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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하목정 여인들,
전의이씨 할머니·순천박씨 할머니
프롤로그
지금까지 하목정을 포함한 전의이씨 예산공 종중의 많은 인물과 문중유산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은가? 왜 우리는 옛 선조나 문중 이야기를 할 때면 늘 남자만 등장하는 걸까? 인류의 절반은 여자요, 신화나 전설에서도 중요한 대목에서는 꼭 여성이 등장하는데 말이다. 족보를 봐도 그렇다. 시조 이하 중시조까지는 대체로 할머니가 등장하지 않는다. 오직 할아버지→할아버지→할아버지로만 연결되어 있다. 할아버지만 중요하고 할머니는 중요하지 않았던 것일까? 물론 문중마다 ‘○○할머니’ 하는 식으로 문중을 빛낸 여성이 몇 분씩 있긴 하다. 하지만 남성에 비해 여성의 존재는 민망할 정도로 미미하다. 이번에는 전의이씨 예산공 종중을 빛낸 할머니 두 분에 대한 이야기다. 한 분은 전의이씨네 딸이요, 또 한 분은 전의이씨네로 시집온 순천박씨네 딸이다.
임금이 내려준 표창, 정려(각)
전통문화 답사를 다니다보면 종종 정려각이 눈에 띈다. 정려각은 주로 마을입구나 큰길가 혹은 서원이나 재실 옆에 잘 있다. 규모는 작지만 화려하게 단청을 칠하는 등 전체적으로 고급건축기법이 적용된 탓에 사람들 눈에 잘 띈다. 이는 정려각이 기본적으로 오가는 사람들 눈에 잘 띄기 위해 의도적으로 지어진 건물이기 때문이다.
정려旌閭는 충신·효자·열녀에 대한 표창으로 대상자의 집 대문 앞[정문], 또는 마을 앞[정려]에 세운 문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문은 우리가 알고 있는 문과는 다르다. 두 개의 기둥과 두 기둥을 연결하는 상부에 홍살만 설치되어 있을 뿐, 가운데는 문짝도 없이 텅 비어 있는 허문虛門이기 때문이다. 이 문은 문 전체에 붉은 칠을 하고 뾰족한 살대가 꽂혀 있다고 해서 홍살문 혹은 홍전문紅箭門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정려(문)라고 하는 것은 홍살문 형태를 하고 있는 정문과 정려를 합쳐 부르는 표현이며, 다른 말로는 ‘도설·작설·오두적각·홍문’이라고도 한다.
요즘은 주객이 전도되어 정려(문)보다는 정려각이란 표현을 더 많이 쓴다. 그런데 사실은 정려가 주인이고 정려각은 손님에 불과하다. 정려각은 주인에 해당하는 정려를 보호하기 위해 지은 보호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정려보다는 정려각이란 용어가 대중적으로 더 많이 사용되고 있는 만큼 정려와 정려각은 서로 통용해도 큰 문제는 없다.
정려로 대표되는 정려정책은 한·중·일 3국을 비롯한 한자문화권에서는 공통적으로 존재했다. 우리나라를 예로 들면 삼국·신라·고려·조선·대한제국·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 이후까지도 정표정책이 이어져왔는데, 정표정책 중 최고등급이 바로 정려였다.
정려가 결정되면 정려가 내려지는 것 외에 세금과 부역이 면제[이를 복호復戶라 한다]되거나, 면천[천민의 신분에서 벗어남]·사면·벼슬이 내려지기도 했다. 이러한 정려제도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충·효·열을 권장함과 동시에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예치禮治와 교화의 한 방편이었다.
정려를 결정하는 과정은 먼저 지역의 백성·유림 등이 나서 고을 수령 또는 감사[관찰사]에게 정려를 청원한다. 감사는 이 청원을 예조에 보고하고, 예조는 임금에게 보고한다. 임금에 의해 최종적으로 정려 결정이 내려지면 이번에는 청원이 올라갈 때의 역순으로 명이 내려오고 시행된다. 어사에 의한 청원도 있는데 이는 어사 스스로 인물을 발굴해 임금에게 직접 청원을 하는 것이다. 참고로 조정이 사라지고 없었던 일제강점기 때는 ‘유림향약본소’라는 유림조직에서 발급하는 ‘포창완의문[일종의 증명서]’이 정려를 대신했다. 해방이후에는 ‘오륜행실중간소’가 그 역할을 이어받았으며, 그 뒤에는 지방의 향교와 서울의 성균관이 중심이 되어 정표제도를 이어갔다.
