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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난징조약 (1842년 8월 )
난징조약 또는 남경조약(장닝조약)은 1839년 임칙서의 아편몰수소각에 대한 응징으로 영국이 일으킨 아편전쟁의 결과입니다.
19세기 초 영국이 중국에서 구한 가장 중요한 상품은 차였는데, 이를 수입하기 위해서는 대량의 은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러나 18세기 말부터 영국본토에서는 산업혁명이 진척되고, 이로 인해 차를 수입하는데 필요한 대량의 은을 조달하기가 어려워지자 생각해낸 묘안이 바로 아편무역이었습니다. 이처럼 중국의 거듭된 금령에도 불구하고 아편무역이 성행하게 되자, 이는 오히려 중국의 은을 해외로 유출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여 당시의 중국경제에 엄청난 악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광동에 파견된 임칙서가 아편을 몰수소각하자, 이에 분격한 영국은 1840년 함대를 파견하여 아편전쟁이 시작됩니다. 영국군이 광동을 봉쇄하고 북상하여 곧바로 북경에 육박할 기세를 보이자, 이에 당황한 중국은 사건의 발단이 된 임칙서를 파면하고 강화론자인 기선을 등용하여 1841년 홍콩의 할양 등을 내용으로 하는 천비假조약을 체결합니다.
그러나 일단 영국군이 철수하자, 영국도 조공국에 불과하다는 중화적 사고방식이 다시 고개를 들면서 기선에게 패전책임을 물어 이를 처벌하고 강경론자인 혁산을 중용하는 등 중국의 태도가 바뀌게 됩니다. 이에 마찬가지로 가조약에 대해 불만이 있었던 영국은 전열을 정비한 후 1842년 다시 함대를 파견하여 상해를 점령하고 양자강을 거슬러 남경을 위협하였습니다. 제2의 도시가 위협받자 중국은 어쩔 수 없이 재차 강화를 결정하고 假조약보다 불리한 내용으로 남경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출처;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1id=11&dir_id=110107&eid=AtADtrLfGSkkYd%2ByOWdcCbzdAQFBqgZb
2. 러·일전쟁 (1904∼1905)
:1904∼1905년에 만주 ·한국 ·동해에서 싸운 러시아와 일본 간의 전쟁.
1904년 2월 8일에 일본함대가 뤼순군항을 기습공격함으로써 시작되어, 1905년 9월 5일에 강화를 하게 된 러시아와 일본 간의 전쟁이다. 한국과 만주(중국 동북지방)의 분할을 둘러싸고 싸운 것이지만, 그 배후에는 영일동맹과 러시아프랑스 동맹이 있었고, 제1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이었다. 러시아는 패배의 결과로 혁명운동이 진행되었고, 일본은 전승으로 한국의 지배권을 확립하고, 만주 진출이 확정되었으나 미국과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출처;http://100.naver.com/100.php?id=54510
3. 레닌 (1870.4.22~1924.1.21)
본명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Vladimir Ilich Ulyanov)이며, 공식명인 니콜라이 레닌은 1902년경부터 사용한 필명이다.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의 중심인물로서 독일파 마르크스주의자 K.카우츠키의 사회민주주의에 대립하여 마르크스주의를 후진국 러시아에 적용함으로써 러시아파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킨 혁명이론가이자 사상가이다.
볼가 강변의 심비르스크에서 교육자의 아들로 태어나, 1887년 황제 알렉산드르 3세의 암살계획에 참여하여 처형된 맏형 알렉산드르의 영향으로 혁명에 뜻을 두기 시작하였다. 카잔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는 한편, 1870년대에는 플레하노프에 의하여 러시아에 도입된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여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이후 혁명운동에 투신하여 체포와 유형의 세월을 거친 뒤 1900년 국외로 망명, 1903년 브뤼셀과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당 제2차 대회에서 당원 자격문제로 마르토프와 맞서 직업혁명가주의를 관철시킴으로써 볼셰비키(다수파)가 되었다.
1905년 제1차 러시아혁명 직후 일단 귀국하였으나, 1907년 다시 망명하여 주로 스위스에 머물면서 연구와 저술에 종사하다가, 1917년 2월혁명 직후 독일이 제공한 봉인열차(封印列車)로 귀국하였다. 같은 해 11월 7일 무장봉기로 과도정부(過渡政府)를 전복하고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표방하는 혁명정권을 수립한 다음, 러시아의 공산정권을 지키기 위하여 1919년 제3인터내셔널인 공산주의자 인터내셔널(약칭 코민테른)을 결성하였다. 1922년 뇌일혈 발작으로 와병, 마지막 1년은 실어증(失語症)까지 겹쳐 병상에서 지내다가, 1924년 사망하였다.
출처;http://100.naver.com/100.php?id=54670
4. 레지스탕스
역사적으로 볼 때 제2차 세계대전에서 넓은 뜻으로는 파시즘 정권에 대한 저항을 가리키며, 좁은 뜻으로는 프랑스인민의 독일점령군과 비시정권에 대한 저항운동을 가리킨다.
즉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스 독일에 의하여 점령된 프랑스·덴마크·노르웨이·네덜란드·벨기에·유고슬라비아·체코슬로바키아·그리스·폴란드·소련 등의 유럽 제국(諸國)에서 비합법적으로 전개된 독일에 대한 저항운동을 가리킨다.
원래 레지스탕스는 침략당한 조국을 해방시키기 위한 애국투쟁이었으나, 침략자인 독일이 나치즘이라는 인간 멸시의 전체주의적 체제를 그들의 점령 하에 있는 각국에게 강제하려고 하였던 점에서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지키려는 투쟁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따라서 각국의 레지스탕스는 각각 연합군의 대(對)독일전의 승리에 크게 기여하였는데, 특히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활동이 가장 높이 평가되는 것은, 신을 믿는 자도 믿지 않는 자도, 반(反)체제주의자이거나 체제주의측 세력이거나를 막론하고 전체가 일치단결하여 광범위한 통일전선을 조직하였으며, 1944년 6월 연합군의 프랑스 상륙에 호응하여 문자 그대로 국민 총봉기를 결행하여 침략군 격퇴에 필사적으로 협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통일전선의 기초 위에 신(新)정부가 수립되었기 때문이다.
출처;http://100.naver.com/100.php?id=55081
5. 마이소르전쟁
:18세기 후반 마이소르왕국과 영국(동인도회사) 사이에 4차에 걸쳐 벌어진 전쟁.
제1차(1767∼69) ·제2차(80∼84) 전쟁에서는 영국측이 불리하게 끝났는데, 남인도에서 영국에 의해 밀려난 프랑스가 마이소르를 원조한 것도 한 원인이었다.
그 후 영국은 인도 각지에 분립해 있는 번왕국 사이의 세력다툼을 교묘히 이용하면서 하이다르 알리의 아들 티푸 술탄에게 제3차(90∼92) ·제4차(99)의 전쟁을 잇따라 도발하여 1799년 그 수도 세링가파탐을 공략하여 티푸를 패사(敗死)시키고 남인도에 그들의 세력을 확립하였다.
출처; http://100.naver.com/100.php?id=58874
6.메이지유신 (1868)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사람들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것은 국가를 외국으로부터 위협에 대항할 수 있게끔 강하게 만드는 것이었으며, 이에 따라 이들은 “부국강병”이라는 슬로건을 채용했다. 부국강병이라는 슬로건 아래 1871년에 이르기까지 다이묘오는 소유지를 몰수당하고 , 무사계급은 폐지되었으며, 사회적 평등과 개인 행동의 자유가 선포되는 등 일본을 서양 수준에 맞추어 재창조하려는 전력을 기울인 노력이 시작되었다.
역사가들은 메이지 유신의 의의에 대해 뜨거운 논쟁을 해왔다. 일본에서는 프랑스 혁명이나 러시아 혁명처럼 사회적인 반목이나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보이지 않았다.
메이지유신은 부르주아혁명도 농민혁명도 아니었다. 변혁의 주도력은 주로 다른 곳, 바로 무사계급 그 안에 있었다. 유신의 전 시기를 통하여 두드러진 특징은 나라 안을 휘몰고 있었던 압도적인 대외 위기의식과 무사계급 안에서 새로운 지도력이 전면으로 나서는 과정에 있었다.
일본의 경우 1850년대부터 1880년대에 걸친 시기만큼 우수한 지도자를 수없이 배출한 적은 드물다. 바로 이들이 유신운동과 그에 잇따른 모든 개혁을 추진했던 것이다. 그들의 동기는 무엇이며 왜 하필 이시기에 나타났는가 하는 것은 유신시대에 가질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리라. 그들은 천화에 대한 열광적인 충성심에 사로 잡혀 있었을 뿐이라든가 , 또는 그들의 주된 희망이 서양을 모방하려는 것이었다는 것은 분명 지나치게 단순한 설명이다. 유신의 지도자들은 무사계급의 여러 층에서 나타났으며 그들의 행동은 계급으로서의 또는 집단으로서의 동기설정이 거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혁명적인 목적을 의해 이용될 수 있는 무사계급으로서의 자질을 가진 존재로 인식하고 있지도 않았다.
