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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01>
그냥 ‘지인’이라고만 해두자. 며칠 전 그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막 불을 붙이던 순간이었다.
‘지인’의 얘기인즉슨, 다가올 지방선거에서 좀 도와줄 수 있겠느냐, 는 것이다.
수도권 어느 도시의 시의회 의원으로 출마한단다.
이미 공천까지 받았다는 건 사전 정지(整地) 작업이 오랫동안 진행됐다는 뜻이렷다.
얘기를 계속 듣고 있자니 들숨, 날숨의 호흡 주기가 점차 짧아졌다.
매캐한 담배연기가 피어올라 눈을 찔러댔다.
눈이 아리니까 덩달아 가슴까지 쓰라렸다.
<장면 #02>
재작년이었던가… 2월쯤 됐을 거다.
신내동 쪽으로 차를 몰고 가다가 하마터면 사고를 낼 뻔했다.
도로변의 건물 2층에 내걸린 큼지막한 현수막 때문이다.
거기에는 굵은 고딕체로 다음과 같이 씌어 있었다.
“한나라당 중랑을 지구당 예비후보 ○○○!”
그 옆에 합성한 티가 팍팍 나는, 2MB와 나란히 포즈를 취한 사진도 보였다.
‘○○○…? 뭐지? 이토록 강력한 기시감은…?’
다시 한 번 현수막 쪽으로 곁눈질했다.
사진 속 인물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역시 단순한 데자뷰 현상은 아니다.
턱 주위에 넉넉히 나잇살이 오른 몽타주는 ○○○이라는 이름과 어우러지면서 뇌주름 깊숙이 봉인됐던 기억의 실타래를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난마처럼 뒤엉킨 머릿속의 실을 조금씩 풀어헤쳤다.
잡힐 듯 말 듯 까무룩하게 떠다니는 실마리…….
‘□□□□연구회? ◇◇팀? … 똥82, …?, …!, … 아, 그 ○○○!’
마침내 기억의 저장고에 진입할 패스워드가 떠올랐다.
오랜 세월이 흘렀을지언정, 그 인상은 23년 전의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 당시… 후배들을 개인적인 안락, 일신의 안위와는 전혀 무관한 어떤 지점(!)으로 내몰며 독려(?)하던 사람이었다.
문과대 어문계열 △△과에 적을 두었던 일 년 선배!
이른바, 학습투쟁과 정세분석을 맡아 구라를 까던 조직책 중 한 명이다.
“허, 거참!” 탄식에 가까운 신음과 “씨발”이라는 욕지거리가 동시에 튀어나왔다.
설마 아니겠지, 하면서도 몇 번이고 현수막을 흘낏거리랴, 무의식의 뻘밭에 가라앉은 기억의 쪼가리들을 추스르랴… 헝클어진 심기처럼 차바퀴의 궤적도 갈짓자 행보였었나보다. 신경질을 잔뜩 품은 클랙션 소리가 주변을 에워쌌다.
이면도로로 접어들어 골목길에 차를 세우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1985년…….
파릇파릇한 청춘이 활짝 피어날 나이였건만, 우리들 눈에 투영된 세상은 칙칙한 모노크롬 상태였다. 미래는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저만큼 지나가버린 듯한 그 아득한 잿빛 절망. 온몸을 육중하게 내리누르는 시대의 엄혹한 공기. 뭐라도 하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았던 알량한 책무의식…. 역사 앞에 당당하자는 치기 어린, 하지만 용기 백배의 다짐과 맹세…. 그들이 있었기에 그 시절을 버틸 수 있었다. 온몸으로 부대끼며 견뎌낼 수 있었다. 누가 뭐래도, 그래도… 그때는 순수의 시대였다.
그리고… 23년이 지난 지금, 한나라당 로고가 선명히 박힌 현수막 속의 ○○○ 선배.
“좆도… 니미” 입술 사이로 담배연기와 함께 갖은 상소리가 새어나왔다.
그 자리에서 담배 세 대가 연달아 작살났다.
<장면 #03>
1987년 1월이었을 게다.
‘탁’하고 책상을 내려치니 ‘억’하고 죽었다던 박종철 사건이 일어났던 때가….
한밤중에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학생을 붙잡아놓고, 형사 서넛이 달려들어 그 학생의 머리를 욕조에 밀어넣고 원 없이 물을 처먹였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당시 ‘민추위’ 사건으로 수배중이던 어떤 선배의 은신처를 대라는 것이었다.
그 선배라는 사람의 이름은 박종운.
그 이름은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2004년에 다시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내린다.
“한나라당 부천 오정 지구당위원장 박종운”
당시 현수막에는 그렇게 씌어 있었다.
지금은 한나라당 경기도당 서부지역 총괄본부장인지 뭔지를 맡고 있는 것 같다.
