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올림픽공원 컨벤션센터에서 ‘전국감리교지도자 교권수호 비상기도회’가 열렸다. 전.현직 감독과 감리사, 평신도지도자 500여명이 참석한 이번 기도회에서 박충구 교수가 특강을 통해 감리회 사태를 기독교윤리학자의 입장에서 조명하며 문제를 진단하고 해법을 제시했다. 박 교수의 특강 요약문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법정에 넘겨진 감리교회
우리 감리교인들은 고통스럽다. 교회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지키지 못한 것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다. 감리교회에 대한 긍지를 교단 정치가들이 능멸하는 현장을 목도하면서, 세속적인 판사들의 판단에 우왕좌왕하며 一喜一悲 하는 기회주의적인 교단 정치가들을 바라보기가 민망하다. 우리의 어린 자녀들에게, 중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복음을 위하여 일생을 헌신하려 각오하고 신학의 길을 걷는 신학도들 앞에서 명분 없이 이전투구하고 있는 이 부끄러운 현실을 어떻게 해명할 수 있을까?
이 글은 특정한 사람을 지지하기 위하여 쓴 것이 아니라 감리교 감독회장 선거 과정에서 무엇이 잘못되어 이런 혼란에 우리가 빠졌는지를 성찰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번 사태의 본질은 감리교회의 자율적인 대표를 뽑는 과정과 절차에서 교단 정치가들이 교리와 장정에 의하여 구성된 기관의 판단범주를 버리고, 사회법정의 판결을 수단으로 삼아 이용함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데에서 발생했다. 이런 의도와 자세는 교회의 권위를 사회법정 아래 내려놓는 결과를 초래했고, 사회법정의 단편적 판단에 따라 교회의 기능이 정지되고, 감리교의 통일성과 정체성에 혼란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교회의 판단에 내재될 수밖에 없는 신앙과 교리, 도덕신학의 문제는 사회법정이 판단할 수 없다. 사회법 시비는 결국 교회를 다각도로 분절(分節)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여 사건을 벌인 이나 이 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이의 의도가 모두 부정이 되고, 사회법의 부분적 판단으로 인하여 교회가 찢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이제 감리교회는 감독선거를 치렀으나 감리교회가 뽑은 대표가 증발한 자리로 전락했고, 공교회의 실질적인 자율권을 상실하고 법정의 지시에 따라야 하는 자리로 전락했다. 법정의 지시구조를 벗어나려면 우리는 사심 없이 그리고 신속히 감리교회의 중의(衆意)를 찾아야 한다. 현재 이 감리교회의 합의는 총대들의 판단에 달려있다. 그러나 이 합의구조를 자파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하는 교단정치가들이 닫아 놓고 있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개신교회의 도덕신학적 원칙
감리교인에게 있어서 “신앙 공동체로서의 기독교 대한 감리교회의 법”은 국가의 기본법인 헌법을 비롯한 법체계에 상위한다. 감리교 교리장정이 단순 우월하다는 것이 아니라 공교회(公敎會)로서의 감리교회의 교리와 장정은 “대한민국의 국가이념을 보수하고 대한민국 국민들의 안녕과 복지와 평화를 지키는 대한민국의 법”보다 더 넓고 보편적인 가치를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교리와 장정은 전 인류를 향하여 주어진 복음,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 교회를 치리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기 때문에 지엽적인 이해관계나 정치적 써클이나, 국가주의나 민족주의는 물론, 파당적 목적에 지배를 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런 목적에 이용당해도 안 되고 이용해서도 안 된다.
전통적으로 개신 교회는 폭력적인 방법을 이용하는 교회의 치리를 거부해 왔다. 기독교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이단을 처형하기 위하여 모진 고문을 가하고 마침내 화형을 집행하곤 했던 교회의 악법은 이미 오래 전에 그 자취를 감추었다. 현대 국가의 법은 물론 교회법에서도 인간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폭력적이거나 권위주의적인 제제 방식을 수용하지 않는다. 전근대 사회에서 빈번했던 인간의 몸을 인두로 지져 낙인을 찍거나, 팔다리를 절단하는 등 고문을 정당화하며 신체형을 가하는 오래된 악습은 오늘날 거의 사라지고 있다. 사회의 질서와 평화를 깬 이들의 죄에 대하여 죄의 경중을 묻지 않고 일반화하여 ”비인간적으로 낙인찍고 처벌“하는 구습은 문명화된 사회에서 거의 사라진 것이다.
과거의 교회는 권력과 교권의 위세를 부리며 군림하던 교회였지만, 오늘날의 교회는 신자들에게 권력과 권위와 위세를 부리는 교권을 용납하지 않는다. 비록 범과가 있어서 출교 당했다 할지라도 당사자가 진정으로 잘못을 회개하고 자복하며 돌아오면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차별 없이” 받아주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교회의 법은 차별보다는 평등을 옹호하며, 권력에 의한 폭력성을 철저히 배제하고 있다.
문명화된 사회의 헌법은 인간의 기본권을 수호하는 것을 국가의 국민에 대한 의무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차별과 배제의 논리를 최대한 거절하고 있다. 차별과 배제의 논리가 강화되면 불평등을 야기하고, 불평등이 야기되면 어느 한편이 사회, 정치, 경제적 불이익에 직면하는 고통을 겪기 때문이다. 이 고통은 인간의 존엄성을 손상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인권법의 유산을 수용하고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는 원칙에 근거해서 교회 안과 밖에서 일어나는 권력의 남용과 오용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는 당연히 인권옹호의 보루가 되어야 하고, 더구나 폭력과 차별을 수용하는 방법으로 교회를 치리해서는 안 된다. 이런 제반 이해를 바르게 하기 위하여 결국 교회를 치리하는 데에는 교리적으로는 신학의 역할이 중차대하고, 사회문제에 대한 적절한 해명과 합의를 찾기 위해서는 교회의 오랜 전통에서 이어받은 기독교 사회 윤리학적 통찰이 요구된다.