메이지유신운동의 지도자들은 대부분이 각기 전통적으로 토쿠가와가에 대해 적대의식을 품고 있던 서일본의 4대 토자마번 출신이다. 그들은 1868년에 평균 서른을 막 넘긴 나이로 집단으로 보더라도 두드러지게 젊은 층이었다. 개중에는 키도처럼 높은 신분도 끼어 있었지만 거의가 하층 무사의 가정에서 자랐다. 이들은 젊은 만큼 정력적이고 또 야심적이었고, 대부분 각자의 번 내에서 지위 상승길을 특히 군복무에서 택하는 전통적 방법으로 그 경력을 시작하였다. 토지에 바탕을 둔 귀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들의 야심은 정치나 관료적 성공으로 충족될 수밖에 없었다.
막번 체제의 지방분권 덕분으로 이들에게는 자신의 능력을 입증할 수 있는 정치활동의 무대가 많이 주어졌다. 독립혁명 전의 미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근대 일본 건국의 아버지들은 국가의 지도자가 되기 전에 출신지역 안에서 지도자로서의 수업을 쌓고 있었던 것이다.
유신 지도자들의 특징은 한결같이 높은 교육을 받고 있었다는 점과 또 전문적인 훈련을 받고 있었다는 점이다. 대부분 군사적 재능이나 학식으로 번 안에서 인정을 받고 있었다.그 결과 이들 모두가 다이묘오의 조언자로서, 대외교섭의 실무자로서, 또는 새로운 군대의 조직자로서 활동적인 초기경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 중에서도 군사교육은
예외 없는 경력이었을 것이다. 사이고 다카모리, 오오무라 마스지로오, 에토오 심페이, 히로사와 사네오미, 이타가키 타이스케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번 군대의 최고 지휘자 였었다.
이토오 히로부미는 통역이었고, 키도는 다이묘오의 수석 고문이었다. 이들이 받은 교육도
의미 깊은 것이었다. 무사였기 때문에 엄한 군사훈련을 견뎌 내었고(이들의 대부분은 우수한 劍士검사였다), 행동적인 인간이 되도록 , 용감한 성격을 기르도록 단련 받았다. 지적인 학습내용은 주로 사회에 대한 충성과 헌신을 강조하는 유교였다. 따라서 강렬한 개인적 야망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국가문제에 비상하게 민감하였고 보다 높은 권위에 대한 봉사심을 주입 받았다. 또 지사(志士)였던 이들은 모두가 구국(救國)과 다이묘오에 대한 봉사심의 열망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특정한 정치적 견해에 사로잡혀 옹졸하거나 맹목적인 경우는 거의 없었다. 1868년 이전에 외국에 갔었거나 (고다이, 이토오, 이노우에는 영국에, 카츠는 일본 배로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갔었다) 또는 일본에 와 있던 서양인과 교제하기도 했다. (오오쿠보, 사이고오, 오오쿠마는 오랫동안 영국의 통역 E촵Satow와 식견을 나누는 사이였다) 대부분의 지사들은 1853년에 비록 폭력적인 양이파로서 출발했었으나(이토오는 1863년 영국 공사관 습격에 한몫 했었다). 그 중에서 가장 열렬했던 자들은 일찌감치 죽임을 당하고 살아 남은 자들은 1868년이 되기 전에 서양문명의 우월성을 확신하게 되었다.
아직 개개인으로서는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사태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길은 이들이 번의 자산을 교묘하게 이용하거나 상사의 권위를 빌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막부를 배제하고 자기 번의 다이묘오를 받들기 위한 목적으로 천황을 좌우해 보려는 것이었다. 이 일이 이루어지자 이들의 다음 목표는 나라를 지키는 일과 나아가 서양제국에 맞서 일본을 강화하는 일 두 가지였다.
이 같은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개인으로서의 야심과 정치적 수완이
융합 되어 활동적 분자를 규합하면서 마침내 국가를 근본적 개혁으로 내닫게 하기에 족한 지도력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1868년 토쿠가와로부터 몰수한 영토는 현과 부로 재편되어 서 일본 번 출신 지도자들이 지사(知事)로 임명되었다. 이로써 명목상의 우두머리인 공가나 다이묘오들은 지체만 누리던 지위에서 탈락하고 활동적인 지도자들이 대신 승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츠마의 오오쿠보가 주도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1869년 3월, 오오쿠보는 중앙집권을 더 강화할 필요성을 확신하게 되었다. 1871년 8월, 옛 다이묘오들이 천황 앞에 호출되고 그 자리에서 천황은 폐번치현의 법령을 발포하였다. 이 전의 번은 현으로 바뀌며 우두머리인 지사(知事) 가 새로이 임명된다는 내용이었다. 다이묘들은 가록을 받고 물러났다. 번의 기존군대나 호위대는 폐지되고 이전의 다이묘오들의 거성은 중앙정부에 접수되었다. 설령 반대한다 하더라도 발언 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이로써 일본은 완전히 중앙집권화 된 국가로 바뀌었다. 이 바탕 위에 완벽한 지휘권을 쥔 새로운 지도세력, 즉 거의 반대 없이 다음 단계의 개혁을 수행할 수 있는 과두정치가 나타났던 것이다.
일본은 혁명의 수행 없이 정치구조와 권력배분에 있어서 혁명적인 변화를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다이묘들에게 제시된 선택의 길이란 그리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아니었다. 영토를 빼앗긴 다이묘들을 기다리고 있는 단두대 따위는 없었고 이들은 오히려 공무의 부담에서 해방됨과 동시에 관대한 재정상의 처분도 받았다. 번의 부채나 지폐조차도 신정부에 의해 흡수되었다. 정치적 변화가 그다지 격렬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토쿠가와 요시노부 조차도 충분한 대우를 받아 1903년에는 공작이 된다)이 서양세력의 출현에서 야기된 국가적 위기의식과 합쳐져 소수의 목표의식 있는 사람들 이 일본이란 국가를 재구성할 수 있도륵 환경을 만들어주었던것이다.
출처;http://kin.naver.com/open100/entry.php?eid=tVA9wKFEKrrlx3%2B2T6J8UvVSAt3X2lqX
7. 민족자결주의
인간이 개인으로서 기본적 인권을 가진 것과 마찬가지로 민족이라는 인간의 공동체도 민족자결권이라는 집단으로서의 기본적 권리가 있으며, 민족자결은 그러한 권리에서 나온 것이다.
민족자결권은 특히 식민지 등 피억압민족이 타국의 지배로부터 이탈하여 자기 국가를 수립하는 권리를 주요내용으로 하고 있고, 민족운동의 정당성의 근거가 되고 있다.
민족자결사상의 기원은 프랑스혁명기의 사상가 J.J.루소에서 볼 수 있지만, 그것이 정치적 슬로건으로서 등장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말기인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T.W.윌슨이 성명한 ‘14개조’이나 영국 총리 로이드 조지 등에 의하여 제창된 것에서 비롯한다.
한국의 3 ·1운동도 당시에 팽배한 민족자결사상에 고무되었고, ‘독립선언서’에는 그러한 역사적 사조가 맥맥히 흐른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국제연합헌장, 식민지독립선언(1960 국제연합총회)이나 인도차이나 문제에 관한 제네바협정(54) 등에 규정되어, 민족자결주의는 국제법상의 확고한 원칙이 되었다.
