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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사조》(성기조, 1995, 한국문화사)를, 《한강문학》에서 ‘문학도의 필독서’로 선정하여, 17호(여름호)부터 권두에 분재한다.〈편집자〉 * 강좌 순서 ⟹ 고대문학, 중세의 서양문학, 근세문학, 현대문학, 작가연구 |
〈책머리에〉
문학을 공부하는 이들의 고민은 한국문학만 가지고는 세계문학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좋든 싫든 간에 세계문학을 이해하여야 하고 동서 문화가 눈부시게 교류하는 홍수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이러한 일은 세계 속에서 한국만 존재할 수 없고 그 속에서 우리는 살아야 하며, 세계 여러 나라의 문학을 이해하면서 한국문학을 공부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문예사조는 한 시대의 문학예술의 기초가 되는 사상의 뚜렷한 흐름이나 경향을 말한다. 문학이 시대의 반영물이란 사실을 말하지 않더라도 한 시대를 휩쓸고 간 사상이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문학작품을 올바로 알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동, 서양 각 국의 문학을 훑어보고 문예사조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편찬하였다. 우리나라에는 문예사조에 관한 자생적인 이론이 없기 때문에 서양의 문예사조를 공부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접근해 온 것이 사실이지만 이제부터는 우리의 이론을 개발할 처지에 와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기 위하여 서양 문예사조를 자세하게 공부하고 우리의 문학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가 생각해 보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단행본 《문예사조》는 문예사조를 쉽게 이해하려는 많은 사람들의 욕망에 부응하기 위하여 아주 간결한 내용으로 편집하였다. 알맞은 분량만 뽑았으며 독자적인 이론이나 논리보다는 세계 여러 나라의 문예사조를 이해하고 그 터전 위에서 우리의 문학을 깊고 넓게 이해하려는데 필요한 책으로 엮기 위하여 많은 책을 참고하였다.(참고한 책은 註에 밝혀 놓았다)
문학은 언어를 매개로 하는 예술이기 때문에 많은 작품을 읽어야 한다. (따라서)작가와 작품에 관하여 될수록 많이 소개하고자 노력했으나 한정된 지면 때문에 그러하지 못한 것을 양해 바란다.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1995년 5월, 多樂里 靑荷軒에서 엮은이 씀)
고대문학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 할 때, 흔히 ‘문학이란 근본적으로 언어라는 매체를 통한 삶의 표현이다’라는 허드슨Hudson의 정의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문학은 인간이 만들어 낸 창조물이라는 점을 상기하면서 인간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문학의 역사란 참으로 짧은 것임을 알게 된다.
지구상에 생명체가 탄생한 것은 35억 년 전이며, 그로부터 30억년이 넘는 세월이 지난 350만 년 전에야, 비로소 두 발로 직립보행을 하는 우리 인류가 태어났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구체적으로 더듬어 볼 수 있는 인류의 역사란 아무리 길게 거슬러 올라가도 만 년을 채우지 못하는데, 하물며 인간이 만든 ‘언어’라는 매체를 통해서 표현되는 문학의 역사는 어떠하겠는가.
세계문학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서양에서는 기원전 8, 9세기 경(혹은 기원전 10세기 경)에 살았다는 호메로스Homeros가 남긴 두 편의 서사시 《일리아스Ilias》와 《오딧세이Odysseia》에서, 그리고 동양에서는 B.C 11~8세기경에 이루어진 중국의 《시경詩經》을 찾아 볼 수 있을 뿐이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기원전 3,000년 경 티그리스강 유역에 살던 슈메르족에 의해 지어지기 시작했다는 《길가메슈》와 역시 기원전 2,000년경에 이뤄진 인도의 《베다》 문학 등을 찾아 볼 수 있지만, 그 앞의 기나긴 문학의 역사는 공백으로 남겨지게 된다.
문예사조란 그 시대의 문학적 정신 혹은 특성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한 시대의 문학적 정신이나 특성은 짧게 보면 변화를 실감할 수 없지만, 문학사의 조류를 따라 살펴보노라면, 변화와 굴곡의 연속임을 알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문예사조를 조망하는 일이란 ‘문학정신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을 전제로 한 통시적인 작업’임을 알게 된다.
문학사 시간에 배우던 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자연주의 등의 순으로 열심히 외어 대던 바로 그 문예사조의 구체적인 전개 과정은 어떠하였을까?
본 장에서는 이러한 질문을 전제로 먼저 고대 동, 서양의 문학이 어떻게 태동되었으며, 또 어떠한 정신사적 바탕에서 출발하였는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역사란 잃어버린 부분이 허다한 그림 맞추기’라는 역사가들의 푸념을 실감하게 될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서양문학의 근원지로서의 고대 그리스와 로마, 그리고 동양문학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고대 중국과 인도, 이집트 등의 문학적인 편린들을 통해 현대문학의 뿌리를 찾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관계
인류 역사의 근저에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라는 두 개의 상반된 정신적인 흐름이 존재한다.
헬레니즘이란 고대 그리스인들이 자기 나라를 ‘헬라스’라 부른 사실을 바탕으로 독일의 역사학자 드로이젠Johann Gustav Droysen(1808~1884)이 고대 그리스인들의 문화와 그들의 이상, 생활양식 등의 정신적인 근저를 헬레니즘이라 명명하면서 유래된 그리스 정신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헤브라이즘은 유대민족이 역사적으로 많은 방황을 거듭함으로 인해 그들을 ‘헤브라이’(방황하는 자)라 칭한 데서 기인한다. 즉, 고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던 시대의 정신적 종교 사상과 도덕률을 그 중심 내용으로 한 기독교 정신과 그 지향성을 헤브라이즘으로 부른 것이다.
1. 헬레니즘
가. 헬레니즘의 형성
헬레니즘이란 알렉산더 대왕 이후 로마제국이 탄생하기까지 그리스를 중심으로 약 300년간에 걸쳐 발흥된 그리스의 정신으로 주로 아테네의 문화 또는 그리스 문화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구체적으로는 알렉산더 대왕 사후에서 기원전 30년 로마의 이집트 병합,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대제까지의 약 300년간에 걸친 그리스 문화가 오리엔트 문화와 융합, 형성된 세계적 성격의 문화를 뜻한다.
그리스인들이 오리엔트 지역을 지배하게 되면서 서방과 동방, 그리스와 미개민족들의 경계선이 제거되고, 계층들 사이의 경계선이 흐려졌다. 또, 도시국가(폴리스) 시민 이념이 소멸하고, 국가는 경제적 능력에 따라 사람들의 우열을 판가름하는 이익 공동체로 추구되었다. 그리하여 종래의 귀족 계급이 퇴조하고, 경제적 실력에 의존하는 시민적 지배계층이 출현하면서, 여러 민족들을 정치적, 경제적으로 통합하는 한편 사상, 종교, 예술 등에서 코스모폴리타니즘을 형성한 헬레니즘 문화가 탄생된 것이다.
나. 헬레니즘의 특성
① 현세적 인간중심
헬레니즘의 첫 번째 특성은 현세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을 들 수 있다. 그리스인들은 예술, 정치, 철학 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 인간의 가능성을 믿고, 인간중심적, 육체적, 본능적인 것을 추구하였다.
그들은 이 인간 세상을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으로 보아 현세에서의 즐거운 삶을 추구하였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한 프로타고라스Prόtagoras의 말이 이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헤브라이즘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곧 쾌락과 자유를 추구하는 이교적異敎的인 것이 되지만, 후세의 사람들에게는 인간의 지성과 감성을 자유롭게 발휘하여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정신적 태도를 전해 준 것이다.
특히 헬레니즘 시대에 전기傳記와 자서전自敍傳이 인기를 끌었다는 점1)은 ‘인간적인 기록’이 갖는 가치가 한층 더 높아진 데서 기인한 것이다. 이러한 인간중심적, 현세 중시의 태도는 후에 르네상스기에 이르러 새롭게 부활되면서, 서양의 모든 문화와 문학의 원동력이 된다.
