 하나 잘 쓴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설계사무소 출신이라면 누구나 고딕체 글씨 정도는 잘 쓴다. 도면에 표기하는 글씨로 고딕체가 가장 좋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속한 공병대는 훈련 시즌엔 각종 훈련에 동원되고 나머지는 군사용 전술도로나 각종 전술용 구조물들을 시공하는 현장에 투입된다. 말하자면 군대조직 내 시설부대로 보면 된다. 철근배근도나 토목도면을 볼 줄 알고 도면을 그릴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요긴하게 쓰임 받는다. 바로 나 같은 사람이다. 상황실에서 평소 유심히 나를 관찰하였던 모양이다. 그중에 공사 계(사회로 치면 공사 관련 공무 업무 )로 근무하던 병장이 대학원생이란 신분으로 복무기간 단축 혜택을 받아 몇 달 뒤에 제대를 앞두고 있었다. 말하자면 공사 계 조수로 발탁된 것이다. 내무반과 상황실은 같은 중대원에 속하지만 하루 일과는 별개로 움직인다. 상황실은 일종의 사무실 같은 개념이다. 내무반에 속한 사병들의 군대기록을 관리하고 병가, 휴가, 외박, 제대, 인사사고, 연중 훈련행정지원 등과 관련된 각종 업무를 본다. 또는 군대 내 조직적인 관리와 검열행정업무 등을 담당한다. 서류 업무가 밀리면 훈련에서도 제외되곤 한다. 그러니 사병이라면 한 번쯤 선망하는 곳이 상황실이다. 이런 이유에서 상황실 대원들을 내무반 선임들도 함부로 다루지 못하였다. 오히려 잘 보이려고 애를 썼다. 그래야 외박 증 한 장이라도 더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작업시즌이다. 우리 중대는 연천 일원의 전술도로개척을 위해 임진강 변에 야전 텐트를 치고 생활 하였다. 중대장 텐트는 별도의 위치에 따로 설치하였다. 간부들은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가고 없다. 밤만 되면 군기 당번들이 갑자기 늑대로 돌변한다. 밥 잘 먹고 내무반 정리에 한창일 때 감시당번을 통해 명령이 하달된다. “중대원 집합” 그러면 당장 동작 그만하고 모두 지정된 야외 집결지로 후다닥 뛰어가 사열 횡대로 줄지어 선다. 아무 이유 없이 자기보다 낮은 계급의 병사들을 앞으로 한 명씩 호출하여 열중쉬어 자세를 시킨 채 주먹으로 가슴을 향해 펀치를 날렸다. 최소한 세 대 이상씩 얻어맞았다. 어떤 놈은 주먹에 힘이 없고 어떤 놈은 강펀치에 나가떨어졌다. ‘퍽퍽’ 주먹질 소리가 날 때마다 ‘끄윽끄윽’ 하는 신음소리가 났다. 한 차례 얼차려를 받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각자 하던 자리로 돌아갔다. 말하자면 군기를 잡기 위해 매일 밤마다 벌어지는 행사다.
상황실 텐트는 내무반 텐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 모두가 공포의 시간일 때 난 상황실 의자에 앉아서 초조하게 시간을 보냈다. 상황실은 상황실 나름대로 위 동기가 군기를 잡았지만 중대원들처럼 무식하진 않았다. 일종의 동료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쩌다가 정도가 세게 나올 때도 있었다.
한 번은 각종 건설공구를 보관하고 있는 자재 창고를 정리하다가 구석에서 잡지 하나를 발견했다. 지금도 미국에서 발행되고 있는 포르노 잡지다. 그걸 창고에서 처음 발견한 사람은 나지만 그걸 거기에 감춘 사람이 누군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나중에 비슷한 잡지를 간부들이 사용하고 있는 책상서랍에서 발견했다. 추측하건데 상황실 대원 중 한 사람이 간부가 가지고 있던 잡지를 몰래 빼돌려서 훔쳐본 게 아닐까 싶었지만 차마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군인이라면 치마만 두르고 있어도 여자로 보인다는 우수개소리가 있을 정도인데 포르노 잡지라니 그걸 보고 있는 나 역시 참을 수 없는 말초신경의 비대증에 몇날 며칠을 시달려야 했다. 그 사건으로 중대는 또 한 번의 극심한 얼차려를 받아야 했다. 군인정신을 흐려놓았다는 이유에서였다. 내 손을 떠난 잡지는 비밀리에 내무반을 떠돌았다. 급기야 그것이 발각되어 보지도 않은 사병까지 모두 범죄자로 떠밀렸다.