출처;http://100.naver.com/100.php?id=67851
8. 베르사유체제
이 조약들은 T.윌슨이 제안한 14개조의 평화원칙을 기초로 하여 작성되었으나 실제로는 연합국측의 자의적(恣意的)인 적용으로 끝났다. 미국과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발족했던 베르사유체제는 1924년 독일의 배상을 경감하는 도즈안(案)의 성립, 1925년 독일·프랑스·벨기에의 국경을 보장하는 로카르노조약 등의 체결로 일시적인 안정을 보였으나, 1929년 대공황 이래의 불황으로 독일이 배상 지불능력을 잃게 되자, 체제의 경제적 기초가 무너지고, 35년 3월 히틀러의 재군비선언, 1936년 3월 나치스 독일군의 라인란트 진주(進駐)에 의해 완전히 붕괴되었다
출처; http://100.naver.com/100.php?id=74361
9. 벵골 분할령
인도 총독 G.N.커즌은 영국자본의 이익증진과 제국의 세력 유지·확대를 위하여 차차 강압적인 정책을 실시하던 중, 벵골 분할령을 실시하였다. 행정상 능률화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은 종래의 영구토지 설정의 폐지와 지조(地租)의 증액, 식민지적 착취의 전형인 차(茶)의 플랜테이션 실시, 반영(反英) 기운이 높은 벵골을 힌두교도가 많은 본주와 이슬람교도가 많은 동벵골 아삼주를 분단함으로써, 민족적 결집을 분열하려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발표되자 벵골인 사이에 반대운동이 일어나, 캘커타를 중심으로 분할이 실시된 10월을 기하여, 국민회의파(國民會議派)의 과격파를 선두로 격렬한 저항운동을 벌였다. 영국측도 이에 못지않게 탄압을 가하여, 소요(騷擾)는 점차 벵골에서 펀자브·봄베이, 남(南)인도에까지 파급되어, 1905∼1908년 B.G.틸라크 등 민족파(民族派) 지도하에 첨예화되었다. 이 저항운동은 인도 각지의 민족운동지도자들의 호응을 얻어, 1906년 국민회의파 캘커타대회에서 스와라지(자치운동)·스와데시(국산품 장려운동) 등을 결의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와 같은 반대운동에 직면하자, 1911년 영국측은 이를 철폐하였다. 그러나 이 분할은 1947년 인도·파키스탄으로 분리되는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출처;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1id=11&dir_id=110107&eid=HoqcJAZD6eER%2FXQ6kmVmNmW1m99fuTK0 (두산백과 '벵골분할')
10. 변법자강 운동 (1898)
:청나라 말기 캉유웨이[康有爲], 량치차오[梁啓超] 등이 중심이 되어 진행한 개혁운동
무술변법이라고도 한다. 청일전쟁 패전과 그에 따른 제국주의 열강에 의한 중국 분할로, 젊은 독서인층은 망국의 위기감을 절감하였다. 그들은 패전의 경험에서, 유럽의 무기·기술만을 도입하려는 양무운동의 한계를 깨닫고, 전통적인 정치체제·교육제도 개혁으로서 부국강병을 실현해야만 중국이 근대세계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헌법제정, 국회개설, 과거제 개혁과 양식학교 설립, 산업의 보호육성 등을 구체적 목표로 정하고, 주요도시에 학교를 설립하고, 신문을 발행하여, 관료나 독서인층을 대상으로 계몽·선전활동을 펼쳤다. 외국인 선교사와 일부 고관들 중에도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어, 고관들의 후원으로 캉유웨이는 황제에게 의견을 구신할 기회를 얻었다. 황제는 그의 의견에 공명하여 량치차오·담사동 등 변법파를 등용하여 그들의 주장을 실행하였다. 그러나 이 운동은 서태후의 쿠데타로 좌절되고, 캉유웨이와 량치차오는 망명하였다. 20세기에 헌법제정·국회개설을 목표로 한 입헌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청조타도·공화국 수립을 목표로 한 쑨원등의 혁명운동이 활발해졌다.
출처;http://100.naver.com/100.php?id=75225
11. 사라예보사건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됨으로써 더욱 알려졌다. 사라예보는 현재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있지만, 당시에는 1908년 오스트리아에 합병된 보스니아주(州)의 중심도시였다.
이 암살사건은 남(南) 슬라브민족의 통일을 부르짖고, 황태자를 그 장애물로 본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적 비밀결사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이 사건에 세르비아 정부가 관련되었다고 하여 즉각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보내고, 7월 28일에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출처; http://100.naver.com/100.php?id=83012
12. 사회주의국가
1917년 러시아혁명에 의해서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주의국가인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USSR)이 창설되었다.
그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소련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동유럽의 8개국(동독·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루마니아·불가리아·헝가리·알바니아·유고슬라비아)에서 사회주의국가가 수립되었다.
아시아에서도 중국·몽골·베트남·북한 등이 사회주의국가를 표명하였고,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쿠바가 그 대열에 포함되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의하면 사회주의국가는 프롤레타리아독재(공산당의 독재)와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 계획경제를 그 특징으로 한다.
사회주의국가의 이론은 대체로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의 《국가와 혁명》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노동자계급이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부르주아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도구로서 국가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또한 이러한 국가의 본질은 프롤레타리아독재에 있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들은 소련형 사회주의국가체제에 강력히 저항하여 1950년 이후 노동자자치관리제(勞動者自治管理制)를 발전시켰다. 그후에도 서유럽과 동유럽의 많은 개혁사회주의자들은 소련형 일당독재에 대항하여 다원주의적·민주적 사회주의를 표방하여 왔다.
특히 서유럽의 대표적 공산당인 이탈리아·프랑스·에스파냐 공산당들은 프롤레타리아독재의 개념을 스스로 포기하였다. 이것이 유러커뮤니즘으로 불리는 사조(思潮)인데, 이것은 폭력혁명과 프롤레타리아독재의 개념을 부인하고,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는 대의제적·민주주의적 과정을 통하여 사회주의사회를 건설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중·소분쟁과 더불어 1950년대 후반 이후 세계공산주의운동의 다중심화(多中心化)현상을 확산시켰다.
한편 미·소 양극체제의 다극체제로의 전환, 국가이익의 이데올로기 중심에서 경제 중심으로의 전환 등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국가의 수를 감소시켰다.
1980년대 소련과 동유럽의 개혁개방정책은 시장경제와 다당제의 도입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데, 이는 고유한 의미의 사회주의국가는 아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당의 지도적 역할을 폐지하였고, 1990년 불가리아에서는 공산당의 지도적 역할을 헌법에서 수정하였다. 또한 1989년 폴란드의 자유경쟁선거에서는 비(非)공산주의자들이 의회의 100석 중 99석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1999년 현재 헌법상으로 사회주의국가라고 할 수 있는 국가는 북한·중국·베트남·쿠바 등인데, 이들 국가 역시 엄격한 의미의 사회주의국가라고는 할 수 없다.
출처;http://100.naver.com/100.php?id=84842
13. 세포이의 항쟁
1857년 5월 10일, 델리 근교에 있는 소도시 메러트에서 영국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의 인도인 용병(세포이)이 영국 식민지 지배에 대해 항쟁을 일으켰다. 당초 항쟁은 인도 병사에 대한 영국 사관의 여러 가지 차별이 원인이었으나 삽시간에 동인도회사의 폭력적인 식민지 지배의 폐지로 초점이 맞추어졌다. 항쟁은 북인도의 갠지스강 유역으로 펼쳐졌고, 이어서 중부 인도와 서부 인도로 파급되어 갔다. 이 항쟁의 주역은 인도인 용병과 하층 농민이었으며 일부 상인들도 항쟁에 동정적이어서 자금 지원을 하고 나섰다.
델리 근교에서는 병사와 농민의 공투회의가 성립되었고 지주제도의 비판, 토지의 직접 경작자에 대한 분배 등이 제기되었다. 항쟁은 먼저 병사와 영국군과의 대결이라는 국면을 거쳐, 병농통일 행동이라는 제2국면을 맞이했고, 이어서 농민의 유격전이라는 최종 국면을 맞이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 항쟁이 강력한 통일 지도조직을 가지지 못하였고, 때로는 몰락 직전에 있는 무굴 황제의 복권이 기도되기도 하여, 지속적 저항을 전제로 하는 최종적 승리를 기대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영국측의 강경한 반격작전이 주효하여 1859년 7월 항쟁은 진압되었다. 또 1858년에는 동인도회사를 대신하여, 인도는 인도정청을 통해서 영국의 직접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출처; http://100.naver.com/100.php?id=93268
14. 수에즈운하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수에즈~포트사이드 사이에 뚫은 운하로 총길이 195km, 수면의 너비는 365m, 수심 약 20m. 35피트까지의 배들이 항해가능하다. 프랑스인 페르디낭 드 레셉스에 의해 1869년 개통되었지만, 이 운하건설 계획은 고대 이집트인이 이미 착수한 것이었다.
이집트는 인구 6천2백만 명에 97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97년 기준 1천2백달러. 연평균 40억달러 수출에 1백 40억 달러를 수입, 무역적자가 적지 않으며 이 적자를 연간 60억~80억 달러의 관광수입과 수에즈운하 수입,외국 원조 등으로 메우고 있다. 이처럼 이집트에서 수에즈가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나다.
최초의 운하는 기원전 2100년에 계획되어 네코가 지중해와 연결 공사를 시작하여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중단 하였고 그 후 기원전 500년경 다리우스 1세가 홍해와 대염 호수(Great Bitter Lakes)를 거쳐 부바스티스(Bubastis)의 나일강과 연결하는데 성공했다.