제문과 절명사를 남긴 여인, 이신옥李臣玉
현풍곽씨12정려각, 곽내용의 처 효열부 전의이씨
대구 달성군 현풍읍 현풍곽씨 550년 세거지 소례[솔례] 마을에는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목조 정려각이 한 동 있다. 정려각은 크게 세 가지 유형이 있다. 목조 정려각·석조 정려각·대문형 정려각이다. 이 중 목조 정려각은 다시 기본형·병렬형·다칸형으로 나뉜다. 기본형은 정면 1칸·측면 1칸 규모로 정표자 1인을 대상으로 한다. ‘병렬형’은 두 개 이상의 기본형이 일렬로 배치된 형식이며, ‘다칸형’은 정려각 내부가 여러 칸으로 나뉜 형식이다. 현풍곽씨12정려각이 바로 다칸형 정려각인데 그 칸 수가 무려 12칸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 현풍곽씨12정려각은 12칸 중 10칸이 정려각이며, 나머지 2칸은 비각이다. 현재 이 정려각에는 충신·효자·열부 15명의 정려편액이 봉안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 충신 | 곽준 (1명) |
| 효자 | 곽이상·곽이후·곽결·곽청·곽형·곽호·곽의창·곽유창 (8명) |
| 열녀 | 포산곽씨·거창신씨·광주이씨·밀양박씨·안동권씨·전의이씨 (6명) |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중 한 명인 곽내용의 처 전의이씨다. 현풍곽씨12정려각 입구에는 비석 3기가 있다. 정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맨 오른쪽 비. 이 비는 지금으로부터 273년 전 소례마을에서 살다가 25세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한 여인이 남긴 절명사絶命詞[목숨을 끊으며 남긴 가사] 전문을 새긴 비다.
익히 아는 것처럼 조선시대를 살다간 우리네 여인들은 이름이 잘 남아 있지 않다. 분명 살아 있을 때는 어떤 식으로든 이름이 있었을 터인데, 죽고 나면 어찌된 영문인지 다들 ‘본관+성씨’가 된다. 그럼에도 종종 세상에 이름을 남긴 여인도 있다. ‘여중군자’라 불린 음식디미방 저자 정부인 안동장씨 ‘장계향[1598-1680]’, 허균의 누나이자 조선 중기 천재 여류시인이었던 허초희[허난설헌·1563-1589] 등이다. 그런데 그녀들보다 100여년 뒤, 우리 고장에서도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남긴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이신옥李臣玉[1723-1748]20)이었다.
20) 참고로 전의이씨 예산공 종중 수월당공파 23世 항열자는 ‘○臣’이다. 따라서 전의이씨 23世인 효열부 전의이씨 이름이 ‘옥신玉臣’이라는 설도 있다.
세상에는 ‘곽내용의 처 전의이씨’ 혹은 ‘효열부 전의이씨’로 알려진 이신옥은 달성 하목정 창건주인 낙포 이종문의 6세손이다. 그녀는 아버지 이명후李命厚와 어머니 오천[연일]정씨 사이에서 3남2녀 중 장녀로 지금의 달성군 하빈면 기곡리 터실에서 태어났다. 3세에 어머니를 잃은 그녀는 오빠 학옹鶴翁 이응신李應臣과 함께 외가인 영천 선원마을에서 자랐다. 오빠 이응신은 매산 정중기 문하에서 수학하고 소산 이광정, 후산 이종수 등과 교유하는 등 학문으로 이름이 난 인물이었다.
