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대구한의대 평생교육융합학과 대학원 3기 허남규
1. 꿈과 좌절의 시절
7남매의 아버지 형제분 중에서 나는 형도, 누나도 한명 없는 제일 맏이로 태어났다. 위로 큰아버지가 계신 관계로 비록 종손은 아니었지만, 어려서부터 나는 할아버지, 할머님은 물론 삼촌, 고모들의 지극한 사랑 속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4학년 경에 꼴지를 하던 학업 성적이 갑자기 머리가 트이는 바람에 중학교까지 동네에서 공부를 꽤 잘하던 아이였다.
김천의 명문고인 김천고등학교에 들어간 나는 성의고 인근에서 자취하던 상주 등 객지에서 공부하러 온 아이들과 자취방에서 매일 어울리며 놀면서 담배, 술, 포커를 배워서 인생에 있어서 큰 후회가 된 시절이기도 하다. 중학교 때부터 “조선총독 이십년사”,“대망”, 등의 어려운 정치 서적과 “죄와 벌”, “삼국지”를 비롯한 무협소설 등을 남의 집에서 빌려서 밤새도록 읽던 나의 꿈은 정치인이었고, 신문기자였다. 또한, 친구들 사이에서 “야당총재”라는 별명이 붙었던 나로서는 대학에 들어가서 1980년 “민주화의 봄”, “광주항쟁”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역사의 현장에서 타는 목마름으로 저항했던 모래시계 세대의 적극적인 참여자로 이어지는 계기가 된 것도 같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직지사에서 만난 정말 소중하고 애잔했던 첫사랑의 달콤함과 불교집안이던 내가 3년여를 새벽교회를 비롯하여 수요일은 물론 토, 일요일 까지도 교회를 빠지지 않고 다니며 사랑의 열병으로 밤을 지새우던 한 소녀를 향한 나의 짝사랑의 열정은 학업은 물론 나의 고등학교 인생 전부를 지배했던 방황의 시절이기도 했다. 비록 그녀에게 나의 뜨거운 사랑은 외면 받았지만 나의 감수성이 이때 많이 형성되고 깊어진 것 같다.
그때의 친구들과 매일 저녁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만나서 뿌연 담배연기와 깡으로 먹던 술과 첫사랑과 짝사랑으로 인생을 애기하던 친구들과는 3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암회”란 이름으로 지금도 일 년에 두 번은 전국 각지에 있는 친구들과 부부동반으로 만나고 있는 나는 행복하지만 뒤돌아보면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시기인 고등학교 시절에 학업을 소홀히 한 것은 큰
후회로 남아있다,
2. 좌절과 행복
대학입시 실패로 인한 아픔 속에서 재수를 하여 청운의 꿈을 품고 서울 이류대학에 들어간 나는 그 무렵 갑자기 집안의 쇠락으로 인한 등록금 때문에 중국집 배달, 아파트 소독 등의 많은 아르바이트를 통해 대학생활의 풋풋한 낭만은 뒤로 한 채 가난과 배고픔을 참으며 공부는 소홀히 한 채 어지러운 시대상황에 빠져든 자칭 운동권이라는 민주화운동의 한 주역이 되기도 하였지만, 최전방부대에서 하사로 군대를 마친 나에게는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쌍용시멘트 입사면접을 필두로 40여회 정도 떨어진 나는 친구 자취방에서 얹혀서 지내며 라면 한 끼도 제대로 사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자 근근이 버티던 3년여 세월동안 나의 마지막 보루였던 여자 친구도 떠나간 뒤에 나는 드디어 빈손으로 초라하게 귀향하였다.
그 후로 집안에서 2달 동안 아무것도 안하고 웅크리며 지내던 나는 정말 신기하게도 공무원 공부 일주일도 하지 않은 채 김천시청을 비롯한 4가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정말 내가 정말하기 싫어하던 공무원생활을 시작하여 28여년을 계속하고 있다. 그나마 안정된 공무원이란 직업을 택해 언제든 떠 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물론 공무원 1년 약간 지난 시절에 김천시 보건소에 다니는 아내를 만나 가정을 꾸려 1남 1녀를 두고 그런대로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평소 근무하는 도중에 항상 일탈을 꿈꾸면서 살아왔다. 주어진 일에는 소홀함이 없이 철저했지만 나의 일에 대하여 만족하지 못하고 무엇이든 새로운 것을 하고 싶다는 욕망은 건설적인 자기 발전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아무생각 없는 허황된 꿈과 한때의 쾌락으로 점철된 채 살아온 것 같아 지금은 많이 후회가 된다.
3. 장래의 나
이제 정년을 불과 몇 년 남겨두고 있지 않은 지금의 나!
앞으로 정년 후의 제2의 노년의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만 노년의 삶을 후회 없이 살 것인가? 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해야 할 시점인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이 시점에서 나는 대구한의대 평생교육융합학과 대학원 과정에 들어온 것을 너무도 잘한 선택이라 생각한다. 퇴직 후의 금전적인 어려움은 크게 없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그래도 비록 여건이 주어진다면 후학이라도 가르칠 수 있는 계기를 삼아 자기가 하고 싶은 꿈을 조금이나마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럼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의 문제에 대하여 내 나름대로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워 실천하며 살아가고자 한다.
첫째 : “9988242 건강하게 살자.” - 『돈을 잃으면 조금 잃고, 명예를 잃으면 반을 잃고, 건강을 잃으면 인생의 전부를 잃는다.』는 말처럼 수영, 테니스, 골프, 바둑, 색소폰, 드럼 등의 취미생활과 음식조절, 스포츠 댄스(사교댄스), 등산, 강변도로 산책 등의 규칙적인 운동을 통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여 건강을 지켜서 죽을 때 까지 반려자나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게 하자. (나의 롤 모델은 “전국노래자랑” 사회자 송해)
둘째 : “ 나눔과 배려의 봉사적인 삶을 살자.” - 대다수의 사람이 죽기 전에 하지 못해 후회하는 세 가지 - “좀 더 놀걸, 좀 더 즐길 걸, 좀 더 베풀 걸”이란 말이 있듯이 미리 가보았던 울릉도, 제주도를 비롯한 국내여행과 호주, 뉴질랜드, 동유럽 5개국, 중국, 대마도등의 해외여행 외에도 세계의 여행지를 1년에 한번은 부부동반으로 즐기면서 살고, “늘 푸른 교실”에서 무료봉사했던 5년여 야학교사 경험을 비롯하여 1년에 3-4회의 사회복지시설, 강변공원에서의 공연 사회 등의 봉사를 통해 재능기부 및 나눔을 실천하며 항상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다.
셋째 : “ 인생의 마무리 웰 - 다잉(Well – Dyeing) 하자.”
모든 행복의 원인은 ‘심즉생종종법생((心卽生種種法生)이요, 심즉멸종종법멸(心卽滅種種法滅)’이란 원효대사의 일체유심론(一體唯心論)에서 말하는 모든 행복의 기쁨도, 슬픔도 마음속에서 생겨나고 사라진다는 말처럼 항상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항상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읽기를 정진하여 이제껏 내가 써 놓았던 수필과 여행기를 책으로 만들어 퇴임식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지고 나의 흔적을 남기고 싶다, 또한, 자식들이 결혼하여 무탈하게 가정을 이루고 나의 소중한 손자, 손녀에게 용돈 주며 살 수 있는 여유 속에서 내 아내 앞에서 멋있게 인생을 마무리하는 웰- 다잉의 편안한 죽음을 맞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