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인 전도의 모범을 보인 안드레(요 1:35-42, 6:8-9, 12:20-22)
안드레는 갈릴리 벳세다 출신으로 아버지는 요나 또는 요한이라 불렸다. 형 베드로와 함께 고기 잡는 일을 했다. 세례 요한으로부터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이란 말을 듣고 안드레와 요한은 세례 요한을 떠나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요 1:35).
안드레는 주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이제까지의 직업인 어부의 일과 장비인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는 결단이 있었다(마 4:18). 안드레는 초대교회에서 ‘프로트클레토스 = 처음제자 = 먼저 부름받은 제자’로 불렸다.
(1). 안드레는 자신의 형제인 베드로를 예수님께로 인도하였다(요 1:41-42).
안드레는 예수님께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우면서 확신이 생겼다. 그 확신이 들자 가장 먼저 형 시몬을 찾아가서 “메시야를 만났다”고 증거하며 시몬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나왔다(요 1:41). 진정한 전도는 가정 내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가정 전도는 말보다 생활로 전도해야 한다.
안드레의 전도의 특징이 개인전도라면 베드로는 대중전도를 했다. 전도에는 이 두 가지 방식이 다 필요하다.
(2). 안드레는 한 소년을 예수님께 인도했다(요 6:8-9).
디베랴 바닷가에서 5천명이 넘는 군중들이 예수님의 설교를 듣는 것에 몰두하여 배고파할 때에 예수님은 허기진 무리를 긍휼히 여기시어 먹을 것을 공급하고자 하셨다.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양식을 공급하라” 말씀하셨을 때에, 빌립은 그들을 먹이려면 2백 데나리온이 필요하다며 회의적인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안드레는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진 아이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예수님은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통해 수 많은 군중들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셨다. 예수님은 영적인 배고픔뿐 아니라 육신의 배고픔도 해결해주시는 분이시다.
*영적 안목의 사람 : 안드레는 사려 깊은 사람이며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이다. 그는 작은 것 의 가치는 보는 안목이 있었고, 작은 일을 하므로 큰일을 이루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인간 의 계산법이 아닌 하나님의 계산법을 수용하였다.
*비전의 사람 : 안드레는 한 아이의 보잘 것없는 도시락을 통해 5천명을 먹이는 vision을 가지고 있었다. 한 사람의 비전은 아주 중요하다. Edward Kimball 선생님은 보스턴의 구둣가게 수선공에서 장차 위대한 전도자의 비전을 보았다. 그가 전도한 소년이 후에 위대한 전도자가 된 D. L. Moody이다. 우리에게는 작은 일에서 큰일을 볼 수 있는 안드레의 비전이 필요하다.
(3). 안드레는 이방인 헬라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였다(요 12:20-24).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헬라인들이 직접 예수님을 뵙기 위해 빌립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그러나 빌립은 그들을 안드레에게 소개하였고, 안드레는 헬라인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였다. 이렇게 안드레는 열린 마음, 따뜻한 마음, 친절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최초의 이방인 선교사의 역할을 하였다.
영혼의 구원은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전도를 통해 얻어진다. 이것이 안드레식 개인전도이다.
♧ 안드레는 오순절 성경강림 후에 소아시아, 에베소, 그리스 등 이방 선교의 대열에 참여하고 있다. *유세비 우스 교회사에 의하면, 안드레는 러시아, 그리스, 소아시아, 터키 등지에서 선교하다가 그리스 아케아의 페 트라스에서 A.D. 69년 11월 30일에 “아멘, 주 예수여, 영광을 홀로 받으시옵소서”라는 말과 함께 X형 십자 가에 달려 순교하였다. 안드레는 스코틀랜드의 성인이 되었다. 그 나라 국기에는 파랑 바탕에 하얀 X형 안 드레 십자가가 그려져 있다.
*적용 / 1. 우리가 본받아야 할 안드레의 사역은 무엇인가?