이신옥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천재성을 보였다. 한 번 본 것은 잊어버리지 않았고, 하나를 들으면 열을 깨우쳤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빠가 매산 선생 문하에서 수학할 때 오빠의 어깨너머로 글을 익혔다고 한다. 13세에 이미 사서삼경을 읽었고 시문에도 능했다. 하지만 당시 사회분위기는 여성이 학문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중도에 학업을 중단하고 효경孝經과 열녀전烈女傳 등을 읽으며 여성으로서 부덕婦德을 쌓는 일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24세가 되자 그녀는 동갑인 현풍 소례마을의 현풍곽씨 곽내용郭乃鎔[1723-1747]과 혼례를 올렸다. 곽내용은 현풍곽씨 청백리공파 탁청헌濯淸軒 곽황郭趪의 8세 주손胄孫[불천위 선조를 모시지 않는 집의 맏이]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혼례를 올린 지 채 6개월도 못되어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그것도 신행新行도 하기 전이었다. 전통혼례에서는 혼례를 올리고 신부가 바로 시댁으로 들어가지 않고 일정기간 친정집에서 생활한 뒤 시댁으로 들어갔다. 따라서 ‘신행 전’이란 말은 혼례는 올렸으나 시댁이 아닌 아직 친정집에 머무르고 있을 때를 말한다.
남편 상을 치르던 그녀는 어느 날 식음을 끊고 남편 뒤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이를 눈치 챈 시아버지는 “외아들을 잃은 나로서는 이제 너를 의지할 수밖에 없다”며 그녀를 위로했고, 병중에 있던 친정아버지도 “너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이다. 내 명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며 탄식했다. 결국 그녀는 결심을 바꿨다. 우선 살아계신 부모님께 남은 효도를 다하고, 그 후에 남편 뒤를 따르겠다는 것이었다. 그날부터 그녀는 초상 때 입었던 여름옷을 입고 겨울을 났으며, 머리를 들고 사람을 대하지 않았다. 심지어 한 집에 사는 가족과 노비조차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로부터 넉 달 뒤 병중에 있던 친정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그 소식을 접하자 비로소 그녀는 죽은 남편 앞으로 제문祭文 한 편을 지어 남편 영전에 고한 뒤 자결했다. 때는 1748년(영조 24) 음력 9월 26일, 그녀 나이 25세였다.
그런데 그녀의 장례날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소례를 떠나 장지로 향하던 상여가 남편이 묻힌 묘 앞에서 멈춰서 버린 것이다. 그녀의 장지는 지금의 달성군 구지면 오설리였고, 남편 묘는 소례와 오설리 사이 마을인 지금의 구지면 징리였다. 소례를 떠나 징리를 거쳐 오설리로 가는 도중 징리에서 상여가 멈춰 선 것이었다. 멈춰 선 상여도 상여지만 연이어 더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남편 묘 봉분이 갈라졌던 것. 이 모습을 지켜 본 이들은 장사계획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이적을 두 혼령의 뜻이라고 생각해 남편 묘에 그녀를 합장하기로 한 것.
뒤에 다시 소개하겠지만, 그녀가 자결하기 직전 죽은 남편에게 올린 제문 말미에 이런 문장이 있다. “한 날 한 시에 같이 죽자는 맹서는 못 지켰지만 한 자리에 같이 묻히기를 원할 뿐입니다” 혼령에게 기원한 말이 정말 씨가 된 것일까? 한 날 한 시에 같이 죽자는 맹서는 못 지켰지만 한 자리에 같이 묻히고자 했던 소원은 이뤄졌던 것이다.
이 소식이 세상에 알려지자 경상좌우도 유림 4백여 명이 통문을 돌리고 유회를 열어 이 사실을 조정에 알렸다. 그리고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25년 후인 1773년(영조 48) 비로소 그녀에게 효열부 정려가 내려왔다.
