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시지동(時至洞),
옛날 시지원이 있었던 ‘원(院)’ 마을
개관
시지동은 수성구 고산2동의 법정동이다. 시지동은 천을산(130m)에서 우산(123.8m)으로 이어지는 낮은 구릉지 남쪽 사면에 자리하고 있다. 매호천이 시지동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흐르며, 마을 남쪽에 넓은 평지가 분포하고 있다. 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옛날 시지동 마을 길은 한 사람이 겨우 지날 만한 오솔길로 하천변이나 산기슭을 따라 나 있었다. 반면 큰길에는 공무로 출장 중인 관리들의 잠자리, 음식을 제공했던 ‘시지원(時至院)’이 있었다. 이곳에 원(院)이 있었다는 것은 과거 시지동이 부산-청도-경산-대구-서울을 잇는 중요한 길목이었다는 것을 말한다. 시지동이란 지명도 시지원에서 유래됐다.158) 고려시대 옥산 전씨가 시지동에 제일 먼저 터를 잡았고, 조선 초에 아산 장씨, 밀양 박씨가 옥산 전씨에 장가들면서 세 성씨가 모두 시지동에서 번성했다. 나중에 아산 장씨는 가천, 옥산 전씨는 파동으로 옮겨 번성했으며, 시지동에는 밀양 박씨가 번성했다.
예로부터 교통이 편리했던 시지동은 5일마다 고산장159)이 열리는 등 고산지역 교역의 중심지였다. 시지동은 동서로 달구벌대로와 대구도시철도2호선이, 서쪽에는 남북으로 대구·부산고속도로와 고모로가 통과한다. 이 밖에도 천을로, 시지로, 노변공원로, 연호로 등이 있어 접근성이 좋다. 주요 공공시설로는 고산중학교, 고산초등학교, 노변초등학교, 고산공원 등이 있다. 주요 유적과 유물로는 청동기시대 석관묘와 지석묘, 주거유적과 생활 유적, 삼국시대 고분, 통일신라시대 생활 유적 등이 발굴됐다. 문화유산으로는 덕산재, 솔일재, 시지동 비석군 등이 있다.
158) 김광순, 한국구비문학Ⅰ, 국학자료원, 2001, 170쪽. 대구광역시 지명 유래.
159) 시지2교-고산성당 사이 매호천변에 고산장이 열렸다. 4·9일장.
지명 유래
시지동은 조선시대 이 지역에 있었던 시지원(時至院)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시지동은 일제강점기인 1911년 경산군 경계 및 명칭을 변경할 때 송정리(松亭里)와 시지동(時至洞)이 합쳐진 동명이다.160) 경상도속찬지리지(1469)에 “곶계리(串界里)에 시지원(時知院)이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이미 시지원이 있었다. 하지만 시지동이란 지명은 경산현읍지(1850년대)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이는 시지원 주변이 큰 마을로 성장하면서 19세기경 곶계리와 시지동으로 분동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경산현읍지(1871)와 「지방지도」(1872)에는 송정리가 기록되어 있다. 이는 19세기경 교통이 편리한 지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동네가 형성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시지는 「지방지도」(1872)에 시지(時旨)로 표기되어 있다. 시(時)는 우리말의 ‘셋’을 나타내는 ‘시’로 볼 수 있으며, 지(旨)는 마을의 줄임말인 ‘말’의 한자표기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시지동(時至洞)을 시지(時旨)로 표기한 경우는 세 집이 마을을 형성했다는 뜻의 ‘세집매기, 싯집매기’를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161) 시지를 한자로 시지(時至), 시지(時知), 시지(時旨) 등으로 표기한 것은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다. 경산현읍지(1785)에 의하면 현 서쪽 10리 지점에 식송정(植松亭)이라는 큰 반송(盤松) 숲이 있었다고 한다. 식송정은 지금의 솔정고개(삼성라이온즈파크 일대) 일대이며 식송정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이 송정동이다. 송정동은 시지동보다는 늦게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명조사철(1959)에는 시지동에 대해 “약 100년 전에 통행인이 이곳에 이르러 식사 또는 유숙 시간이 되면 식사 또는 유숙을 하는 원사가 있었으므로 시지동이라고 칭하게 되었다는 설과 옛날 신(申) 모 장군이 전쟁 귀로(歸路) 시 이곳에 이르러니 오시(午時)가 되었다 하여 시지동이라고 칭한다는 두 설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원(院)은 고려·조선시대 때 국내 주요 간선도로 상에 있었던 공적 시설로 주로 공무상의 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했다. 또한 원에는 운영관리를 위한 관원과 운영경비 조달을 위한 전답이 제공됐다. 지금과 달리 옛날 대구-경산 간 통로는 대구성 남문-신천-지산·범물-대구스타디움-시지동-경산읍 남성현으로 이어졌다.