그러나 신학과 기독교 윤리학적인 기준을 적용함에 있어서 개신교는 유대교와 같은 율법주의적 전통을 이어받지 않는다. 율법주의적 전통은 도덕성의 범주를 공식화하여 “판단하는 자와 판단을 받는 자간에 도덕적 우월성과 열등성을 전제”하기 때문에 기독교 인간학의 평등의 정신에 위배되어 위선적이다. 성서에서 보복의 법을 가르쳐온 율법사들과는 달리 무한한 사랑의 법을 가르치신 예수와 간음한 여인을 돌려 치라는 율법을 예수가 거부한 것을 상기하면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개신교의 신학적 전통은 인간이해에 있어서 가톨릭교회가 가진 성인(聖人)의 개념, 곧 “성덕을 갖춘 인간”이라는 우상숭배적인 태도를 버렸다. 덕의 실천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인간됨의 근본을 “하나님 앞에서의 죄인”이라는 기본적인 이해에서 개신교 신학이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신교 신앙 공동체의 과제는 “죄인들이 겸허하게 하나님의 뜻을 찾아 실천하는 데” 온갖 역량을 집중하게 된다.
죄나 오류가 없는 인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감독도, 감리사도, 목사도, 장로나 권사도 집사나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겸허하게 하나님의 뜻을 준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주의적 비난은 기독교 신앙 공동체 안에서 정당한 것으로 수용되기 어렵다. 다만 죄의 극소화(極小化)를 위하여 우리의 신앙과 인격을 동원하고, 이성적이며 합리적 설득과 이해를 통해 교회 안에서 최대의 합의(consensus)를 이끌어내는 민주적 방식만이 최상의 수단인 것이다.
“죄인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방법”에 있어서 이런 “최대의 합의”를 거절하거나 부인하는 태도는 결과적으로 교회를 파괴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교회만이 아니라 민주화된 사회는 이런 합의의 기초로서 기본가치들(basic values)을 공유하고 있다. 곧 “정의와 평등과 자유와 연대, 그리고 생명을 존중하는 가치”로서 교회만이 아니라 민주 사회 구성원이 지켜야 할 기본적이고도 상식적 원칙이다. 이런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불신앙이거나 비인간, 비윤리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민주주의와 인권
감리교회가 이렇게도 난장판이 된 것은 교회가 사회법의 기준들을 교회 안에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한 개인의 권력에 대한 야욕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나는 그런 야욕을 구별 판단하는 이들은 투표권을 가진 총대들이라고 생각한다. 제아무리 선의를 가졌다 할지라고 막강한 교단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직무를 지원하는 이들은 한결 같이 권력에 대한 요구를 가진 분들이다. 이 요구가 탐욕인지, 신앙적 응답인지, 아니면 개인의 야욕인지 하나님의 눈이 되어 판별할 능력은 우리에게 없다. 그러나 나는 이번 사태의 소이는 교회가 감독 후보의 자격을 사회법의 기준으로 삼은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전과를 가진 이들을 사회가 배려하여 사회 복귀를 돕기 위해 형의 실효(失效)를 선언하고 있는 인권법적 정신을 무시하고, 일반인이 회람하거나 청구할 수도 없는 실효된 형까지 확인하고, 이를 공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피선거권을 박탈할 근거로 삼는 과잉해석을 내세워 인권침해 논란을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감리교 장정은 “범죄경력조회확인서”(경찰서장 발행)로 후보자의 교회법과 사회법에 의한 전과사실을 확인하여 그 자격을 제한하는 규정을 가지고 있다. 범죄경력확인서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일반용으로서 실효된 형은 표기되지 않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공직선거용으로 실효된 형을 포함한 확인서가 있다. 범죄경력을 제출하라는 요구를 담은 이 규정은 2004년 장정에 추가된 것으로서 구지 적용한다면 2004년 이후의 범죄 사실부터 적용되어야 옳다. 2004년에 추가된 무흠 개념의 확대 범주를 25년 전까지 소급하여 적용하는 것은 소급입법 적용으로서 문제가 된다. 일반 법상식에 의하면 해당자에게 불이익을 주는 소급입법은 법률로 금지되어 있다.
소급입법금지는 죄형법정주의와 짝을 이루어 현대 민주사회의 법치주의의 근본에 속하는 것인데 우리 감리교회는 “교회이므로” 소급입법도 당연시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어서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소급입법이 받아들여지는 경우는 누가 하나 피해 당사자가 없는 구제법이나, 특별한 반민족 사범에 대한 제제와 같이 전사회 구성원이 동의할 수 있는 경우에 한정한다. 소급입법을 법률로 금지하는 이유는 그것이 필연적으로 해당자의 인권을 침해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민주적 가치와 인권의 가치를 이해하는 집단이라면 이런 악습을 수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는 서구사회보다 인권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상대적으로 그 학습과 체험이 짧기 때문에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두 축의 중요성을 동시에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민주화를 외치는 이들 조차도 간혹 반인권적인 논리와 습성을 남발하고, 심지어는 민주적 절차를 생략하고 도덕주의적인 사형(私刑)을 가하려 하거나 전체주의적 합의를 선택하여 “전체 빼기 하나를 평화”라고 간주하려는 경향을 보이곤 한다. 특정인만 희생시키면 다수의 평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효용론이다. 이런 논리는 소수인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제의를 당연시하는 의식을 불러온다. 감리교 게시판에서 교단의 민주화와 정상화를 도모하겠다는 이들이 벌이는 반인권적인 공격행위가 그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이런 태도는 모순을 낳는다. 민주주의를 위한다면서 반민주를, 평화를 위한다면서 개인의 권리를 박탈하려 하기 때문이다. 생각이 다르다하여 피차 적이 되는 것이 아닌데도 사유의 다원화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점에서 이들은 도덕의 이름으로 무례한 공격과 도덕주의를 앞세워 일방적으로 문자와 언어를 동원한 테러를 감행한다. 그러나 현대 세계에서 민주사상과 인권사상은 사회를 균형 있게 이끌어가는 마차의 두 바퀴이므로 어느 하나 없이 사회 집단이 진보할 수는 없는 일이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합의를 소수의 합의보다 상대적으로 옳을 수 있다는 합의에 근거한 판단방식이라면 자유주의는 개인의 인권의 보장을 요구한다. 따라서 양자의 요구를 수용하는 자유민주주의적 판단은 인권침해를 낳는 다수의 결정을 바른 판단이라고 보지 않는 것이다.