2. 주님의 아픔인 가룟 유다(마 26:14-16, 47-50, 27:3-10)
유다라는 이름은 그리스에 대항하여 마카비우스 봉기(B.C. 167년)를 일으켰던 유대인들의 영웅 유다 마카비우스의 명예로운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대부분 갈릴리 출신인데 유다는 남쪽 출신이다.
유다는 총명하고 유능하고 큰 꿈을 가진 야심만만한 청년이었다. 세리 출신인 마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다가 회계를 맡은 것을 보면 재정적으로 많은 신임을 받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1). 가룟 유다는 탐욕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했다.
유다의 처음 욕심은 예수님을 위하여 옥합을 깨뜨려 드린 마리아의 헌신을 낭비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를 들먹이며 성금의 일부를 유용했다(요 12:3-6). 그러다가 유다는 예수님을 두고 “얼마나 주려느냐?”며 흥정하여 은 30세겔을 선불로 받는 일로 발전하게 된다(마 26:15).
불의의 재물인 피 묻은 돈은 불안과 재앙을 함께 가져왔고 결국 자신의 영혼을 파멸로 이끌고 말았다(마 27:6). 불의한 방법으로 돈을 모으면 재물과 함께 재앙도 온다.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하였고,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하였다.
(2). 가룟 유다는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실망으로 변하면서 증오심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했다.
가룟 유다는 극렬 민족주의자로서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하시니까 도무지 이해를 못하여 결국에는 외골수적인 행동을 하였다는 것이다. 신앙생활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 한다면 이런 결과를 초래한다.
(3).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죽일 의도는 없었는데 예수님의 메시야적인 능력을 충동적으로 자극하여 자 위적인 수단으로라도 행동을 유발하게 하려 했다.
이러한 플롯으로 소설을 진행시키는 것은 <Jesus Christ the Super Star>와 Hugh J. Schonfield의 <The Passover Plot, 유월절의 음모>이다. 가룟 유다는 세상적 왕국을 추구하였다. 그는 예수님께서 능력을 발휘하기만 하면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만 해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뜻과 전혀 다른 길을 가는 예수님을 몰아세워서라도 기대를 관철시켜보려고 가룟 유다는 극단적 행동을 감행했다.
유다는 몸은 예수님과 같이 동행했지만 마음은 영 다른 곳에 있었다. 유다는 예수님을 위해 자신이 쓰임을 받으려 하기보다는 자신의 목적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였다. 유다의 더 큰 비극은 자살로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저버린 데에 있다. 유다는 ‘그의 곳’으로 갔다(행 1:25). 원수까지도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은 능히 유다를 용서하실 수 있었지만 유다 자신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 죄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하나님의 은혜는 내 죄보다 훨씬 더 크다.
** 마리아와 가룟 유다 / ①. 마리아는 주님을 위해 3백 데나리온 가치도 더 되는 향유를 아낌없이 깨뜨려 헌신하고자 했으나, 유다는 예수님을 이용해서 30데나리온을 벌려고 했다. ②. 마리아는 예수님을 섬김의 대상으로 보았으나 유다는 예수님을 이용의 대상으로 보았다. ③. 마리아는 예수님을 3백 데나리온어치의 향유를 한순간에 부어도 아깝지 않은 귀한 분으로 높였으나, 유다는 은 30데나리온에 팔 정도로 예수님을 평가절하였다.
♧ 훌러신학대학교의 교수 Ray S. Anderson의 「가룟 유다로부터 온 복음」 : “유다야, 집으로 오너라. 모든 것이 다 용서되었다.”라는 프롤로그로 시작한다. 앤더슨은 “사랑하는 것은 배신당할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다른 죄와는 달리 배신은 사랑하는 사람을 파멸시키기 위하여 그의 사랑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배신당하지 않는 길은 결코 사랑하거나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적용 / 1.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내 뜻을 고집하고 있지는 않은가?
