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부
제1장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신자의 삶
황영철 (독립개신교회 성약교회 교우, 기독교 학문 연구회 간사)
이 장에서는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 나라, 혹은 천국이 임했다는 사실이 오늘을 사는 신자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공부할 것이다. ‘천국을 사후 세계나 예수 그리스도 재림 이후의 세계로만 이해하는 일반적인 생각이 어떤 점에서 문제가 있는가?’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는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를 천국의 현재성과 미래성이라는 측면에서 다루며, 천국의 이런 이중성에 관한 성경의 근거를 제시한다. 그리고 ‘천국이 현재 여기에 임해 있으면서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 재림으로 완성에 이른다는 성경의 가르침이, 하나님 경륜의 현재 역사 시기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삶을 요구하는지?’를 다룬다. 마지막으로, ‘그런 가르침에 비춰서 정치에 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어떠해야 할 것인지?’를 간단하게 언급한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 사역에서 핵심 위치를 차지함
예수님께서는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을 앞서서 왔던 세례 요한도 역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1)고 전파했다. 또한 누가복음 4장 4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다른 동리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해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의 사명을 ‘하나님 나라 전파’라고 밝히셨다. 또한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이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했고”(눅 8:1)라고 말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복음의 내용을 ‘하나님 나라’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구절들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하나님 나라’가 불가분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뒤 40 일 동안 땅에 계시면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내용 역시 하나님 나라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 1:3) 우리는 부활하신 뒤 40 일 동안 예수님께서 땅에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구체적인 내용을 전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이후 제자들 태도가 현저하게 변화한 사실에 비춰볼 때, 그 기간 동안 제자들은 하나님 구원의 일에 관한 많은 중요한 것을 배웠으리라고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누가는 그 내용을 한 마디로, “하나님 나라의 일”로 요약했던 것이다.
누가가 [사도행전]을 맺으면서 한 말은 더욱 인상적이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행 28:31) 이 구절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주목할 수 있다. 첫째는, 바울이 전파한 내용의 핵심을 ‘하나님 나라’로 소개함으로써 예수님과 바울이 동일한 것을 가르쳤음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거의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상의 사실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 가르침과 사도 바울 가르침에서ㅡ따라서 {신약성경} 전체 가르침에서ㅡ 하나님의 나라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 주님의 가르침은 언제나 하나님을 최고의 위치에 뒀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최정상이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이 점을 지적한 게할더스 보스 경고는 하나님 나라를 공부하는 모든 사람이 귀담아 들을만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사실을 기억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는 {신약성경}의 열쇠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 주님의 가르침과 사역에서 얼마나 중심 위치를 차지하는가를 웅변적으로 보여 주는 구절들을 우리는 이 이외도 얼마든지 열거할 수 있다. ㅡ예를 들면, 요한복음 3장과 마태복음 16장 16절 이하다.ㅡ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관한 바른 이해는 우리 주님의 가르치심을 정당하게 이해하는 일에서 불가결의 요소이다. 하나님 나라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하나님 말씀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하나님 나라에 관한 정당한 이해는 신자의 하루하루 생활을 위해서도 필수다.
한 가지 언급하고 넘어갈 것은, {신약성경}에서 ‘하나님 나라’와 ‘천국’을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 논의에서도 그 두 단어를 구별 없이 사용하기로 한다.
우리나라 교회의 전통적인 천국 개념
우리나라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거의 전적으로 내세적인 것으로 이해돼왔다. 이 사실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실례가 {찬송가}에 나타난 천국 이해이다. 우리나라 {찬송가}를 펴서 천국에 관한 찬송을 찾아보면, 예외 없이 장례식에서 부르기에 적합한 가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우리나라 기독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천국은 죽은 다음에 가는 영원한 안식의 처소로만 이해돼왔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비록 완전히 틀린 이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심히 부족한 이해다. 한국의 기독교가 현실에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게 된 것은 이와 같은 천국관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이 세상은 신자에게 별로 의미가 없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신자는 이 유혹이 많고 고생이 많은 세상에서 어떤 의미 있는 일을 이루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신자가 빨리 건너서 지나가야 할 곳이지, 거기에서 어떤 일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거나 영원한 가치가 있는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천국관은 필연적으로 기독교를 내세 지향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에 따라서 현세는 자연히 관심의 중심이 못됐다. 신자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하게 의미 있는 일이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함께 천당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런 현상에서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천국에 관한 어떤 형태의 이해가 그에 상응하는 기독교 형태를 만든다는 사실이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신자들이 지금 천국이 여기에 임해 있으며 우리가 이 땅에서 비록 완전한 형태는 아닐지라도 천국을 이루며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들은 현실에 훨씬 큰 의미를 부여하며 이 세상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전통적인 천국 이해가 과연 정당했는가? 만약 거기에 어떤 부족이 있었다면, 그 부족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앞으로 하나님 나라를 공부함으로써 점점 분명하게 밝혀질 것이다.