160) 조선총독부경상북도고시 제24호(1911.9.21)
161) 실제로 시지동은 조선 초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본토박이 옥산 전씨와 사위인 아산 장씨, 밀양 박씨 세 성씨 세거지였다.
강선계(講先稧)
강선계는 조선 초부터 혼인 관계로 시지 일대에서 번성한 옥산 전씨, 아산 장씨, 밀양 박씨 세 성씨 문중 연합계다. 세 문중 중에서 터줏대감은 고려시대부터 고산에 세거한 옥산 전씨다. 조선 초에 이르러 아산 장씨, 밀양 박씨, 은진 송씨(일찍 대가 끊어졌다)가 옥산 전씨에 장가들면서 이들 문중이 고산에 터를 잡았다. 600년 넘게 각별한 인연을 이어온 세 문중은 1923년 공식적으로 ‘강선계’를 결성했다. 전·장·박 강선계 세 문중은 지금도 매년 강선계(음력 4월 10일)를 개최하고 있고, 옥산 전씨 전의룡 묘소 벌초와 묘사를 비롯한 세 문중의 묘사도 함께 하고 있다. 강선계 회장은 2년 임기로 각 문중이 돌아가면서 맡고 있다. 강선계가 공식적으로 설립된 것은 100년 전이지만, 전후 맥락을 고려하면 강선계의 비공식적 역사는 무려 600년이 넘는다고 볼 수 있다.
공룡발자국
시지1교와 시지2교 사이 노변청구 아파트 북쪽 매호천 하천 바닥에 있는 공룡 발자국으로 ‘매호천 공룡 발자국’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2021년 조사 결과 16개 지점에서 약 26개의 공룡 발자국이 확인됐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두 발로 걸어 다닌 것으로 추정되는 악어 발자국 2개다. 악어 발자국은 최근 남해안 일대의 곳곳에서도 발견되어 국제학술지에도 게재됐다.
서당골 덕산재(德山齋)와 아산 장씨
서당골은 시지동의 자연부락이다. 서당골은 고산중학교 북쪽 골짜기인데 지금도 서당지(書堂池)라는 못이 있다. 옛날 이곳에는 아산 장씨(牙山莊氏)들이 많이 살았다. 그들은 ‘부모 없는 자신은 없다’는 가문의 전통을 이어, 1824년(순조 24) 이곳에 재실을 건립해 선조를 기리고 학문을 익혔다. 서당 아래쪽에는 못보다 작은 웅덩이가 있어 농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이곳 산골(범밭골)에 범이 자주 나타나는 소동이 있어 재실을 내환동으로 옮겼다. 그 후 이 골짜기를 서당골이라 했고 못을 서당지(사당못)라 했다고 한다.162) 내환동으로 옮긴 재실은 이후 다시 본래 서당골로 옮겼다가 1917년 고산초등학교 뒤편 증심사 가는 길 입구로 다시 옮겼으니 지금의 덕산재(시지동 75)가 그것이다. 참고로 1954년 항공사진에는 고산초등학교 뒤편에서 지금의 증심사에 이르는 골짜기에는 덕산재를 제외하고는 민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솔일재’ 사진 참조)
162) 대구직할시 교육위원회, 우리고장대구, 1988, 348쪽.