민주주의란 제아무리 선한 의도를 가진 인간이라 할지라도 사람이 일단 권력을 장악하면 그 권력을 남용할 수밖에 없는 이기적, 혹은 집단 이기적 충동과 속성을 가지게 되므로, 그 권력을 가지고 타방의 권리를 침해하지 못하도록 견제하기 위하여 권력을 분립시켜 피차 서로를 감독, 비판, 견제하게 하는 장치다. 권력의 집중과 독선을 막음으로써 권력이 없는 다수 국민들의 권리를 균등하게 지킬 수 있기 때문에 진보된 사회들은 한결 같이 민주주의를 채택한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와 인권옹호의 정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민주사회에 존립하고 있는 교회는 서구 기독교 세계에서 형성되어 온 이 정치철학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이 정신에 위배되는 결정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럴 경우 교회는 민주사회의 기초 상식도 지키지 못하는 반민주적인 집단으로 간주되거나 반인권적인 집단으로 규정을 받게 되어 선교와 봉사는커녕 사회의 조롱과 비난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감리교회는 겉으로는 민주와 정당함을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다수의 소리도 침묵시키고, 인권옹호의 정신도 외면하는 이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하여 교단을 볼모잡고 있다. 사람과 하나님 앞에서 정당하지 못하다.
규정의 과잉해석과 무리한 적용
자유민주주의 역사를 우리가 기억한다면 법에 따른 절차와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충분히 체득해 온 셈이다. 그런데 일반 사회에서도 경멸을 받을 권한의 남용이나 인권침해를 공교회(公敎會)의 공론으로 삼으려 한다면 그것은 명백한 오류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경멸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건들도 일면 합법성을 가장(假裝)한 절차를 밟는다. 즉 소수 집단의 기획에 의한 악법의 합리화와 은밀한 생성과정이 있는 것이다. 개인의 인권과 국민들의 합의를 무시하면서도 기어이 관철하려는 특정집단이나 소수인의 “정치적 의도가 앞설 경우” 소수의 약삭빠른 이들의 음모에 의하여 악법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감리교회의 교리장정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감독의 자격에 추상적인 “무흠”조항을 넣었으나 2001년 장정부터는 “교회재판법과 사회재판법에 의하여 처벌을 받은 사실이 없는 이”라는 조항이 생겼고, 2004년 장정에는 이 규정에 대한 보조조항으로 범죄경력확인서를 제출하도록 추가하였다. 이 추가 조항의 해석에 있어서 다툼이 일어나자 총회 유권해석위원회는 실효된 형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판단했고, 총회 감독회장 선관위는 일반 범죄경력확인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이어 재판위원회는 이를 해석하면서 양분된 견해를 보인 바, 6명은 “실효된 범죄경력까지 포함할 것”을 요구하고, 5명은 경찰서장이 발행한 범죄경력 확인서로도 충분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결국 총회 재판위원회는 후보자격취소, 재심사 청구 건(2008. 2)을 재석위원 3분의 2의 동의가 없음으로 규정대로 “기각”했다. 감리교회가 대표성을 부여한 위원회를 통한 교회의 자율적 판단은 이것이다.
그런데 감독회장 후보들이 교회의 판단에 불만을 품고 사회법에 다시 이 문제를 제소한 것이다. 보편적인 법상식에 의하면 정당한 사유 없이 개인의 피선거권을 박탈하는 행위는 정치적 평등권을 침해하는 행위로서 인권침해가 된다. 하지만 금고이상의 특별한 범죄의 경우 그 자격을 일정기간에 제한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벌금형으로 자격이나 권리를 제한하는 것은 인권침해 소지가 많은 과잉조치가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불법 선거로 공직 선거법을 위반한 경우에 한정하여 벌금 100만원 이상을 받을 경우 그 당선을 취소하게 되지만, 일단 5년이 지나면 이를 빌미로 공직 피선거권을 제한하지 않는다. 이명박 대통령의 사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도 수많은 전과가 있지만 실효된 전과를 빌미로 하여 그의 피선거권을 박탈당하지 않았다. 국가의 원수를 뽑은 중요한 일에서도 법의 적용에 과잉해석을 가하거나 무리를 두지 않는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 공직선거의 경우 실효된 형을 포함하여 후보자의 전과기록을 공표함으로써 유권자들이 어느 후보를 선택할 것인지를 판단하는 자료로 삼을 뿐, 그 실효된 전과를 이유로 한 개인의 피선거권을 박탈하지는 않는다. 더구나 평등권을 침해하는 피선거권 박탈과 같은 자격제한의 문제는 혹 형의 실효(失效)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적용할 수 있어도 일단 형이 실효된 경우 이를 들어 신분이나 자격을 제한하지 않는다. 또한 실효된 형을 포함한 범죄경력을 조회할 수 있는 실정법적 한계는 일반용이 아니라 검경찰의 수사 자료나 공직후보자의 전과사실을 공표하는 데 주 목적이 있다.
