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주기율표 외우시느라 고생하셨죠.
멘델레예프가 주기율표를 발표한 날이 바로 1869년 오늘이랍니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 http://navercast.naver.com/worldcelebrity/history/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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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들어 1803년 한 해에만 팔라듐, 세륨, 오스뮴, 이리듐이 한꺼번에 발견된 것을 시작으로 새로운 화학 원소들이 잇달아 발견되고 있었다. 과학자들은 궁금해졌다. 도대체 세상에는 원소가 몇 종류나 존재하는 것일까? 아직도 발견하지 못한 원소들이 남아 있을까? 그리고 그것들은 어떤 성질을 지니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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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질문들에 답을 하려면 먼저 뭔가 규칙이나 원리가 필요했다. 한 세기 전 린네가 이명법을 이용해 생물을 분류하면서 분류학의 토대를 마련했듯이, 이제 뭔가 일반적인 토대가 필요했다. 돌턴의 원자설 이후, 화학은 과거 연금술의 색채를 어느 정도 벗고 과학으로 인정받는 길을 걷고는 있었지만, 아직은 미흡했다. 과학이라면 모름지기 일반적인 법칙들과 그것을 통한 예측이 가능해야만 한다. 하지만 당시의 화학은 그렇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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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미트리 이바노비치 멘델레예프는 1834년 2월 8일 러시아 토볼스키 인근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반 파블로비치 멘델레예프와 어머니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 멘델레예바의 열 네 아이 중 막내였다(형제가 정확히 몇이었는지는 문헌에 따라 다르다). 열다섯 살 되던 해 집에 우환이 겹쳤다. 교사였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가 운영을 하던 유리 공장이 화재로 불타버린 것이다.
사업가 집안 출신인 어머니는 남달리 근면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었다. 남편을 잃은 그녀는 멘델레예프와 딸 하나만을 데리고 모스크바로 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아들을 모스크바 대학에 보내려 했지만 시베리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당했다. 그녀는 아들을 데리고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 그곳 대학들의 문을 두드렸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멘델레예프의 어머니는 아들을 교원을 양성하는 학교에 입학시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곳에서 멘델레예프는 화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855년 우수한 성적으로 교사 자격을 얻었다. 한동안 크리미아에 있는 오데사라는 곳에서 교사 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화학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대학에 들어갔다. 이후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국비 유학을 다녀온 후 1864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일반 화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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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화학 교과서에 불만이 많았던 멘델레예프는 1870년 <화학의 원리>라는 책을 펴냈다. 판을 거듭하며 세계 여러 언어로 번역된 이 책을 쓰는 동안 멘델레예프는 화학 원소 사이의 관계를 알아내기 위한 연구를 했다. 당시 알려져 있던 63개 원소들 사이에 분명 일정한 규칙이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한 것이 그가 처음은 아니었다. 1862년 프랑스의 광물학자 알렉상드르 드 상쿠르투아가 원소를 나선형으로 배열하면 비슷한 성질의 원소가 수직으로 나열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1864년에는 영국의 화학자 존 뉴랜즈가 음표를 써서 원소를 배열하면 8개를 주기로 비슷한 원소들이 나타난다는 ‘옥타브의 법칙’을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시도들은 불완전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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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은 꿈과 인연이 깊은 모양이었다. 독일의 화학자 프리드리히 케쿨레가 1865년 벤젠의 고리 구조를 밝혀낸 것도 꿈 덕분이었다. 그리고 4년 후인 1869년 멘델레예프가 그토록 알아내고자 했던 원소들의 분류 규칙을 알아낸 것도 꿈 덕분이었다. 그는 종이 카드 63장에 각 원소 하나의 이름과 원자량, 성질 등을 쓴 다음 다양한 방식으로 배열해 보았다. 며칠에 걸쳐 다양한 시도를 해보았고, 심지어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기차 안에서까지 이 일에 몰두했다. 하지만 만족할 만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카드로 어질러져 있는 책상에서 연구를 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나는 꿈속에서 모든 원소들이 정확히 있어야 할 위치에 자리 잡은 표를 보았다. 꿈에서 깨어나자마자 나는 즉시 종이에 그것을 기록했다.” 몇 주 후 1869년 3월 6일, 그는 자신이 알아낸 것을 <원소의 구성 체계에 대한 제안>이란 제목으로 발표했다. 이 논문에는 수직으로는 원자량이 증가하는 순서로, 그리고 수평으로는 유사한 성질을 가진 원소들이 배열되어 있었다. 당시 다른 과학자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몇몇 원소들의 배열이 당시에 알려져 있던 것과 달랐던 것이다. 게다가 아무런 원소도 적혀 있지 않은 빈 칸도 있었다. 명백한 오류처럼 보였다. | |