솔일재(率一齋)와 밀양 박씨
솔일재는 조선 초 이곳으로 입향한 밀양 박씨 대사헌공파 파조인 귀림(歸林) 박해(朴晐·1347-?)를 기리는 재실이다. 박해는 30세 되던 해인 1377년(우왕3) 문과에 급제, 조선 초에는 대사헌까지 올랐다. 이후 정승에까지 하마평이 올랐지만, 모든 벼슬을 내려놓고 청주 계림촌을 거쳐 시지동으로 내려와 은거했다. 이러한 그의 처세를 두고 그의 후손들은 선조(박해)가 조선의 기틀을 닦은 후 미련 없이 은거함으로써 고려와 조선 두 왕조의 은혜에 함께 보답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솔일재 솟을대문은 ‘공경히 재계한다는 의미’의 재경문(齋敬門)이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정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에서부터 방 2칸, 대청 2칸, 방 1칸이며, 재실로는 나름 화려한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정문 바깥에는 ‘박응성 의병장 4부자 순국기적비’와 ‘귀림 박해 신도비’가 있다. ‘솔일’은 한 집안의 인심, 나아가 천하의 인심을 ‘한곳으로 모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솔일재 후손으로는 임진왜란 때 4부자(父子)가 함께 순절한 의병장 매헌(梅軒) 박응성(朴應成·1539-1592)과 그의 세 아들 박근·박장·박환, 조선 후기 가사문학의 대가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1561-1642) 등이 있다. 재실 북쪽 천을산 기슭에는 약 600년 전에 조성된 박해의 묘소가 아직도 그대로 전하고 있다.
시지동 비석군(碑石群)
고산초등학교 교문 내 서쪽에 있는 9기의 송덕비다. 과거 시지동에는 대구와 경산을 잇는 관도가 있었고, 또한 시지원과 식송정(植松亭)이 있어 항상 통행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이곳에는 지방 관리들의 치적을 칭송하는 송덕비가 많았다. 본래 시지동 송덕비는 고산동 지역 국도변에 흩어져 방치되어 있었다. 1978년 고산지역 국도가 확장될 때 ‘고산회(孤山會)’에서 훼손 위기에 있었던 송덕비들을 현 위치인 고산초등학교 내로 옮겨 보존·관리하고 있다.
시지동 비석군에는 모두 9기의 비가 있다. 통훈대부김대엽시혜비(通訓大夫金大燁施惠碑), 종이품봉상사제조서상하송덕비(從二品奉常司提調徐相夏頌德碑), 현령이후헌소청덕선정비(縣令李侯憲昭淸德善政碑), 전오위장강대봉송덕비(前五衛將姜大鳳頌德碑), 관찰사조상국강하영세불망비(觀察使趙相國康夏永世不忘碑), 현령심후휘수준청덕애민선정불망비(縣令沈侯諱壽浚淸德愛民善政不忘碑), 현령이후만승청덕선정비(縣令李侯晩昇淸德善政碑), 순상국김공휘명진영세불망비(巡相國金公諱明鎭永世不忘碑), 현령박후종구거사비(縣令朴侯宗球去思碑) 등이다. 이들은 모두 조선 후기 인물이며, 비 역시 모두 19세기에 조성된 비다.
시지원(時至院)
고려·조선시대 때 지방을 이동하는 관리에게 말을 제공하는 역(驛)과 공적인 목적으로 지방에 파견된 관리 등에게 숙식을 제공했던 원(院)을 통칭해 ‘역원(驛院)’이라 한다. 원은 관리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으며, 때론 일반 행인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와서 관리에 대한 숙식을 역이나 고을, 또는 사설 주막 등에서 담당하게 되면서 원은 점차 사라졌다. 지금과 달리 옛날 대구-경산 간 통로는 대구성 남문-신천-지산·범물-대구스타디움-시지동-경산읍 남성현으로 이어졌다. 시지원은 조선 후기 경산현 서면에 있던 역원으로 1760년(영조 36) 그 기능을 상실했다. 현재 고산2동행정복지센터 내에 시지원터 표지가 세워져 있다.
지명조사철(1959)에는 시지동에 대해 “약 100년 전에 통행인이 이곳에 이르러 식사 또는 유숙 시간이 되면 식사 또는 유숙을 하는 원사가 있었으므로 시지동이라고 칭하게 되었다는 설과 옛날 신(申) 모 장군이 전쟁 귀로(歸路) 시 이곳에 이르러니 오시(午時)가 되었다 하여 시지동이라고 칭한다는 양 설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회(화)나무
현재 시지 경로당(시지동 53)에 있는 수령 200-300년 된 회화나무다. 이 나무는 과거 마을 당제를 모셨던 당산나무로 옛날 이 마을에 정착한 엄씨들이 심었다고 전한다. 과거 이곳에는 회화나무와 함께 팽나무 두 그루도 있었다. 하지만 1990년 경로당을 신축할 때 팽나무는 베어지고 지금은 회화나무 한 그루만 경로당 마당에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