“형의 실효 등에 관한 법률” 제 6조 1항 “범죄수사 또는 재판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로 제한하고 있으며, 당 법률 6조 3항에서는 더욱 명시적으로 “누구든지 제 1항에서 정하는 경우외의 용도로 사용할 목적으로 범죄경력 자료 또는 수사 경력 자료를 취득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명시하고 있고, 이를 위반했을 경우 동법 제 10조에서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이런 법률을 제정한 이유는 비록 전과자라 할지라도 항구적인 차별의 대상으로 낙인을 찍어서는 안 된다는 인권보호의 정신을 존중하는 민주 사회의 합의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감리교 정치판에서는 이 정신은 외면하고 이 법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이들에 의하여 난장판이 된 것이다.
25년 무흠 조항을 교회법과 사회법에 판결을 받은 사실을 규명하는 데 있어 “살인, 강간, 강도, 폭력” 전과와 동일하게 사소한 벌금형을 포함하겠다는 주장이 이번 사건을 불러온 다툼의 원천이다. 형의 실효에 관한 법률은 범죄의 경중을 따져 차별적 징계를 하고 있다. 즉 사소한 범죄에 관해서는 그 실효(失效)기간을 2년으로 하고, 3년 이하의 징역은 5년, 3년을 초과하는 징역이나 금고에 대해서는 10년으로 차별적 적용을 하고 있다. 범죄자에 대한 사회적 징계의 범주를 이미 형의 실효에 관한 법이 담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일부 감리교회의 구성원들은 교회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이를 가중(加重)하여 무차별적으로 벌금 100만원 받은 사실을 근거로 동료 성직자를 살인, 강간, 폭력치사, 반국가 사범과 같은 흉악범과 동일하게 낙인찍겠다는 주장을 한 것이다. 법리를 모르는 과잉처벌이요 과잉해석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주장에 감리교 교인인 변호사들까지 참여했다는 점에 대하여 나는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들이 법을 배웠으니 “과잉금지의 원칙”이 무엇인지 “소급입법 금지의 정신”이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지적, 법적 판단능력을 갖추었을 것이라 상정한다면 교단의 율사들이 왜 이런 무차별 원칙을 주장했는지 나는 그 의도에 대하여 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과잉 확대 해석 혹은 무차별적 해석은 법상식 밖의 행위라 할 것이고, 나아가서 신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도 명백한 과잉 적용이다. 과잉해석자들은 벌금형을 자의적으로 구분 해석하여 건축법, 도로교통법, 향군법 위반은 아예 사회 재판법에 의하여 처벌을 받았다 할지라도 범죄행위로 보지 않겠다는 부드러운 해석을 섞었다. 누군가의 벌금형을 구제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벌금형을 구별, 경중을 자의적으로 구분한 이들이, 정작 살인, 강도, 강간, 폭력 등 강력 범죄와 벌금 100만원 건을 구별해서는 안 된다는 경직된 율법주의자들이 된 것이다. 이런 해석은 교회가 지켜야 할 공정한 정신, 인권옹호의 정신, 죄인을 향한 용서와 사죄의 소식을 담고 있는 복음의 정신, 그리고 모든 인간을 죄인이라 보는 기독교 인간학의 관점에서 볼 때 매우 그릇된 것이다.
감독회장의 권한 남용
감독회장 선거관리위원회가 이 법을 적용하면서 장정해석위원회의 직권적 과잉 해석을 그대로 받지 않고 모든 후보들로부터 실효된 형에 대한 조사를 하지 않은 사실로 인하여 당시 3인의 감독후보들이 연합하여 한 후보를 사회법에 자격심사를 의뢰한 사건(2008. 8. 19, 후보자 등록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은 교회의 수장이 되겠다는 이들의 행태로서는 함량미달 행위다. 이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총회 특별재판위원회회에 문제를 제기해도 이익이 없자 결국 사회법에 재차 의뢰한 것이다. 감독회장 입후보자들은 사회 재판관에게 재판을 의뢰함으로써 교회법의 위상을 격하시켰다. 이는 교회 안에서의 다툼을 교회 밖으로 가지고 간 행위로서 교리와 장정의 정신에 위배되는 행위다. 교리와 장정을 가장 높은 법으로 여기고 이를 지켜야 할 분들이 사회법에 문제를 가지고 감으로써 교회의 자율적 판단능력을 부정한 것이 감리교회 난장판을 초래한 또 하나의 요인이다.
여기에 더하여 교리와 장정을 준수하고 모든 교회가 이를 지키도록 감독해야 할 당시 감독회장의 오판이 감리교회의 문제를 풀 수 없게 만들었다. 당시 감독회장은 사회법에서 한 감독후보의 자격에 대한 가처분이 내려지자마자 사회법에 호소한 세 감독후보의 취지를 그대로 받아들여 이를 기정 사실화 하고 감리교회 감독회장 선거에 직접 개입한 일, 선거당일에 즈음한 시점에서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을 대행체제로 교체하고, 자신에 내세운 인물을 통하여 대다수의 총대들의 표를 사표화시킨 일, “교리와 장정을 통한 재판과 절차도 없이” 세속 재판정의 판단을 지나치게 신뢰하여 한 후보의 자격을 박탈한 일, 그리고 교리와 장정에도 없는 절차를 만들어 “차점자를 합법적인 감독회장이라고 선언”한 일은 교리와 장정에 따라 밟아야 할 절차와 과정을 무시한 행위로 판단 받을 수밖에 없다.