3. 최초의 순교자 야고보(눅 9:51-56, 막 10:35-45, 행 12:1-2)
야고보는 가버나움 게네사렛 호수가에서 베드로와 어부로 일하다가 형 요한과 함께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주님의 으뜸 세 제자가 되었다(눅 5:10). 야고보의 아버지는 세베대이고 어머니는 살로메이다.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야고보는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제자로 예수님의 사역을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었다. 베드로의 장모를 고칠 때도,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릴 때도(막 5:37), 변화산의 체험도(마 17:1-2),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도 야고보는 예수님 곁에 있었다(막 14:32-33).
(1). 야고보는 다혈질적이고,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을 “보아너게 = 우뢰의 아들”라는 별명을 붙여주실 정도로 야고보는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막 3:17).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기 위해 지름길인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고자 하셨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이 마을을 통과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이 때 다혈질의 야고보는 흥분하여 사마리아인들을 향해 저주하며 예수님께 “불을 명하여 저희를 멸하소서!”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야고보를 책망하시며 우회하여 먼 길로 돌아가셨다(눅 9:51-56).
예수님은 민족적 편견과 복수를 반대하신다.
(2). 야고보는 과도한 야망가이다(막 10:35-45).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과 함께 십자가의 능력을 말씀하실 때에(막 10:32-34)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가 예수님에게 “주의 영광 중에서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주소서!”라 요청하였다(마 20:21). 야고보 형제의 세속적인 야망 때문에 제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다.
야고보 뿐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무엇인가를 추구한다. 프로이트는 그것을 “사랑받고 싶은 욕구”라 했고, 칼 융은 “안전에의 욕구”라 했고,. 알프레드 아들러는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구”라 했다.
예수님과 동행하면서도 同床異夢을 꿈꾸며, 예수님께서 마셔야 할 잔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왕관을 원했던 야고보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 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막 10:38)는 말씀을 하셨고,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말씀하신다.
우리가 추구할 것은 위대함이 아니라 섬김이어야 하고, “무엇이 되느냐”보다는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
(3). 야고보는 진정 변하여 주의 제자가 되었다(행 12:1-2)
야고보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과 오순절 성령강림의 체험 이후 변하여 주님을 위해 희생하는 제자가 되었다. A.D. 44년 헤롯 아그립바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였는데 이때에 야고보는 첫 순교자가 되었다. 성서에 기록된 제자의 죽음은 가룟 유다와 야고보뿐이다.
야고보는 주님의 제자들 중 최초의 순교자이다. 주님의 제자들 가운데 먼저 죽은 사람은 가룟 유다로 자살로 죽었고 그의 빈자리는 맛디아가 차지했다. 제일 먼저 순교한 제자는 야고보인데 그가 죽은 뒤 그 자리는 채우지 않았다. 왜냐하면 야고보는 순교함으로써 자기의 자리를 지켰기 때문이다.
교회 전승에 따르면 야고보는 오순절 이후 10년 동안 스페인까지 선교하고 돌아온 후에 순교하였다 한다. 야고보는 스페인의 성자가 되었다.
*적용 / 1. 내 기질의 단점을 보안하기 위하여 성령의 열매 가운데 무엇이 특별히 요구되는가?(갈 5:22-23)
2. 나의 소망은 과연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검증된 것인가?
3. 나의 사명은 심판하는 일인가? 아니면 전도하느 일인가?
4. 새출발한 제자 마태(눅 5:27-35, 마 9:9-13, 막 2:14-17)
마태는 가버나움에서 세리로 일하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이다. 당시 세리는 정치적인 이유로 유대인들로부터 믿음을 받았고, 과중한 세금을 착취한다 하여 백성들로부터 매국노로 멸시받았다. 유대인들은 돈을 위해 몸을 파는 창기와 돈을 위해 영혼과 나라를 판다며 세리를 싸잡아 죄이라고 낙인 찍었고, 회당 출입도 금지하고 헌금이나 자선금도 받아주지 않았다.