하지만 멘델레예프는 자신이 작성한 표에 대단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요오드 등 자신의 표와 차이가 나는 원소들의 원자량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빈 칸에 들어갈 원소들 역시 언젠가는 발견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이듬해인 1870년에는 빈 칸에 들어갈 원소들의 특성까지 예측했다. 이제는 그를 경멸하는 과학자들까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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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간은 멘델레예프의 편이었다. 1875년 프랑스의 화학자 보아보드랑이 멘델레예프가 예측한 원소들 중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갈륨이었다. 하지만 이 원소는 그가 예측했던 것과 성질은 유사했지만 비중이 달랐다. 멘델레예프는 이 원소의 비중을 5.9라고 예측했는데, 보아보드랑의 실험 결과치는 4.7이었다. 이때도 멘델레예프는 자신이 옳으며 보아보드랑의 측정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나중에 재실험을 통해 멘델레예프의 예언이 맞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5년 후 1882년 독일의 화학자 클라멘스 빙클러가 새로운 원소를 발견하고 게르마늄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 원소에 대해 멘델레예프는 비중 5.5인 회색빛 금속일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실제 발견된 것 역시 비중 5.47에 회색빛 광채가 나는 금속이었다.
이로써 멘델레예프의 표가 확실하게 증명되었고, 화학도 이제 과학의 한 분과로 당당하게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법칙을 통한 예측이 가능해진 것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원소는 모두 117개이다. 멘델레예프가 주기율표를 작성하던 당시와 비교해 54개가 늘어난 것이다. 그 사이 주기율표 자체도 조금씩 개선되어 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멘델레예프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주기율표에서 중요한 것은 원자량이 아니라 원자번호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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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망에 빠지지 말아라, 말이 아니면 행동을 앞세워라. 신성한 진리와 과학 탐구를 위해 꾸준히 노력해라” 아들의 교육을 위해 시베리아 토볼스키에서 모스크바까지 그 먼 길을 마다 않던 어머니 마리야가 아들에게 남긴 유언이었다. 아들은 훗날 자신의 논문에 이렇게 적었다. “드미트리 멘델레예프는 어머니의 유언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정이었다. 그는 현대 화학의 초석을 놓았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멘델레예프 덕분에 나는 화학이 정말로 과학이라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1955년 101번째 원소가 발견되었다. 그 원소는 일년에 한 번 정도나 손질해 늘 더부룩한 머리와 턱수염을 한 푸른 눈의 과학자이자 이웃 농부들에게 작물 재배법, 치즈 제조법 등을 가르쳐주던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의 이름을 따 멘델레븀이라고 명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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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델레예프를 다룬 전기 중 우리말로 된 것은 <멘델레예프(주기율표의 창시자)> (마까례냐 르이셰프 지음, 전파과학사)가 유일하다. 그리고 주기율표의 발견을 주제로 한 단행본으로는 <멘델레예프의 꿈> (폴 스트레턴 지음, 몸과 마음)이 있다. 두 책 모두 절판 상태이긴 하지만 인터넷 헌책방들을 이용하면 구할 수 있다.
만약 한 권의 책만 고른다면 <멘델레예프의 꿈>을 권하겠다. 저자는 멘델레예프와 주기율표를 중심으로 화학의 역사를 요령 있고 흥미롭게 서술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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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비해 <주기율표의 창시자 멘델레예프>는 다소 밋밋한데다 러시아인 저자가 지나치게 애국적인 관점에서 멘델레예프를 묘사한 점들이 거슬린다. 그리고 한 권 더. 주기율표와 원소들을 그림과 함께 해설해 놓은 <뉴턴 하이라이트-물리 화학 시리즈(완전 도해 주기율표)>(뉴턴코리아)를 추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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