② 이성과 합리주의
기원전 5세기 경 그리스에서는 모든 영역에 걸쳐 합리주의 정신이 정착된다. “헬레니즘의 최고 이념은 사물을 존재하는 그대로 보는 것”이라고 한 메튜 아놀드의 말에서 잘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이성에 의한 진리추구에 노력하였다.
그 결과 앞 시대에 만연했던 인종차별, 혹은 계층 간의 차별이 평준화되고, 경제상의 자유 경쟁을 저지하는 모든 전통이 폐지되었다. 뿐만 아니라 학문 및 예술상의 활동도 초국가적으로 조직되며, 신분상의 제약들도 없어지게 되고, 정신영역에서도 분업의 원리가 확립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인들은 이성과 지성을 중시하게 되었고, 모든 현상에 대한 객관적이고 공정한 판단을 추구하는 합리주의적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객관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정신은 초기에 탈레스Thals, 피타고라스Pythagoras 등의 학자들을 거쳐 유명한 역사가 헤로도투스Hrodotos에 이르러 완숙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합리주의 정신은 ‘헬레니즘시대에 이루어진 학문적 업적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특징일 뿐만 아니라, 헬레니즘의 모든 특색 중 가장 현대 정신에 가까운 것’2)이라 할 수 있다.
③ 조화와 통일성
기원전 6세기에 이르러 예술의 생명인 미의 조화와 통일성을 중요시하는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원리를 발견하였다.
그 전 시기까지는 예술에 있어서 통일성이라는 명제가 중요시된 것은 아니었다. 즉, 전대에는 상류계급의 엄격한 형식주의적 예술양식과 더불어 형식적으로 보다 자유로운 하층계급의 예술양식이 병존하는가 하면 보수적인 종교예술과 진보적인 세속예술이 동시에 병존함으로써 다양성은 어느 정도 충족되었다. 그러나 동일한 사회 계층으로부터 전혀 틀린 몇 개의 예술양식이나, 전연 틀린 양식에 속하는 예술작품이 동일한 사회 계급, 동일한 교양 층을 위해 만들어진 시대는 헬레니즘 이전에는 거의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성과 결합된 미를 사랑하였고, 조화와 통일성을 추구하게 된다. 그리스 사상이 ‘너 자신을 알라’는 말에 잘 나타나 있고 아폴로 신전에 새겨져 있는 ‘모든 일에 지나치지 말라’는 금언은 곧 조화와 통일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인은 학문을 사랑하고 자유를 사랑했으며 또한 예술을 사랑했다. 이러한 것들은 두말할 것 없이 각기 떨어진 특성보다는 내적으로 연관되고 유기적으로 결합된 것이었다. 그들이 만든 아폴론이나 미의 여신상, 새나 짐승으로 표현된 신들을 비교해 보면 이성과 결합된 미를 사랑하였고 조화와 균제, 통일을 생명으로 삼은 것을 알 수 있다.3)
파르테논 신전이나 그리스의 항아리 등 그리스의 예술품들은 하나같이 전체적인 조화와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s(B.C 384~322)의 논리학을 낳은 그리스의 문예작품에서도 조화와 통일성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헬레니즘은 인간의 가치를 중시하는 한편, 합리적인 관점에서 대상을 객관화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예술과 학문 등에 있어서 조화와 통일성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헬레니즘은 뒤에서 살펴 볼 헤브라이즘과 더불어 오늘의 문명과 문화를 지탱하는 커다란 힘이 되어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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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1990,창작과 비평사) p.124.
2) A. 하우저. 앞의 책 p. 121.
3) R. W. 호튼, V. F. 호퍼 編, 《서양문학의 배경》(고양성 역, 1988, 강원대학교출판부), p. 20.
2. 헤브라이즘
가. 헤브라이즘의 형성
헬레니즘이 그리스의 정신과 문화를 총칭하는 개념이라면, 헤브라이즘은 유대인 즉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습관과 문화, 정신, 사상을 이르는 것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유대 민족이 팔레스타인에 살던 시대의 유일신적인 종교사상, 신神과의 중개자인 모세Moses(B.C 1500~1407), 그리고 십계명의 도덕률을 그 중심 내용으로 하여 성립된 것이다. 여기서 생기는 신에 의한 우주의 창조와 세계사의 주재主宰, 이 신과의 계약에 의한 인간의 책임을 주장하는 세계관 및 인간을 영육일체로서 파악하는 인간관에서 헬레니즘과 대립된다.
원래 유대인들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사이의 메마르고 협소한 팔레스틴에 살면서,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및 앗시리아 등 강대국 사이에서 시달리던 약소민족이었다. 앗시리아인, 바빌로니아인, 페니키아인처럼 셈족 혈통인 유대인 조상들은 아라비아 사막의 변두리 지대에서 살고 있던 아랍계 유목민들이었다.
기원전 1700~2000년 사이에 고대 유대인들은 지중해 연안에 인접한 비옥한 땅을 찾아 방랑을 시작하였다. 그래서 한 때는 기름진 국토를 가진 이집트에 이주하여 살기도 하였다. 인구의 증가 때문에 이집트인들의 심한 학대를 받게 되자, 기원전 1440년경 모세의 인솔 아래 홍해를 건너 이집트를 탈출하였다. 가나안에 도착한 그들은 독립 국가를 세웠고, 다른 모든 다신교적인 신들을 버리고, 국교로서 오직 야훼신 만을 섬기며, 십계명을 종교 및 윤리의 원칙으로 삼았다. 헤브라이즘의 근본적인 바탕은 이때 이미 기본적인 골격이 짜여진 것이다.
나. 헤브라이즘의 특성
① 메시아 사상
서구 문명에 대한 헤브라이즘의 가장 두드러진 공헌은 종교에 대한 것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창조주가 자신들을 돌보고 있다는 생각과 더불어 우주의 창조주이며 통치자인 하나님과의 내적 영교를 맺고 있다고 믿었다. 유대인들은 단일 혈통의 민족으로서 하나님 아버지에 의하여 선택되었다는 선민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헬레니즘은 현세적, 인간 본위이며 이성주의이기 때문에 감각에 의해 육체미를 주로 하는 외형의 미학을 존중하는 반면에 헤브라이즘은 내세적, 신본주의, 신비주의이기 때문에 정신과 영혼을 중시하고 초현실적인 종교적인 흥미에 기울어 정신적인 미를 존중하는 차이를 보인다. 헤브라이즘의 이러한 특성은 구약성서에 명시된 약속된 구원들이 언젠가는 메시아Messiah (‘기름 부어진 자’라는 뜻, 구원을 가져다주는 자로서 묵시문학에 여러 가지 형태로 묘사됨) 즉, 구세주 사상으로 집약되어 진다.
그리스인들은 현세와 인간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인간의 타락을 강조하지는 않았지만, 유대인들은 인간의 현세를 타락한 것으로 보았고, 이를 구제해 줄 메시아의 출현을 기대한 것이다. 그 구세주는 위대한 종교적 정치적 영도자이면서 이스라엘에게 고대의 영광을 되찾아 줄 수 있는 또 다른 모세나 다윗왕王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이 구세주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면서 영광 속에서 오는 것으로 믿었다.
메시아를 하느님과 동일시하는 신비적인 언급과 그분을 ‘인간의 아들’로 보는 서술을 근간으로 기독교의 토대가 이뤄진 것이다.