이 수로는 7세기 아랍의 상인들이 이집트의 농산물을 실어 가는데 중요한 교통로가 되어 백여년 동안 사용되다가 회교 내분으로 수로를 이용한 곡물 운반이 중단되자 운하는 폐기되었다.
1798년 나폴레옹이 홍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수석 기사의 계산 착오로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주 카이로 프랑스 영사였던 페르디난드에 의해 1859년 공사가 재개되었으며, 그로부터 10년 후인 1869년 11월에 총 길이 161 Km의 운하가 개통되었다.
1952년 군사혁명으로 집권한 대통령 압델 나세르에 의해 1956년 7월 수에즈 운하 회사를 국유화하였고, 기득권을 상실한 영국과 프랑스는 군대를 동원하여 강점 하는 등 분쟁이 그치지 않았다. 그 후 1967년 6일 전쟁으로 운하가 폐쇄되었다가, 1973년 사다트 대통령의 시나이 반도 탈환과 더불어, 이 운하는 이집트 정부의 관리하에 폐쇄 8년만인 1975년 재개통되었다.
하루 평균 100여 척의 선박이 이용하고 있으며 전세계 물동량의 14%가 이 운하를 통과하고 있으며, 통과 소요시간은 약 15시간이 걸린다. 운하의 폭은 365미터, 평균 수심은 20m인데, 교통량이 늘어남에 따라 꾸준한 준설 확장을 계속하고 있고, 현재 운하의 길이는 173 Km에 달한다.
이 운하를 건너 시나이 반도로 들어가는 연결 지점은 4곳의 나루터와 한 개의 해저 터널이 있는데 이 터널은 진입로를 포함하여 총 연장 4km이다.
운하의 항구는 홍해쪽이 수에즈 이고 지중해 쪽에는 포트사이드이다.
출처; http://www.119tour.co.kr/sungji/suez.htm
15. 신해혁명
청나라가 망해가고 구미열강들이 중국의 이권을 차지하고 관리들은 부정부패에 서태후의 독재정치까지 겹쳐 중국 곳곳에서는 민주혁명을 요구했다.
쑨원역시 혁명파의 하나였다. 쑨원은 홍콩에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사귀고 톈진의 이홍장에게 개혁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했다. 1894년 미국 하와이에서 개혁, 혁명파들을 모아 홍중회를 조직하여 다시 중국 광저우로 돌아왔다. 1895년 무력을 앞세워 혁명을 하려 했으나 발각되고 말았다. 그래서 쑨원은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하지만 쑨원의 영향을 받아 중국각지에서 혁명봉기가 일어나고 가난에 시달리고 청왕조의 지배를 받던 중국사람들도 혁명과 개혁에 호응했다. 쑨원은 강대국들을 돌아다니며 원조와 협력을 요청했다. 그리고 유명한 삼민주의국가를 이루기위해 혁명의 목표를 세웠다. 삼민주의의 내용은 이렀다.
한족에 의한 중국을 회복하자는 민족주의, 국민이 나라의 주인인 민주주의, 그리고 국민을 잘살고 부강하게 만들자는 민생주의를 앞세웠다. 그리고 여러 개혁파를 모아 중국 혁명 동맹회를 결성하고 중국에서 수차례 무력봉기를 일으켰으나 모두 정부군에게 패하였다. 1911년 후베이성의 우창에서 혁명에 성공하여 혁명은 전 중국으로 퍼져나갔고 1912년 쑨원은 드디어 중화민국이라는 삼민주의 국가의 건국을 선포하고 위안 스카이와 협력하여 청나라를 무너뜨렸으니 이것이 바로 신해혁명이다. 하지만 신해혁명 이후 중국은 혼란에 시달리고 1949년 마오쩌둥의 사회주의 정권과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설 때 까지 중국은 험난의 역사를 겪는다.
출처;http://kin.naver.com/open100/r_entry.php?rid=17702#7
16. 아편 [阿片)
: 양귀비과의 2년생초인 양귀비(Papaver somniferum)의 즙액을 굳힌 것, 또는 이것을 가공한 것.
마약의 일종이다. 아편은 유럽 각국어인 opium의 한역(漢譯)이며, 어원은 그리스어 opos(식물즙) 및 opion(양귀비의 즙액)으로 보고 있다.
아편은 생아편·의약용 아편·흡연용 아편으로 나눈다. 생아편은 덜 익은 양귀비 열매에 상처를 내어 유출되는 유액(乳液)을 채집하여 건조시켜서 덩어리로 만든 것이다. 이것을 가루로 하여 모르핀의 함유량을 10%로 조절한 것을 '아편말'이라 하여 의약용 아편으로 쓰고 있다. 아편말은 갈색의 가루이며, 특이한 냄새가 나고 맛은 매우 쓰다. 흡연용 아편은 생아편을 물에 녹여 불용분(不溶分)을 제거한 후 증발 농축하여 엑스상(狀)으로 만든 것으로서, 특별한 곰방대를 써서 작은 램프의 불로 발연시켜 흡연한다. 아편은 주로 인도·터키·유고슬라비아·파키스탄에서 재배·제조되며, 전세계의 생산량은 약 100만kg이나 된다.
아편의 재료가 되어 중국에서는 1906년 재배를 전격 금지하였다.
출처; http://100.naver.com/100.php?id=106093
17. 아편전쟁 (1840~1842 )
: 1840∼1842년 영국과 중국 청(淸)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 중국 반식민지화의 기점이 되었다.
홍콩 식민지역사는 아편전쟁과 함께 막이 오른다. 아편전쟁은 식민지개척에 나선 서구 자본주의가 잠자는 동양 봉건 전제주의의 심장에 비수를 꽂은 일대 사건이었다. 영국과 청제국이 주연 을 맡은 이 피비린내나는 역사의 무대에서 고통스럽게 탄생한 것이 바로 식민지 홍콩이다. 연대를 따지자면 홍콩할양전에 아편전쟁이 있었고 아편전쟁전에 아편무역이 있었다. 아편무역은 청나라 강희-옹정-건륭으로 이어지는 1백30여년간의 태평성세가 끝나고 국운이 쇠퇴하는 시기와 맞물려 번성한다. 아편무역이 본격화되기 전 영국은 청과의 무역에서 상당한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영국이 생사, 견직물, 찻잎 등을 수입해갔으나 중화사상에 젖은 청은 대등한 통상 자체를 거부, 영국상품을 거의 수입하지 않았다. 무역 적자를 보전하기 위해 영국이 착안한 것이 아편수출. 18C말부터 아편수입이 본격화 돼 청의 은이 수입대금으로 대거 빠져 나가자 은본위제인 청의 경제는 뿌리 채 흔들리기 시작했다. 1806년 한해 동안 중국이 수입한 아편은 약 27만톤으로 추산되며 아편전쟁 직전인 1838년엔 1800년에 비해 10배나 늘어났다. 도광제는 극약처방을 동원한다. 당시 호광(호북-호남성)총독 임칙서(린쩌쉬)를 흠차대신에 임명, 아편유입저지 특명을 내린다. 엄정한 판관으로 이름을 날려 '임청천'이라는 별명을 얻은 '임칙서'는 열렬한 아편금지론자였으며 강직한 인물이었다. 시골 훈장 아들로 태어나 총독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청대 고관중 외국 문헌과 국제 법에 가장 밝은 사람으로 꼽혔다. 도광제는 그에게 황제의 명령권인 조칙권을 부여, 아편유입저지에 관한한 전권을 맡겼다.
임칙서가 광동성에 도착한 것은 1839년 1월25일. 도착 9일만에 그는 아편을 중간거래해온 중국인 상회에 추상같은 명령을 내린다.