천국을 이해하려 할 때 주의해야 할 점
바울 사도는 로마서 14장 17절에서 하나님 나라에 관해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한다. 비록 이 구절은 언뜻 볼 때 천국에 관한 정의로 들린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천국은 정의로써 알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점이다. 즉, 로마서 이 구절을 외우고 있는 사람은 천국이 그러하다는 사실을 알 뿐이지, 천국 그 자체의 실상을 깨달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천국을 실제로 아는 사람은, 설사 이 구절을 모르고 있다고 하더라도, 천국의 실상인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이 점은 하나님 말씀이 가르치는 다른 모든 진리에도 적용된다. 그러므로 천국을 안다는 것은 천국의 왕이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요, 그 왕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받고 산다는 것이다. 천국을 안다는 것은 사죄의 은혜와 능력을 맛보며 그 은혜와 능력을 함께 맛본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거룩한 교통을 나누며 산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으며 정당한 교회 생활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를 알기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천국을 안다는 것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자기 속에서 역사함을 아는 것이다. 즉, 마귀를 제압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하루하루 생활 속에서 체험하면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삶이란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온 피조물의 왕으로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므로, 신자도 지금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는 그분께서 주시는 능력을 받아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적하는 세력을 쳐서 물리치면서 사는 삶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의 완전한 승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낙심치 않고 그날을 소망하며 오늘이라는 날 동안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며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요, 사변적인 철학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지금 생생하게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 통치’의 사실이다. ‘하나님 능력의 발휘’다. 이런 사실을 늘 명심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진리를 연구해야 할 것이다.
천국 사상의 기원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라는 이 사상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우리는 과거 거의 모든 사회와 문화 속에서, 현재 질서가 아닌, 현재 질서보다 더욱더 완전하고 이상의 세계에 관한 기대와 대망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이 세상은 자기 본향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비록 자기는 이 세상에 살고 있으며 이 세상에 살 수밖에 없는 형편이지만, 이 세상보다도 더 완전한 이상 세계가 그 어디엔가 있으며, 어떤 방법을 잘 사용하기만 하면 그 세상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막연한 형태의 기대는 거의 모든 인간 사회와 문화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비록 그 형태가 모두 동일하지는 않지만, 고대 희랍에서도, 고대 중국에서도, 인도에서도 이런 사상은 발견된다. 불교에도 이런 생각이 있으며 우리나라 전통적인 민간 신앙에도 역시 이런 식 사고방식은 존재한다.
이 질문에 바른 답을 얻기 위해서는, ‘인간 사회에 보편의, 새롭고 이상 사회에 관한 기대는 하나님 계시의 왜곡된 형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창세기 1장부터 11장에 걸쳐서 기록된 인류 역사 벽두에 관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인간 창조 이후 상당 기간 동안 인류는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면서 한 사회를 이루고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들은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였다. 그들은 자기네가 서로 헤어지는 것을 막으려고 성을 쌓았다.(창 11:1~9) 그들은 홍수로 인류가 한 번 멸망 당한 이후에 노아를 통해 새롭게 시작된 인류로서 노아에게 다시 인간의 기원과 타락의 사실과 하나님 구원의 약속에 관한 이야기를 배웠을 것이다. 특히 전 인류를 멸망케 한 대홍수 이후에 태어난 세대들은 하나님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명심하도록 교육받았을 것이며, 그런 하나님 진노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기원과 타락과 하나님 구원의 약속에 관한 이해는 필수조건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노아 이후의 새로운 인류에게서 창세기 3장의 계시가 상당히 자세히 알려져 있었으리라고 우리는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바벨탑에서 그들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다. 이제 언어가 혼잡하게 돼서 함께 살 수가 없게 된 그들은 온 땅으로 흩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그들은 노아에게 그들이 배운바 인간의 기원과 타락과 하나님 구원의 약속에 관한 계시의 내용을 가지고 온 땅으로 흩어져 나아갔다. 오늘날 인간 사회에 거의 보편으로 퍼져 있는 이상 나라에 관한 여러 가지 형태의 기대는 이 최초 계시가 장구한 역사 흐름 속에서 왜곡되고 마모된 나머지 형태라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던 하나님 나라에 관한 기대는, 모든 인간이 기대하는 그 새롭고 이상 나라에 관한 기대의 참된 형태이다. 왜냐하면 그 기대의 참된 내용이 되는 하나님 계시를 이스라엘에 가장 완전한 형태로 주셨고 보존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전파하신 하나님 나라는 기독교라는 종교의 교리가 아니라 온 인류 소망의 실체다. 그런데 이 기대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로 표시됐을까?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기대