이러한 메시아 사상을 담은 기록물로 성경을 들 수 있는데, 이는 헤브라이인들의 문학적 표현의 집대성이기도 하다. 구약은 창세기에서 말라기서까지 39권으로 되어 있다. 성립 연대는 기원전 1200년경에서 2세기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고대의 역사적 기록과 예언서 및 문학집文學集인 것이다. 신약은 구약을 통해 약속된 구원이 예수에 의해 실현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② 야훼Jehovah 신앙
모든 종교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색은 다신교가 성행할 때, 비범한 종교가 출현하여 그것을 일신교로 통합하여 발전시켜 가는 양상이 일반적인 경향이라 한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유대교의 하나님의 이름인 야훼란 유대인들의 유일신으로서 시내 산상山上에 살고 있는 산의 신의 일종이었다. 화산과 같은 속성을 지닌 이 신은 바로 천둥과 파괴와 불의 신이고 벌을 잘 내리는 분노의 신이며, 다른 신의 존재를 인정하긴 하지만, 질투심이 많아 자신을 제일 경배해 줄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그리스의 신들처럼 야훼 신神은, 동물, 조류, 곡물을 제물로 바치거나, 진노를 달래 주는 제식을 베풀어야만 하였다. 또한 격정적인 성격을 지녀서 대홍수 또는 재앙을 일으키기도 하며, 자기의 말을 거역하는 사람을 찾아가 그에게 고통, 속박, 기아, 군사적 참패, 역병을 안겨 줌으로서 자신의 분노를 터뜨렸다.
이러한 야훼신이 차츰 자비의 신으로 바뀌어졌는데, 그 까닭은, 야훼가 에덴동산에서 아담, 이브와 함께 대화를 하였다거나, 아브라함과 흥정을 하고 모세가 자기의 등을 바라볼 수 있도록 자신을 허용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건들은 신인동형론적神人同形論的 신의 등장을 가져왔다.
호머의 서사시에 나오는 여러 신들은, 사람을 닮은 친근한 신이지만, 야훼신은 멀리에 있는 존엄의 신으로 승화되었고, 이스라엘 민족을 선민으로 택한 우주의 창조주이며, 인류의 유일신이 되었다. 모세의 신은 동양의 독선적 군주를 닮은 신이 아니었다. 오히려 10계명과 그 이후에 생긴 여러 가지 규율에 나타난 율법을 몸소 지킴으로써 성실히 봉사하는 통치자로서의 신이었다.
히브리 종교의 핵심적인 내용은 “내가 오는 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주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좇으면 저주를 받으리라”라고 하는 하나님 말씀에 잘 요약되어 있다. 즉, 유대인들은 종종 많은 의문점을 제기하였지만, 최종적인 해답은 항상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4)
3.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융합
기원전 4세기 이전에 벌써,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문화가 독자적으로 발전되어 서양문화의 2대 원류를 이루어 왔다. 이 두 문화가 융합된 계기는 기독교가 서양의 지배적인 종교로 자리 잡으면서부터였다.
기독교는 오늘날 서양사회가 뿌리박고 있는 중세문화를 주도하였으며, 중세교회의 정신적 요소는 ‘헬레니즘 사상이 혼합된 헤브라이즘’이 주로 근간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들 두 정신은 서로 상반되는 특성을 지니면서 역사적인 사건들을 통해 서로 조우하여 융합되어 왔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두 문화의 첫 번째 만남은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 이후, 아시아의 전 지역에 헬레니즘 문화가 도입, 보급되기 시작하였던 기원전 333년 경부터였다. 이때 헬레니즘이 헤브라이즘에 침입하였고, 그런 상황에서 뒷날 바울로 하여금 기독교와 이교異敎 세계의 중개자가 되게 한 것과 같은 문화가 형성되었다. 팔레스타인을 비롯하여 그 주변 도시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은, 지금껏 자신들이 접해 보지 못한 새로운 풍속과 문화를 자유롭게 수용하게 되었고, 또한 그리스 문학에 접하게 되면서 그 세계에 매료되었다. 인근 알렉산드리아 지방을 중심으로 새로운 그리스 문화권이 형성되었으며, 이로 인해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은 물론 많은 이민족들이 모여들었고, 그리스어판 구약성서를 번역하게 되었다. 이 그리스어판 구약성서가 보급됨으로써 이교도들에게 성서를 읽을 기회를 제공하여 기독교로 개종할 기회를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중해 연안과 서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태인들이 성서를 계속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동시에 플라톤의 관념론적 철학을 접하게 된 유태인들은 신앙의 지성화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유태인들의 종교문학은 예언적 영생의 약속과 플라톤 학파 및 신플라톤 학파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또한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으로 인해 유태인들은 기독교 출현 훨씬 이전부터 헬레니즘 전통에 따른 교육을 받았으며, 아울러 이교도들이 유태인들의 문학을 접하게 되었다.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문화융합은 기독교의 출현으로 이뤄졌다.
원래 유대교의 변신인 기독교는 다음과 같은 우연한 3가지 사실 덕분에 전 세계에 전파되었다. 첫째, 그 당시의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로마제국의 보호 밑에서 통일되어 있었고, 둘째, 모든 주요 도시에 있는 유태인들의 촌락이 선교활동을 위한 편리한 중심지가 될 수 있었으며, 셋째, 세계 도처의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내세를 위한 종교를 염원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콘스탄티누스 로마 황제 치하에서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가 되었을 때, 유대의 온갖 전통이 고전주의 문화와 겹쳐지게 되었다.
완전한 융합은 매우 영향력 있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포함한 초기 기독교의 학자들 거의가 모두 플라톤 학파의 출신들이었기 때문에 이 새로운 종교에 헤브라이즘 신학 못지않게 그리스의 신학을 불어넣었고, 아울러 유대교의 성전 숭배는 물론 로마의 전통으로부터 파생된 여러 가지 의식을 채택하였다는 사실에 의하여 가능하게 되었다. 그 때부터 줄곧 서구 세계의 지식인들은 고전주의 원천으로부터 보통교육을 받았고, 두 가지 사상이 융합된 새로운 근원으로부터 종교교육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5)
영국의 근대 비평가 매튜 아놀드Mattew Arnόld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라는 논문에서 “세계 역사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두 역점 사이를 오락가락 한다”고 지적한 것처럼 이들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은 오늘날의 문명과 문화를 지배하는 양대 조류의 근원이 되고 있다.
이들 양대 정신의 발생의 측면을 검토해 보면, 서로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생, 형성되었기 때문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것은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전개 과정에서 이들은 서로 번갈아가면서 서양의 문화와 정신사의 흐름을 견인해 왔다고 할 수 있다. 헬레니즘은 문예부흥의 정신과 상통하는 동시에 리얼리즘의 바탕이 되었고, 헤브라이즘은 종교 개혁의 정신과 낭만주의의 근본정신이 되어 왔다. 다음에 두 정신을 비교해본다.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차이점〉6)
헬레니즘 | 헤브라이즘 |
너 자신을 알라 육적肉的, 본능적本能的 개인적 자각個人的 自覺 자유주의自由主義 현세現世, 인간본위人間本位 자아의 만족 자연주의 지식적, 예술적 과학적, 실험적 객관적 경향 | 신神을 공경하라 영적靈的, 금욕적禁慾的 절대적 자각絶對的 自覺 교권주의敎權主義 천국天國, 신본위神本位 이타주의 초자연주의 종교적, 도덕적 신앙적, 독단적 주관적 경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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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R. W 호튼. V. 호퍼, 앞의 책, p. 192~193참조
5) 앞의 책, p. 218~219.
6) 구인환. 구창환, 《문학개론》 (1988, 서울: 삼지원) p. 585~586.
▲ 그리스 문학
문학이 발달해 온 역사를 살펴보면 그 연원은 아득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의 인류에게 있어서 예술양식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여 재현시키는 자연주의에서 시작되었다.