총대원의 다수 표를 얻었으나 선거직전 부자격자로 간주되어 후보자격이 박탈되고, 그를 뽑은 44.4% 총대원들의 표를 사표화 함으로써 차점자를 당선인으로 선언한 입장을 지지하는 이들의 글을 종합해 보면 사회법에 의하여 자격정지를 당한 해당자는 졸지에 감리교회의 “파렴치한, 원수내지는 이단, 혹은 적보다도 더 악한 존재”로 간주되어 매도되는 것 같이 보였다. 비판자들은 이런 점에서 동료 인간, 동료 성직자에 대한 인간적 예우나 배려를 찾아 볼 수 없는 매우 비기독교적인 태도를 일상화했다. 이들이 쏟아낸 한 후보에 대한 반복적인 인신공격, 일방적인 모욕, 공개적인 자리에 그의 전력을 들어내는 명예훼손성 발언들은 성직자로서의 언어와 글로서 도를 넘은 것이었고, 심지어 몇몇 사람의 경우 사적 감정과 체험을 섞어 공론의 지지를 받기에는 무리였다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과정에서 감독회장 후보의 자격에 대한 교단 각종 위원회의 논란, 장정유권해석위원회의 실효된 전과 산입 해석 -> 선관위의 불수용 -> 총회재판위원회에 자격취소 청구-> 총회 재판위원회의 기각 -> 감독회장 후보들의 사회법 시비-> 전감독회장의 권한 남용 -> 감독회장선거 파탄 -> 본부 측의 전감독회장의 의도 지원 -> 임시대행의 무기능 -> 재선거 시도 -> 법원이 지명한 임시감독회장 - 등으로 이어진 일련의 과정은 교리와 장정을 과잉 해석하는 논조를 신념처럼 받아들여 한 후보를 정치적으로 배제하려는 목적에 지배된 과정이며, 이는 또한 교리와 장정 안에서의 치리능력을 상실한 과정이고, 감독회장이 사회법정의 판단을 불러들여 총회원의 감독선거 권한을 부정한 사건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한국판 新도나티스트 논쟁
이번 사거의 이면을 살펴보면 형식적으로는 법리논쟁인 것 같이 보이지만 내용적으로는 한 후보가 교단의 책임자가 되기에는 부족하다는 도덕적 판단이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것이라는 주장들도 있다. 물론 이런 판단들도 도덕적이며 영적인 판단이라고 볼 수도 있다. 우리나라 대통령도 일각에서는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기도 하지만 일각에서는 그의 도덕성에 심각하게 문제를 제기하는 논의들이 많았다. 그러나 민주사회에서는 투표권을 행사하는 국민이 최종적인 판단을 내린다. 나는 이런 판단이 언제나 “도덕적으로 옳은 판단“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민주적 절차와 과정에 승복해야 하는 것이 민주시민의 도리다.
교회의 역사를 돌아보면 혼란과 무질서와 다툼의 연속선이었다. 무수한 논쟁이 일어났고, 교회가 분열되기도 했으며, 끝없는 신학적 논쟁이 일어났다. 어쩌면 우리 교회에게는 궁극적으로 만들어진 답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거룩하시고 온전하신 뜻(롬, 12: 2)을 찾아가기 위하여 우리는 서로의 생각이 달라 부딪칠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311년경 누미디아지방의 대주교였던 도나티스트와 그 일파들이 세실리안(cecillian)이 칼타고의 감독으로 임명되는 것에 반대하여 이의를 제기하고 그를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도나티스트파는 배교의 전력이 있는 압통가의 펠렉스(Felex of Aptonga)에 의하여 임명을 받은 세실리안이 칼타고의 감독이 될 경우 교회의 순수성을 파괴하고, 성직자들의 영권(spiritual power)의 약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도나티스트들의 주장에 따르면 성직자의 능력은 개인적 성결에 근본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라는 견해였다. 이들은 불법적으로 후계자를 뽑았으나 칼타고는 도나티스트의 권한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그 효과가 없었다. 이 논쟁은 2년간 지속되었고 313년 교회는 세실리안의 칼타고의 감독직을 인정했다. 그러자 도나티스트파들은 이 건을 세속법정으로 가지고 가서 펠렉스의 배교전력을 입증하려고 노렸했으나 314년 회의에서 교부들은 도나티스트파들을 광기에 사로잡힌 열광주의자(crasy fanatics)라고, 기독교의 위험(danger of Christianity)으로서 교회를 위태롭게 만드는 이들이라고 판단했다. 316년에 또다시 도나티스트파는 황제에게 세실리안의 칼타고 감독임명을 파기할 것을 요청했으나 황제는 공의회에 도나티스트파가 참여하지도 못하게 했다. 마침내 321년 도나티스트 추종자들은 황제에게 관용을 구했고, 황제는 그들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마지못해 그 청원을 받아 주었다.
당시 어거스틴은 도나티스트의 율법주의적인 주장에 현혹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교회와 그 교회의 일꾼은 자신의 義를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한 사죄, 곧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성직자로서의 소명을 수행하는 것임을 주장했고, 교회는 어거스틴의 신학을 복음주의 전통에 더 적합한 것으로 해석해 왔다. 결국 교회지도자의 자격에 남다른 의(義)로움의 조건을 달았던 도나티스트파들은 당대의 율법주의자들로 정죄되었고, 교회는 은총의 교설을 정통 기독교 신앙으로 재확증하게 되었던 것이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율법주의와 복음주의 사이에서 어디에 서야 하는 것인지를 오래 전 밝혀준 사건이다.
인간의 의를 앞세우는 도나티스트들을 거절한 어거스틴이 과연 인간의 죄를 간과하려는 것이었는가? 아니다! 그들의 입장을 거절한 까닭은 기독교는 죄 용서의 종교, 은총의 종교라는 점을 그들이 부정하고 인간의 의를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오늘의 감리교 사건의 신학적 열쇄는 이 역사적 논쟁의 교훈에서 찾을 수 있다. 평신도들보다는, 변호사들보다는 신학을 공부한 목사나 감리사, 감독이라면 이 기초 신학적 상식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어거스틴이 도나티스트파 사람들의 주장을 기독교의 본질에 위해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판단한 소이가 무엇인지 정도는 신학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감리교회 일각에서 무흠규정을 지나치게 확대하는 논리는 현대 법상식과 인권론에 근거한 것만이 아니라 교회의 신학적 전통과 기독교 근본 교리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거절해야 하는 것이다.
