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오늘 소개해드릴 무인은 현대 검도의 두 아버지중에 하나인 나카니시 츄우베에 타네사다입니다.
그의 출생 및 사망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없습니다.
오직, 그의 행적만이 남아있지만, 그 행적이 오늘날에도 길이길이 남을만한 가치있는 것들입니다.
나카니시가 오늘날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크게 두가지 입니다.
첫째는, 오늘날 사용하는 호구를 개발한 장본인이라는 것.
둘째는, 진정한 스승의 본을 보여준 무사였다는 것입니다.
나카니시는 처음에는 오노하 일도류의 제자였습니다.
당시까지의 일도류는 진검 승부를 전제로한 목검 대련, 즉 본 수련만이 있었습니다.
(물론, 당시의 본은 오늘날의 대도7본, 소도3본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대도의 본만 50가지가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시대는 바햐흐로 도쿠가와 막부시대, 전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무사가 살아남는 길은 돈많은 영주의 가신(경호원)이 되든가,
아니면 낭인(떠돌이 칼잡이)이 되는것 뿐이었습니다.
나카니시는 이러한 세상의 흐름을 직시하고 무사들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줘야겠다고 마음먹습니다.
그는 목검 대련만을 고집하던 오노하 일도류의 전통을 과감히 버리고
죽도를 사용한 시합위주의 죽검술을 개발합니다.
목검은 내리치면 어디라도 뼈가 부러지지만, 죽도는 뼈가 부러지지는 않고 아프기만 무지 아프기때문에 속도감 있고도 안전한 경기가 가능했습니다.
영주들은 가신을 뽑을때 죽도시합을 벌여 무사를 평가하기 시작했고,
죽도 시합에 능한 사람은 다른 유파의 도장이나 영주의 시합 사범 내지는 식객으로 머무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신이 되지 못한 무사들은 내기 시합에 참가하거나
광대나 연기자들이 연극을 하듯이 연무(칼춤, 대련 시범)를 시연하여 그럭저럭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무사들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은 '검으로 먹고 살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줬다는 것입니다.
나카니시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급소는 죽도로 맞아도 치명상'이라는 생각에 자기만의 디자인으로 새로운 호구를 만들어 사용하게 합니다. 그것이 근대 호구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물론, 호구가 나카니시의 독자적인 아이디어는 아니었습니다.
당시 오노하 일도류와 경쟁상대이던 야규 신가게류에서는 초기부터 후쿠로 시나이(12쪽 대나무로 엮어만든 고전 죽도)와 고전 호구를 이용한 대련 연습을 행해왔었습니다.
나카니시는 이 고전 호구와 고전 죽도를 개량하여 자기만의 호구와 죽도를 만든 것입니다.)
이렇듯 나카니시의 도장에서 목검술이 아닌 죽도 검술이 발전하자, 사람들은 나카니시의 죽도검술을 일컬어 나카니시하 일도류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나카니시는 호구와 죽검술 외에도 스승의 본보기로도 많은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진정한 스승은 제자의 가능성을 개발하고 격려해 주는 것'이라는 말을 그대로 실천한 스승이었습니다.
그의 제자중에는 당대에 이름을 날린 무사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시라이 토오루는 글자 모양으로 바둑알을 던질 정도로 수리검의 달인이었고, 온나시 카마에의 마타시로가 시합할때는 마타시로의 죽도가 상대를 때리는 소리만 나고 상대의 죽도가 마타시로를 때리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고로우에몬은 특이한 사람입니다. 처음에 나카니시 도장에 입문했다가 죽도 검술에 염증을 느끼고는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사람이었습니다.
(즉, 배신의 경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돌아오고 난 후에도 절대로 죽도를 잡지 않았고, 맨날 도장 구석에서 본 연습만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카니시는 그런 고로우에몬을 받아주고, 그가 그만의 스타일로 연습하도록 허락해주었습니다.
(고로우에몬은 그런 나카니시를 스승으로서 예를 다해 모셨고, 나중에 텐신덴 일도류를 창시했을때, 나카니시 도장의 수련생들이 모자란 본 연습을 고로우에몬의 도장에서 보충하도록 했습니다.)
아마도 나카니시는 혈기에 찬 고로우에몬의 마음을 이해했던것 같습니다.
고로우에몬은 '죽검술과 진검술은 다르다! 진검가지고 죽검다루듯이 했다가는 작은 상처만 날뿐, 상대는 더욱 미쳐서 길길이 날뛸 것이다.
검의 길은 일도양단(一刀兩斷, 한번 휘둘러 두동강이 낸다)이 있을 뿐이다!' 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나카니시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일도양단의 정신으로는 먹고 살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로우에몬을 받아주고 품어주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이들은 모두 평민이하의 신분이거나 하급 무사의 자식들이었지만, 나카니시의 격려로 당대에 이름을 날리는 검객들이 되었습니다.
(한 스승 밑에서 이렇게 많은 류조와 유명인이 나온 경우는 검의 역사에서 매우 드문 경우라고 합니다.)
아사리 마타시치로의 입문에 얽인 일화는 매우 재미있습니다.
마타시치로는 원래 조개를 내다파는 상민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CEO로, 사장님으로 존경받는 계층이지만 당시의 상업종사자는 농민보다도 하급계층이었습니다.
게다가, 특정 상인을 제외하고는 절대다수가 빈곤층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는 검술을 배우고 싶었지만, 상민이고 가난했기 때문에 도장에 입문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타시치로는 매일 저녁 장사를 마치고 오는길에 나카니시 도장의 창문으로 수련하는 모습을 훔쳐봤습니다.
천하고 가난하게 취급받는 그로서는 그 이상의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몇년이고 흘러갔고, 마타시치로는 매일 저녁 창문으로 수련하는 모습을 눈물을 삼키며 훔쳐봤습니다.
3년째 되던날, 나카니시는 마타시치로를 불러들였습니다.
'네가 도장 밖에서 구경한지 오늘로 3년이다. 자네, 검술이 좋은가?'/'네! 무엇보다 좋아합니다.'
'자네, 죽도를 들어본 적이 있나?'/'아뇨.'
'보는 것도 연습이다. 네가 3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연습을 한 만큼 어느정도의 단련이 되었으리라 생각했다. 오늘부터 도장에 나오너라.'
나카니시는 마타시치로의 입문을 허락한 것은 물론, 무료로 수련하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너무나 감격한 마타시치로는 열심히 수련하여 스승 나카니시를 능가하는 실력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독립하지 않고 나카니시의 임종까지 그의 사범 대리로서 충성을 다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도장을 이어받지 않고 나카니시의 아들이 물려받게 하고 나카니시에게 대했듯이 나카니시의 아들을 위해 도장을 열심히 운영해 나갔습니다.
후에 신분이 상승하여 (무사가 된다는 것은 신분이 상승했음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성을 정하게 되었을때, 눈물을 삼키며 훔쳐보던 조개장수 시절을 잊지 않기위해 자신의 성을 '아사리'(우리말로 '조개')라고 붙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