(1). 욕된 자리에서 복된 자리로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마태의 이름을 “레위”라 기록하였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이름은 레위였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선물’이란 뜻의 “마태”라는 새 이름을 주셨다. 예수님은 충성스런 믿음의 사람에게 새 이름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과거의 레위가 예수님을 만난 후 새로운 제자 마태로 변한 것이다.
예수님은 욕된 자리에 앉아 있는 레위에게 “나를 좇으라!”며 복된 자리로 부르셨다. 예수님은 세상의 길로 살아가는 인생을 하나님 나라의 길로 초대하신다. 예수님의 초청은 방향전환을 요구하신다. 방향전환이 회개이다.
(2). 초청에의 순종
예수님의 초청에 대하여 마태는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눅 5:28) 즉시 응답하였다.
*첫째, “모든 것을 벼려두고” 도마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대가를 치렀다. 이제까지는 돈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는데, 이제 더 값진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 마태는 예수님의 초청을 어떤 금은보다 더 귀한 것으로 여겼기에 물질적인 희생을 치르고 주님을 따랐다. 과거에는 자기의 영혼을 팔아 부를 축적했던 레위가 부를 버리고 생명을 구하는 길로 접어들었다.
*둘째, “일어나 좇으니라”는 것은 새 삶을 향한 결단과 용기를 보여주고 있다. 시편 1편에 ‘복 있는 자의 길’이 있는데 마태는 죄인의 길과 오만한 자의 자리를 청산하고 예수님을 좇았다. 획기적인 결단으로 변화된 마태는 “예수를 위하여 큰 잔치를 열었다”(눅 5:29). 마태의 잔치는 자기를 불러주시고 구원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잔치이다. 진정으로 예수를 영접하는 사람에게는 마태처럼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잔칫집이 될 수 있다.
(3). 죄인과 함께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마태를 부르신 사건은 2가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첫째 논쟁은“예수가 왜 세리와 죄인들과 자리를 함께하느냐?”이다(눅 5:30). 이 질문은 ‘의로우신 메시야라면 왜 죄인들과 사귀는가?’에 대한 반문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31-32절) 대답하셨다.
*둘째 논쟁은 “바리새인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예수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느냐?”이다(33절). 마치 금식하는 것이 참된 경건과 신앙생활의 표준처럼 말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신앙생활은 금욕이 아니라 신랑과 함께 잔치하는 생활이라 말씀하셨다(34-35절). 의식적이고 율법적인 유대종교로는 생명력을 가진 예수님의 복음을 이해할 수가 없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장부기록의 전무가인 마태는 예수님의 기사를 기록하는 복음서의 기자가 되었다. 그는 동족 유대인들을 위해 마태복음을 집필하였다. 마태복음에는 마태의 부름받은 기록 사건 외에는 아무 내용도 없고 오직 예수님만을 드러냈다. 마태는 유대를 중심으로 사역하다가 아리비아와 에티오피아까지 나아가 선교하다가 칼로 베어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마태는 T형 십자가에 매달렸다.
*적용 / 1.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아직도 놓지 못한 세상 줄은 없는가?
2.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있었던 나의 재능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 어떻게 쓰이고 있는가?
(1). 도마의 용감한 비관주의
나사로가 죽었다는 전갈을 받은 예수님께서 베다니 마을로 다시 들어가시고자 할 때에 제자들은 유대인들의 위협이 도사리는 베다니에 들어가는 것은 막았다(요 11:8). 그래도 예수님께서 베다니로 가신다 하자 도마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며 큰소리쳤다(요 11:16). 여기에 도마의 용감한 비관주의(Brave Pessimism)가 나와 있다. 언뜻 보기에는 도마의 충성심, 의리와 용기를 볼 수 있지만 그것도 그의 비관적인 성격에서 비롯된 말이다(부정적 시각으로 볼 때).
(2). 도마의 솔직한 질문
예수님께서 고별설교(요 13장~16장)를 하던 중에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13:2-5) 말씀하자 도마는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못하는데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반문하였고,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6절) 대답하셨다. 도마를 긍정적 시각으로 본다면, 그는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지 않았고 믿지 못하는 것을 믿는 척하지 않았다.