우리는 {신약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우리 주님’과 ‘그 가르침을 듣는 이스라엘 군중’ 사이에 묘한 관계가 있음을 느끼게 된다. 우선 주목할 사실은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기 시작하셨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이라고 설명하시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 군중 앞에 처음 자신을 나타내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하는 사람은 당연히 군중이 잘 알고 있으며 가장 관심을 가진 사항을 택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하나님 나라를 들어서 전도를 시작하셨다는 사실은, 당시 이스라엘 군중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잘 알려진 개념이었으며 그들 중요한 관심사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신약성경}에는 누군가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입니까?” 여쭸다는 기록은 한 군데도 없다. 요한복음 3장에 나타난바 니고데모 관심사는, 도대체 하나님 나라가 무엇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음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그러함에도 우리 주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를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애쓰신 흔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 좋은 실례는 마태복음 13장에 기록된바 여러 개의 천국 비유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 주님께서는 당시에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던 천국을 다시 가르치시기 위해 애를 쓰셨을까?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에게서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은 잘 알려진 개념이었지만 그들 이해에는 결함과 결핍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잘 알고 있는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사용하시면서도 그들에게 다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먼 옛날 이스라엘에만 있었던 일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에도 실제로 하나님 나라는 여러 가지로 오해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오해는 반드시 하나님 나라의 증거를 약화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현실도피의 한 수단이라 생각하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인간이 자신의 노력으로 이 지상에 건설할 수 있는 이상 사회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사회개혁 프로그램으로 제시하는 어이없는 일까지도 벌어지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오해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런 오해는 바로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 기독교 역사에도 언제나 있었다. 물론, 오늘날에도 있다. 이런 그릇된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매우 필요한 일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미리 약속하신 나라임
{신약성경}의 “천국” 혹은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과 정확하게 대응되는 표현이 {구약성경}에 그대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왕이시다.’는 사상은 {구약성경}에 편만하게 퍼져 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왕”으로 부를 때에는 두 가지 의미를 띨 수가 있었는데, 첫째,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주재자라는 의미에서 왕이셨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땅 위에서 한 백성을 택해 그들 위에 하나님의 특별한 왕권을 행사하신다는 의미에서 왕이셨다.
왕이신 하나님께서는 만물의 주인이시며, 만물 가운데 가장 크신 분이시며, 그 기뻐하시는 뜻대로 나라를 세우기도 하시고 폐하시기도 하시며, 사람을 세상에 보내기도 하시며 다시 데려가기도 하시는 분이다. 이 하나님의 절대 대권 앞에서 “왜 당신께서는 이러이러하게 하시지 않고 여사여사하게 하십니까?”라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역사 속으로 들어오셔서 이스라엘이라는 한 나라를 세우시고 친히 그들 왕이 되시며, 그들에게 언약하시고 그들 앞에 복과 저주를 두시고 그들이 기꺼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순종해서 그 약속된 복을 누리며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맺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그때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언약을 파기했으며, 바로 이런 맥락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한 새로운 나라를 언제나 계시해 오셨다.
그 나라의 왕께서는 다윗의 가문에서 나실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 나라의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실” 것이다.(삼하 7:14) 또한 다니엘은 그날에 관해 이렇게 예언했다.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께서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영원히 멸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단 2:44) 이와 같이 그 나라는 지상의 어떤 나라보다도 강력한 나라가 될 것이며, 지상의 모든 나라는 유한이지만, 그 나라는 영원한 나라가 될 것이다. 또한 그 나라의 왕께서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신적인 어떤 존재이시다.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봤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했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 7:14)
하나님께서 예언하고 약속하신 그 나라는 영광스럽고 강력하며, 지상의 다른 모든 나라를 점령해서 그 국권이 만방에 미치며, 그 나라의 권세와 왕권이 영원한 나라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 나라와 함께 이 땅에 임할 큰 구원의 사실을 함께 예언하심으로써 그 나라의 구체적인 내용을 명확하게 보여 주셨다. 그날이 되면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세우실 것인데, “그 언약은 이러하니 내가 내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해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3~34) 즉,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그 구원의 날이 되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편만해지며 하나님께서 사람들 죄악을 사하시며,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법이 기록됨으로써 사람들이 본성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킬 것이다.
