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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 (한국 정치가) [金斗漢]
이정재(李丁載; 1917년 1월 6일 1961년 10월 19일) 미군정 대한민국 경찰, 정치 깡패(조직폭력배)로 활동한 인물이다.
경기도 이천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가 휘문고등보통학교로 전학하였다. 그 후 신흥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고보출신으로 공부를 잘하였는데다가 힘이 세어 싸움도 잘했으며 특히 씨름을 잘하여 고향인 이천에서 열린 전국 씨름 대회에서 3연승을 휩쓰는 승리를 거두어 황소를 10마리나 가지고 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김두한 등이 징용을 피하기 위해 조직한 주먹들의 단체인 반도의용정신대 서무계장직을 맡아 건달세계에 등장한다. 해방 후에는 미군정 경찰, 국립경찰에 몸담았다. 그는 반민특위의 특경대 요원으로 활동했다고도 전해진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1949년 6월 6일, 이승만 독재정권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해체당하고 결국 그는 경찰을 사직하고 동대문시장의 삼양상사라는 상호로 광목장사를 시작했다.
6.25전쟁 이 끝난 후 조직폭력배가 되어 1953년에 동대문 상인연합회를 조직, 회장에 취임하였다. 이 때 이성순가 이정재의 사무실에 들러 자꾸 돈을 달라고 요구 하자 그와 그의 부하들의 불만이 점점 쌓여가고 나중엔 암묵적인 그의 지시로 김동진, 이석재를 비롯한 그의 휘하에 있던 이들은 이성순을 유인해 기습, 린치하여 폐인으로 만들었다.([대한민국, 조폭을 말하다]에서 김홍빈씨는 이정재의 지시가 아니라 그의 부하들이 자발적으로 린치를 했다고 한다.)
동대문의 알카포네라고 해서 일명 동카포네라 불리기도 했으며 소련의 수상 말렌코프를 닮았다고 하여 말렌코프로 불리기도 했다. 동대문 상인연합회를 개설한 후, 조직을 체계적으로 유지, 관리하기 위해 이기붕과 연을 맺어 자유당의 당원이 된다. 또 그 당시 경무대 경찰서장이던 곽영주와는 개인적인 친분 및 동향 선배로서 손이 닿아 있었다. 1956년에는 대통령선거 당시 야당집회를 방해, 테러를 가하고 1957년에는 장충단공원정치테러사건을 저지르는 등 정치테러의 주요인물로 악명이 높았다. 그 때문에 자유당 감찰부차장이라는 직함을 받았다. 그는 정치에도 큰 야망을 보여 자신의 고향인 이천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1958년, 이기붕이 자신의 선거구인 서대문구에서 국회의원 당선이 불확실해지자 이정재에게 선거에 출마하지 말라고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이정재가 이를 거절하면서 서로 간에 겉잡을 수 없는 풍파가 일어난다. 자유당에서 경찰력을 동원하여 갖은 횡포를 부리는 바람에 이를 견디지 못한 이정재는 결국 이천 선거구를 이기붕에 양보, 자유당과 결별하고 동대문 상인연합회의 회장자리를 임화수에게 넘긴 뒤 은퇴하였다. 은퇴 후 북악산 쪽에 자리를 잡고 흉가라 불리던 한 채의 헌집을 헐고 새로 주택을 지어 거기서 은둔생활을 했다.
4.19 혁명 후인 1960년 4월 28일, 정치테러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허정 과도정부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풀려났으며 다시 장면 국무총리의 제2공화국이 들어서자 다시 체포되었으나 가벼운 형량을 선고받고 1961년 2월 10일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는 5·16 군사 정변으로 다시 쿠데타군에게 체포되었다. 처음에는 형이 가벼울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화랑동지회에 관한 내용이 폭로되어, (임화수가 폭로했다고도 함) 중형을 받게 된다. 임화수, 유지광 등 여러 폭력배들과 함께 거리에서 조리돌림을 당한 뒤 군사재판이 열린 군법회의에서 임화수, 유지광, 곽영주, 최인규, 신정식 등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고 그 해 10월 19일에 서대문형무소 형장에서 교수되었다. 당시 나이는 44세였다. 이후 그의 시신은 고향인 경기도 이천군 호법면 유산리에 묻혔는데 한때 그의 무덤은 단성사 앞 귄총저격 사건의 주인공이였던 심복 이석재가 관리했다.