"오랑캐들에게 앞으로 영원히 아편을 들여오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라. 그러지 못하면 황명으로 처형한다. "
이어 임칙서는 영국상인등이 갖고 있던 아편 1천4백25톤을 압수, 소 금물에 완전히 녹여 바다로 흘려보냈다. 보복에 나선 영국은 군동원 령을 내렸고 이듬해 6월 원정군을 실은 군함이 마카오해역에 도착했다.제 1차 아편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영국 함대는 남동부해안을 끼고 북상, 천진(톈진) 앞바다까지 와 수도 북경(베이징)을 짓밟아 버릴 기세였다. 1842년 8월29일 청조정은 결국 굴복, 굴욕적인 남경(난징)조약에 도장을 찍는다. 홍콩은 불평등 조약인 남경조약 제3조에 따라 영국에 영구 할양됐다. 1백55년 전의 일이다. 남경조약엔 아편무역에 대해 일체 언급이 없지만 영국의 아편무역은 이 조약을 계기로 '무언의 공식화'가 이루어진 셈이다. 이후 아편무역은 더욱 기승을 부려 늙은 청제국을 막다른 골 목으로 몰아넣었다. 아편무역으로 은이 유출돼 은값이 뛰자 죽어나는 것은 일반 백성들이었다. 은값이 뛴다는 것은 은시세를 기준해 동전으로 세금을 내던 백성들 에겐 실질적인 증세였다. 백성들의 생활이 피폐해지면 다음 순서는 민 란이다. 1850년 광서(광시)에서 과거 낙방생 홍수전(훙슈취안)을 중심으로 뭉친 배상제회(일종의 기독교)가 세상을 뒤바꾸겠다고 항거의 깃발을 들 었으니 이름하여 태평천국의 난이다. 임칙서는 바로 이 해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러 가다 병사했다. 아 편추방의 기치를 든 것까진 좋았으나 어느것 하나해결하지 못한채 한많은 세상을 등졌다. 급변하는 세계사의 흐름을 간파하지 못한 임칙서는 동 점하는 서세에 깔려 '압사'했지만 부국강병을 꿈꾸던 그의 치열한 정신은 강유위(캉유웨이) 등 자강파로 이어졌다. 아편전쟁은 임칙서가 죽고도 계속됐다. 영국은 1856년 애로우호사건을 빌미로 청과 제 2차 아편전쟁을 일으켜 홍콩섬위의 구룡반도 남단과 앙선주(스톤커터스 섬)를 할양받았다. 이어 1898년엔 구룡반도 북부의 신계를 99년간 조차해 '동방명주' 로 불리는 현재의 홍콩식민지 지도를 완성했다.
출처;http://kr.ks.yahoo.com/service/ques_reply/ques_view.html?dnum=AAH&qnum=1617403
18. 양무운동
:19세기 후반 군사 중심의 근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청나라 관료군(官僚群)의 운동.
봉건체제의 유지 보강을 서유럽으로부터의 근대기술 도입에서 이루려 한 청국 정부의 자강운동을 말한다. 당시 밖으로는 아편전쟁·애로호사건 등으로 해서 배외·쇄국주의가 굴복되고, 안으로는 태평천국운동으로 해서 봉건적 지배체제가 위기에 빠졌다.
이러한 사태 아래 증국번·이홍장·좌종당 등 한인 관료와 공친왕 등 궁정대관료는 근대무기의 수입·제조를 개시하고 군사공업을 일으켰다. 한편, 장즈둥·성쉬안화이·장젠 등도 관상합판사업을 크게 일으켜, 한때 청나라의 지배체제는 안정되었다.
그러나 이 자강운동은 군사중심의 근대화에만 치중하였기 때문에 사회·정치체제의 근대화는 등한시되었고, 때마침 프랑스와의 전쟁, 일본과의 전쟁에서 뼈아픈 타격을 받아 그 약체성이 노정되었다. 이리하여 구체체의 지배자는 그 자리를 무술변법운동의 지도자에 물려주었다. 그러나 이 양무운동이 중국 자본주의 발달의 싹이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출처;http://100.naver.com/100.php?id=109233
19. 와하브운동
18세기 초인 1744년에 사우디 가의 지원으로 일어난 복고주의운동으로 초기 한발리 학파와 14세기 이븐 타이미야(Ibn Taymiya)의 반수피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이 운동은 이븐 아브드 알-와하브(Ibn Abd al-Wahhab)가 창시했다. 즉, 와하브는 '디라이야'(Diraaiya)의 소국(小國) 네즈드(중앙 아라비아)의 지도자 무함마드 빈 사우드(Mohammed bin Saud)와 함께 은신처를 마련하였다. 동시에 그들은 광범위한 아라비아반도를 지배하기 위한 장래 사우드家의 군사활동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사우디 왕가 합법성의 초석이 되고 있는 정통 와하비즘(Wahabism)의 강력한 종교적 권위를 수립한 아라비아 반도를 가로질러 개종을 선언하였다.
그는 무함메드와 쿠란의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고, 마호메트 사후 메디나 공동체에서 결정된 사항만 제외하고 ijma를 통해 결정된 모든 수정적 요소를 거부했다. 수피주의를 혐오했으며, 부족간 갈등을 저주하고, 술,담배를 금지했으며, 무슬림의 평등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무덤이나 모스크 예배의식에서 수피의 요소를 배격했고 성인숭배도 다신교로 간주하여 배격했다. 집과 의복을 간소화했고, 농담, 음악, 금 장식등도 금지했을 뿐만 아니라 장기 같은 게임도 금지시켰다. 와하비 운동은 북아프리카,인도,동부인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와하브 운동은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왕국의 설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당시 네즈드(Nejd)의 대부분 지역은 1765년 모함마드 빈 사우드의 사망시까지 사우드의 지배하에 있었다. 압델-와하브가 1792년 사망함으로써 이러한 지배는 남부에서 루브 알-칼리(Rub al-Khali)로 확대되었다. 또한 오늘날 동부지역인 하싸(Al-Hasa)는 18세기말에 합병되었다. 19세기초 사우디 군대는 성지인 멕카(Makka, 1801), 메디나(Madinah, 1805) 및 거대한 헤자즈(Hejaz)의 지배권을 획득하였다. 성지(聖地)의 탈환은 즉각 오스만 제국의 반발을 유도하였고, 1814년 오스만 정부는 그의 이집트 군대에게 사우디의 지배로부터 성지를 해방시키라는 권한을 위임하였다. 이로 인하여 1818년까지 사우디는 아라비아 반도의 대부분 영토를 잃었으며, 그 자신의 수도 '디라이야'도 폐쇄되었다. 사우드家의 간헐적인 봉기가 화이잘 빈 투르키(Faisal bin Turki)의 지휘하에 19세기 중반 시도되었지만, 오스만 정부가 경쟁자인 하일(Hail) 지역의 알-라쉬드(Al-Rashid) 부족을 지원하였기에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사우드는 네즈드로 부터 추방되어 쿠웨이트에 일시적인 거처를 마련하였다.
출처;http://kin.naver.com/open100/entry.php?eid=LLfpSLiBhuCZA88o3dIwL1aHgn7SPQBa
20. 의화단운동 (1900~1901)
1900년 중국농민들이 일으킨 운동으로 산동지역에서 일어나 전국으로 확대됩니다. '부청멸양' 중국을 도와 서양을 멸한다는 것을 구호로 내세웠습니다. 이들은 도처에 교회와 서양세력을 공격하였습니다. 이들의 서슬퍼런 기세에 놀란 서양세력은 영국, 미국,일본, 프랑스, 오스트리아, 독일, 러시아,이탈리아의 8국 연합군을 구성하여 반격하였고 북경, 천진등에서 야만스런 도살을 자행하였습니다.
그 결과 신축조약이 체결되는데, 내용은 외국군대 주둔과 막대한 배상금 요구를 담고 있습니다. 결국 중국은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게 됩니다.
출처;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1id=11&dir_id=110107&eid=TCSIyaxrrCKR7gluHsvBJ10gYy2CnU4%2B
21. 장 제스[蔣介石(장개석), 1887.10.31~1975.4.5]
본명 중정. 저장성 펑화현에서 출생하였다. 1906년 바오딩군관학교에 입학하고 다음해 일본에 유학하였다. 그 무렵 중국혁명동맹회에 가입하고 1911년 신해혁명에 참가하였다. 1918년 쑨원의 휘하에 들어가 주로 군사면에서 활약하고 1923년 소련을 방문, 적군에 대해 연구하였다. 1924년 황푸군관학교 교장, 1926년 국민혁명군 총사령에 취임하여 북벌을 개시하였다.
