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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이 알록달록 물들었다가 스산한 겨울로 흘러가는 섬진강. 전북 임실군 덕치에서 순창으로 조용히 흐르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엮어 낸다. 구비구비 휘어지며 흐르는 섬진강을 따라 덕치면 장산에서 시작되는 황톳길. 강물은 천담마을을 지나 순창 회룡 마을을 돌아 기묘한 바위를 쓰다듬으며 속깊은 겨울로 흘러간다. 그 강물을 따라가며 강변 마을의 이야기를 찾아간다. 시인의 마을 전북 임실에서 순창으로 이어지는 30번과 27번 국도를 따라 22㎞쯤 가면 섬진강이 모습을 드러낸다. 길 오른쪽으로는 회문산 줄기가 길게 이어진다. 덕치 초등학교를 지나 다리 하나를 건너면 바로 회문산 자연 휴양림 초입인데, 그 맞은편 길로 들어서면 섬진강과 나란히 달릴 수 있다. 콘크리트 길을 1.5㎞쯤 가면 장산이다. 산자락에는 20여 호쯤의 집들이 들어앉았고, 앞에는 섬진강이 흐른다. 드넓은 강가의 풀밭에는 흑염소들이 풀을 뜯고 있다. 멀리서 보면 검은 색깔의 바위들이 촘촘히 박혀 있는 듯하다. 메에∼메에∼, 간혹 흑염소의 울음소리가 들려올 뿐. 물풀 사이를 지나는 강물은 소리도 없이 조용조용 흐르며 갈대숲에서 들려오는 염소떼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 강물을 닮아서인지 산과 강에 둘러싸인 마을도 적막하다. 이 적막한 마을 섬진강변의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조용히 그러나 속이 옹골찬 시를 써온 시인이 있었다. 섬진강의 토박이 시인 김용택. 시인은 “긴긴 가뭄에 퍼가도 퍼가도 마르지 않는 전라도의 실핏줄” 섬진강을 흐르고 흘러, 다시 섬진강변의 ‘가을 밤’을 노래했다. 아름다운 섬진강에는 이 곳 사람들의 끈끈한 속내가 짙게 배어 있다.
시인이 도시락을 자전거에 싣고 4㎞쯤을 달려 천담초등학교로 아이들을 가르치러 오갔던 길을 밟아간다.
길은 앞을 가로막은 산줄기를 에돌며 이어진다. 강의 양쪽으로는 낮게낮게 내려앉으며 잇대어 온 산줄기들이 물길을 만들어간다. 길은 겹겹이 포개지는 산자락 사이로 희미하게 이어진다. 길에는 트랙터 한 대가 털털거리며 지나갔을 뿐,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다. 길과 강 사이로는 억새가 흐드러져 하얀 손짓을 해댄다. 휘돌던 물길은 어느새 넓은 소(沼)를 만들어 낸다. 그 수면으로 산그림자가 드리워지며 초겨울의 풍경화를 그린다. 바람이 불어갈 때마다 강의 수면은 하르르, 하르르, 잔물결을 뒤집으며 은빛 비늘을 반짝인다. 언뜻, 잔잔한 강의 물결에 어떤 움직임이 감지된다. 너무 멀어서 확인할 수 없지만, 물오리인 듯한 날짐승 세 마리가 수면을 미끄러져 간다. 그것도 잠깐, 인기척이 나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한참을 두리번거려 보아도 강에는 흔적도 없다가, 산쪽으로 열심히 날개짓을 해대며 가뭇없이 날아간다. 얼마쯤 더 내려갔을까, 강 건너편 쪽에 또 하나의 움직임이 있다. 이번에는 허리까지 강물에 잠겨 강바닥을 뒤지고 있는 사람이다. 아낙네 하나가 다슬기를 잡고 있었다. 쓸데없는 걱정으로 물었지만, 역시 “안 춥다”는 덤덤한 대답. 강 건너 바위 벼랑에는 흑염소들이 강물을 바라보며 짧은 햇살을 받으며 앉아 있다. 장산에서 4㎞쯤 가면 천담마을이다. 마을은 보이지 않고, 강물이 크게 휘도는 곳에 난데없이 큰 건물 하나가 나타난다. 옛 천담분교로 지금은 야영장으로 쓰인다고 한다. 학교 건물로 가지 않고, 둔덕을 넘으니 소복하니 앉은 마을이 보인다. 마을 곳곳에 서 있는 감나무엔 까치밥으로 남겨 놓은 쭈그러든 감 한두 개만 덩그마니 매달려 있다. 집집의 처마 밑에는 잘 깎아 싸릿가지에 꿰어 놓은 곶감이 쫀득쫀득하니 말라가고 있다. 천담마을에서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빨랫줄에 걸어 둔, 삼베를 짜기 위해 손질 중인 삼 가닥들이다.