당시 전의이씨 효열행을 상부에 알렸던 여러 문서는 소례 현풍곽씨 종가에서 소장해오다 6·25 한국전쟁 때 소실됐다. 하지만 다행히 1947년 필사[베낀 글]해 둔 자료가 이후 발굴되어 「전의이씨 실행록」이란 이름으로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이 자료에는 당시 고을대표 김성원, 고을향약 대표 곽방구 등이 올린 공문서 외, 현풍 사림 101인[대표 엄이절], 거주민 49인[대표 박만필], 단성 사림 73인[대표 권대일], 창녕 사림(1) 22인[대표 윤상정], 창녕 사림(2) 39인[대표 노홍], 초계 사림 78인[대표 노갑후], 대구 사림 52인[대표 정동필], 고령 사림 28인[대표 박홍통], 성주 사림 37인[대표 윤면정] 등이 작성한 통문과 전의이씨 이신옥이 지은 ‘제문’·‘절명사’ 등이 등재되어 있다.
효열부 이신옥, 제문과 절명사를 남기다
1748년(영조 24) 25세 꽃다운 나이로 남편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난 전의이씨 이신옥. 염습을 하기 위해 그녀가 누웠던 자리를 들추니 자리 밑에서 한 폭 가사가 나왔다. 그녀가 자결하기 전에 써두었던 절명사絶命詞였다. 이 절명사는 그녀가 남편에게 쓴 제문과 함께 그 내용이 지금까지 그대로 전한다. 학계에서는 제문은 제문대로 절명사는 절명사대로 명문 중에 명문이라 평가하고 있다. 특히 절명사는 조선시대 여성의 작품으로는 최고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조선 후기 보기 드문 양반가 여성의 글인데다 문장이 유려하고 유가의 도가 잘 드러나 있으며, 동시에 지아비를 잃은 젊은 여성의 애절함이 구구절절 잘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제문과 절명사는 글이 상당히 길다. 하지만 어깨너머 글을 익혔다는 양반가 규수의 글이자, 영조로부터 효열부로 정려까지 받은 여인의 글이니 어떤 글인지 한 번 살펴보자. 두 글은 모두 한자, 한글이 섞여 있으며, 지금으로부터 270여 년 전 글이다 보니 문체와 맞춤법이 지금과는 사뭇 다르다. 전체 내용 중 일부만 발췌했고,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글도 현대식으로 바꿔보았다.
먼저 부인이 남편에게 올린 제문부터 살펴보자. 제문은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의 뜻을 나타낸 글로 정해진 형식은 없으며 대체로 글이 길다. 주로 제주가 아닌 친인척이나 지인이 제물을 올리고 제문을 읽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축문과는 다르다.
유세차 정묘년(1747) 9월 무자삭 26일 계축일. 한 집안의 주부[맏며느리]인 이씨[전의이씨]는 하늘·땅·사람 삼천 세계에 용납되지 못할 큰 죄를 지은 원통하고 억울한 마음으로 온몸이 쓰러질듯 합니다. 해와 달이 어두워지고 형체와 그림자가 흩어진 넋을 모아, 힘써 담을 크게 하고 정신을 가다듬어 돌아가신 부군 영전에 잠깐 고하나니 앎이 있을까요?
오호통재라. 저의 전생 죄악이 하늘과 신명의 저버림을 받아 포대기에 싸인 어린아이 신세를 면치 못해,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외로운 남매가 새로이 부모를 맞아 불쌍하고 사랑함이 지금 같을 때가 없었습니다 ···(중략)··· 지난해 음력 12월 그믐에 당신께서 기러기[전통혼례에서 신랑이 들고 가서 전안례에 사용하는 나무기러기]를 안고 저를 맞아주시니 나이는 동갑이요, 문중 또한 서로 격이 맞았으니 빈부귀천이 누가 높고 낮았을까요? 집안사람이 말하기를 진실로 원앙의 쌍이요, 하늘이 정해준 배필이니 백년을 함께 즐기리라 하셨는데 이 무슨 일 일까요?