총대의 중의(衆意)와 본부의 기능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많은 감리교인들은 본부 임직원들의 기능이 과연 무엇인가 다시 묻게 되었다. 그간의 과정을 살피면 합법적인 감독회장이 아닌 분을 수장으로 모시고 한 때나마 일사불란한 행동을 보였던 본부 임직원들이 과연 법을 바르게 해석하고. 감리교 총대들이 자유로운 선거를 통하여 감리교회의 합의를 담은 감독회장을 선출하도록 공정한 선거관리를 수행하는 기능을 했는지, 아니면 불법적인 감독회장의 행위가 교회 내외에서 부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단을 바꾸어 기필코 한 후보를 배제 하기위한 목적에 정치적으로 올인하는 편향적 입장을 취했는지에 대하여 많은 이들이 의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임시대행이 법원에서 그 자격을 다시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성된 신설 감독회장 선관위와 각종위원회 없는 감독회장 선거판, 즉 본부측의 “재선거” 의도가 표면화 되고 있다.
이런 무리를 기하는 것은 일단 밀어 붙이고, 일단 자리를 잡으면 법원의 판단을 유리하게 받아낼 수 있는 기선을 잡는 것이라고 믿는 감리교 정치판의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교리와 장정의 요구조건에 미달하거나 과정적 한계가 있어서, 또 다른 다툼을 불러올 수 있으며, 결국 사회법정에서 감리교회를 또다시 만신창이 만들 대안이 될 수도 있다. 이런 본부의 움직임에 대응하여 총회대표 806명 총회개최 서명, 8개 연회의 총회 건의안 결의와 7개 연회 감독들이 소위 천안 총회를 개최(9개 연회 감독들이 총회개최 합의)하여 과반수이상의 감리교 총대들을 규합함으로써 실질적으로 감리교회의 중심세력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피차에 인식과 판단에 한계가 있는 기독교 인간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신앙 공동체 안에서 총대 과반수 이상의 참여가 이루어졌다면, 이는 감리교회의 중의(衆意)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합리적 판단을 할 수 있는 데이터가 된다. 그러나 교회의 행정권력을 걸머지고 있는 이들은 감리교회의 합의보다는 사회법정에서 자파에게 유리한 판단이 내려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총대들의 절대 다수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이들이 결국 사회법을 자기 방어 수단으로 삼으며 감리교회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과정을 살펴볼 때 원인제공자나 사건의 시발점은 그동안 감리교회의 중심부로서 일해 온 본부 측의 편향된 정치화가 문제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감리교회의 다양한 기능을 위하여 고용된 이들이 도덕적, 법적 우월성을 주장하며 감리교 총대들의 판단을 걸러내고, 총대들의 합의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판단이 오류일까? 그러나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생각을 해 보라.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행위에 의하여 선거과정 중 자격을 박탈당하는 일이 백주대낮에 가능한 일인지, 본부 임직원들이 자격 없는 감독회장을 공식적으로 세우려 했던 전 감독회장의 의도를 이처럼 초지일관 지지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완벽한 선거과정이 아니어서 비록 성에 차지 않더라도 교회의 지도자들은 감리교회 총대들이 뽑은 각종 위원회의 판단을 존중했어야 했다. 오랜 학연, 파벌, 파당성에 피차에 찌든 이들이 위선과 기만까지 동원하지 않으려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 감리교 교단 정치는 교회 내부에서 끝나야 한다. 민주사회에서는 도덕적으로 옳은 것이 언제나 단번에 옳은 것이 아니다. 제아무리 결과가 싫어도 다수의 결정을 존중하고 관용, 승복하는 것이 민주시민의 도리다. 이런 승복의 과정을 거쳐서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참되고 옳은 것에 언젠가에는 도달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의무다. 그러므로 두 말할 것도 없이 교단의 질서와 평화를 지키지 못한 책임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이들에게 물어야 한다.
감리교 본부는 총회 총대들의 중의(衆意)를 거부해 왔다. 선관위와 총회 재판위의 기각 결정을 부정했고, 선거결과를 거부했으며, 위기상황에서 총회를 여는 것을 거부했다. 매우 반민주적이다. 이 거부의 논리를 요약한다면 감리교 본부의 판단은 적법하고, 총대들은 정치적으로, 혹은 무슨 이유에서든지 조정을 받아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이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부 측에서 총회를 대신한 초법적 기능을 수행하겠다는 의지를 총회 없는 재선거로 관철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판단을 지키기 위하여 교단의 돈으로 대형 로펌을 사서라도 교인간의 법정싸움에서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태도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악법은 법이 아니다.
고대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대 인권사상은 “악법은 법이 아니다.”라고 한다. 악법을 인정하면 개혁도 불가능하고, 전근대적 망령에 사로잡혀 보편적인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법은 법이 아니다. 더구나 과잉 법해석은 더욱 정당하지 않다. 교회의 헌법이 있고, 교회의 치리를 위한 법 규정들이 있다면, 그리고 그 교리와 장정에 의하여 감독회장직을 위임받은 분이라면, 그는 반드시 자기 목숨이 버려진다 할지라도 사회법에 앞서 교회법을 지켜야 한다. 그래야 교회를 지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감독회장이 교회법을 스스로 버렸다.
혹자는 불법이 아니라 감독회장의 권한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행위로 말미암아 교회의 모든 기능이 정지되고, 감리교회가 대 혼란에 빠졌다면 이런 행위를 조장할 권한이 도대체 교리와 장정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더구나 법원의 판결문이 송달되기도 전에 약삭빠른 변호사들을 이용하여 법원 판결문을 비공식적으로 사전 유출 수령한 후 이를 이용한 행위도 투명하고 공정해야 할 감리교회의 행정 수장으로서 정당한 행위라고 볼 수 없다. 게다가 일사천리로 감리교인들이 뽑지도 않은 이를 감독회장으로 세우려고 의도한 것은 어찌된 일인가? 이런 비합리적 판단과 절차는 결국 사회법에 의하여 제지를 당하고 말았다.