이 양식이 수만 년간 계속되다가, 신석기 시대에 이르러 기하학적인 양식과 추상화된 예술형식이 뿌리를 내린다. 이러한 장식적, 형식주의적 예술은 신석기 시대와 더불어 시작한 이래, 크레타, 미케네 예술을 제외하고는 청동기 시대와 철기시대의 전부, 고대 오리엔트의 예술과 그리스 초기까지의 예술양식을 지배하였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기원전 약 5000년에서 기원전 약 500년까지에 이르는 세계 역사상의 기간을 장식적, 형식주의적 예술양식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모든 원시시대의 문학이 그러하듯 고대 그리스 문학도 주문呪文이나 신탁神託이 일종이었으며, 축복이나 기원을 위한 격식에 맞춘 문장들이거나 군가 또는 노동요였다. 이들 장르에 공통된 특징은 모두가 한결같이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 집단적 문학이었다.7)
기원전 12세기, 즉 영웅시대가 시작되면서 문학의 사회적 기능과 시인의 사회적 지위도 바뀌었다. 이때의 문학은 대중문학, 집단문학 또는 집단이나 합창대를 위한 것으로 서정시의 성격을 잃고 개인적인 작자가 인간 개인의 운명을 노래하는 작품이 되었다. 그리하여 서양 기록문학의 출발점인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이르게 된 것이다.
1. 서사시
서양문학의 근원은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도리스Doris인의 침입을 받아 이오니아Ionia 지방으로 이주하게 되었고, 이 이오니아 지방에서 다른 민족들의 틈바구니에서 여러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3백년의 세월을 거쳐 이 서사시를 탄생시킨 것이다.8)
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전설은 트로이 전쟁에 관한 것이다. 호메로스에 의해 지어졌다는 《일리아스》와 《오딧세이》에 그려진 이 전쟁에 관한 전설은 위대한 문학작품으로 초기 서양 문학의 근원이 된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딧세이》는 그리스어로 쓰여진 문학작품으로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이지만, 그리스 문학 전체를 통해 최초의 작품이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최초의 문학작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고도로 발달된 형식과 구조를 지녔다.
호메로스의 생존 연대에 관하여는 학자들 간에 여러 의견이 있지만 대략 기원전 10세기 전후로 추정하여, 출생지도 소아시아 서해안의 스뮤르나 또는 키오스로 보고 있다. 이 눈먼 늙은 가인歌人에 관하여 후세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이미지는 주로 신들린 예언자요 사제司祭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호메로스는 트로이 전쟁을 소재로 하여 문학과 실제로 관계되는 두 가지의 전기적 문제, 곧 어떻게 해서 문학은 쓰여지며, 또 어떻게 하여 문학은 우리와 관계를 맺는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주었다.
트로이 전쟁의 가장 유명한 내용을 다룬 《일리아스》는 10년에 걸친 전쟁에 관한 이야기이다. 총 15,693행에 이르는 이 서사시를 쓰게 한 트로이 전쟁은 기원전 12세기경에 있었다. 이 서사시에 따르면 트로이 전쟁은 그리스의 세 여신, 즉 신들의 여왕인 ‘헬라스’와 지혜의 여신인 ‘아테나’와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 때문에 일어났다. 이들은 서로 자기가 가장 아름답다고 다투었는데 이때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는 이 아름다움을 경쟁하는 데 심판을 맡게 되었다. 그는 아프로디테가 가장 아름답다고 판정을 내려 그 보상으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인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왕비 헬레네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아프로디테의 도움을 받은 파리스는 그리스로 가서 헬레네를 납치하여 트로이로 끌고 갔다. 이에 분노한 메넬라오스와 그의 형 아가멤논은 그리스 전국에서 군사들을 모아 헬레네를 다시 빼앗을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이리하여 10년간에 걸친 트로이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올리스 항구 출발과 호머의 서사시가 시작되는 사이에 그리스 원정군에게는 여러 가지 모험으로 가득 찬 9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영웅 필록테티스가 해안을 산책하다가 독사에 물려 그를 내버려둔 채 떠나야 했던 이야기가 처음에 나오고, 그 다음에 그리스 함대가 실수로 소아시아 해안에 있는 미시어에 상륙하여, 동맹국인 미시어를 트로이로 생각하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얘기가 나온다. 실수를 깨닫기 전에 텔레푸스Telephus왕은 아킬레스의 창에 찔렸다. 치료가 불가능한 큰 상처를 입고 동맹국끼리 싸움을 벌였다는 사실을 알자, 그리스 군은 그들이 저지른 잘못을 시정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들은 텔레푸스왕의 상처를 치료하고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용한 의사를 불러왔고, 몇 주가 지나자 시달리던 왕은 평온을 되찾았다. 그에게 상처를 입힌 그 창을 줄로 갈아서 그 가루를 그의 상처 부위에 입히라는 신탁의 지시대로 따르자 텔레푸스왕은 드디어 완치가 되었다. 이 불행한 사건은 3개월 이상이나 계속되었는데, 천여 척의 군함이 마침내 트로이에 도착한 때는 이른 봄이었다. 거대한 진지가 구축되었고, 트로이 군軍은 막강한 적군의 전력에 겁을 먹고 떨었다. 곧 전투가 시작되었으나, 9년간의 전쟁은 양측에 별 소득 없이 계속되었다. 그리스 군은 트로이의 푸라이엄 왕의 아들인 어린 폴리도루스를 생포하여 죽여 버렸다. 이 난폭한 행위가 트로이 사람들의 증오심을 부채질하여 전쟁은 가열되었다.
《일리아스》는 바로 전쟁 10년째를 맞이하는 시점에서부터이지만, 위에서 살펴 본, 이 전쟁의 배경과 발생 경위 등이 회상 형식으로 모두 삽입되어 나온다. 처음에 나오는 이야기는 그리스 연합군 중에서 가장 뛰어난 전사였던 아킬레우스의 노여움에 대한 것이다. 그는 자기 상관인 아가멤논에게 전쟁의 노획물의 하나로 그의 차지가 될 포로 처녀를 양보해야 했기 때문에, 그에게 노여움을 품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전쟁을 포기하고 자기 천막으로 돌아와서 드러누워 버렸다. 그러자 전쟁은 그리스 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던 중에 아킬레우스의 절친한 벗인 파트로클로스가 살해되자 아킬레스는 또 다른 노여움에 사로잡혀 그 복수를 위해 전투에 참여하여 트로이의 왕자 헥토르를 죽인다.
《오딧세이》는 《일리아스》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이 두 편의 시는 신들이나 영웅들의 거대한 서사시적 전설들이 접근한 부분인 것이고, 그 밖의 부분은 이야기 시로 다루어 졌거나 또는 그렇지 못한 것이 되었으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수법으로 보아 《오딧세이》와 《일리아스》는 매우 흡사하다. 《오딧세이》는 트로이에 대한 포위, 목마를 사용한 계략 등으로 이룬 점령 등의 이야기를 마치고, 우리가 라틴식으로 발음하면 율리시즈가 되는 오디세우스의 여행과 모험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가 길고 험한 모험을 두루 거치면서 귀환하고 있는 동안, 그의 아내인 페넬로페는 자신과 결혼하기를 강요하는 구혼자들에게 둘러 싸여 있고, 구혼자들은 또 페넬로페와 어린 아들 텔마카스를 이용하고 있다. 페넬로페는 끝까지 정절을 지켰고, 돌아온 남편 오디세우스는 구혼자들을 무찌르고 아내와 아들을 구한다.
이상에서 살펴 본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나타난 세계관은 비록 완전히 봉건적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철두철미하게 귀족적이다. 영웅시는 전적으로 왕후와 귀족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풍습, 규범, 인생목적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서사시에 이르면 그처럼 좁은 세계는 아니지만, 그래도 거기 나오는 평민은 여전히 이름조차 없고, 평범한 병졸은 전혀 중요시되는 대목이 없다. 호메로스의 전 작품을 통해 귀족이 아닌 사람이 귀족의 대열에 끼는 장면은 한 군데도 없다.
