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530709 최고의 사랑 171203 대림절 둘째 주일 요일40712
1.세기의 사랑
에드워드 8세 (Edward VIII)
영국의 왕(재위 1936).
국왕 자리를 버리고 윈저공(Duke of Windsor)으로서 미국 출신의 이혼녀 심프슨부인과 결혼하였습니다.
윈저공은 서리주 리치먼드 출생으로 조지 5세의 맏아들입니다.
조부 에드워드 7세를 닮아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황태자 시절에 세계 각지를 여행하여 상하 각층의 사람들과 널리 사귀었으며, 사회문제에도 조예가 깊어 인망이 높았습니다.
조지 5세가 죽자 독신인 채로 즉위하였는데, 미국 출신의 이혼녀 심프슨부인과 열애하였고,
1936년 12월 마침내 국왕 자리를 버리고 해외로 떠나 윈저공(公)으로서 그녀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리고 죽음후에는 부인과 함께 윈저성(城) 부지 내 프로그모어에 묻혔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과 지지 없이는 무거운 책임을 이행해 나가기가 나로서는 불가능하다고 깨달았으며…』 [영국 국왕 에드워드 8세의 이임사(1936년 12월 11일)]입니다.
이 연설은 당시 영국 국왕이었던 에드워드8세(윈저공)가 1936년 12월 전국 방송으로 발표한 연설로서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남을 공식적으로 밝히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할 만큼 부강했던 나라인 영국, 그 왕위에 올랐으나 한번의 이혼 경력에다가 유부녀인 심슨 부인을 영국 의회와 국민들이 ‘이혼한 여인은 왕비가 될수 없다’는 법 조항을 내세워 반대하자 왕위를 내려 놓겠다는 사임 발표입니다. 세상에서는 이 사랑을 ‘세기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연인과의 사랑을 위해 왕위를 내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2.우리나라 예 신랑에서 있었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입니다.
신라 진평왕때(재위 579∼632년)의 일입니다.
경주 율리에 절세미인이 살고 있었다. 설(薛)씨의 성을 가진 처녀가 있습니었다.
비록 평민의 빈한하고 외로운 집 처녀였지만 용모단정한 뜻과 행실로 유명했습니다.
뭇 남성들은 곱고 아리따운 여인을 흠모했지만 감히 말 한 번 걸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설씨 집에 큰 일이 생겼다. 나이 많은 설씨의 아버지가 병역의 대상으로 징발됐습니다. 아버지는 경북 의령에 주둔하던 국경수비대 군인으로 징집된 것입니다.
가실(嘉實)이라는 청년이 그 설씨 처녀의 딱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역시 상사병이 걸릴 정도로 설씨 처녀를 짝사랑하던 소년이었습니다.
그는 잽싸게 설씨 처녀를 찾아갔습니다.
“제발 내가 아버지 일을 대신 군대에 가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
설씨 처녀는 뛸 듯이 기뻐 아버지에게 자초지종을 고했습니다.
그러자 설씨처녀의 아버지가 가실 청년을 불렀습니다.
“이 늙은이의 일을 그대가 대신하여 주겠다니…. 고맙소. 보답할 길을 생각해 보았소. 자. 우리 딸을 주어 그대에게 주겠소.”
가실 청년과 설씨 처녀는 거울을 둘로 쪼개 신표로 삼고 “후일 합치자”고 약속했습니다.
가실 청년은 자신이 키우던 말 한 필을 설씨처녀에게 주면서 “잘 길러달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그러나 나라에 변고가 생겨 3년 예정이었던 경비원의 근무교대가 계속 연기됐습니다.
6년이 되도록 가실청년이 돌아오지 못하자 아버지는 딸을 위해 중대결심을 합니다.
“3년 기약이었는데…. 가실청년이 돌아오지 못하는구나. 더는 기다릴 수 없으니 다른 집에 시집가야겠다.”
하지만 설씨 처녀는 “배신할 수 없다”며 눈물로 하소연했습니다.
“아버지를 위해 굳게 약속한 것인데…. 가실청년이 이것을 믿고 군대에 나갔는데~ 신의를 버리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의 도리이리요? 아버지 명을 좇을 수 없사오니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마시오.”
그러나 이미 늙어 마음이 조급해진 아버지는 혼기를 지난 딸이 걱정되어 억지로 시집을 보내려 동네사람과 몰래 혼인을 약속했습니다.
이윽고 혼인날이 되자 그 신랑을 끌어들였습니다.
설씨 처녀는 도망가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채 마굿간에 가서 가실이 남겨두고 간 말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마침 가실이 군대에서 왔습니다.
“설씨 처녀. 저를 못알아보겠소?”
“….”
그 모습이 마치 마른 나무처럼 야위었고, 옷이 남루하여 집안 사람조차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가실이 정표로 나눠가졌던 거울 반 쪽을 던지니 설씨가 주워 들고 흐느껴 울었습니다.