코와 입으로 물이 밀려들어와 허파가 터져나갈 듯한 고통 속에서도 박종철은 끝내 불지 않았다. 아니,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연락책 역할은 했으되, 선배 박종운이 어디 짱박혀 있는지 그는 애초부터 몰랐다.
공권력에 의한 살인! 뒤이어 벌어졌던 온갖 추잡한 은폐와 조작….
어쨌건 한 청년의 죽음에 결코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처지의 박종운은, 그 청년을 죽이고 사고사로 위장할 것을 교사했던 주범의 품에 덥썩 안기고 말았다.
“종철아, 잘 가그라. 아부지는 할 말이 없데이.”라며 아들의 장례식 때 오열하던 부친 박기정 씨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데도 말이다.
한나라당이라니…. 한나라당이야말로 이승만의 자유당, 박정희의 공화당, 전두환의 민정당 → 민자당 → 신한국당을 고스란히 계승한 집단 아니던가!
한나라당이라는 정치 결사체와 세칭 ‘386세대’의 주도 세력 사이에 가로놓인 거리는 ‘똥’과 ‘된장’의 차이만큼이나 멀다.
도대체 군사정권의 눈엣가시였던 학생운동의 수괴급 인물이 군사정권의 후예들과 짬짜미를 맺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뭘까.
<다시 장면 #01>
예상대로 ‘지인’의 공천권을 행사한 곳은 한나라당이었다.
필터까지 치고 올라온 열기에 담배를 느릿느릿 비벼 껐다.
그 손놀림만큼이나 내 음성도 차분했지만 그 목소리엔 시큰둥한 냉소가 서려 있었다.
언짢은 내색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러나…
송화기를 타고 흐르는 떨떠름한 기색을 감지했는지 ‘지인’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구닥다리 슬라이드폰 액정화면의 불이 꺼지자마자 또 다시 흡연 욕구가 밀려들었다.
내가 맞닥뜨린 딜레마는 두 가지다.
‘지인’을 도울 것이냐 말 것이냐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첫째, 지극히 사적일 수도 있는 전화, 그러니까 ‘지인’과 나 사이에 개인적으로 오고간 통화 내역을 공론화시켜도 되는가.
둘째, 앞으로 ‘지인’과 일상적인 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씨바~ 존나 어려운 문제다.
그런데……
세상을 바꾸기 위한 싸움은 ‘절대善’과 ‘절대惡’의 대결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성찰’과 ‘기억상실증’ 사이에서 벌어지는 긴장과 대립이다.
다시 말해, ‘수오지심’과 ‘후안무치’ 사이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투쟁이다.
어느 게 똥이고, 어떤 것이 된장인지 가릴 수 있는 분별력을 잃지 않는 것이다.
똥인지 된장인지 굳이 찍어 먹어보지 않고 알 수 있는 것,
그게 꼬박꼬박 나잇살 먹어가는 인간의 기품이다.
아무리 사슴을 가리켜 말[馬]이라고 강짜를 놓는 몰상식의 시대일지라도,
아무리 온갖 미망과 협잡과 반칙과 사술이 판치는 사회일망정,
여하튼… 똥을 끓여서 된장찌개라 우길 수는 없잖은가!
행여나 그 ‘똥찌개’를 맛보라고 주변에 권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갑작스레 치밀어오르는 욕지기가 줄담배 탓만은 아니다.
벌써 일 년 가까이 됐구나. 10개월 전 어느 친구에게 보냈던 편지의 일부를 인용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갈음하자. 소설가 김별아의 칼럼 중 일부분이다.
“ …… 물론 우리가 얼마나 부족한가는 스스로 잘 알고 있지만,
어쨌든 적어도 친구에게 부끄러운 일은 하지 말고 살아야지.
스무 살의 그때처럼 불꽃의 삶을 꿈꾸기엔 현실이 너무 초라해도,
최소한 우리가 맞서 싸우던 그 괴물을 닮아가진 말아야지.”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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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괴물과 싸우다 정작 자신이 괴물이 되기도 아주 쉬운 세상입지요.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합니다.
홍상수의『생활의 발견<2002>』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배우 경수(김상경)는 어느 감독(안길강)의 작품에 출연했으나 흥행이 영 시원찮았죠.
그럼에도 경수가 바득바득 러닝 개런티를 요구하자, 감독이 이렇게 말합니다.
“경수야, 우리 사람 되는 거 힘들어. 힘들지만, 우리 괴물은 되지 말고 살자.”
그렇죠. 사람으로 살기 참 버겁습니다. 괴물이 안 되기도 힘들고, 정신… 똑바로 차리기도 힘겹고.
그림 : Maurits Cornelis Escher, <Print Gallery(19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