서사시는 신화 및 설화에 나오는 영웅적 이상을 아무 수정 없이 그대로 재현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거기에는 서사시를 성립시킨 시인들의 세계관과 작품의 소재가 된 영웅들의 생활양식 사이에 어떤 뚜렷한 긴장관계가 느껴진다. 이러한 것은 귀족의 세계관 자체가 변모해 나가고 있었다는 증거이며 시인들이 그들의 도덕적 기준을 귀족이 아닌 어떤 신흥계층의 세계관에 맞추어 재조정했다는 증거로는 볼 수 없다. 여하간 시인들이 청중으로 생각했던 것은 호전적인 토지 소유 귀족들이 아니라, 싸움을 즐기지 않은 도시귀족들이었다.9)
호메로스와 같은 전설적인 시인의 한 사람으로 헤시오도스가 있다. 그는 800행에 이르는 교훈시 《노동과 나날》 및 신화를 다룬 약 1,000행의 시 《신통기神統記》라는 유명한 작품을 남겼다. 그리스 사람들은 여러 세기 동안에 걸쳐 헤시오도스를 호메로스와 같은 정도의 시인으로 인정하여 왔던 것으로 보인다.10) 그의 작품의 의의는 오늘날 말하는 민중문학이나, 농민문학의 개념과는 다소 거리가 멀지만, 농민의 생활권에 자리 잡고 있어 진정한 의미에서 대중적인 성격을 띠었던 최초의 문학이었다. 그의 작품에서 취급되고 있는 소재와 가치관, 인생 목표 등은 농민계급, 즉 귀족 지주들에게 억압받는 민중이었다. 즉, 헤시오도스 작품의 문학사적 의의는 그것이 사회적 긴장과 계급 간 대립의 최초의 문학적 표현이었다는 데 있는 것이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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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A. 하우저, 앞의 책. p. 68.
8) R. W. 호튼. V. F. 호퍼의 《서양문학의 배경》에 따르면, 이 시기 즉, B.C 1200~900년 간을 ‘호머시대’라 명명하고 있다. (R. W. 호튼. V. F. 호퍼, 앞의 책, p. 29~31.
9) A. 하우저, 앞의 책, p. 78~79.
10) 존 메이시, 《세계문학사》(1983, 서울: 종로서적), p. 79.
11) A.하우저, 앞의 책, p. 79
2. 서정시
서사시 다음으로 나타난 문학적 양식은 서정시(Lyric)였다. 이는 시인의 주관적 감정을 노래한 것으로 그 명칭은 그리스 사람들이 인류의 조상들이 노래를 하거나 운문을 암송할 때 켜던 악기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개인적인 감정의 변화를 표현하며, 노래와 동시에 춤이 동반되었는데, 서경시나 극시보다 훨씬 짧지만, 사용되는 리듬의 변화가 풍부한 것이 특징이었다.
서정시가 발흥되기 시작할 무렵에도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여전히 그리스 전역에서 인기를 끌고 있었지만, 한편으로 귀족들 속에서는 점차 합창대용 서정시와 사상시 쪽에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쏠론Solon을 비롯한 격언시인, 튀르타이오스Tyrtaios와 테오그니스Thehgonis등의 비가悲歌시인, 시모니데스Simόnides(B.C 556~468)와 핀다로스Pindaros(B.C 518~538) 같은 합창대용 서정시 작자들은 처음부터 영웅들의 모험담에서 벗어나 주관적 정서와 정치적 선전과 도덕, 철학을 담은 서정시를 귀족 계급들에게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들 자신은 시의 오락성에서 벗어나 전 귀족 및 전 민족의 교육자요, 정신적 지도자의 위치에 서서, 귀족들의 마음속에 항상 위기의식을 일깨워 주고 자신들의 위대성에 대한 기억을 되새겨 주게 되었다. 따라서 서정시는 그리스 운문에서 특별한 분야를 차지하였다. 물론 호메로스에게나 베르질리우스에도 서정시적인 요소가 많지만, 그리스에서의 서정시를 발흥시킨 인물로는 핀다로스와 알카이오스Alkaios, 그리고 사포Sapphό를 손꼽을 수 있다.
정열의 여류 서정시인 사포는 동성애적인 애정의 여러 감정을 여성 특유의 감수성으로 노래한 아름다운 시를 지어 유명해졌다. 그는 B.C 6세기에 산 시인으로 그리스에서의 그에 대한 평판은 ‘열 번째의 뮤즈Muse’라 일컬어지며, 거의 호메로스의 평판을 능가할 정도였다. 사포가 창안하였거나 완성한 운문의 형태는 그녀의 이름을 따 ‘사포시격詩格’이라 불렸다. 사포시격은 라틴 시인들에 의해 사용되었고, 뚜렷하게는 호라티우스가 사용하였다.12)
또한 알카이오스는 남성적인 행동인으로서 신들에 대한 찬가와 정치시 외에 술과 여인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노래하였다.
그리스의 서정시들은 사포의 작품들과 같이 개인적인 정서, 슬픔의 호소, 고통, 기쁨, 웃음, 연민 등을 표현한 것이다. 서정시의 폭넓은 형태는 합창시였는데, 그것은 한 마디로 합창할 수 있게 지은 시였다. 가사가 지닌 뜻에 따라 합창대에 대한 찬송가나 찬양가처럼 되었고, 승리자나 영웅들을 찬양하는 송가(ode)들과 같았다.
서정시의 이러한 갈래는 시적 연극에로 접근하였고, 연극적 합창의 찬가를 닮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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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존 메이시, 앞의 책, p. 83.
3. 극시
초기 그리스 문명의 발전은 여러 신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한 합창 가요제에서 시작된다.
이 축제는 시골에서 시작되어 점차적으로 도시로 확산되었다. 신을 찬미하는 원시적 가요가 연극 발전에 공헌하였지만, 연극 공연은 디오니소스 축제 기간에만 국한되었다.
술과 풍요의 신을 찬미하는 다섯 차례의 연례행사 중에서 세 번째의 행사가 연극 공연과 직접 관련이 있었다. 11월에 열리는 디오니소스의 시골 축제, 1월 달의 술 거르기 축제, 3월에 열리는 디오니소스 대축제 때에는 반드시 연극이 공연되었으며, 6세기 이후부터 연극은 깊이와 기교에 있어서 빠른 발전을 하였다.
초창기의 연극은 숲속에 사는 반인반수伴人半獸의 신의 모습으로 분장을 하고 합창대가 일제히 부르는 주신酒神 찬가에 지나지 아니하였다. 5세기까지는 오늘날 개념의 극장이란 곳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길모퉁이나 광장에서 공연되었으며, 송시의 주제는 주신 디오니소스의 시련과 고통에 관한 것이었다.13)
기원전 534년에 합창단을 중심으로 한 사람의 배우와의 문답형식의 연극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연극 형태로 시를 쓴 최초의 시인은 아리온Arion (B.C 7세기~6세기)이었으며, 그는 비극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 후 여러 시도가 있었으나 아이스킬로스Aischylos (B.C 525~456)에 의하여 비로소 비극의 원초적 3부극이 탄생하였다. 소포클레스Sophokls (B.C 496~406)가 새로운 비극 형태를 마련하여, 악惡이 끝내는 파멸하는 비극을 시극詩劇화했는데, 대표적인 작품으로 《오이디푸스 왕》이 있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비극의 전형典型이라 하였다. 소포클레스의 뒤를 이어, 미완성의 비극을 완성된 단계로 끌어올린 에우리피데스Euripides(B.C 480~406)가 출현하였다.