(3). 믿음을 추구하는 의심
제자들이 주님의 십자가 흔적과 부활하심을 목격(요 20:20)하고 큰 기쁨을 도마에게 전했으나 도마는 부활의 주님을 믿지 않았다(요 20:26). 그러나 예수님은 의심하는 도마에게 나타나시어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며 도마의 의심을 풀어주었다. 여기서 도마는 깨어진다.
도마는 의심 많은 사람의 대명사가 되었지만 그러나 회의론자와는 차이가 있다. 회의론자와 이성주의자는 처음부터 불신앙을 추구하지만 도마는 믿음을 추구하면서 생기는 의심을 풀어보려 갈등하였다. 도마에게는 십자가 흔적만이 믿음을 줄 수 있다 여겼다. 의심은 있지만 일단 확신이 서면 확실하게 결단하는 사람이 도마이다.
(4). 확신 이후의 도마
의심이 확신으로 바뀐 후 도마는 “나의 주시며 나의하나님이십니다!”(28절) 신앙고백을 한다. 이에 예수님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9절) 말씀하셨다. 세상에는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에 종속시키며 사는 믿음의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에 종속시켜 살아가는 불신앙의 사람이 있다. 보지 않고 믿는 우리는 도마보다 더 복된 사람이다.
♧ 성령강림 체험 이후 도마는 페르시아를 지나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했다. 도마는 제자들 중에서 가장 멀리까지 복음을 들고 간 사람이다. 도마는 칼라미나(Calamina)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로 창에 찔 려 순교를 했다 한다. 마드라스에 그의 무덤이 있으며 토마스 기념교회에서는 “나는 당신은 예배하나이다” 라는 도마의 마지막 말이 적혀 있다 한다.
*적용 / 1. 도마의 행적에서 배울 것은 무엇인가?
2. 믿음생활에서 의심과 무관심은 어떻게 다른가?
3. 나에게도 도마처럼 예수님을 향하여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있는가?
6. 반석이 된 제자 베드로(마 16:13-25)
안드레의 소개를 받은 예수님은 어부 시몬에게 “게바라 하라”(요 1:42) 하셨다. 게바는 아람어로 “베드로, 반석”이 된다. 베드로는 제자가 되기 전에 이미 결혼을 한 상태였고, 다혈질적이고 급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시몬이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전혀 고기를 잡지 못한다(눅 5:2). 그 때에 예수님은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4절) 말씀하셨는데 놀랍게도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혔다. 그러자 시몬은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8절)라 고백하였다.
베드로의 반복되는 3가지 패턴을 볼 수 있다. 첫째는 그의 실패, 둘째는 실패를 통한 깨달음과 고백, 셋째는 예수님의 용서와 사명의 선언이다.
(1). 베드로의 실패
①.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갔을 때에 황홀한 체험을 하게 된다. 베드로는 주님께 현실과는 동떨어진 현실 도피성의 건의를 올린다(눅 9:28-36).
②. 풍랑 이는 바다 이를 걸어 오시는 예수님을 보자 베드로는 “나를 명하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청하며 물위를 걷다가 파도를 보고 의심이 생겨 그만 바다에 빠졌다 그러자 예수님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 심하였느냐!” 나무라셨다(마 14:28-33).
③.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예언하시자 베드로가 주님의 십자가를 만류하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 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가 나를 좇을 것이니라”는 책망을 받았다(마 16:21-23).
④. 예수님이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저는 죽일지언 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며 장담을 하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끝내 주님을 세 번 부인하였다(마 26장)
(2). 베드로의 깨달음과 고백
①. 베드로는 끝내 예수님을 부인한 후에 철저히 깨지는 실패의 경험을 통하여 용서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예수님께 “주여, 저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는 고백을 한다. 그의 고백에 예수님은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막 1:17) 말씀하셨다.
②.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마 16:16)는 고백에 예수님께서는 “너 의 반석(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마 16:18) 말씀하셨다.