또한 그 왕께서는 공의와 구원을 베풀며 이방에게 화평을 전하실 것이다. “보라. 네가 네 왕이 네게 임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끈까지 이르리라.”(슥 9:9~10) 또한 그날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는 날이 될 것이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때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 부어 줄 것이며,”(욜 2:28~29).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미래의 어느 날에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을 약속하셨으며, 그 나라의 임함과 함께 위에서 열거한 것과 같은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리라고 예언하셨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이미
그렇다면 이 하나님 나라는 언제 이 땅에 임하는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그 축복의 날은 언제인가? 인간은 죽은 다음에야 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가? 아니면, 역사의 끝날, 주 예수께서 구름을 타고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함께 영광 중에 임하실 때 비로소 그 나라는 임하며 하나님의 언약은 성취되는가? 그때까지 그리스도인은 사탄이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으며, 속히 이 세상을 벗어나기를 갈망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우리 주 예수께서 오셔서 가르치신 내용을 자세히 살펴볼 때 가장 놀라운 가르침 중 하나는 바로 그 하나님 나라가 지금 이 땅에 임해 있다는 가르침이다. 이것은 언뜻 생각하면 현실과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 이야기 같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임해 있다고 가르치신 예수님 말씀을 얼마든지 인용할 수 있다. 지금부터 그런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가르치는 구절을 살펴보기로 한다.
마태복음 12장 22절 이하의 사건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입증하는 좋은 실례가 된다. 이 부분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그들 병을 고쳐주신 사건’과 ‘그 일에 따른 유대인들 비난’과, ‘그 비난에 관한 예수님 대답’을 기록하고 있다. “그때 귀신 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 무리가 다 놀라 가로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고 말했다.”(마 12:22,23)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을 평가하기를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리라.”고 함으로써, 예수님의 가장 신성한 능력의 발휘를 귀신의 일로 돌리는 악마적인 짓을 했다. 이런 바리새인의 생각을 잘 아시는 주께서는 그들의 논리 모순을 지적하신 뒤에(마 12:25~27)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했느니라.”(마 12:28)고 대답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이 사실을 다른 말로 설명하시되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마 12:29)고 말씀하셨다. 즉, 하나님 나라는 이미 임했고, 이 사실이 의미하는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사탄이 결박당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좋은 실례는 누가복음 17장 20절~21절이다. 그때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하나님 나라가 어느 때 임하나이까?”라고 질문했다. 물론,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이스라엘 나라와 관련해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이스라엘이 로마 압제에서 벗어나서 강대국이 되리라고 생각했으므로 그들이 질문한 하나님 나라가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하나님 나라와 꼭 일치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쨌든 예수께서는 일방 그들 오해를 시정하시면서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 임함의 실상을 가르쳐 주셨는데, 그 가르치신 내용이 바로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였다.
여기서 “너희 안에”라는 표현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여러 가지 의견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떻게 보면, 이 말은 사람과 사람들 사이 관계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뤄진다는 말 같기도 하고, 아니면 개인 내면의 삶 속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말 같기도 하다. 또 어떻게 보면, 그들 사이에 계신 그리스도 그분께서 바로 하나님 나라라는 말로도 들린다. 그런데 그 정확한 해석이야 어떠하든지, 적어도 이 구절은 하나님 나라가 ‘지금 거기에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신 것만은 분명하다.