감리교회를 대표하는 감독회장이라면 명료한 도덕신학적 판단과 교리와 장정이 명하는 절차를 지켜야 한다. 부족한 사람들이 모여 이룬 교회를 평화롭게 지키기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그러나 감독회장이 앞장서서 사회법의 판단을 앞세워 감리교 최고 의회 총대들의 감독회장 선거권을 일방적으로 무효화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교단 지도자가 지켜야할 덕목 곧 민주사상과 인권옹호의 의지가 결여된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민주주의적인 사고에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라는 두 축이 기능해야 한다.
민주주의가 권력의 오남용을 막기 위한 권력견제장치라면, 자유주의는 개인의 인권과 존엄성을 극대화하는 사상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는 권력의 독선을 감시함으로써 모든 특권을 폐기하고 개인의 인권을 보장하는 데 그 존재이유가 있다. 자유민주사회에 세워진 교회의 지도자는 민주적 절차를 파기하거나 방해해서도 안 된다. 그리고 교단 구성원 어느 누구의 인권이 침해당하도록 방관해서는 안 된다.
설사 후보자 개인적인 덕목이 부족하고, 감리교회 일부의 반감과 저항이 있다고 하여도 감독회장 선거에 관한 전권을 가진 선관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력화 하고, 자파의 인물을 앞세워 장정규정의 과잉해석을 수용하게 만든 후, 한 후보의 피선거권을 박탈한 행위는 상식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 이 과정에서 사상과 신념이 있는 감독회장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민주적 절차와 과정도 없고, 동료 성직자에 대한 인권옹호 의지도 없었다는 것이 그릇된 판단인가? 법의 과잉해석을 통하여 동료 성직자의 평등권을 25년간 차별할 수 있다는 사고는 자유민주주의적 사고도 아니고 심지어 복음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무서운 도덕주의적 사고의 결과다. 교회가 그동안 선포해온 “용서와 사죄의 신학적 함의”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규정을 과잉 해석하는 것이 정당한 법해석이라고 해야만 한 후보를 배제하고 몰락시킬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지금까지 교단을 혼란스럽게 한 모든 책임을 그에게 덮어씌울 수 있기 때문에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할지라도 나는 명백하게 말할 수 있다. 복음의 정신에 위배되고 또한 근대 인권법에 위배되는 과잉해석은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가르쳐 질 수 없는 것이고 또한 감리교회의 지도자들이 수호해야 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다.
사회법을 앞세우는 도덕주의자들은 그들 주장의 근거를 성서적이며 신학적인 이유를 들어 밝히기 보다는 한결같이 사회법정의 판단이 그 정당함의 근거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율사들이 주장한다면 다소 이해가 될 것이지만 주일마다 강단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목사로서는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 주장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절차와 과정의 적법성
만일 기필코 감리교회가 25년 전까지 소급하여 사회법에서 실효(失效)된 벌금형까지라도 적발해 내어 감독회장 후보의 자격에 흠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면 이런 목적은 반드시 교리와 장정에 따라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서 확인이 되고 시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절차상 위법적인 일이다. 만일 그 기준이 “누가 보아도 옳다”면 선거가 끝난 후에라도 교단의 교리와 장정을 따라 공적인 교단 재판을 거쳐서, 설령 누군가가 감독회장에 당선이 되었을지라도 자격이 없다는 사실이 “공적 판단”으로 들어났을 경우 그의 감독회장직을 합법적으로 박탈하면 될 일이었다. 사실상 감독회장 선관위는 이런 재론의 논의의 여지를 남겼다.
민주사회에서 자격 없는 이가 국회의원이 되거나, 불법적인 방법으로 국회의원이 되었다가 “법원의 판결에 의하여” 그 자격을 상실한 이들이 한 둘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오직 “법원의 판결”에 의하여 그 자격을 박탈할 수 있을 뿐이다. 전근대 사회의 절대권자, 왕이나 독재자라면 몰라도 민주사회에서는 대통령도 자의적 판단만으로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그 자격 박탈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자격이 없는 국회의원 후보가 있다고 하여 대통령이 개입하여 선거판을 뒤집어 그를 제치고 다른 후보가 당선되었다고 선언하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도대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인가?
만일 감독회장이 교회의 법을 지키고 정당한 절차와 과정을 밟아 해당 후보가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공적 절차를 거쳐 확인하는 절차를 바르게 밟았다면 우리 감리교회가 이리도 온 세상의 조롱을 받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 감독회장은 교회가 지켜야 할 절차와 과정과 치리를 포기하고 신앙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판사의 가처분 판결문에 압도되어 교회의 수장으로서 해서는 안 될 판단, 곧 장정에도 없는 차점자를 감독회장이라고 선포하게 만든 것이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지금 교단 정치가들은 감리교회의 공금을 사용하면서 대형 법률회사를 불러들여 신학적 논쟁이나, 도덕적 논쟁이나 절차상의 논쟁이 아니라 자본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동안 교단 변호사들의 역할에 만족하지 않고 교단 임직원들이 수천만원에서 억대에 이르는 수임료를 지급해야 하는 대형 법률회사를 끌어들이는 이유는 우리나라 법정을 지배할 수 있는 인맥과 권력구조를 가진 대형법률회사를 이용하여 무조건 승소하고 보겠다는 심사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제는 신학이나 도덕적인 다툼이나, 교리와 장정에 따른 절차의 적법성을 따지는 것도 아니다. 교회가 견지해야 할 높은 도덕성과 자율성은 증발해 버리고 돈으로 산 변호사들을 전면에 내세워 법정 다툼에서 이겨야만 하는 전쟁에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교회를 치리하는 방법이어야 하는가?