③.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반복된 질문에도 베드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 나이다!”(요 21:15)는 고백을 하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고 먹이라!”(요 21:17) 말씀하셨다.
(3). 예수님의 사명 선언
실패와 고백을 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는 사명을 선언하셨다. 사명을 받은 베드로는 사람을 낚는 어부로, 양을 치는 목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한다.
♧ 유세비우스의 교회에 의하면, 베드로는 로마에서 순교할 때에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게 된다.
*적용 / 1. 베드로는 어부 생활의 실패를 통하여 주님을 만났다. 나의 실패를 통해서도 주님께서 새로운 역사 를 이루실 것을 믿는가?
2. 베드로의 삶에는 실패와 고백과 사명이 반복된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3. 하나님 나라의 반석이 되기 위하여 특히 어느 부분을 다듬어야 되겠는가?
4. 나의 믿음생활은 내 의지에 기초한 것인가, 아니면 성령의 역사에 의존한 것인가? 어떻게 하면 약 한 육신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가?
7. 신중한 제자 빌립(요 1:43-46, 6:5-7, 12:20-22)
빌립은 베세대 출신으로 직업은 어부였는데, 예수님이 빌립의 가능성을 보시고 그를 부르셨다(요 1:43-46).
(1). 빌립의 신앙은 말씀에 기초한 신앙이다.
빌립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찾았다!(I found him!)” 외쳤다. 그리고 친구인 나다나엘을 찾아가 “율법에 기록하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를 만났는데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이니 와보라!” 전하였다(요 1:46-47). 빌립은 말씀(O.T)에 기초하여 예수님을 살펴보았고, 확신이 든 후에는 확신한 예수님을 전하는 적극성을 가졌다.
(2). 빌립은 이성적 판단이 앞서는 신앙인이다.
예수님이 빌립을 시험하려고 “어디서 떡을 사서 이 무리들로 먹게 하겠느냐?”라 물으셨을 때에 빌립은 “각 사람에게 조금씩 거둘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합니다”라며 이성적인 답변을 하였다(요 6:1-7). 빌립의 대답을 해석하기에 따라 2가지 판단을 할 수 있다. 첫째, 부정적인 면에서 빌립은 계산부터 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불가능하다는 판단까지 곁들여 부정적인 답변을 했다. 둘째, 긍정적인 면에서 빌립은 베드로처럼 성급하지 않고 신중함을 보였다는 점이다.
예수님이 빌립에게 던진 질문은 敎育의 차원에서 던진 질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빌립에게 듣고자 했던 대답은 “저희 생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하실 수 있는 줄 믿습니다”이다. 인간적 사고에 집착하면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지 못한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빌립과 같은 사람을 위한 기적이라 할 수 있다. 믿음과 이성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성적 믿음만 강조하면 현실주의가 되기 쉽고, 반대로 맹신적인 믿음은 공상주의가 되기 쉽다.
(3). 빌립은 하나님을 보고자 하였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하나님을 보았다”(요 14:7) 말씀하시자 빌립은 예수님께 “주님,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소서!”(8절)라 요청하였다. 빌립은 모르는 것과 의심나는 것을 주님께 직접 확인받으려는 솔직함을 보였다. 또 하나님을 진심으로 보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기도 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나는 아버지 안에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시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설명하셨다(11절). 즉,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말씀이다.
♧ 빌립은 소아시아 선교와 히에라폴리스를 중심으로 복음사역을 감당하다가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그는 나 무기둥에 거꾸로 매달려 죽음을 당했다 한다. 빌립은 순교할 때에 자신의 시신을 세마포 대신 갈대로 싸달 라 하였다.
*적용 1. 예수님에 대한 나의 믿음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것인가?
2. 나는 실제 생활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얼마나 믿고 사는가?