유지광(1927~1988)
경기도 이천 출생 단국대학교 졸업. 군 장교 출신
이정재, 곽영주와 더불어 이천 3인방이다. 1955년, 이정재의 권유로 ‘삼우회’라는 별도 단체를 조직하여 주먹세계에 뛰어들어 동대문 주먹사단의 돌격대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이 조직은 ‘화랑동지회’로 개편하였다.
공공연하게 야당정치인 등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자들에게 테러 등으로 활약하였고, 대표적으로 야당인사들의 대규모 집회이던 1957년 ‘장충단 야당집회 방해사건’의 주동자로 활약하였다.(이 사건으로 ‘깡패’라는 명칭을 언론들이 처음 사용하였다)
장충공원 정치테러 사건, 4.18 고대생 데모대습격 사건등 숱한 정치테러의 주인공으로 활약함. 이정재 1급 참모로, 후엔 임화수의 참모로 역사의 뒷편에서 주먹을 휘두르던중 4.19를 만나 이승만 정권이 몰락하고 허정 과도정부에 의해 ‘정치깡패’로 체포된 후 징역 5년을 선고 받았다.
그러자 4.19 관련 단체들은 형량이 지나치게 낮다라는 이유로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5.16으로 정권을 잡은 쿠데타 군들의 ‘깡패소탕’으로 재조사를 받았다. 가담자는 물론이고 자신이 행한 행위까지 타인에게 덮어 씌우면서 진술하는 임화수와는 반대로 유지광은 모든 행위는 자신이 한 행위라고 진술하였다. 등급을 나누어 B급은 국토건설 노무원에, A급은 재판으로 회부하였다. 이정재, 임화수, 곽영주 등과 함께 구속되었고 이정재, 임화수, 곽영주, 신정식, 최인규 등은 사형을 유지광은 처음엔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이후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이후 복역중 대통령 특사로 형 집행정지로 자유의 몸이됨. 그후, 낙향하여 사업(동부연쇄점본부)에 몰두하며 나름대로 역사와 민족 앞에 속죄의 길을 가다가 1988년,63세를 일기로 갑자기 타계함. 저서로 ‘대명’이 있다
이미 광풍 노도의 삶과 인생을 통해 세상에 던져 놓았던 역사와 민족 앞에 참회한다던 그의 말이 세상에 남은 후배 주먹들에게 던지는 화두였다.
(나는 살아오면서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 한 적은 없다. 다만 의리와 우정을 말하면서 실상은 그러지 못했던 협객의 길이 아쉬울 뿐이다. 그런 마음으로 후배들의 인도에 나섰던 나도 사실은 마음 편하지 않았다.)
유지광의 죽음은 사분오열 치달으며 극렬한 쟁투를 벌이고 있던 국내 주먹계에 잠시 소강 상태를 맞았다. 그것은 누구랄 것 없이 인간 유지광에 대한 공과를 떠나 협객을 자처하뎐 대선배에 대한 예의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엄청난 조문 행렬이 연이었다. 찾아드는 전국 주먹 보스들은 물론, 일본 야쿠자 양대 산맥인 야마구치 구미파, 청년사파 에도 도요히사와 대판의 패자 가네야마 오사부로등 100여명 야쿠자와 대만, 홍콩, 중국 트라이어드 (삼합회) 에서까지 조문을 왔다. 또한 김두한의 후계자 조일환씨와 김두한의 벗이였던 김동희씨도 와서 그의 죽음을 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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