고전 비극은 소위 시간, 장소, 행위의 ‘고전적 3일치 법칙’을 준수하며, 5막 운문으로 된 영웅의 이야기였으며, 24시간 이내에 일어날 수 있는 단일한 줄거리, 단일한 세팅, 단일한 구성으로 부차적 줄거리가 없고, 하나의 극적 사건을 다루었다. 무대 위에서 실제 동작은 제한을 받으며, 그리스인들은 섬세한 여러 가지 무대연기보다는 주옥같은 시가 아름답게 낭송되는 것을 듣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스 비극 공연에 있어서 유혈의 장면은 항상 무대 뒤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처리하였는데, 그 까닭은 바로 부자연스러운 동작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극작가들은 삼일치 법칙을 준수할 뿐만 아니라 민속이나 신화 또는 당시의 역사적 사건을 작품의 소재로 하여 집필하였으며, 관례상 다음과 같은 극적 구성형식을 엄격히 따라야만 하였다.
① 프롤로그Prologue 혹은 주역 배우에 의한 개막사
점차적으로 이 프롤로그는 희곡의 일부분으로서 총체를 이루도록 통합되었으며, 희곡의 전체적 구성 속에서 배경과 상황을 설정하여 주는 기능을 하게 되었다. 일부 유리피데스의 희곡에서는 극적인 성격을 떠나 순전히 설명의 성격을 띠고 있는 프롤로그가 사용되기도 했으나 이러한 장치는 로마시대가 되어서야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② 파로도스Parodos 혹은 합창단의 등장
처음에는 12명이었으나 후에 3명이 더 추가되어 15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공연되는 희곡의 심각한 성격에 부합되는 느린 춤을 추기도 하였다. 합창으로 전달하려는 구절은 일정한 형식에 맞추어져 있었지만, 융통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가사 자체는 사용되는 단어의 발음 및 억양의 효과를 염두에 두고 일정한 규칙적인 패턴으로 구성하였다.
합창의 구성 중 가장 보편적인 형태는 스트로우피, 안티스트로우피, 에포우드로로 이루어졌는데, 스트로우피란 좌로 돌면서 합창단들의 반이 부르는 합창이며, 안티스트로우피란 무용수들이 좌에서 우로 이동할 때에 나머지 합창단원이 부르는 응답 시이고, 에포드로우는 안티스트로우피에 이어서 계속되는 대단원의 막을 최종 종결짓는 마지막 절이다.
③ 파로도스에 이어서 희곡의 중심부가 전개되며, 주연 배우들에 의한 극적 에피소드들로 구성되는데 사이사이에 스타시마라는 합창가가 삽입된다.
한편의 희곡은 보통 다섯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었으며, 길이가 매우 짧지만, 대략 현대 드라마의 막에 해당한다. 에피소드와 합창가의 상호관계는 일정치 않다. 아이스킬로스Aischylos (B.C 525~456)의 초기 작품에서는 합창가무단이 직접 극의 액션을 논평하고 가끔씩 드라마 자체에 개입한다. 유리피데스의 후기 작품에서는 합창가가 분위기를 조성하는 시적 막간 음악에 불과하였던 것 같다. 합창가 대신에 때때로 극작가는 주변 배우와 합창단 사이에 번갈아 오가는 대화 즉, 코무스를 집어넣기도 하였다.
④ 일련의 에피스드와 막간 합창이 끝난 후에는 이태리 오페라의 휘나레에서처럼 합창단이 퇴장한다. 합창단의 퇴장을 엑소더스라 하였다. 사실상 그리스의 비극은 연기와 노래 및 춤이 혼합되었기 때문에 현대의 드라마보다는 오페라와 공통점이 더 많았다.14)
그리스의 비극은 일반적으로 4부극, 즉 4편의 희곡으로 구성되었다.
4편 가운데 전반의 3편의 희곡은 내용이 진지하고 무게가 있으며 4번째의 것은 좀 가벼운 익살맞은 촌극이다. 사실상 아이스킬러스만이 연속물의 방식으로 4부극이 완전한 형태로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전해 내려오는 것은 없지만, 아이스킬러스의 작품 《아가멤논》, 《코이포리》, 《유메니데스》 등에서 당시 가장 위대한 극작품이었던 3편의 희곡을 접할 수 있으며, 별로 중요치 않은 4번째의 익살맞은 촌극은 분실되어 유감스럽게도 접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스 비극의 대표적인 《오이디푸스 왕》의 개요를 보면 다음과 같다.
그리스의 테베에 무서운 전염병이 돌았다. 수많은 백성들이 죽어 가는 것을 본 테베의 오이디푸스 왕은 무척 괴로웠다. 오이디푸스는 코린토스의 왕자였으나 마녀 스핑크스를 죽이고 그 공에 의하여 공석 중이었던 왕위에 올랐고, 선왕 라이오스의 왕비였던 이오카스테를 아내로 삼았다.
바로 그 때, 신하 크리온이 등장하여 이 괴로움을 구하는 길은 선왕 라이오스를 살해한 범인을 추방하는 길밖에 없다고 알리는 것이었다. 그 말에 따라 오이디푸스는 범인을 찾으려 했으나, 좀처럼 그 범인을 알아낼 길이 없었다. 이상스러운 불안에 사로잡힌 오이디푸스는 어렸을 때부터 자기 자신을 괴롭혀 온 불길스러운 예언을 생각해 내었다. 그 예언이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삼을 운명이라는 내용이었다.
또한 따져 보니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에게도 자식이 있었는데, 그 아이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삼으리라는 신탁神託이 있어 그들은 아들을 카이론 산에 버렸다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수수께끼는 대체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첫째, 자기는 코린토스의 왕자가 아닌가. 그런데도 오이디푸스는 고민을 하였다.
다행히 라이오스 왕이 살해될 당시 목격자가 살아 있어 그를 찾아가 물어보면 자연히 그 수수께끼는 풀릴 것이었다. 거기에 뜻하지 않은 소식이 전해졌다. 코린토스에서 온 사자의 말에 의하면, 코린토스 왕이 붕어崩御하였으며, 오이디푸스가 그 후계자로 등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사자는 오이디푸스가 원래 코린토스 사람이 아니라 테베 출신이란 놀랄 만한 사실을 알려 주었다. 더구나 리이오스의 아들로서 갓난아이일 때, 산에 버린 것을 데려다 길렀다는 것이었다.
곧 선왕 라이오스의 최후를 목격한 자가 등장하여 여기서 최후의 막이 내려진다. 오이디푸스가 범인이라는 것이다. 즉, 오이디푸스 자신이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의 자식이었던 것이다. 절망과 비탄으로 자살하는 이오카스테, 자신의 무지에 분노하고 수치스럽게 여겨 자기 자신의 두 눈을 뽑아 버리는 오이디푸스, 이렇게 비극의 최종적인 귀결점에 이르러 막이 내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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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R. W. 호든 . V. F. 호퍼, 앞의 책 p. 114
14) 앞의 책 p. 116~117.
비극의 대표적인 작가로는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페데스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 세 사람을 그리스 3대 비극 작가라 일컫는다.
그 가운데서 아이스킬로스는 비극의 창시자이자 그리스 3대 비극시인 중 제1인자였다. 90여 편에 이르는 작품을 썼다고 하나 현재 전하는 작품으로는, 다나오스의 딸들의 이야기를 쓴 《구원을 원하는 여인들》, 살라미스 해전에서의 페르시아의 패전을 다룬 《페르시아인》, 《테베로 향하는 일곱 사람들》, 인간에게 불을 주었기 때문에 제우스에게 형벌을 받는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아트레우스 일가의 불행을 소재로 한 3부작 《아가멤논》, 《코에포로이》, 《에우메니데스》 등이 있다. 그는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애국심이 고양된 시기의 애국시인이었으며, 신에 대한 절대적 신화에 가득 찼던 숭고미로 인해 후세에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소포클레스는 아이스킬로스보다 1세대 젊은 사람으로서 비극의 완성자로 꼽힌다. 그리스에서는 디오니소스 축제 기간 동안에 드라마 경연대회가 성행했는데, 소포클레스는 28살 때 당시의 비극의 일인자였던 아이스킬러스를 제치고 우승하였던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 때부터 소포클레스는 그의 나이 90세가 되어 이 세상을 떠날 때가지 변함없는 명성을 누렸던 것이다. 또한 그의 생애는 아테네의 전성시대와 일치하고, 그의 작품은 페레클레스 시대의 문화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다루어 그리스 3대 비극 작가 가운데 가장 극적인 효과를 거두었다. 그는 123편의 비극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존하는 것은 《오이디푸스 왕》 외에 7편의 단편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만년의 소포클레스에게 영향을 준 점도 있는 에우리피데스 역시 90여 편에 이르는 작품을 썼다고 하나, 현재는 17편의 비극과 위작僞作 1편이 전해지고 있다.