하나님 나라가 사후 상태나 재림 이후 상태만이 아니라 현재 어떤 것이라는 이해는 사도들 서신 속에서도 발견된다. 골로새서 1장 13절~14절에서 바울 사도는 “그분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겼다는 말이 우리가 죽었다는 말이나, 혹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셨다는 이야기는 분명히 아니다.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바로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살면서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와 함께 임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그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셨기 때문에 또한 “그리스도의 나라”라고도 부른다. 그리스도께서 고난과 순종으로 그 나라를 세우셨고, 그의 피로 백성을 사셔서 그 나라로 불러들이신다. 그 나라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왕권을 행사하시면서 그 나라를 이끌고 계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나라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사탄이 아직 큰 힘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람들 죄를 용서하시며 사람들을 흑암의 권세에서 건지기도 하시며, 새 생명을 주셔서 하나님 나라의 일군으로 삼기도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 아직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해서 지금 여기에 있다.”고만 말하면 아마 어떤 사람들은 “만약 하나님 나라가 여기에 임해 있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왕권이 지금 능력 있게 행사되고 있다면, 왜 세상은 이 모양인가?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으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는 예언은 왜 성취되지 않는가? 전쟁과 죽음과 미움과 질투가 들끓는 이 세상이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결과란 말인가?”라고 반문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가 여기에 임해 있긴 하지만, 아직 완성된 형태로 임해 있지 않다는 이 사실 때문에 현세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아주 독특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성경} 전체의 가르침으로 비춰볼 때,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시작돼서 상당한 기간 동안을 저주의 결과가 아직도 지배적인 이 세상에서 그 능력을 발휘하고 활동하다가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그 완성에 이르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알곡과 가라지 비유>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의 한 가지다.(마 13:24~30. 그 해석은 마 13:36~44.)
하나님 나라는 아직 완성에 이르지 않았다. 그 나라는 미래의 어떤 때, 하늘의 천사들도 알지 못하고, 심지어 아들도 알지 못하는, 성부께서 정하신 어떤 때에 그 충만하고 영광스러운 자태를 드러낼 것이며, 그날에는 왕이신 그분을 찌른 자들도 그를 볼 것이며, 모든 입이 예수님을 주로 시인할 것이다. 그날에는 그 나라의 백성들에게는 더 이상 죽음도 없고 슬픔도 없고 곡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지만, 그때는 얼굴과 얼굴로 볼 것이다. 마음속 죄에 따른 고통스러운 투쟁도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이 나라의 완성은, 그때를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듯이, 오직 하나님만이 가져오실 수 있다. 그 나라의 완성은 인간의 도덕적인 노력이나 종교적 열심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이 점은 지금 이 땅에 임해서 능력 있게 활동하고 있는 나라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그 왕이신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통치하신다. 하나님 절대 대권의 뜻으로 인간의 역사 속에서 진행되다가 때가 되면 그 완성에 이르는 것이다. 그 나라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은 왕의 뜻에 복종하면서 그 왕께서 명하시는 일을 할 뿐이다.
하나님 나라 현재성과 미래성의 관계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한 번 오심으로써 완성된 상태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초림과 함께 그 나라가 시작되고 상당한 기간 동안 계속 되다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그 완성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잠정적으로 임한 나라”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그 자체로서 충분한 하나님 나라이지만 아직 그 완성에는 이르지 못한 상태다. 그러면 이 잠정적인 하나님 나라와 완성된 하나님 나라는 어떤 관계에 있겠는가? 다시 말하면, 잠정적인 하나님 나라와 완성된 하나님 나라는 어떤 점에서 연속적이고 어떤 점에서 단속적이냐는 것이다.
