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의 온도 / 김진우
나는 걷기를 새해의 다짐으로 삼았다.
나이가 들수록 계획은 줄고 다짐은 가벼워진다지만, 이번만은 다르다. 몸이 예전 같지 않고 마음도 쉽게 지친다. 몸을 움직이면 생각도 따라 움직일 것이라 믿었다.
걷기 위해 집을 나섰다. ‘수밭 골’ 들머리의 수변공원은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입구부터 길게 늘어선 차량 행렬, 데크 위를 메운 산책 인파. 모처럼 풀린 날씨에 모두가 바깥 공기를 탐하듯 몰려나온 모습이었다. 겨우내 웅크렸던 어깨들이 조금은 펴진 듯 보였다.
아내와 나란히 데크 길에 올랐다. 산 능선을 타고 내려온 바람이 이마를 스쳤다. 차갑다기보다 겨울 끝에서 건너온 맑은 기운 같았다. 고개를 들자 산자락에 자리한 하얀 의료원이 눈에 들어왔다. 한때 아내가 누워 지내던 곳이다. 그때 나는 병원 창문 너머로 펼쳐진 도시를 바라보며, 언젠가 저 길을 아내와 함께 걸을 날을 기다리곤 했다.
창밖으로 바라보기만 하던 길을 이제 우리는 나란히 걷고 있다. 지난날의 시간이 발끝에서 하나씩 풀려나가는 듯했다. 아내의 걸음에 맞춰 천천히 발을 옮겼다. 말은 없었지만 서로의 온기가 손끝으로 전해졌다. 걷는다는 것이 이토록 조용하고 단단한 위로가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공원의 나무들은 아직 침묵 속에 서 있었다. 소나무는 듬직한 제 모습을 지키고 있었고, 활엽수의 앙상한 가지들은 하늘을 향해 가느다랗게 뻗어 있었다. 바람이 스치면 살랑살랑 흔들리는 가지 끝은 겨울의 끝자락을 견디는 몸부림처럼 보였다. 못가의 억새는 빛이 바래 바삭한 소리를 냈다. 한때 푸르게 물결치던 것들이 이제는 바람만 스쳐도 부서질 듯 말라 있었다. 그러나 그 마른 줄기 속에서도 어딘가 봄의 숨결이 천천히 고이고 있으리라.
벤치에 앉자, 놀이공간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귀가 번쩍 뜨인다. 미끄럼틀을 오르내리는 작은 몸들이 햇살 속에서 반짝인다. 넘어질 듯 위태로운 순간에도 아이들은 웃음을 멈추지 않는다. 젊은 부모들은 그 곁을 맴돌며 혹시 모를 사고라도 생길까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손에는 휴대전화가 들려 있지만, 시선은 아이에게서 떼지 못한다.
아내와 나는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우리 아이들이 저만했을 때가 떠올랐다. 나라 살림도, 우리 살림도 넉넉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소풍날은 도시락 반찬을 고민하던 날이었고, 졸업식 날 짜장면 한 그릇이 작은 잔치였다. 놀이공원은 텔레비전 속 풍경에 더 가까웠다.
그 시절에도 우리는 웃었다. 그러나 지금의 웃음과는 결이 조금 달랐다. 공원은 화려해졌고, 사람들의 옷차림은 세련되어졌으며, 아이들의 장난감은 풍부해졌다. 그러나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의 눈빛만은 달라지지 않았다. 걱정과 기대와 사랑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흘러왔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걸음을 멈추었다. 오래전 교과서에서 배웠던 「오빠 생각」이었다. 공원 한편에 세워진 작곡가 박태준의 흉상이 햇살을 받고 서 있었다. 동요를 만들던 그의 마음에도 이런 계절의 숨결이 스며 있었을까. 노랫가락은 나를 지나간 시간 속으로 데려갔다.
동갑내기 친구들이 하나둘 지나간다. 모임을 이어온 지도 어느덧 삼십 년. 많던 친구들 가운데 이제 일곱 명이 남았다. 타국으로 떠난 이도 있고 먼저 세상을 떠난 이도 있다. 그리고 몇 달째 나오지 못하는 친구가 있다.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걷기가 힘들다.”
짧은 한마디가 오래 마음에 남았다. 산을 좋아하던 친구였다. 같은 나이, 다른 걸음. 전화를 끊고 난 뒤 한동안 마음이 무거웠다. 사람마다 늙어가는 속도와 모양은 다르다지만 병은 예고 없이 찾아든다. 가는 길 두드려보며 가라는 것인가. 속도가 느려져도 방향을 잃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얼음이 물이 되고, 물이 강이 되어, 마침내 바다에 닿듯 우리 또한 그렇게 흘러가면 되지 않겠는가.
오늘은 우수(雨水)다. 버드나무 가지 끝으로 연둣빛이 번져 나가고 있었다. 둑 섶은 아직 마른 기색이지만 그 속 어딘가에서는 새싹이 조바심을 다독이며 움츠리고 있겠지. 겨울이 아무리 완강해도 영원할 수는 없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걷는다는 것은 어딘가에 닿기 위한 일이 아니라 오늘도 멈추지 않고 걸어가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겨울을 지나는 동안 그사이 어딘가에서는 이미 봄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내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체온이 고요히 전해졌다.
우리는 말없이 다시 걸었다.
----------------------------------------------------------------------
jwkimkj@hanmail.net
계간 <문장> 수필 등단(2024)
제17회 강원교육문학 신인 작가상
재4회 한국디지털문학상 입상
한국문인협회, 수필과지성 문학회, 달구벌수필문학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