우리 중대에게 주어진 임무는 산 정상의 약 30m를 깎아 내고 지정된 위치까지 전술도로를 개척하는 것이었다. 먼저 예상되는 도로 주변의 모든 나무를 벌목했다. 이어서 장비를 동원해 흙을 굴착하였다. 약 1m 남짓 흙을 파내자 암반층이다. 힘깨나 쓴다는 사병들을 골라 착암작업을 시켰다. 뚫린 구멍에 다이너마이트를 집어넣고 터트렸다. 공병의 주특기가 폭파 및 지뢰매설이기 때문에 다이너마이트 터트리는 일은 식은 죽 먹기다. 문제는 암반층이 떨어져 나가면서 도로 좌우에 가파른 암벽 절벽이 생겼다. 절벽 표면이 울퉁불퉁해서 깨내야 한다. 장비로는 닿지 않았다. 그러자 현장을 지휘하던 선임이 착암기를 잡고 있는 사병들의 허리에 밧줄을 묶고 위쪽에 있는 참나무에 묶었다. 그러고 공중에 매달린 채 착암작업을 이어나갔다. 지금 생각해도 무식한 짓이다. ‘안되면 되게 하라’ 군대니까 그런 말이 통한다.
매미가 지척에서 귀가 따갑도록 운다. 병사들은 매일 이어지는 콘크리트 타설 작업에 지쳐갔다. 군화는 시멘트가 묻어 딱딱하게 굳어갔고 손과 발이 부르트고 얼굴은 햇볕에 시커멓게 그을렸다. 전방의 산악지형을 파다 보면 육이오 참전 중에 임시 매설된 이름 없는 장병들의 무덤이 종종 발견되었다. 마침 그런 무덤 몇 기가 발견되자 중대장은 꼼수를 부렸다. 마을 이장과 짜고 연고 있는 무덤이라 속여서 정부로부터 보상비를 받아 가로챘다. 아무도 모르지만 상황실에 근무하고 있는 나는 그들의 서류를 대신 작정해 주어야 했다. 뻔히 아는 거짓말에도 정부는 현장 확인도 않고 이장에게 보상비를 지불해 주었다. 그런 와중에도 병사들은 거지도 이런 생 거지가 없을 정도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군인의 나이라고 해봤자 이십 대 초중반 아니던가. 철근이라도 씹어 먹을 나이다. 피골이 상접되도록 파김치가 돼버린 병사들이 안쓰러웠다. 마침 그 무렵에 나는 휴가차 집에 갔다 알바를 해서 번 돈을 가지고 부대로 돌아왔다. 선임에게 보고하고 넌지시 부대원 회식을 시켜주자고 제의하였다. 돈은 내가 댈 테니 염려 말라고 하였다. 나는 우리 동기 몇 명과 함께 고개 넘어 민간인 가게로 찾아갔다. 막걸리 두 말과 수박과 참외 과자를 잔뜩 사가지고 작업장 근처에 적당히 숨겨 놓았다. 오전 내내 높이 4m 길이 80m의 옹벽을 완성하기 위해 콘크리트 타설을 진행하였다. 나도 1500가론 물통에 들어가 물을 떠 주는 역할을 하였다. 점심을 먹고 쉬는 시간에 중대원들을 한 자리에 모여 막걸리 파티를 벌였다. 회식이라고 해봤자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부대원들은 부어라 마셔라 하며 시원한 수박과 과자봉지를 뜯고 먹느라고 야단법석이다. 그걸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데 선임이 나를 부른다. 그러곤 뿔잔에 막걸리를 가득 담아 마시라고 한다.