3. 행위를 결단하는 데 이성적인 판단과 신앙적인 판단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
8. 사랑의 제자 요한(눅 9:49-50, 요 19:26-27)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들 중 제일 어린 나이인 10대 후반에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하여 가장 오랫동안 생존한 제자이다. ‘우뢰의 아들’이라 불리울 정도로 야심만만하고 욕심 많던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통하여 ‘사랑의 사도’로 변모하였다.
①. 요한은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예수님 곁에 앉아 주님의 품에 의지하여 누운 제자이다(요 13:21-25).
②. 예수님이 붙잡혀 가실 때에 대제사장의 뜰까지 예수님을 따라간 ‘다른 제자 하나’가 요한이다(요18:15-16). 사랑은 늘 함께 하는 것이다. 어려울 때 같이 할 수 있는 것이 참 사랑이다.
③.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제자였다(요 19:26-30).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갔지만 요한은 끝까지 예수님 곁에 남아 주님의 마지막 길을 동행하였다.
④. 요한은 예수님이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할 정도로 신뢰와 사랑을 받은 제자이다(요 19:26-27). 에 베소에는 요한이 마리아를 돌본 유적지가 있다고 한다. 요한은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시고 평생을 봉양하 였다.
⑤. 요한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은 후 제자들 중 제일 먼저 무덤으로 달려갔다(요 20:2-8).
⑥.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도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사랑하시는 제자”(요13:23, 19:26)· “또 다른 제자” 등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을 드러내기 위해 복음서를 기록하였다.
⑦. 요한은 복음을 증거하다가 도미니안 황제 치하에 밧모 섬에 유배당했다가(계 1:9), 98년경 풀려나 에베소 로 돌아와 100년경 90세의 나이로 주님의 부름을 받았다.
요한은 제자들 중 유일하게 순교를 당하지 않고 자연사를 하였는데 아마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 의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적용 1. 무엇이 ‘우뢰의 아들’이었던 요한을 “사랑의 사도”로 변화시켰는가?
2. 나는 요한처럼 일평생 주님을 위해 사는 ‘살아 있는 순죠자’가 되길 원하는가?
9. 하나님께만 알려진 제자 작은 야고보(막 3:13-19)
성경에는 작은 야고보에 대한 기록이 적다. 작은 야고보는 세베데의 아들 야고보나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同名異人이다. 작은 야고보는 열심당원으로 있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작은 야고보는 골고다에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멀리서 지켜보았고(막 15:40),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것을 보면 작은 야고보는 사람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하나님께는 인정받는 제자라 할 수 있다.
교회 전승에 의하면, 작은 야고보는 스페인 콤포스텔라까지 가서 선교하다가 돌에 맞았으나 죽지 않으니 톱으로 켜서 죽음을 당했던 충성스러운 제자이다.
작은 야고보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섬긴 제자라 할 수 있다. 교회는 작은 야고보와 같은 조명을 받지 않는 음지와 후미진 곳에서 일하는 신실한 일꾼이 많아야 한다.
*적용 1. 나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묵묵히 섬기고 있는가?
2. 교회 안에는 자기를 드러내려는 스타 증후군이 있는데 (Star-syndrome) 어떤 것들이 있는가?
10. 하나님께 열정을 바친 제자 유다와 시몬(눅 6:12-16, 14:22-23)
성경에 유다와 시몬의 행적이 잘 알려지지 않은 제자들이다. 유다는 ‘다대오(막 3:18)· 야고보의 아들 유다’(눅 6:16)로 소개되었고, 시몬은 ‘가나안 시몬(마 10:4), 셀롯 시몬’(눅 6:15, 행 1:13)로 소개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극과 극의 사람인 마태와 같은 세리와 열심당원인 유다와 시몬을 함께 제자로 삼아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같이 일하는 일꾼으로 만드셨다.
(1). 민족 해방을 꿈꾸는 열심당원
작은 야고보와 가룟 유다처럼 유다와 시몬은 로마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을 벌였던 열심당(Zealot) 출신이다. 열심당원은 극렬 민족주의로 “하나님 외에는 어떤 왕도 없고, 성전 세금 외에는 어떤 세금도 없으며, 열심당원 외에는 어떤 친구도 없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로마 정권에 항쟁하다가 A.D. 73년 최후의 요새 마사다가 함락되기 전날 960명이 자살로 끝까지 로마에 항쟁하였다.
