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성곽, 달성토성마을
오종락
세상의 모든 눈부신 기적도 지극히 작은 점 하나, 그 조용한 태동에서 시작된다고 했던가. 대구의 서쪽, 달성공원 서문 너머 비산 2·3동이라는 이름의 낡은 지도를 펼치면, 그곳에는 오랫동안 시간이 퇴적시킨 무채색의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도심의 화려한 조명들이 비껴간 자리에 남은 것은 낙후와 소멸이라는 서글픈 낙인이었다. 그러나 그 잿빛 침묵을 깨뜨린 것은 거창한 기계의 굉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느 이름 모를 집 앞, 쓰레기장에 심은 ‘한 송이 꽃’이라는 아주 작은 반란이었다. 그 가녀린 꽃잎 하나가 공기의 진동을 바꾸었다. 이제 그곳은 골목길 곳곳마다 100개가 넘는 꽃정원이 별자리처럼 수놓인, 이른바 ‘꽃의 은하수’로 변모했다. 사람들은 이것을 두고 상전벽해라 말한다.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가 되었다는 그 경이로운 변신은, 이곳에서 낡은 담벼락이 향기로운 꽃담으로 피어나는 현실의 마법이 되었다.
이 마법의 골목으로 깊숙이 들어서면 시간의 태엽은 느릿하게 감기기 시작한다. 달성토성의 겹겹이 쌓인 흙의 기운 때문인지, 붉은 황토의 질감이 발바닥을 타고 전해질 때, 나는 문득 서양의 어느 오래된 마을들을 떠올린다. 프랑스 남부 에즈의 좁은 돌길이 생각나기도 하고, 이탈리아의 치비타 디 바뇨레조(Civita di Bagnoregio) 마을과도 비교하게 된다. 이 마을 역시 한때는 ‘죽어가는 도시’라 불렸으나, 독특한 풍경을 활용한 관광 자원화로 사람의 손길이 닿으며 영혼의 안식처로 부활했다. 하지만 달성토성마을의 부활은 그보다 더 깊은 ‘대지의 숨결’을 품고 있다. 이탈리아의 치비타 디 바뇨레조의 중세 시대 돌길과 오래된 석조 가옥이 지중해의 태양을 차갑게 반사한다면, 이곳 달성토성마을의 흙길은 우리 선조들의 투박한 손마디를 닮아 따스하다. 낭만적인 시선으로 골목을 바라보자면, 집집마다 내걸린 개성 넘치는 정원들은 마치 각기 다른 꿈을 꾸는 세포들 같다. 어떤 정원은 수줍은 소녀의 비밀스러운 일기장 같고, 어떤 정원은 모진 풍파를 견딘 백전노장의 훈장처럼 당당하다. 이 정원들은 서로의 향기를 섞으며 마을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식물적 유토피아로 변모시킨다. 서양의 ‘게릴라 가드닝(Guerrilla Gardening)’이 도시의 무관심에 저항하는 투쟁적 행위였다면, 달성토성마을의 정원 가꾸기는 상처 입은 대지를 치유하는 ‘어머니의 바느질’과도 같다. 버려진 화분, 깨진 장독대조차 이곳에서는 생명을 잉태하는 고귀한 요람이 된다.
그 요람이 모여 마을의 심장부에 닿으면, 이제 상징들이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다. 세월의 저편, 우물에서 솟아올랐다는 청어의 전설은 메마른 현대인의 정서에 신비로운 삶의 기운을 불어넣는다. 청록색의 비늘을 반짝이며 허공을 유영하는 전설 속의 청어는, 낙후된 마을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약속된 복선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감동의 깊이는,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던 고목 대추나무의 거룩한 변신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생의 수명을 다해 잘려 나간 고목은 그대로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솟대로 다시 태어나 마을의 안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이는 마치 서양 신화 속 피닉스(Phoenix)가 스스로를 태워 재 속에서 부활하는 것과 같은 영성적 승화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시작임을, 달성토성마을은 솟대의 구부러진 몸짓을 통해 침묵으로 웅변하고 있다.
이러한 생명의 순환은 사람의 온기로 비로소 완성된다. 도심의 번화가를 떠나 이곳에 터를 잡은 한의사 부부가 어르신들에게 내어주는 다정한 진료는, 달성토성마을이 품은 황토의 서정만큼이나 깊고 그윽한 인술의 결정체다. 이는 단순한 봉사를 넘어, 소외된 이들을 보듬었던 초기 공동체의 아가페적 사랑이자, 삶의 균형을 이루는 북유럽의 라곰(Lagom) 정신과도 맞닿아 있다. 육신의 질병을 고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르신들의 시린 삶을 보듬는 이들의 존재는, 이 마을을 흔들림 없이 지탱하는 또 하나의 깊고 단단한 뿌리가 되고 있다.
이처럼 달성토성마을은 더 이상 삶을 무심히 의탁하는 평범한 터전에 머물지 않는다. 그곳은 시간이 멈춘 박제가 아니라, 시간이 가장 아름답게 꽃피는 전시장이다. 순박하게 살다 간 선조들의 넋이 꽃향기가 되어 다시 돌아오고, 낡은 벽돌 사이로는 꿈꾸는 이들의 열망이 넝쿨째 자라난다. 서양의 대리석 도시들이 차가운 완벽함을 뽐낼 때, 우리 달성토성마을은 황토의 서정적인 질감으로 지친 방문객을 포근히 안아준다. 비가 오면 구수한 흙내음을 내뿜고, 해가 나면 꽃들의 웃음소리로 들썩이는 이 마을은 진정한 의미의 ‘지상 낙원’이다.
한 송이 꽃에서 시작된 이 기적의 서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침묵의 그늘을 깨고 생명의 만개를 선택한 주민들의 의지는, 세상의 소외된 모든 곳에 전하는 가장 향기로운 전언이다. 나는 오늘도 이 붉은 흙길 위에서, 솟대의 끝에 걸린 푸른 하늘을 보며 골목정원이 피워낸 경이로운 변신을 예찬한다. 이곳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고, 꽃이 사람의 꿈을 함께 꾸며, 골목골목이 하나로 어우러져 피어나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꽃의 성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