오호통재라. 당신께서 생전에 제가 있는 곳에 두 번 오셔서 조용히 저에게 경계하며 이르셨습니다. “집에 죄를 얻지 말고 친척 대하기를 내 자식 내 형제처럼 하세요” ···(중략)··· 오호통재라, 오호통재라. 문득 당신의 부음이 이르니 “하늘아! 하늘아! 어찌 차마 어이 이런 일을 하는가”. 한마디 소리도 하지 못하고 오장육부는 끊어지고 온몸은 사라져 유유히 뜬 넋은 어디 있는가요? ···(중략)···
절절통재라. 당신께서 이별하실 때 옷을 벗어 내게 주며 “내가 그리울 때 이 옷을 보고 마음을 진정시키고 몸에 탈이 없도록 하시오. 초가을에 좋은 날을 받아 그대를 데리러 오겠소” 라며 금석같이 한 언약이 지금도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 통재라. 죽고 사는 결정이 그날인 줄 제가 어찌 알았겠나요? 간장이 다 녹아내리고 형체와 그림자는 남았으나 마음과 뼈는 다 썩었답니다. ···(중략)··· 통재라. 부부는 인륜의 대절이요 만복의 근원이라 했습니다. 주역 64괘에 건곤[부부]이 으뜸이요, 모시[시경] 3백편에 관저關雎를 먼저 쓰니 성인의 정한 법이 중한 줄 어찌 제가 모르겠습니까? ···(중략)··· 저의 청춘을 어디에 의탁하라고 원통히도 돌아가셨나요?
통재라. 통재라. 언제 다시 만나 이 집에서 화목하게 즐기실 건가요? 달 밝은 밤과 사람 없는 때를 틈타 하늘에 가만히 빌고 또 빌었습니다. 저 또한 당신과 함께 돌아가게 해달라고 ···(중략)··· 오호통재라. 언제 다시 보기를 기약할까요. 같이 죽자는 맹세를 저버리니 같은 곳에 묻히기를 원할 따름이에요. 오호라. 붓을 들어 한 번 크게 울고 넋이 유유히 노니 당신 가는 길을 보고자 하나 어찌 능히 미치리리오.
오호. 당신! 다시 원하노니 3생 연분을 다시는 잊지 말고 저를 빨리 데려 가세요. 저를 세상에 오래 두면 원통한 마음 하늘에 이를 것이니 당신의 체백인들 어찌 편하겠나요. 흐르는 눈물은 흔적이 또렷하고,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는 고통과 마음속에 품은 온갖 정이 가슴과 애간장을 막으니, 붓을 들어 쓰는 바를 알지 못하고 만분의 일도 못 베풀겠습니다. 어진 신령이시어! 앎이 있거든 한 잔 술을 흠향하시고 저의 원[어서 빨리 남편 곁으로 데려가 달라는 기원]을 다시금 잊지 말아 주세요. 오호통재라. 오호통재라. 상향
다음은 절명사에서 일부 발췌한 것이다. 사詞라고 하는 것은 산문과 운문 사이쯤 되는 문학 장르다. 산문처럼 글이 길지만 대체로 4·4음보를 기본으로 하는 음률이 있어 운문에 가깝다. 전의이씨 절명사는 모두 63구로 되어 있다. 내용 중에는 남편을 따라 죽음으로써 절개도 지켜야 하고, 동시에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등지는 불효도 행하지 않아야 한다는 열烈과 효孝 사이의 갈등이 잘 나타나 있다.
··· 슬프다. 가을바람은 어느 곳에서 오나요. 외로운 마음은 더욱 슬프고 슬프네요. 계절의 흐름은 이미 변하니 단풍은 비단 수놓은 장막처럼 둘렀고, 누운 수양버들은 어지러이 금실을 드리웠네요. 원앙은 서로 갈라져 꽃 수풀을 잃었고, 짝 기러기 남쪽으로 나니 또한 외롭지 아니할까요? 가을하늘 보름달은 서릿발에 잠겼으니 남편 잃은 나와 더불어 빛이 애처로워 보이네요. 슬프다. 계절 따라 변하는 경치여. 정말 나의 명을 재촉하는 때로다. 더디고 더디구나. 나의 죽음이여. 어찌하여 지금인고. 부모가 살아 있으니 천륜을 막는구나. 여자는 부모를 멀리하고 형제와 이별하고 반드시 남편을 따라야하거늘 ···(중략)···
소녀의 작은 몸을 한탄할 바 아니지만 20년 흔적이 전할 것이 없어지니 조상은 누구에게 전하고 지켜줄 이 없는 시아버지는 무엇을 의지할고 ···(중략)···
내 마음과 내 기운이 옛 적에 또렷하고 낭군의 낭랑한 말소리와 화평한 얼굴이 의심이 없는지라. 낭군님이 다시 돌아오실까요? 아니면 내가 낭군님을 따를까요. 세상 이별을 못내 슬퍼하였더니 한 평생 다시 만날 줄 누가 알겠나요. 옛적 아황과 여영이 저 같으니 우리 두 사람의 맑은 이름과 곧은 절개를 가히 알지 않겠어요. 오직 기쁘고 반가운 넋이 세상에서 멀리 떨어져 막혔으니 집 앞 산에서 우는 이는 시아버지요, 빈소에서 슬피 곡하는 이는 시어머니와 두 자매로다.