당시 그리스 비극이 다채롭게 전개되었는데, 그 가운데서 바로크적인 경향의 대표자로 알려져 있으며, 비장미悲壯美가 뛰어났다고 한다. 그는 신들을 한층 인간적으로 묘사하였고, 특히 사랑의 정열을 묘사함으로써 비극을 보편화하고 또한 세속화하는데 공헌하였다. 또한 그는 인간과 인간의 갈등 속에서 고뇌하는 인간을 묘사 하는데 주력하였다. 등장 인물을 취급하는 점은 심리적으로서 3명의 비극 시인 중 가장 근대적인 정신의 소유자로 평가된다. 극의 구성은 눈부신 급전개와 장황한 철학적 독설 등으로 해서 소포클레스만큼 균형이 잡혀 있지는 않으나, 긴장은 서서히 고조되고, 비극적이며 비참한 효과는 언제나 성공을 거두었다.
비극이 인간의 불행과 고난의 신비와 관계있는 제사와 춤에서 성장하였듯이 희극은 디오니소스 축제 때 행해진 우스꽝스런 행렬에서 기원된 것으로 보인다.
아테네의 고전적인 희극은 기원전 487년부터 주신酒神의 제사에 공식적으로 상연되었다. 도리스 지방의 시인 에피카르모스Epicharmos(B.C 6세기 후반~5세기 전반)는 최초의 희극을 쓴 작가로 알려져 있다. 희극은 비극이라는 진지한 예술과는 정반대의 성질로서 그 영역에 야유와 욕설을 내포하고 있었다. 동물로 분장한 합창대나 제사의 비속한 소란 속에 위정자나 권력자에 대한 민중의 해학과 풍자가 들어 있다.
그리스 희극은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 (B.C 445~380)에 의해 절정에 도달하였다.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 평화론자로서 시류에 대한 풍자를 작품 속에서 전개하였으며, 감미로운 서정성과 천재적인 패러디가 넘치는 작품을 많이 썼다. 44편의 희극을 창작했으나 현전하는 것은 11편이다. 그는 신화와 전설의 인물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하여, 초기 희극의 특색을 대표하는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아리스토파네스가 활동한 시기의 희극을 가리켜 고古희극이라 한다.
이어서 기원전 400년에서 336년 사이에 고古희극(개인적, 정치적 풍자)과 신新희극(풍속 희극)의 교량적 역할을 한 중기 희극의 시대가 있는데, 이때는 이미 합창대는 퇴화되고 정치비판은 사라져 풍속 희극화의 경향으로 변모되었다. 그 대표적 작가는 안티파네스Antiphanes이다. 그리고 기원전 336년에서 250년 사이에는 신희극이 대두되었는데, 이는 시정市井의 사건에 교묘한 줄거리를 덧붙여 인물의 유형화를 이룩하였다.
4. 산문 문학
기원전 6세기에 이오니아 지방을 중심으로 철학, 역사, 지리 등 새로운 내용을 담는 그릇으로 성립된 산문은 헤로도투스Helodotod(B.C 480~425)의 《역사歷史》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다. 산문은 서사시나 서정시 그리고 극시와 같은 그리스 문학이 시작된 뒤에, 비로소 과거를 돌이켜 보고 자연을 관찰하고 이국민異國民들의 풍습에 기이한 느낌을 품게 됨에 따라 역사와 철학 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발표하는 수단으로써 시의 형식에 구애되지 않는 자유로운 산문을 요구하게 되었다. 따라서 산문의 특징은 기교에 치우침이 없고, 자유롭고 유창하게 표현되었으며, 수사적 기교보다는 사실 전달에 중점을 두었다.
산문 장르를 대표하는 인물로는 이미 위에서 언급한 헤로도투스, 아테네의 황금시대를 전해 주는 튜키디데스Thucydides (B.C 460~400), 크세노폰Xenophon(B.C 430~355)과 일반적으로 이솝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아이소포스Aisŏpos (B.C ?~550) 등이 있다.
또 그리스 문학의 본류라 할 수 있는 철학면에 있어서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라고 이야기한 탈레스Thales(B.C 640~546)를 비롯한 피타고라스Pythagoras(B.C 582~500),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B.C 480~410) 등이 있다. 특히 그리스 철학의 절정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활동했던 고전기였는데, 이는 오늘의 서양 철학의 기초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철학의 확실한 진로를 모색했던 시기였다.
그리스 철학은 이 시기를 전후하여 3기로 나눠지는데, 제 1기는 소크라테스 이전시기로서 그 때의 주된 관심은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의 근원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쏠렸다. 그리고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연이어 활동하던 시기로서 대우주인 자연에서 인간에게로 관심이 돌려졌다. 그리고 제 3기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시기를 말한다.
초기 그리스에서는 철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소피스트’라 불렀다. 그 뒤, B.C 5세기에 들어와서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등장한다. 그러나 그는 급진적인 사상으로 인해 나이 70에 청년들을 타락시키며, 새로운 신들을 만든다는 혐의로 기소되었고, 유죄가 선고되어 사형을 언도받고, “악법도 법이다”라는 그 유명한 말을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났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플라톤의 사상적 체계는 《공화국》, 《변명》, 《향연》 등에 잘 나타나 있다. 《공화국》에서 이상적 공동 사회에서는 왕은 정치가나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상가, 곧 철학자여야 한다고 간파했다. 《변명》은 소크라테스의 재판과 마지막 날에 대하여 쓴 기록물이다. 소크라테스가 한 말들이 실제 그가 말한 것인지, 또는 그 대부분이 예술가이자 시인이었던 플라톤 자신이 쓴 것인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효과는 아주 극적이며 고상하다. ‘착한 사람에게는 살아서든 죽어서든 악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것이 그 결론이다. 《향연》은 플라톤이 지은 것 가운데 가장 매력 있는 작품이다. 그 주제는 사랑이다. 즉 사랑은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관념을 사랑하지만, 그 관념이 사랑 받게 되는 객체란 단순히 어떤 영상, 또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향연》에 나타난 플라톤 식의 사랑관이다.
