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달삼은 제주4.3폭동의 성공 후 북한 해주로 간 뒤 약 1년 만에 1949년 8월 4일 북한 인민 유격대 제 3병단장이 되어, 강동정치학원 출신 300여 명의 북한 인민유격대를 이끌고 오대산과 태백산맥을 따라 내려와 경북 영천 보현산을 중심으로 동해여단을 편성해 국군을 공격하였다. 북한은 1950년 6월25. 한국전쟁 직전까지 10차에 걸쳐 인민유격대를 남한에 침투시켰는데 열 차례의 무장공비 남파 중 네 차례가 김달삼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김달삼은 제 4차때 경북 영양의 일월산으로 남파되었다. 제 7차 인민유격대 약 360명은 1949년 8월17일에 태백산으로 남파하여 대부분 토벌되고 100여명이 김달삼 부대와 합류하여 경북 일원에서 활동하였다. 그 해 11월 6일 제 9차 인민유격대 100여명이 김달삼 부대와 합류하였으나 김달삼 부대는 전멸에 가까운 위기에 처하게 된다. | | | ▲ 1950년 3월 28일 제 10차, 약 700명의 강력한 화력을 가진 정예부대를 오대산과 방대산으로 침투시켰으나 강원도 정선군에 있는 반론산에서 국군 토벌대에 의해 소탕되었다. 반론산(1068m)은 빨치산 퇴로 중 하나였다. photo by 제주의 소리 |
마지막으로 북한은 전멸에 처한 김달삼의 월북을 지원하기위해 1950년 3월 28일 제 10차, 약 700명의 강력한 화력을 가진 정예부대를 오대산과 방대산으로 침투시켰으나 강원도 정선군에 있는 반론산에서 국군 토벌대에 의해 소탕되었다. 반론산(1068m)은 빨치산 퇴로 중 하나였다. 그런데 실제 김달삼은 1950년 3월28일 강원 정선군 반론산 전투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경남 신불산 전투에서 죽었다. 국제정치학자 토르쿠노프가 쓴 책, [한국전쟁의 진실과 수수께끼]에는 “남한의 신문 라디오는 김달삼의 사망을 보도했으나 그는 현재 빨치산 활동을 위해 북한을 방문 중”이라는 평양 주재 소련 대사가 모스크바로 보낸 전보(50.4.10) 내용이 실려 있다. 즉 김달삼은 3월 28일 반론산에서 국군 토벌대 8사단 21연대의 공격을 받았지만 월북에 성공한 것이다. 3개월 후,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6월 25일 아침 9시경 제주4.3폭동 주동자 제 1대 제주인민유격대장 김달삼은 강동정치학원 출신 유격대원 3백여 명으로 구성된 조선인민유격대 제 3병단을 이끌고 주문진항에 상륙 후, 경북 청도군 운문산지구로 침투하여, 경남 신불산 부근에서 부산지구에 침투할 계획으로 해로로 남하하던 중에 사살되었다. ‘김달산모가지잘린골’은 ‘강원도 정선군 여량면 봉정리’가 아니라 경상남도 신불산이었던 것이다. 6.25 한국전쟁 당일 김달삼 유격부대가 부산침투에 성공했다면 부산항을 통한 즉각적인 미군과 UN군의 도움은 어려웠을 것이다. 참조 : [참혹했던 비극의 역사 1948년 제주4.3사건(휘선출판사/박윤식)], [잊을 수 없는 6.25전쟁(휘선출판사/박윤식)], [대한민국 근현대사 시리즈 완전정복(휘선출판사)], [정선 임계면 지명유래(정선아리랑연구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