처가곳 묘골에 묻힌 박씨 할머니
출가외인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에서는 혼례를 치룬 여인은 시댁 쪽에서 장례와 제사를 지낸다. ‘시집간 여인은 죽어서도 시댁귀신이 된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세상이 바꿨다.하지만 이 문화는 아직까지 유효하다. 그런데 달성군 하빈면 하목정 옆 마을인 묘골에는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 이곳에서 살다간 한 자매의 이상한(?) 묘가 있다. 동생은 미혼이었지만 언니는 분명 혼례를 치렀음에도 시댁이 아닌 친정 선영에 동생과 함께 나란히 묻혀있다. 왜일까?
출가외인出嫁外人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시집간 딸은 친정과는 남이나 마찬가지라’는 뜻. 평소 별 생각 없이 써온 말인데 사전 설명을 보니 참 매정하고 정 안가는 말이다. 그런데 출가외인이라는 말은 생각과는 달리 그렇게 오래전에 만들어진 말은 아닌 것 같다. 옛 혼례문화를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 초·중기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혼례문화는 남자가 여자 집에 들어가 사는 ‘장가를 가는’ 문화였다. 이를 어려운 말로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솔서혼率壻婚’이라 한다. 그런데 조선 후기부터 반대가 됐다. 여자가 남자 집으로 들어가 살았다. ‘시집을 간 것’이다. 이러한 혼례문화의 변화는 사회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처가살이가 시댁살이로, 각성마을이 동성마을로, 윤회봉사[남녀 구분 없이 자식이 돌아가면서 제사를 모심]가 종자봉사[맏이가 제사를 모심]로, 남녀균분상속제[아들·딸 구분 없는 동등한 상속제도]가 종자중심상속제[맏이 중심 상속제도]로 바꿨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는 이론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모든 변화의 근본원인은 주자가례에서 말하는 ‘종자종법宗子宗法’ 때문이었다. 집안의 모든 일은 종손·주손·장손 등 맏이가 주관한다는 것이 종자종법이다.
아직 며느리가 아니다, 미성부
‘아닐 미, 이룰 성, 며느리 부’, 미성부未成婦. 이 말은 혼례는 치렀지만 며느리로서 치러야할 나머지 절차를 다 마치지 않았기에 아직은 며느리가 아니란 뜻. 지금 기준으로 보면 뭔가 이상하다. 혼례를 올렸으면 이미 부부가 됐고, 사위·며느리가 된 것이지 무슨 절차가 더 있단 말인가?
근대기 우리나라 혼례문화는 신부 집에서 혼례를 올리고, 3일 후에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오는 ‘3일 신행’을 행했다. 하지만 전통혼례에서는 혼례를 치루고 신부가 바로 시댁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신부는 한 동안 자신의 집에서 생활하다 시댁으로 들어갔는데 이를 신행新行·우귀于歸·우례于禮라 한다. 이 때 자신의 집에서 보내는 기간은 달을 넘기는 경우[달묵이]도 있고 해를 넘기는 경우[해묵이]도 있었다.
