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선조 23년 4월 13일 조선왕조실록에 “왜구(倭寇)가 침범해 왔다.”라 시작되는 전쟁은 조선 사회를 송두리채 바꾸어 놓는다. 서양의 신식 문명을 빨리 받아들인 일본은 조총을 앞세워 동래성을 함락 시킨후,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20여일 (5월 3일)만에 한양을 점령했다. 4월 17일 왜구는 충주까지 진격했다고 기록되어 있음을 적용하면, 성주성은 4월 15일에 함락되었다 유추된다.
임진왜란은 200년간 전쟁을 모르고 지낸 조선 백성들에게는 공포를 유발시켰다. 각 군현들이 왜병의 진격 풍문만 듣고도 놀라 무너졌고, 일부 장수마저도 겁을 먹고 도망가면서 군대가 급속히 붕괴 되었다. 각 고을은 무너져 사방으로 흩어진 자들이 도망한 군사나 패전한 병졸만이 산속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대소 인원들이 모두 산속으로 들어가 새나 짐승처럼 숨어 있다가 밤이면 마을로 돌아오곤 했다. 전쟁은 일반 백성들만이 아닌 나라의 최고통치자인 왕에게도 시련을 주었다. 선조는 4월 30일 새벽부터 내리는 비의 악천후를 뚫고 호종문무관 백 명도 안 되는 초라한 몽진길에 올랐다. 점심 수라는 벽제관에서 먹는데 왕과 왕비의 반찬은 겨우 준비되었으나 세자는 반찬도 없었다. 저녁에 임진강 나루에 닿아 배에 올랐다. 밤은 칠흑 같이 어두운데 한 개의 등촉도 없었다. 밤이 깊은 후에 겨우 동파까지 닿았다. 백관들은 굶주리고 지쳐 시골 민가에서 흩어져 잤다.
조선의 왕인 선조의 피난길이 이러할진데, 일반 백성들의 생존을 위한 고난의 몸무림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된다. 성주의 임진왜란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암곡 도세순’의 용사일기를 보면 왜 성주 가야산 만수동이 생겼는지 유추 할 수 있다.
모든 조선인들은 전쟁을 피하기 위하여 높은 산으로 오르는 것 이었다. 암곡선생도 성주 벽진면과 김천 조마면 사이에 해발 783.6m의 험준한 빌무산 (걸수산)을 향하여 피난 떠납니다. 왜구의 성주 진입으로 곳곳에는 방화로 인한 연기가 피어나고, 매일 반복되는 산으로 피난길에 올라 초전마을 지나 김천으로 진군하는 왜병들을 보며 두려움에 떨어야 했던 것입니다. 암곡의 주거지인 개티마을을 떠나 지금의 월항 자산리(점복마을)로 갔습니다. 자산리의 뒷 산에 있는 방목암으로 이동하였다가,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산으로 산으로 가서 지금의 살티재에 가서 나뭇잎으로 부막을 지어 있어 보지만, 왜병들도 도망간 조선 백성들을 찾아 산을 수색 했습니다. 성주민들은 왜병의 수색을 피해 산 능선을 뒹굴고 밧줄로 바위를 내려오고 하느라 다치기도 하고, 임신한 아내와 노부모와 동행한 경우는 그 고난이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라 추측됩니다. 그 와중에 비는 얼마나 내리는지 미끄러운 흙길, 비에 젖은 옷으로 인한 추위, 언제 왜병을 맞부딪칠지 모르는 두려움에 힘든 피난길의 여정이었습니다.
왜병을 피해 반복되는 산꼭대기에 올랐다가 저녁에 내려오는 생활이 반복되면서 손발은 부르트고, 밀려오는 피곤에 노부모는 ‘목숨이 하늘의 뜻이다’라며 집에 머무른다. 피난길에도 조상님의 제사를 지낼 정도의 부모님에 대한 효도가 중요시 되는 성리학 사회에서 암곡은 부모를 모시러 와서 다시 피난길에 올랐다. 암곡은 피난 시작 후 한 달여만에 가야산 만수동 2백리에 포함될 것으로 판단되는 신흥 뒷산 (독용산성 근처)을 거쳐 만수동 3백리에 포함되는 증산 문예촌 (지금의 장전리)에 도착하여 오랫동안 머물렀다.
아마도 전쟁초기에 성주는 가장 힘든 시기였었고, 왜병의 주력부대가 한양을 거쳐 함경도 까지 진격함으로써 4~50명의 왜군이 머무르고 있는 성주성은 전쟁 초기와 같은 살벌한 상황은 좀 누그러졌다 보여집니다. 암곡 도세순의 피난길을 정리해보니. 조선 백성들은 왜 전쟁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에 대한 관심이 마음에 각인되었는지 이해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가야산 만수동의 잿밥에만 관심 있는 분들도 있겠지만, 가야산 만수동이 늘 성주인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자산이 되었음 하는 기대도 해 봅니다. 힘든 시기 저에게 위안을 주었던 고향 공부가 좋은 결과가 나타나기 위해 어떠한 경우라도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야산 만수동 표지석이 어디인지도 몰랐던 마을 이장이 마치 가야산 만수동의 전문가가 된 것처럼 언론에 내비치는 이런 모습은 자제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야산 만수동의 왜곡이란 지적을 할 때와 같은 초심을 유지하면서 시간과 여건이 부족하지만 만수동의 살아 있는 진실을 밝히도록 노력하려 합니다.
암곡 도세순의 피난일지
날자 | 위 치 | 내 용 | 체류 | 비 고 |
4. 13 | 개티 | 빌무산으로 피난 결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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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4 | 산점 | 정담사 집 빌려서 생활 | 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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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5 | 방목암 | 친족과 송아지 잡음 | 4 일 | 성주성 함락 |
4. 29 | 살티재 | 왜구가 산 수색 |
| 거센 강우 |
5. 1 | 개티 | 지인 누이의 죽임 당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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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5 | 개티 | 왜적 출몰로 갈마산으로 피난 |
| 약관례 실시 |
5. 6 | 빌무산 | 증산으로 피난길 (40 여명) |
| 개티로 회귀 |
5. 7 | 개티 | 갈마산 피난후 저녁에 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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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8 | 개티 | 나부산으로 피난(父兄은 개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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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9 | 도남동 | 이돈복집 도착 (3일간 비) |
| 조부 제사 |
5. 12 | 도남동 | 흙비 내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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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4 | 도남동 | 최망년 집에서 의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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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7 | 신흥뒷산 |
| 5일 | 왜적 출현 |
5. 26 | 신흥뒷산 | 왜적이 성주성 방화 및 참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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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28 | 문예촌 | 도남동에서 형제봉 경유 | 3달 | 저녁 도착 |
5. 29 | 문예촌 | 잡목과 띠풀로 임시 초막거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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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30 | 문예촌 | 이봉춘, 이득구집 거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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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1 | 개티 | 후리실 뒷고개에서 생활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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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곡 도세순의 피난 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