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 질서 속에 가려져 왔던 인간들의 욕망" 소복을 입은 양반댁 과부가 개의 짝짓기를 감상하면서 배시시 웃고, 그 옆에선 몸종이 민망한 듯 마님의 무릎을 꼬집는다. 양반가의 젊은 서방님이 후원에서 젊은 종년의 손목을 끌고 희롱하며, 고요한 한밤에 군복을 입은 남자가 여인네의 허리를 휘어안고 있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가 혜원(蕙園) 신윤복의 그림에는 이처럼 조선시대 사람들의 내밀하고도 감추고 싶었던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이 책은 혜원의 풍속화 전집인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에 실린 30장의 그림을 통해 조선 후기의 풍속사를 조명한 것으로, 저자는 그의 그림을 바탕으로 관련된 사료와 한시(漢詩) 등을 연구하여 조선시대 남녀들의 풍류와 성(性) 문화를 눈으로 보는 듯 그려낸다.
혜원은 빨래터와 선술집, 기방, 뱃놀이, 도박판과 절 등 다양한 장소에서 벌어지는 인간들의 군상을 은근하면서도 재치가 넘치는 필치로 묘사하였다. 겉으론 근엄한 체 하지만 속으론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못하고 어쩔 줄 모르는 양반들을 풍자하는 그의 재기발랄함은 책을 넘겨보는 이들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를 짓게 한다. 저자는 미적 형식을 따져가며 그림에 대해 설명하기 보단, 그림에 담겨 있는 여러 가지 풍속들과 그 의미를 알려주며 유쾌한 역사읽기를 시도한다.
조선 시대의 빨래터와 절은 자유롭지 못했던 여인들이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해방구 역할을 해왔으며, 기방과 술집을 드나드는 이들은 주로 무관이었고 거기엔 나름대로의 법도가 있었다. 조선 후기 사람들은 투호나 쌍륙, 투전 등 도박을 즐겨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했다는 것도 이 책이 알려주는 새로운 사실이다.
어렵고도 멀게만 느껴졌던 조선 시대의 사람들은 이 책을 통해 새로운 생명력을 갖게 되었다. 사진보다 더욱 생생하게 우리네 선조들의 모습을 보여 주는 혜원의 그림은 그들에 대한 열 마디의 말보다 더욱 진한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사족 이 책을 통해 혜원의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된 이들에겐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현재 국내에 나온 책들 중엔 그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화집 한 권조차 찾기 힘들다. 이 책의 근간이 된 탐구당판 <혜원전신첩>의 영인본마저도 1974년에 출간된 이후 절판되었다고. 이번 기회로 혜원의 그림을 멋진 화집으로 만나볼 수 있기를 바라는 건 단지 꿈에 불과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