그럼 신행을 하면 비로소 진짜(?) 며느리가 되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었다. 신행을 하고 시댁 어른과 조상신에게까지 인사를 다 마쳐야 비로소 며느리가 될 수 있었다. 이때 시부모에 대한 인사는 신행 직후 바로 행하지만, 조상신에 대한 인사는 또 석 달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석 달을 기다리지 않고 시부모에게 인사하고, 하루, 이틀 내에 사당에 곧장 인사를 행하는 예도 있었다. 이는 혼례 이후 신행까지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고, 또 이 기간에 출산까지 하는 예도 있는 만큼 또다시 석 달을 기다리는 것은 너무 길다고 본 것이다.
이렇듯 전통예법에 따르면 신부는 혼례·신행을 해도, 시댁 사당에 인사를 하지 못하면 아직 며느리로서의 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봤다. 그래서 그 전에 신부가 죽으면 참 난감했다. 예서에는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있다. 그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며느리가 시댁 사당에 인사를 올리기 전에 죽으면, 시댁이 아닌 친정집에서 장사를 지내는데 이는 성부成婦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파심에서,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오해를 피하기 위해 사족을 하나 달고 넘어가야겠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예법은 사실상 그 적용 대상이 양반·사대부로 정해져 있었다. 이는 전통예법을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임에도 소홀히 다뤄 많은 오해를 낳고 있다. 대부분 전통예법은 ‘사서인례士庶人禮’[여기서 서인庶人은 평민이란 뜻이 아닌 선비류라는 의미]라고 해서, 조선시대를 기준으로 하면 일반 상민이 아닌 기본적으로 양반·사대부 이상에 적용되었던 예법이란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천 길 낭떠러지로 몸을 던진 박씨 자매
어려운 전통예법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고 다시 박씨 자매 이야기로 넘어가자. 달성군 하빈면 묘골 마을은 사육신 박팽년 선생 후손들의 560년 세거지다.[묘골과 하산은 구봉산 자락에 이웃하고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 입구에 사육신기념관이 있고 기념관 뒤편에 이곳 묘골박씨[순천박씨 충정공파] 문중 선영이 있다. 선영 축대 바로 아래에 작은 묘 2기가 나란히 있다. 정면에서 마주 보았을 때 좌측 묘 앞에는 ‘의인순천박씨지묘’라 새긴 묘비가 있고, 우측은 없다. 이곳이 바로 ‘박씨부인 순절묘’로 알려진 묘소인데 좌측이 언니요, 우측이 동생 묘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한 달이 지난 1592년 5월 18일. 왜적이 묘골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때 박팽년 선생의 5세손인 총관공 박충후의 두 딸이 왜적을 피해 낙동강가 높은 바위벼랑인 탁대에서 강으로 몸을 던져 순절했다. 당시 언니는 인근 하산마을 전의이씨 이종택과 혼례를 올린 후 신행을 앞두고 친정에 머물던 중 변을 당했고, 동생은 아직 처녀의 몸이었다. 나중에 이 일이 세상에 알려져 언니인 박씨 부인에게는 조정으로부터 열부정려가 내려졌다.
‘의인순천박씨지묘宜人順天朴氏之墓’에서 의인이란 표현은 조선시대 6품 문무관의 처에게 내린 작호다.[박씨부인의 남편 이종택은 종6품 선무랑] 이종택은 임진란 때 곽재우 장군 진영에서 의병활동을 한 인물로, 당시 하빈지역 의병대장이자 달성 하목정의 주인이었던 낙포 이종문의 동생이다.
대구지역 옛 선비들의 문집에는 임진란 때 묘골이 왜적에 의해 초토화됐다는 기록이 있다. 임란 직후 서인의 거두 오음 윤두수가 묘골을 방문하고 남긴 시에도 “난 후에 인가가 백에 하나도 남지 않았다[亂後人家百不存]”는 표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당시 처참했던 묘골의 모습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박씨 자매가 몸을 던진 구봉산 탁대는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지역에서는 탁대를 다른 말로 자매바위 혹은 형제바위라 부르기도 한다. 두 조각 난 형상의 탁대에는 박씨 자매에 얽힌 또 다른 전설도 전한다. 자매가 강으로 투신하는 순간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바위가 두 조각났다는 전설이다.