이 관계를 살펴보면, 거기에는 지금까지 생각하던 것 이상의 연속성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우선 완성된 나라에 들어가는 백성은 바로 잠정적인 나라의 백성이다. 또한 각 신자는 자기 의식과 지식을 가지고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 또한 신자가 그 나라에 들어가서 누릴 생명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 이후에나 받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서 받아 가지고 있다. 즉, 그리스도인은 그가 지금 그리스도의 은혜로 받은 그 영생을 가지고 그 완성된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지금은 우리가 ㅡ비록 본질적으로는 동일하지만ㅡ 부분으로만 맛보고 있는 그것을 그때에는 완전하게 맛본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잠정적인 나라와 완성된 나라의 관계는 시작과 완성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 초림과 함께 죽음은 정복됐지만, 그 완전한 완성의 형태가 드러나는 것은 재림 이후다. 그리스도의 초림과 함께 마귀는 결박당했지만, 마귀가 완전히 파멸되는 것은 재림 이후다. 그리스도 초림과 함께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과정이 시작됐지만, 그 일의 완성은 그리스도 재림 때에 이뤄진다. 이런 의미에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맛보지 못하거나 지금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지 않는 사람은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보장을 아무 데서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완성이 점진적인 발전의 결과로 이뤄진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은밀한 모습으로, 그러나 강력한 모습으로 투쟁의 과정을 거치다가 하나님의 초자연적 전 우주적 간섭으로 홀연히 그 완성에 이를 것이다. 그리고 그 완성의 날에 관한 기대와 소망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 한 부분을 형성한다. 따라서 그 완성의 날을 불신하거나 기대하지 않는 형태의 신앙을 기독교 신앙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완성에 관한 기대와 믿음이 그리스도인 현재의 삶에 심각한 의미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하나님 나라가 여기에 임해 있으며, 그것이 역사의 일정 기간을 지나서 완성된 형태에 이른다는 이 {성경}의 교훈, 그리고 잠정적인 하나님 나라와 완성된 하나님 나라가 단순한 단절적인 관계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연속성을 갖는다는 이 교훈이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신자의 삶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이라는 사실’과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간 역사 속에 한 나라를 세우시고 독특한 방식으로 그 나라를 다스려 가신다는 사실’과 ‘지금 이 땅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는 모든 일을 새로운 빛으로 보게 한다. 이런 사실에 비춰볼 때, ‘이 죄악스러운 세상을 하루 바삐 떠나서 저 낙원(천당)에 가기를 바란다.’는 생각이 결코 그리스도인에게 마땅한 생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세상은 믿는 자의 아버지의 세상이다. 그리고 지금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세운 나라의 왕으로서 이 세상에서 주권을 행사하고 계신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결코 공허한 소리가 아니다. 이 세상은 정을 붙이고 살려고 하는 태도를 {성경}은 우리에게 권하지도 않는다. 그러함에도 하나님께서 그 택하신 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살게 하신 것은 ‘이 세상에서 충성스럽게 하나님의 일을 하며 그 나라를 증거하라.’ 하시는 것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영혼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육체까지 부활한 전인이 최종적인 구원에 이르듯이, 또한 그리스도 구속의 공효는 저주 아래에서 신음하는 모든 피조물까지 마침내 구원하는 것이듯이, 이 세상에 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삶은 신자의 삶 전체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교회와 종교적인 일에 관계해서만 하나님의 백성이고, 여타의 다른 일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의 통치가 온 피조물에 전부 미치는 것과 같다. 아브라함 카이퍼 말처럼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인생의 영역은 단 하나도 없다.” 현재의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 있게 증시되는 세상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 백성들이 부지런히 그 나라를 증거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더욱 드러나며 구원받는 자가 더욱 늘어나기를 바라셔서 이 기간을 두신 것이다. 이 기간은 그리스도인에게 기회의 시간이요 특권의 시간인 것이다.
이 점에서 정치가 예외일 수는 없다.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는 정치에서도 역시 주인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정치는 내가 잘 모르겠으니까 너희 인간들이 알아서 잘해 봐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국가를 있게 하시고 ㅡ국가 제도가 비록 죄의 결과이긴 하지만, 그 제도를 제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ㅡ 국가를 위한 법을 제정하신 연후에, 그 법을 따르면 복을 받고 그 법을 어기면 화를 당하도록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는 그리스도인이 회피해야 할 속된 어떤 것이 아니다. 정치는 그리스도인의 현실 생활의 매우 중요한 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정치는 그리스도인이 참여해서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증거해야 할 분야인 것이다.
토론을 위한 질문
1.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하나님 나라(천국)는 어떻게 이해돼왔는가? 그런 이해가 성경적이라고 생각하는가?
2. 우리나라의 그러한 천국 이해가 기독교의 대사회적 태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3. 하나님 나라가 그리스도와 함께 임했음을 가르치는 성경 구절들을 열거하라.
4. 오늘날 세계의 상황에 미뤄보건대 하나님 나라는 아직 임하지 않았다는 주장에 당신은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5. 현 역사 속에서 인간의 노력으로 천국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의 오류는 어디 있는가?
6. ‘현재 임해 있는 잠정적인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이뤄질 완성된 하나님 나라’ 사이의 단절과 연속성에 관해 토론하고, 어떤 점에서 단절이고, 어떤 점에서 연속적인지를 토론하라.
7. 당신은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 임해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가? 만일 실감하지 못한다면 그 까닭은 무엇인가?
8.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이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9.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이 이 세상 정치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 황영철 편저 {그리스도인의 현실참여 어떻게 할 것인가?} (서울: 도서출판 나비, 1990) 15쪽~34쪽.
|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