법원과 총대들의 위상
기독교 도덕신학적 전통은 교회가 국가로부터 독립하여 자율적인 기관으로 존립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켜왔다. 따라서 감리교회의 교리와 장정에 의하면 제아무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법정에서 승소를 하고, 법적 정당성을 확보했다 할지라도 그 결과가 감리교회 총회에서 총대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누군가가 교단을 법정지배 상황에 처하도록 계속 고의적으로 일을 벌이지 않는 한, 결국 언젠가는 그 모든 결과들이 감리교회의 총회에서 총대들의 판단 앞에 세워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법원의 판단은 교회가 내리는 최종적인 판단으로 대치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법정이나 국가는 교회를 지배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법원의 판단은 교회가 혼란과 무능에 빠졌을 때만 강제적 질서를 갖추기 위하여 잠정적으로 작용할 뿐이다. 그런데 이런 법원의 강제적 기능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이들이 있다. 이를 잘 이용하면 총대들의 합의나 교단 법의 절차를 무시하고서라도 특정한 지위와 자리를 확보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감리교회의 구성원들은 법원이 교회의 머리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감리교회의 주권은 감리교회 구성원에게 있고, 교회의 궁극적인 결정권은 각종 의회원들에게 있으며, 교단의 주요 결정은 파당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감리교회를 대표하는, 맘몬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주(主)로 섬기는 총대들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민주사회에서 국민의 주권을 정부가 빼앗아 갈 수 없듯이, 권력집단이 법률회사를 동원하여 법원의 판결을 앞세운다 할지라도 “교리와 장정”을 죽이지 않는 한 총대들의 권리를 몰수할 수 없는 법이다. 따라서 감리교 총대들은 이제부터는 파당중심의 사고와 행위가 아니라, 감리교회 중심의 사고와 판단을 해야 하고, 나아가서 하나님 중심의 신앙과 실천에 나서야 한다.
총대들의 지지를 받지도 못하면서 법적 공방을 통하여 정통성과 합법성을 주장한다면, 그리고 신학적 정당성도 결여한 채 타방에만 법적 절차와 과정에 하자가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법 논쟁을 벌려 감리교회를 계속 고통스럽게 만들겠다는 실세 우위론에 빠진 결과일 뿐이다. 이제 나는 솔로몬의 재판에 나오는 지혜로운 어머니처럼 감리교회를 살리는 이가 더 위대한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교회의 신학적 전통과 민주적 합의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총대들 다수의 지지를 받는 이에게 교단 대표의 직무를 맡기는 길이 교단을 위하여 옳은 길이며, 감독회장 후보로 나선 분들이 교권을 쟁탈하려는 의지에 앞서 교단의 일치를 위하여 헌신할 수 있고, 또한 명분을 얻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마치는 말
민주주의 의회제도를 선택한 감리교회는 모든 시비와 권력구조의 한계를 넘어서 이번 사건을 통하여 보다 성숙하게 된 총대들의 명철한 판단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들의 판단에 따라 감리교회의 미래가 결정되어야 정도(正道)다. 감리교 본부가 결정한 것을 총대들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 총대들이 결정한 것을 감리교 본부가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촘스키는 “민주사회는 일반인보다 특출한 영웅적인 지도자를 기다리지 않는다. 영웅보다 좋은 생각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민주적 신념이 있는 사람은 한 사람의 영웅보다는 대중의 뜻(衆意)을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왕족이나 귀족과 같은 소수자에 의한 지배가 정당화되던 시대는 지난 지 오래다. 그러므로 감리교회는 모든 감리교인들이 합의하여 중지를 모을 수 있는 방법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
이번 사건으로 인한 교훈을 잘 반영하여 절차를 중시하고, 교단을 민주화하며, 권력의 독선을 감독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고, 나아가 새로운 시대를 맞아 교단을 대표하는 이들이 민주적으로 구성될 수 있도록 보다 성숙하게 개혁하는 일에 총대들이 나서주기를 바랄뿐이다. 연합감리교회처럼 모든 계층이 골고루 교단의 문제에 관심하고 참여하며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민주적 구조가 세워질 때다. 하지만 지금은 독선과 오만은 꺾고 겸허히 감리교 중의(衆意)의 소리에 귀를 기우리는 지도력이 필요한 때다. 도덕적이며 신앙적인 명분이 없는 파당성에 몰려다니는 해바라기 권력집단과 총대들은 구시대의 유물로서 이제는 사라져야 한다.
이번 사건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우리 모두가 존중받을 수 있는 민주적인 의사결정 과정이 이루어질 수 있는 교회를 향하여 새롭게 교단이 정비될 수 있도록 모든 총대들이 노력해 주시기 바란다. 이제는 하루바삐 모든 감리교인들이 감리교회에 대하여 새롭게 겸손한 긍지를 가질 수 있는 교단이 되어야 한다. 아이를 키울 때 한번 고되게 앓으면 한층 성숙하는 모습을 보이곤 하듯이, 우리 감리교회가 이번 내홍을 통하여 한층 성숙할 수 있기를 나는 희망한다. 정말이지 오늘의 우리 감리교회는 주인이 아니라 겸허하게 주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종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
나는 교회의 합의와 신앙의 전통을 지키기 보다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권을 탐하는 이들이 감리교회에 고통을 주어왔다고 생각한다. 반면 감리교회가 가진 희망은 신실한 감리교회의 구성원들, 교회의 대표인 총대들의 기도와 결단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분란 위기를 극복하려면 고통의 원천은 비판적으로 극복하고 총대들의 판단과 결단에 하나님의 뜻이 담길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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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충구 교수 (감리교신학대학교 기독교윤리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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