아버지와 집안 사람이 기뻐하여 어쩔 줄 몰랐습니다. 둘은 드디어 혼인해서 해로했습니다.(<삼국사기> ‘열전·설씨녀’편)
볼수록 ‘지독한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리 사랑한다 한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걸고 대신 군대를 갈 수 있는 남자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세상의 이러한 사랑을 ‘세기의 사랑’, ‘최고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3.그러나 최고의 사랑은 여기있습니다.
오늘 신약 본문 말씀중 요한일서 4장 9절, 10절을 보십시다.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그 사랑, 이 사랑이 천상 천하에서 제1의 사랑입니다.
4.자, 그러면 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천상 천하에서 제1의 사랑인가?
첫째, 생명을 구원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귀한 것!!
하나뿐인 우리의 생명입니다.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사람은 온 천허보다 귀한 존재입니다.
온천하보다 귀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시기 위하여 주님이 이 세상에서 오셨고 죽으셨습니다.
이미 살펴보았습니다마는 세기의 사랑으로 일컬어지는 영국왕 에드워드8세와 심슨 부인의 사랑은 자기 둘만의 사랑을 위해 왕위를 버리고 남편을 버린 것이지 다른 사람을 살리고 세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내가 좋아하는 여인을 위해 왕위를 버린 것과 내가 좋아하는 남자를 위해 남편을 버린 사건이 어지 세기의 사랑이며, 감동적인 사람이 되겠습니까?
신라시대의 가실과 설씨 처녀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실이라는 청년은 설치 처녀를 얻기 위해서 설씨 처녀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3년 동안의 군복무를 자원한 것이고,
설시 처녀는 아버지를 염려하는 마음에서 아버지를 대신해서 군데에 가준 가실이 고마워서 약속대로 기다려 준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세기의 사랑, 신라의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는 세상에서는 흔치 않은 사랑으로 보이나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비교가 안되는 줄 믿습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이야 말로 온 인류를 살려낸 최고의 사랑인줄 믿습니다.
둘째, 자기 생명을 기꺼이 버린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사랑들은 일정한 경향이 있습니다.
누구를 사랑하고자 할 때 자기가 죽는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습니다.
설령 위험한 곳에 들어가는 모험을 한다고 해도 설마 죽지는 않는다고 생각하고 합니다.
만일 죽을 것이 명백한 경우에는 부모라고 해도 쉽게 달려 들지 못합니다.
실제로 여름이면 많이 발생하는 익사사고-
자녀들과 함께 물가에 갔는데, 명백히 보는 앞에서 자식들이 물길에 힙쓸려 내려 갑니다.
그럴 때 수영을 잘하거나, 살려낼 가망이 있겠다 생각되면 뛰어 들겠지만 100펴센트 완전히 죽는다고 생각하면 아무리 자식을 사랑해도 뛰어들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뛰어 들어도 자식을 살려낼 자신이 없는데 뛰어 들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은 명백하게 우리 인간들을 살려 내는 대신 자기는 죽겠다고 오셨고 그렇게 죽으셨습니다.
차원이 아주 아주 다릅니다.
그러니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최고의 사랑이지요.
아멘이십니까?
셋째, 가장 겸손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이 최고의 사랑인 것은 불가능한 사랑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우리 주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에 불과한데. 창조하신 분이 피조물을 살리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어 오셨고, 죄인된 사람을 대신하여 죄를 스스로 지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말씀하기를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5:7-8)말씀하셨습니다.
의롭고 선한 사람을 위해 죽는 경우가 극히 드물게 있기는 죄인을 위해 죽으신 주님의 죽으심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누가 의인도 아니고 선한 사람도 아닌데 죄인을 대신하여 죽느냐는 말씀입니다.
오늘구약본문 이사야 53장 첫 번 성탄절에 오실 예수님에 대해 예언한 말씀인데요.
예수님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고 하십니다.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을 때 사람들은 아무도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악인으로 치부를 당했고 죽어 악인들과 함께 계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아무 죄도 없으신데 죄있는 것처럼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주님은 창조주로소 피조물이 되셨고, 죄있는 피조믈을 위해서 자신이 죄인것처럼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자신보다 우리보다 더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최고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지금 대림절 기간을 살고 있습니다.
주님오신 성탄절 전, 네 주간을 대림절 기간으로 정하고 첫 번 성탄절에 오신 주님을 기억하고, 다시 오실 재림의 주님을 대망하는 절기가 대림절입니다.
우리는 이 대림절에 최고의 사랑을 기억합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서도 찾아 볼수 없는 사랑, 주님의 사랑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 우리는 거저 받았지만 주님은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자신이 죄인이 되어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 최고의 사랑을 받은 우리들, 이제 그 최고의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합시다.
그 최고의 사랑으로 형제 자매와 이웃을 사랑합시다.
그것이 우리를 최고의 사랑으로 사랑한 주님께 대한 도리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