1927년 상하이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을 탄압하였으며 1928년 베이징을 점령하였다. 난징 국민정부 주석과 육·해·공군 총사령이 되어 당과 정부의 지배권을 확립하였으며, 한편으로는 광둥·광시의 군벌들과 펑위샹·옌시산 등 지방군벌을 누르고, 1930년부터는 5회에 걸쳐 대규모 중국공산당 포위전을 수행하였다. 또한 만주사변 후 일본의 침공에 대해서는 '우선 내정을 안정시키고 후에 외적을 물리친다'는 방침을 세워 군벌을 이용, 오로지 국내통일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내전정지 일치항일'을 외치는 여론이 높아진 가운데 1936년 독전을 위하여 시안에 갔다가 장쉐량 군대에 감금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1937년 국공합작으로 육·해·공군 총사령관의 책임을 맡고 전면적인 항일전을 개시하였다. 항일전쟁 중에는 국민정부 주석, 국민당 총재, 군사위원회 주석, 육·해·공군 대원수 등의 요직을 겸직하여 최고권력자로 군림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1946년 다시 중국공산당과 결별하고 내전을 개시하였다. 처음에는 우세하였으나 1949년 12월 완전히 패퇴하여 본토로부터 타이완으로 정부를 옮겨 미국과의 유대를 더욱 강화하고, '자유중국' '대륙반공'을 제창하며 중화민국 총통과 국민당 총재로서 타이완을 지배하였다. 저서에 《장중정전집(蔣中正全集)》(상·하권) 《장총통언론휘편(蔣總統言論彙編)》(24권) 등이 있다. 195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한민국의 독립을 지원한 공로가 인정되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출처;http://100.naver.com/100.php?where=100&id=133248
22. 제1차 국공합작
제1차 국공합작은 1921년 7월 탄생한 중국 공산당은 그 해 제1기 전국대표대회 직후 제국주의와 군벌을 타도하고‘민족혁명’을 성취할 목적으로 국민당과의 합작을 결정하였다. 이는 1920년 레닌이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서 ‘민족 및 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를 발표, 식민지 해방투쟁에서 부르주아의 역할을 중요시한 데 따른 것으로서 1920년경부터 반제(反帝) ·반봉건의 입장을 취해 오던 국민당도 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1923년 쑨원-요페선언을 거쳐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의 공식적인 연합전선이 형성되었다. 이에 따라 국민당은 1924년 제1기 전국대표대회에서‘연소(聯蘇) ·용공(容共) ·농공부조(農工扶助)’의 3대 정책을 채택함으로써 국공합작이 발족되었으며, 공산당원은 그 당적을 보유한 채 개인의 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하는 형식을 취하여 리다자오[李大釗] 등 3명이 중앙집행위원에, 마오쩌둥[毛澤東] 등 4명이 중앙집행위원 후보에 선출되었다. 이에 힘입어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 급속히 발전하였으며, 1927년 우한[武漢]에 혁명정권이 수립되기까지 하였는데, 이와 같은 좌파의 영향력 확대를 두려워한 장제스[蔣介石]는 1927년 4월 상하이[上海]에서 반공 우파 쿠데타를 감행함으로써 국공합작은 결렬되고 공산당은 불법화되었다. 이러한 패배에 큰 타격을 입은 중국공산당은 토지혁명을 추진함으로써 농촌지역에서의 세력확장에 주력하였으며, 마오쩌둥[毛澤東]을 지도자로 하는 장시성[江西省]의 ‘중화소비에트’를 성립시켜 난징[南京]정부에 대항하였다. 이에 따라 10년간에 걸친 국공내전이 전개되었다.
출처; http://100.naver.com/100.php?id=731911
23. 제1차세계대전
영국과 프러시아는 프랑스 황제인 나폴레옹을 워털루(Wateroo)에서 물리친 1815년 이래로 1914년까지 유럽에는 별다른 다툼이 없었다. 그 세월동안 자기 나라의 우월성을 외치며 군 사적 능력을 시험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차츰 국수주의적 조짐이 나타나고, 여러 왕실국가 사이의 오래던 적개심이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불행하게도 유럽에서 시작된 제2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기술의 발전은 전쟁의 본질마저도 바꾸어 놓았다. 기관총과 장거리 대포, 철조망의 발명으로 기마병은 그리스 시대의 보병 만 큼이나, 총검 로마시대의 단검 만큼이나 쓸모없게 되어 버렸다. 새로 개발된 무기들은 소규 모의 공격에도 엄청난 실상을 입힐 정도로 파괴력을 지닌 것이었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일찌기 현대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군비 경쟁이 여러 주요 국 가에서 시작되었다. 이제 전쟁에서의 승리는 단지 전투에서의 무용과 사기가 아닌 그들 나라가 생산할 수 있는 군수 물자와 전함의 수에 의해서 결정되게 되었다. 마침내 한 암살자의 총알 몇 발로 전 유럽을 전화속으로 몰고갈 제1차 세계대전이 불이 붙다. 독일의 남쪽에 있는 동맹국인 오스트리아, 헝가리 연합(Austria-Hungary)과 발칸반도의 소국 인 세르비아(Serbia)가 장기간의 전쟁에 돌입하려하는 시점에 있었다. 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의 한 민족주의자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의 왕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디 (Franz Ferdinand) 대공을 암살하였다(사라예보사건). 이 사건에 대해 오스트리아는 암살의 배후세력으로 세 르비아를 단정하고, 비난을 퍼부었다. 그 해 7월 말에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게 무리한 사 과와 양보의 최후 통첩을 보냈다. 이에 세르비아는 그들의 요구를 대부분 들어주겠다고 했지만,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를 침략하는 전쟁의 길을 택했다. 오래 전부터 발칸반도 슬라브 국가들의 맹주였던 러시아는 오스트리아가 침공하자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 돌입했으며, 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인 독일도 러시아와 프랑스에 대항해 군사를 동원하기 시작했다. 1914년 8월 4일에는 독일이 중립국인 벨기에를 침략하자, 영국이 독일에 대항하여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렇게 해서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출처;http://kin.naver.com/open100/entry.php?eid=KqlZMTC2mmtZBryjO%2F%2FvkfKQthTQT5ue
24. 제2차세계대전
온건 우익인 영국,프랑스의 경고를 무시한 히틀러의 독일 나찌스 3제국 이하 괴링,괴멜스 등의 극우파 군대는 1939년 9얼 1일 전격적으로 폴란드의 회랑 지방으로 침공한다.
이에 영, 불은 선전 포고를 하였으나 서부 전선에서는 침묵만이 감돌 뿐 조용하다가 돌연 히틀러의 대대적 서부 전선 진격에서 영불 연합군이 괴멸당하고 철벽이라 여기던 마지노선이 괴멸당한 후 됭케르크 철퇴를 하게 된다. 뒤이어 독일군은 파리를 점령하고 베네룩스 3국을 접수하여 임시 정부인 비시 정권을 세운다. 허수아비 독일 협력 정권의 국가 수반으로는 1차 대전의 영웅인 페탱을 앉히고 서유럽을 지휘한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영국의 전시 내각 총리인 처칠은 미국의 대통령인 루우스벨트에게 조건 없는 참전을 요구한다. 그러나 미국의 의회가 자국의 이익이 하나도 없는 무의미한 참전에 제동을 걸었으나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도화선이 되었다. 당시 미 해군력의 40%를 보유한 진주만의 궤멸은 충격 그 이상이었다.
일본은 중일 전쟁 중에도 연전 연승을 거듭,당시 영국 식민지령이던 구버어마,말레이시아,싱가포르,브루네이,홍콩을 정복했고 또 프랑스령이던 인도차이나 반도의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를 점령했으며,심지어는 미국령이던 하와이 제도,필리핀을 탈취했고 태평양의 대양주를 석권했으나 전쟁이 장기전으로 치달았다.
점점,인적,물적으로 자원이 딸려 전쟁 수행이 어렵게 되자 만주 관동군의 대규모 동원과 조선을 수탈,인도에까지 전선을 확대,멸망의 지름길로 달려가고 있었다. 다음에 히틀러는 북유럽인 덴마아크 스웨덴, 노르웨이를 무력 점령하고, 연이어 동맹국측인 헝가리까지 점령했고,유고,그리이스,루마니아,불가리아를 점령,구소련과 영국,이리,스페인을제외한을 전 유럽이 그의 정복욕의 희생의 제물이 될 판이었다.
허나 일본으로 인해 미국이 참전하게 되고, 대전 발발전 맺어 세계를 놀라게 했던 극좌와 극우의 독소 불가침 조약을 깨뜨리고 구소련에 전격전을 지시한 히틀러에 의해 미국이 참전, 새로운 양상으로 치달았다.
미국은 초기의 관망적 태도를 버리고 영국 및 구소련에 무제한적으로 무보상의 전폭적 무기 지원과 조건을 제시하여 여러 식민지인의 협조하에 점점 북아프리카 전선의 승리를 필두로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착실한 성공과 미드웨이 해전의 승리를 시작으로 승리의 기운이 맴돌았다.
이후 구소련의 동부전선 진입과 점령지인들의 빨치산 유격 활동 및 미영불군의 서부 전선 맹공으로 히틀러는 자살,서부 전선은 끝이 났고, 좀처럼 일본이 항전 자세를 굽히지 않자 관동군의 대대적 병력 동원에 의구심을 품은 루스벨트는 영불소련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국 군대의 희생을 줄이려고 무시무시한 원자폭탄을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투하 종전됐다.