“ 전 못 마십니다.”
“ 얀마 군대서 먹으라면 먹어야지 무슨 잔말이 많아 어서 마셔”
“전 술을 전혀 못 마십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선임이 내게 모래를 져 나르는 질통을 가져오라 하곤 그걸 내 등에 지게 하고서 모래를 퍼 담고 뺑뺑이를 시켰다. 언덕을 오르내리는 뺑뺑이다. 태양은 내리쬐지 입에선 단내가 났다. 돌아와서 한 잔을 억지로 마셨다. 그러자 또 한 잔을 가득 따라주며 마시라 한다. 이번에도 못 마신다 했더니 다시 뺑뺑이를 돌렸다. 그러길 대 여섯 차례 반복되었고 난 어쩔 수 없이 생전 술이라곤 입에 대보지도 않았는데 플라스틱 뿔잔에 여섯 잔을 거푸 마셨다. 속으론 ‘이런 젠장, 누가 사준 술인데 내게 이런 대접을 한단 말인가’ 열불이 났지만 나로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무튼 즐거운 막걸리 회식이 끝나고 다시 옹벽 거푸집에 콘크리트 타설이 이어졌다. 나도 돌아와 물 조를 맡았다. 1500가론 물통에 풍덩 들어가 물 한 동일 퍼서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병사에게 건네주었다. 몸이 맘대로 움직여주질 않는다. 물을 건네주다가 물통 바닥에 철퍼덕하고 고꾸라졌다. 그러길 연거푸 하니 물을 받던 위 선임이 쌍욕을 퍼 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입에선 시조가락이 흘러나왔다.
“태산이 이~ 높다아아~ 하되~...”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선임이 꽥하고 소릴 질렀다.
“야 이 미친 00새끼야 너 뒈지고 싶냐”
“예 뭐라고요 00님” 혀가 꼬부라져 말도 안 나왔다. 즉시로 난 목덜미를 붙잡힌 채 물통에서 끄집어내졌다. 그리곤 곧바로 상황실로 쫓겨 왔다. 술김에도 뭔가 잘못된 걸 알았다. 이런 몸으로 상황실에 들어가면 호되게 얼차려를 받을 게 뻔하였다. 그래서 중대장 텐트로 몰래 들어갔다. 중대장의 야전침대에는 고급지고 뽀송뽀송한 군용 담요가 정갈하게 깔려 있었다. 난 거기에 들어 누었다. 너무 졸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일과를 마치고 일석점호시간이다. 한 놈이 빈다. 아무리 재 일련번호를 외쳐도 마지막 숫자 하나가 모자란다. 모두가 누가 빠졌는지 궁금해 두리번댔다. 내가 없는 걸 알고 모든 병사들이 일제히 찾아 나섰다. 야전 텐트가 있는 곳의 뒤와 좌우로는 산이 둘러있다. 막사로 들어오는 전면 쪽은 임시 개통한 진입로가 외부와 연결되어 있었다. 산 중턱엔 임시 화장실이 움막처럼 지어져 있다. 곳곳을 수색해도 나를 찾지 못하자 병사들은 웅성대기 시작했다. 내가 탈영한 줄로 알았다. 그때 상황실 선임이 중대장 실에 들어왔다. 감히 일개 이등병 주제에 중대장 침상에 버젓이 누워 잠을 자고 있는 게 아닌가 선임은 군홧발로 자고 있던 내 배를 퍽하고 찼다. 자다가 이게 뭔 일이람 하고 얼떨떨한 채 상황 판단이 안 되었다.
그 사건 뒤로 누구든 지 내게 술을 권하는 놈은 가만 안 두겠다고 공개적으로 선포되었다. 어찌나 반갑던지 열 살 때 내 자신에게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한 놈이다. 아버지의 술주정과 후유증에 시달리는 걸 너무도 힘들게 지켜봐야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