혁명을 꿈꾸던 유다와 시몬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타락한 종교 지도자의 허위의식을 책망하고, 특별히 병들고 소외되고 가난하고 약하고 억눌린 자를 돌보는 것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성서학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이니까?”(행 1:6)라 물은 제자가 시몬이라 주장한다.
(2). 민족 중심의 열심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열심으로 변화된 제자
유다와 시몬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때에 열심의 방향이 바뀌는데 민족에 대한 열정이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바뀌었다. 사도 바울도 율법에 대한 열심이(행 22:3, 빌 3:5-6) 다메섹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 영혼 구원의 열심으로 바뀌었다. 유다와 시몬의 민족 해방에 열망 때문에 예수님을 이용하고자 했으나 성령충만을 받은 후에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제자로 변화되었다. 우리도 유다와 시몬처럼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가지고 헌신해야 한다.
♧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 의하면 유다는 남부 러시아인 에데사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 유다의 행적은 외경 <다대오 행전>에 기록되어 있다. 유다는 아르메니아와 커디스탄에까지 나아가 선교하다가 활에 맞아 순교했다. 시몬은 소아시아오 이집트, 흑해를 건너 영국에까지 복음을 전하였다.
*적용 1. 나는 무엇에 가장 열심을 내는가?
2. 나의 사명을 한 문장으로 쓴다면, 어떻게 쓸 것인가?
11. 경건한 사람 나다나엘(요 1:43-51)
‘하나님의 선물’이란 뜻의 나다나엘은 바돌로매와 동일한 인물이다(마 10:3). 공관복음에는 바돌로매로 나오고 나다나엘이라는 이름은 없는 반면에, 요한복음에는 바돌로매라는 이름은 없고 나다나엘이라고 나온다. 복음서에 나다나엘과 빌립 또는 나다나엘과 빌립과 짝을 이루어 소개하는 것으로 보아 동일인임을 알 수 있다.
(1). 종으로 오신 그리스도
빌립이 친구 나다나엘에게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요 1:45)는 소개에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46절)며 편견적 반문을 한다.
이사야의 말씀처럼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53:2) 예수님은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빌 2:7).
(2). 좋은 점을 먼저 보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향해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는 말씀으로 나다나엘의 좋은 점을 보셨다. 주님은 우리의 많은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가능성을 보신다.
의아해 하는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48절)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 밑에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경건한 나다나엘을 보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나다나엘은 예수님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9절)라고 고백하였다. 비로소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면서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
♧ 주의 제자가 된 나다나엘은 브릿지아,히에라폴리스, 중앙아시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그리고 인도까 지 선교를 하였다.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아르메니아 알바노폴리스에서 A.D. 40년에 칼에 베여 순교 를 당하기까지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게 된다.
*적용 1. 어떤 때 편견이 생기는가?
2. 나다나엘이 편견이 믿음으로 바뀌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
3. 나는 하나님을 만나는 나만의 은밀한 무화과나무를 가지고 있는가?
12. 보충된 제자 맛디아(행 1:12-26)
가룟 유다를 대신할 새로운 제자를 선출할 때의 자격 요건은, 첫째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따라 함께 다니던 사람중에서 선출한다(행 1:21-22). 둘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본 사람 중에서 선출해야 한다는 것이다(22절). 이 두가지 요건을 갖추어 추천된 사람은 요셉과 맛디아이다. 요셉과 맛디아 중에서 한 사람 선출을 위해 기도하였고 제비를 뽑아 선출된 사람이 맛디아이다.
맛디아는 사도 중의 한 사람으로 사명을 감당하였다(행 6:2, 9:27).
♧ 교회 전승에 따르면 맛디아는 에티오피아에까지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고 목매달려 순교한 것으로 알려 졌다(A.D. 61년이나 6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