출처;http://kin.naver.com/open100/entry.php?eid=t08IKyXQXCSwUp%2ByNOUSphbCF39SSOhG
25. 제3세계
이 용어는 중국이 대소(對蘇) 긴장격화에 따라 국제정세 인식에 변화를 겪으면서, 1960년대 말부터 사용되었다. 이 구분에 의하면 전세계는 경제적으로 발전된 미국과 서유럽 등의 선진자본주의 국가가 제1세계, 여기에 맞서온 사회주의 국가가 제2세계, 양쪽 모두에 포함되지 않는 국가들이 제3세계로 규정된다. 이와 같은 국제정치적 기준은 소련 및 동유럽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퇴색하고 있다. 제3세계를 경제발전에 따라 구분한다면,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자연스럽게 발전한 구미자본주의 국가와 일본이 제1세계가 되고, 사회주의노선에 따라 산업화를 이룬 소련과 동유럽블록이 제2세계이며, 제1세계와 제2세계로부터 자본과 기술 및 이데올로기를 도입하여 산업화를 추진하고 있는 국가들이 제3세계이다. 흔히 제3세계로 부르는 국가들은 지역적으로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등지에 편중되어 있다.
선진국과 제3세계 사람들의 삶의 질과 수준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간격을 보인다. 제3세계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빈곤의 원인을 제3세계 자체에서 구하거나, 아니면 외부세계, 즉 제국주의적 국제관계의 산물로 본다. 첫번째 주장은 제3세계의 국내적 상황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높은 인구밀도, 낮은 농업생산성, 적대적인 사회계급과 격심한 부의 불균등배분, 분절적 사회문화, 그리고 정치엘리트의 무능력과 파당성을 빈곤의 원인으로 지적한다. 두번째 입장은 오늘의 강대국이 제3세계를 유린 ·약탈했기 때문에 강대국은 경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지만 그 반대로 제3세계는 빈곤과 저발전의 악순환을 거듭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논리를 통상 ‘종속이론’이라고 부른다.
출처; http://100.naver.com/100.php?id=137580
26. 청년투르크당
정식 호칭은 ‘통일진보위원회(Ittihat ve Terakki Cemiyeti)’이다. 19세기 중엽부터 문학운동 등을 통해 사회개혁이 추진되고 있었고, 1876년에는 파샤가 헌법제정에 성공했다. 그러나 술탄은 터키-러시아전쟁(1877~78)을 이유로 내세워 헌법을 정지시켰다. 이에 헌법을 부활시키고 전제정치를 폐지키 위해 처음에는 비밀결사로 발족하여 단기간에 사관학교 ·기술학교의 장교 ·교사 ·학생 ·정부 직원들 중에서 많은 동조자를 얻어냈다. 그러나 당 지도부 중에서 추방자와 처형자가 나왔기 때문에 일부는 카이로 ·나폴리 ·런던 등으로 망명, 국외에서 활동을 계속하였다.
20세기에 들어와 청년장교층이 혁명세력의 지주가 되기에 이르자 당세는 신장되어, 1908년 살로니카에서 혁명을 일으켜 입헌정치를 선언한 뒤, 다음해 정권을 장악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 독일 ·오스트리아측에 가담한 것도 당의 실력자 엔베르 파샤, 탈라트 파샤, 아메드 제말 파샤 등의 획책에 따른 것이며, 패전 후 그들이 국외로 탈출했기 때문에 자연히 해산되고 말았다.
출처;http://100.naver.com/100.php?id=146367
27. 청·일전쟁 (1894~1895)
:1894∼1895년 사이에 청(淸)나라와 일본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다툰 전쟁.
이로 인하여 일본의 중국에 대한 본격적인 분할이 시작되었으며, 동아시아에 제국주의 시대의 막이 열렸다. 일본은 1876년 조선과의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이 자주국임을 인정하고 다음해 부산에 거류지를 설정, 곡물의 매점과 무관세 특권으로 공산품을 수출하며 조선에 진출하였다. 82년 최초의 반일운동인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일본은 제물포조약을 체결하여 주병권을 장악하고, 84년에는 김옥균·박영효 등 개화파를 후원,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오히려 청의 종주권이 강화되었다. 청의 식민지적 지배와 일본 상업자본의 진출, 조선왕조의 압제 등에 시달려온 농민들과 동학 교도들이 봉기하여, 1894년 5월에 전주를 점령하자 조선왕조는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조선에서 청 ·일 양국의 세력균형을 요구하던 일본 정부는 6월 초에 출병을 결정하였다.
서울에 주병한 일본은 조선 내정의 청 ·일 공동개혁을 요구하였으나, 이것이 거부되자 일본의 단독개혁을 요구하였다. 때마침 진행 중이던 영국과의 조약 개정을 성공시킨 일본은, 조선이 청에 대한 복속관계의 파기와 청국군의 철병을 거절하자 조선 정부를 무력으로 억압하고, 7월 25일 풍도 앞바다의 해전과 29일 성환 육전에서 청국군을 격파하였다. 8월 1일의 개전 후 9월에는 평양 육전과 황해 해전에서 우세를 확보한 일본은 랴오둥반도의 탈취 계략을 세우고, 10월에 청국 영토에 진격하여 뤼순학살사건을 일으킨 후 봉천 남부를 제압, 이어서 웨이하이웨이 군항에서 북양함대를 격멸함과 동시에 타이완 점령을 위하여 펑후섬 작전을 벌였다. 일본군에게 연전연패한 청국은 95년 3월 강화 전권대사 이홍장을 파견하여 30일에 휴전, 4월 17일 시모노세키에서 강화조약에 조인하였다. 일본은 ① 조선에서의 청국의 종주권 파기, ② 랴오둥반도와 타이완 ·펑후섬의 할양, ③ 배상금 2억 냥 지불, ④ 열국과 동일 특권을 인정하는 통상조약의 체결 등을 얻었으나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3국 간섭 앞에 무릎을 꿇고 랴오둥반도는 반환되었다. 타이완 민중은 일본에의 할양을 거부하며 저항하였는데, 일본은 고전 끝에 11월에 이를 진압하였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이미 끝낸상태였고 청나라는 그에비해 근대화가 늦었던상태였기 때문에 일본이 쉽게 이길수 있었다.
출처;http://100.naver.com/100.php?id=146728
28.탄지마트(은혜개혁) 1839~1876
탄지마트는 19세기 중엽에 오스만 제국에서 광범위 하게 추진한 근대적 개혁을 말한다.
오스만 제국은 서양 세력의 침입에 대처하여, 압둘 메즈드(1839∼1861) 때부터 '탄지마트(1839∼1876)'라는 개혁을 단행하였다. 즉 황제 중심의 이슬람 정신을 강조하고 조세 제도의 개혁, 오스만 은행의 설립, 민족적·종교적인 차별의 철폐 등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구세력의 반대와 재정난 및 열강의 내정 간섭 때문에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크림전쟁(1853∼1856)이 일어나자 영국과 프랑스의 보호를 받았는데, 오스만 제국에 반대하는 열강의 간섭이 심하였다. 그러자 국내에서 개혁을 요구하는 기운이 다시 고조되어, 자유주의적 정치가인 미드하트 파샤(1822∼1883)의 주도로 근대적 헌법이 제정되고(1876), 국휘의 개설과 책임 내각제, 언론의 자유 등이 인정되었다. 그러나 이 헌법은 러시아·투르크 전쟁(1877∼1878)으로 정지됨으로써 개혁은 좌절되고 제국은 점차 해체되어 갔다.
이에 민족주의 단체인 청년 투르크 당이 결성되어 전제 정치에 반대하고 입헌 정치를 추진하였다. 청년 투르크 당은 1908년, 무장 봉기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헌법을 부활시켰으나, 극단적인 투르크주의 때문에 아라비아의 민족주의와 대립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때에는 동맹국 측에 가담하였다가 패한 후, 소멸되었다.
출처; http://blog.naver.com/fallinhosuk/140010847574
29.태평천국운동(1851~1864 )
: 청(淸)나라 말기 홍수전(洪秀全)과 농민반란군이 세워 14년간 존속한 국가(1851∼1864).
태평천국이 일어나기 전에, 아편전쟁이 막을 내리고 그 후부터 영국은 공공연히 아편을 가지고 와서 중국에 팔았습니다. 청나라에서는 날이 갈수록 아편 중독자들이 늘어났고, 청나라의 은은 영국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또한 백성들은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었으며, 청나라는 날이 갈수록 힘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청나라 사회에서는 아편에 중독되었으나 돈이 없어 아편을 구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끊이지를 않았습니다.
이런 광경을 바라보던 홍수전이라는 사람은 하루빨리 과거에 합격하여 관리가 되어 백성들을 구제하고 나라를 발전시키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홍수전이라는 사람이 바로 태평천국 운동을 일으킨 운명입니다. 그는 이 당시, 관리가 되기 위해 서당의 서생으로 있으면서 과거시험의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에게 한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 관리가 되어 출세를 한다고 해도 청나라를 구할 수 없을것이라며 어지러운 세상을 올바른 세상으로 돌이킬 사람은 상제(여호와)밖에 없다고 하면서 책을 한권 주었습니다.