한 30여 호 되는디, 베 짜는 집이 겁나게 많어요.” 신영동 씨(73세)는 봄이 되면 온 동네가 베를 짠다고 말한다. 겨우내 삼을 잇고, 물레질을 하고, 다시 삶아 탁한 색깔을 뺀다. 이웃집 천경숙 씨(64세)는 처녀적부터 삼베를 짰지만, “따박따박 짠 게로” 선수는 못 된다며 웃는다. 하루종일 논밭에서 땀을 흘리다 해가 저물면 섬진강에 종아리를 담그고 삽을 씻으며, 평생을 섬진강과 함께 흐르며 살아온 사람들. 섬진강변의 마을에 들러 마을 사람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재미있는 추억을 만산에 등을 기대고 강 자락에 발을 담그는 마을에는 풋풋한 인심이 아직 후하게 남아 있다. 드는 일이 될 것이다. 천담마을을 말발굽 모양으로 감싸안으며 흐르는 강을 따라 다시 길을 잡는다. 강물에는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노닌다. 그러나 섬진강도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고 있다. 곳곳이 댐으로 막히면서 물길은 느려졌고, 생활·농업 폐수가 흘러들어 가을 하늘처럼이나 맑던 물빛은 점점 뿌옇게 변하며 몸살을 앓고 있다. 강 여기저기에는 오래도록 걷지 않은 그물이 물청대를 흉물스럽게 달고 물길을 붙잡고 있다. 천담에서 3㎞쯤 내려가면 임실군의 끝인 구담이다. 산허리에 예닐곱 집이 들어앉았다. 강가에는 닥나무를 찌기 위해 돌을 쌓아 큰 ‘가마’를 만들어 놓았다. 주변에는 껍질만 남은 밤송이들이 뒹굴고 있다.
강 건너 마을은 순창군 회룡이다. 다리를 놓지 않았기에 온통 젖으며 건너야 한다. 다행히 차가 지나다닌 자국이 있어 길을 찾기에는 어렵지 않다. 강을 거너자, 서른 마리는 족히 될 흑염소떼가 마을로 들어가고 있었다. 벌써 해가 기울고 있었던 것이다. 산이 높으니 오후 3시쯤이면 벌써 햇살이 가시고 쌀쌀한 저녁이 들이닥친다. 마을을 벗어나자, 고추밭에서 고추말뚝을 뽑고 있는 노부부가 보인다. 말뚝이 잘 뽑히지 않아 힘겨워하면서도 허리 몇 번 투덕이고 나면 다시 말뚝을 잡는다. 잔잔히 흘러가는 강물만큼이나 무던하게 살아온 세월이 읽혀진다. 회룡을 지나면서 강은 벼랑 아래로 흐른다. 제법 물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온다. 차를 세우고 세상의 적막을 깨우며 흐르는 물소리를 듣는다. 오래도록 그 소리 듣다 보면 몸은 저절로 강물을 따라 흘러갈지도 모를 일이다. 이쯤에서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산줄기 사이를 헤집으며 이어지는 길이다. 흙먼지 풀풀 이는 길의 두 줄기가 뚜렷하고, 길 가운데에는 한 줄로 잡초가 무성하다. 아마도 섬진강변에서 가장 흙길다운 길이 아닌가 싶다. 회룡에서 1.5㎞ 가면 내룡이다. 장구목가든을 비롯해 민박 겸 식당이 서넛 있다. 섬진강은 내룡에 이르러 기묘한 모양의 바위들을 일부러 만들어 놓은 듯하다. 장구목가든 바로 앞에는 가운데가 움푹 패인 요강바위가 있다. 2㎞쯤 아래 큰 바위에는 마을 사람들도 언제 누가 새겼는지 모르는 ‘동호(潼湖)’라는 글자가 있다. 다만 한때 이 강변에 행세깨나 하던 양반들이 살았는데, 여름이면 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바위에 술을 부어 놓고 판소리를 하며 즐기곤 했다고 전한다. 요란스럽지 않게 묵묵히 그저 흐르는 강물, 수면에는 어느새 설풋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내룡에서 5㎞쯤 내려가면 구미리다. 이 곳부터는 포장도로와 연결되는 콘크리트 길이 나 있다.
<한국 타이어>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