전의이씨 족보에는 의인 박씨부인에게 열부 정려가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현재 박씨 부인 정려(각)은 남아 있지 않다. 전의이씨 문중을 통해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박씨 부인 정려각은 하빈이 아닌 시외가 곳인 낙동강 건너 고령 다산 상곡에 있었다고 한다. 이 정려각은 1900년대 초까지도 존재했으나 어느 때인가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시댁이 아닌 친정 곳에 묻힌 박씨 부인의 묘사는 누가 모시고 있을까? 답은 친정이 아닌 시댁 전의이씨 문중에서 지금껏 모시고 있다. 결국 ‘미성부 박씨 부인’도 체백은 비록 친정 땅에 묻혔으나 혼은 어쩔 수 없이 시댁 귀신이 되었나보다.
친정족보, 시댁족보
효열부 유인孺人[생전에 벼슬하지 못한 사람의 아내에게 사용하던 존칭] 전의이씨 이신옥과 열부 의인 순천박씨. 효열부는 효孝와 열烈을 모두 행한 부인이고, 열부는 열烈을 행한 부인이다. 남들이 쉽게 행하지 못했던 효행과 열부행으로 세상에 알려지고, 임금으로부터 정려를 받고, 기록으로 남아 대대손손 칭송을 받는 두 여인. 그런데 그녀들이 시댁과 친정의 족보에 어떻게 올라 있을지 궁금하지 않은가? 출가외인은 정말 출가외인인 모양이다.
곽내용의 처 효열부 유인 전의이씨 이신옥
| 현풍곽씨 대동보 [시댁] | 전의이씨 부정공파 족보 [친정] |
| 전의이씨 이명후의 딸로 승지공 이종문의 8세손[오기임. 6세손]이다. 합장묘다. 효열행으로 정려됐으며 지지地誌에 실렸으며 절명사가 있다. 양자는 정준挺俊이다. | 포산인 곽내용에게 출가했다. 효열로써 정려를 받았다. |
이종택의 처 열부 의인 순천박씨
| 전의이씨 부정공파 족보 [시댁] | 순천박씨 충정공파 족보 [친정] |
| 순천박씨다. 아버지는 총관공 박충후다. 후사는 없다. 임진왜란 때 하빈 묘동 친정에 머물다 피란길에 올라 마침 구봉산 언덕에서 적을 만나 피할 수 없게 되자 강 한복판으로 몸을 던져 죽음으로 절개를 지켰다. 후에 이를 듣고 조정에서 정려를 내려 포상했다. 묘는 하빈면 묘동산 임좌. | 전의인 이종택에게 출가했다. 이종택은 망우당곽재우와 창의하여 참봉에 제수됐으며 아버지는 참판 이경두다. 임진란 때 여동생과 더불어 절개를 지켜 정려를 받았다. 후사는 없다. |
에필로그
소학과 효경(孝經)에 이런 말이 있다.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之父母라 불감훼상不敢毁傷이 효지시야孝之始也오, 입신행도立身行道하야 양명어후세揚名於後世하야 이현부모以顯父母 효지종야孝之終也니, 부효夫孝는 시어사친始於事親이요 중어사군中於事君이오 종어입신終於立身이니라
해석하면 이렇다.
신체와 털과 피부는 부모에게 받은 것이다. 감히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고, 몸을 세우고 도를 행함으로써 후세에 이름을 떨쳐 부모를 드러내는 것이 효의 마지막이니, 무릇 효는 어버이 섬김이 그 시작이요, 임금을 섬김이 그 다음이요, 몸을 세우는 것이 그 마지막이니라
그렇다. 유교에서 말하는 효는 이렇듯 그 뜻이 분명하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몸을 다치게 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고, 몸을 세워 도를 행함으로써 자신의 이름을 후세에 떨쳐, 끝내는 그 부모를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효의 마지막이라는 것. 전의이씨, 순천박씨 두 여인은 효열부로 정려를 받음으로써 부모를 세상에 드러냈고, 몸을 세웠다. 정말 대단한 여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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