그 책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상제(여호와)를 유일한 신으로 섬긴다면 이 세상은 천국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 책을 읽은 홍수전은 이 가르침을 그대로 실행하면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며 하나님이 자신에게 세상을 바로잡으라고 계시를 내린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리하여 1850년, '상제회'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태평천국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이 '상제회'는 크리스트교적 성격을 띈 비밀 종교 결사로, 광시 성 산간 지대에 사는 이주민 출신이 주축이 되어 있었습니다.
태평천국에서는 남녀가 평등하며 신분이 높은사람과 낮은 사람,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차별이 없었으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반겼습니다.
또한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었으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었으므로 많은 농민들에게 환영을 받았습니다.
농민들은 아편전쟁 이후 무거운 세금에 시달려 왔기 때문에 앞다투어 태평천국 운동에 가담했습니다.
나날이 갈수록 태평천국의 세력은 커져가고,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황제는 결국 진압군을 보냅니다.
물론 태평천국군은 농민들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그들은 물러서지 않고 당당히 싸웠습니다.
진압군이 가까이 오자 봉화를 올려 동료들에게 알렸으며, 진압군이 골짜기에 완전히 들어서자 일제히 총을 쏘고, 둘멩이를 굴려 떨어뜨려 진압군에 승리를 거둡니다.
이 승리로 태평천국의 세력이 더더욱 커지자, 홍수전은 청을 무너뜨리고 태평천국을 건설하겠다며 진톈춘에서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홍수전은 1만 5천의 군대를 이끌고 중국의 중용한 도시중의 하나인 난징으로 출발했습니다.
1852년 말에 태평천국군은 우한을 점령했으며, 여자들과 군인들까지 가세하여 태평천국군이 후난성에 들어갈 무렵에는 5만명으로 늘어났고, 창사를 포위했을때에는 10만명, 그리고 우한을 점령한 후인 1853년 1월에는 50만명으로 그 수가 기하학적으로 증가했습니다.
태평천국군은 우한까지 점령한 후, 본격적으로 난징을 점령하기 위해 양쯔강을 타고 내려와 난징으로 향했습니다.
난징은 청나라 제 2의 도시라고 할 만큼 중요한 곳이였기 때문에, 청나라 조정에서는 태평천국군을 진압하기 위해 황제군을 난징으로 보냈습니다.
하지만, 황제군은 태평천국군을 당할 수 없었습니다.
황제군은 태평천국군에 몰려 도망쳤으며, 태평천국군은 궁 안으로 들어가 1853년 3월, 난징을 점령했습니다.
이때 난징을 공략하는 태평천국군은 남자는 180만, 여군은 30만이였다고 합니다. 태평천국군은 난징을 점령한 후, 난징의 이름을 '천경'이라고 고치고 태평천국의 수도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홍수전은 '천왕'이라고 불리었으며 태평천국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토지를 골고루 나누어 주었고, 남자의 변발과 여자의 전족을 금지했으며, 아편과 도박, 술과 담배도 금지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태평천국의 성격은 사회주의적인 성격을 띈 면이 있다고 볼 수 있겠죠.
술과 담배까지 금지한데 대해 불만이 곳곳에서 터져나오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평천국군은 다시 난징에서 양쯔강을 타고 올라와 수많은 청나라의 도시를 점령했습니다.
태평천국군은 청 황제가 있는 베이징을 목표로 하여 톈진으로 진격했습니다.
그 말이 전해지자 베이징의 궁전에서는 쓸모없어진 청나라 군대 대신에 증국번과 이홍장의 의용군에게 태평천국군을 진압하도록 합니다.
이 증국번과 이홍장의 군대는 청나라 군대보다 훨씬 강한 군대였습니다.
태평천국군과 의용군은 톈진에서 맞붙었는데요
태평천국군은 이 톈진에서 이홍장과 증국번의 군대에 패하고 맙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태평천국은 양쯔강 일대의 넓은 영토를 지배했으며, 세력은 전성기에 300만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청나라 조정은 태평천국의 세력을 꺾기에는 힘이 부족해 손도 쓰지 못했습니다.
청나라가 베이징조약과 톈진조약으로 큰 손해를 보았을 때 , 홍수전은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외국의 세력을 중국 내에서 몰아내려고 합니다.
그러자 청나라와 영국, 프랑스의 군대는 함께 태평천국을 무찌르기로 합니다.
진압군은 증국번과 이홍장의 의용군과영국의 고든장군이 이끄는 상승군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들은 태평천국의 수도인 천경(난징)을 공격합니다.
태평천국군은 비장한 각오로 압도적으로 강한 적과 싸웠으나, 영국의 위력적인 신식 뭄기들과 의용군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태평천국군은 전투가 불리해져 거의 전멸상태에 다다르자 성 안으로 도망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과하고 적은 계속해서 공격을 가해 태평천국군은 대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1864년 6월 태평천국 운동을 일으켰으며 천왕으로 불렸던 홍수전 또한 전투로 인해 폐허가 된 난징에서 자살하여 태평천국은 14년만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출처;http://kin.naver.com/open100/entry.php?eid=u23xRgn9JWFAwOnOLDD7VnrTNchv8nXr
30. 플라시전투
벵골 태수 웃다울라는 영국 동인도회사와 그 직원의 밀무역이 벵골의 경제에 커다란 타격을 주고 있다고 항의하고, 영국인들을 캘커타시(市)에서 추방하여 양군은 충돌하게 되었다. 클라이브가 이끄는 영국군과 소수의 프랑스군을 포함하는 태수군은 6월 캘커타 북서방의 플라시에서 결전을 하였다. 병력은 태수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였으나, 부장(部將)들이 영국측에 매수되었기 때문에 참패를 당하고, 태수 자신도 배신한 미르 자파르의 아들에 잡혀 처형당하였다. 전후 미르 자파르가 벵골의 태수가 되었으나 그는 영국의 괴뢰에 지나지 않았고, 이로써 영국은 벵골의 지배권을 확립하고 인도 전토의 식민지화를 위한 침략의 교두보로 삼았다.
출처;http://100.naver.com/100.php?id=183910
31. 3.1운동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이라고도 한다. 1910년 이래 한국은 일본의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통치하에 놓여 있었는데,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한민족의 항일독립투쟁은 각지에 의병(義兵)을 낳고 널리 민족계몽운동으로 발전하여 갔다. 일본은 이와 같은 민족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헌병경찰제도를 실시하여 항일독립운동 투사들을 학살 ·투옥하고, 일체의 결사(結社)와 언론활동을 금지하였다. 교육정책에 있어서도, 우민정책을 실시하여 민족의식의 성장을 억누르고, 고도의 기술을 습득할 기회를 박탈하였다.
이러한 무단정치는 한국의 고유문화를 말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토지 ·광산 ·철도 ·금융 등 모든 분야의 이권을 독점 경영하였으며, 한민족의 경제발전마저 극도로 제한하였다. 한국의 지도자들은 해외로 망명하고, 특히 무력투쟁으로 혹은 외교활동을 통하여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한 선두에 섰다. 한편 국내의 대다수 농민들은 소작농(小作農) ·화전민(火田民) 등으로 전락하였으며, 생활난으로 인하여 만주(滿洲) 등지로 유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일본의 폭압(暴壓)은 지식인 ·학생 ·종교인뿐만 아니라, 농민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민의 반일감정(反日感情)을 불러일으켰다. 한국이 일본의 무단정치를 겪고 있을 무렵, 1914년에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전으로 끝나고, 1918년 1월 미국대통령 윌슨은 14개조로 된 전후(戰後) 처리원칙을 파리 강화회의(講和會議)에 제출하였는데, 그 가운데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 스스로 결정한다’고 하는, 민족자결(民族自決)의 원칙을 제창하였다. 이것은 세계의 피압박민족에 대한 자극제가 되었다. 이 민족자결주의의 새로운 원칙은 항일투쟁을 계속해오고 있던 독립운동가들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조류 속에서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高宗皇帝)가 갑자기 승하(昇遐)하게 되자 일본인들에 의한 독살설(毒殺說)이 유포되어 한민족의 일본에 대한 증오는 극도에 달하였다. 해외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 중에도 활동해왔으나 1917년 스톡홀름의 만국사회당대회(萬國社會黨大會)와 뉴욕의 세계약소민족회의 등에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국제여론에 호소하였다.
출처;http://kin.naver.com/open100/entry.php?eid=DdPtGU%2F%2FcUXspPe%2FNQ4et2UoapFM%2Bhpo
첫댓글 뭐야 -_-
숙제다...
이딴거 어떤 xx가 다읽냐 ㅋ ㅋ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