플라톤의 수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시의 모든 지식을 알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가 후세에 남긴 발자취는 철학, 윤리학, 논리학, 문학 등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져 있다. 특히 그가 남긴 《시학》은 모방론과 비극시의 구성원리를 제시함으로써 후세의 문학적 전범을 남겼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그가 비극을 논한 부분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 비극에서 우리를 가장 매혹시키는 것에 급전急轉과 반전反戰인데, 이들은 플롯에 속하는 부분이다. 또 한 가지 증거로 작시作詩의 초심자들이 사건의 결합보다는 조사와 성격 묘사에서 성공을 거둔다는 사실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초기 시인들 거의 전부에게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비극의 제1원리, 또는 비극의 생명과 영혼은 플롯이고, 성격은 제2위인 것이다. (……) 비극은 행동의 모방이며, 비극이 행동자를 모방하는 것도 주로 행동을 모방하기 위해서이다. 제3은 사상이다. 사상이란 상황에 따라 해야 할 말과 적당한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다. 대사에 관한 한, 이 능력은 정치학과 수사학의 연구 분야에 속한다. 왜냐하면 옛날 시인들은 수사학자와 같이 말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상을 성격과 혼돈해서는 안 된다. 성격은 행동자가 무엇을 의도하고 무엇을 기피하는지가 분명치가 않을 때, 그의 의도를 분명하게 해준다.15)
지금까지 서양문학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그리고 이들과 연관지어서 그리스 문학에 대하여 개관해 보았다. 그런데 그리스는 마케도니아와 로마에 의하여 두 차례나 정복당하였음에도 문학면에서와 지적인 면에서 중요한 두 갈래 사상이 발전하고 있었다. 그 하나는 소설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 사상과 기독교 신앙과의 결합이었다. 그리스 소설(또는 로망스)은 뛰어난 재능이 있는 사람이 소설에 손 댄 사람이 없었기에 크게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시 역시 산문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 상황이 지니는 중요성은 뒤에 로마와 중세 문학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 사상과 기독교 정신과의 융합이었다. 교회에 영향을 기친 많은 철학자들은 그리스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근본적으로 기독교는 히브리 사람들의 것으로, 그 주요한 지도자였던 바울은 스스로를 히브리 사람들 중의 히브리 사람이라 불렸다. 뒷날에 로마가 세계를 제패하자 라틴말은 교회의 공식 용어가 되었다.
그리스 사람들은 많은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기록된 역사로 보아 다른 어떤 종족보다도 말[言]과 대리석을 가지고 당시의 세계라든가, 닥쳐올 세계의 아름다움이나 공포 등의 느낌들을 표현하는 일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리고 예술사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는 전체적으로 자연주의, 개인주의적인 요소가 풍성하게 발전하였다. 올림피아의 입상이나 조각가 미론Myron의 작품에 나타난 초기 고전주의뿐만 아니라, 자연주의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이를 우리는 그리스 고전주의라 칭하는데, 이 그리스 고전주의가 후대의 모방적인 신新고전주의 양식들과 틀리는 점은, 그것이 절도와 질서를 추구하던 노력에 못지않게 자연에 충실하고자 하는 강력한 경향도 띄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예술의 영역에 이러한 서로 대립하는 형식원리가 병존해 있던 긴장 상태, 무엇보다도 민주적 이념과 개인주의적 경향 사이에서 그 모순관계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민주제는 온갖 세력의 경쟁을 자유롭게 방임하고 모든 인간을 그 개인으로서의 가치에 따라 평가하여 각자에게 그 최고의 능력을 발휘시키려고 하는 점에서는 개인주의적이지만, 동시에 신분의 차이를 평준화하고 출생에 따른 특권을 폐지한다는 점에서는 반개인주의적이기도 하다.
민주제는 사회 발전 단계의 소산으로서, 이미 상당한 분화分化를 거쳤기 때문에 거기서는 개인주의냐 아니면, 공동체 이념이냐라는 식의 간단한 대답이 있을 수 없다. 양자는 이미 불가분의 관계로 얽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복잡한 사회에서는 예술 양식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각기 그것에 대응하는 사회학적 사실에 연관시키는 작업도 훨씬 어려워지는 것은 물론이다.
사회 계급을 각기의 이해나 목적을 기준으로 정의하려 해도 그것은 옛날의 토지 소유 귀족과 무산 농민 계급의 관계처럼 간단하게 되지 않는다. 중간 계층 내부에서도 이해와 관심이 엇갈리게 되고, 도시의 시민 계급은 한쪽으로는 민주적 평준화의 경향을 환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가들의 새로운 특권을 만들어내는데 열중하고 있었는가 하면, 귀족 계급은 또 그들대로 화폐 경제에 의존하게 된 결과 옛날과 같은 통일성과 일관성을 가진 행동기준을 잃고 시민계급의 비전통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에 접근해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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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천병희 譯: 서울, 문예출판사. 1991) p. 51~52
▲ 로마 문학
로마 문학이란 기원전 3세기에 그리스 문학과의 접촉에서 발흥하여 로마 제국의 언어인 라틴어로 기록된 문학을 뜻한다.
로마의 역사의 중심인물이 된 이탈리아인들은 몇 차례에 걸쳐 이탈리아 반도에 정착하였다. 특히 로마인들은 실용을 숭배하고 정치, 법률, 토목, 건축 같은 실제적인 방면에 많은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예술적인 방면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으나, 그리스 문화와 접촉하게 된 후부터는 문학에도 깊은 관심을 쏟게 되었다. 따라서 자연히 라틴어로 기록된 로마 문학은 그리스 문학의 번역에서 시작되었다. 로마 문학의 특징은 본래 전대 작가들의 작품을 모델로 하여 그것을 발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의 국운이 서서히 기울어지는 동안, 로마는 티베르 강변의 언덕을 중심으로 국력이 신장하며 그 위용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이태리 반도 전체 지역을 그들의 지배하에 둔 로마 사람들은 끊임없이 외국을 침략, 정복하고 그 곳에 개화된 식민 정책을 펴 나감으로써 지중해 연안 전 지역에 걸쳐 그들의 세력을 확장 하고자 노력하였다. 그 결과 불과 수세기 만에 라인강과 다뉴브강 남쪽의 유럽 지역과 영국, 북아프리카, 그리고 흑해와 지중해에 인접하여 있는 아세아 전 지역이 대 로마제국에 통합되는 세계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정치적 기적을 낳았다.
로마의 역사는 크게 1.유사이전, 2.고대(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에서 키케로까지), 3.황금시대(B.C 70~A.D 14), 4.백은白銀시대(14~117), 5.쇠퇴시대(117~500)로 분류된다. 그 기간은 약 1,300여년 가량 되는데, 그 역사 전개과정을 통해 로마인들의 흥망성쇠를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기원전 3세기 이전의 로마 문학도 살펴볼 수는 있으나, 그것은 남쪽의 헬레니즘, 북쪽의 에트루리아적 헬레니즘의 영향 아래 축제의 노래나 우리나라의 산대놀이 같은 연극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기원전 272년 남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지 타렌툼 함락 때 로마로 끌려온 포로 가운데 소년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Livius Andronicus(B.C 284?~204)가 번역한 《오딧세이》를 최초의 로마 문학으로 인정하기에 이른다. 로마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헬레니즘의 정신과 문화를 전수 받게 되었고, 그리스어가 아닌 자국어(라틴어)로 그리스 문학과 사상을 옮겨 재현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로마인은 그 빈약한 농민의 말을 갈고 닦아 고전 라틴어를 만들어내었고, 그리스 문학을 모형으로 하여 많은 걸작을 낳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이 항상 현실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그 현실을 넘어 이상의 세계를 추구한 데 비해, 로마인들은 항상 현실 속에만 시선과 관심을 한정하고 집중하였기 때문에 행정, 공학, 건축 같은 현실적이며 실제적인 방면에 힘쓰게 되었다. 이는 역사상 필연적인 소산이었으며, 힘으로 그리스를 정복한 로마였지만, 사상, 예술, 그리고 문학에 있어서는 그리스의 노예였음을 우리는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1. 로마의 3대 정신
로마인들은 그들 자신의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었으며, 그들 자신의 정신을 발산하였다.
로마의 정신이 그리스의 정신처럼 그렇게 고원高遠한 것은 되지 못하였고, 그리스의 것이 시적이라면 로마의 정신은 오히려 산문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16) 그리고 로마인들의 내면생활은 의무, 규율, 성취의 세 가지 분야로 대변할 수 있다. 로마시의 전설적인 건설로부터 고트족의 최후까지 이 3대 정신은 로마인의 생활양식 속에 들어앉아 그들의 의식으로서나 이상주의적 요소로 작용하면서 발전을 멈추지 않았다.
① 의 무
로마인들은 인간은 자신보다 더 우월한 존재에 복종하여야 하고, 또 그 우월적 존재에 의하여 만들어진 도덕률에 절대적으로 순응을 하도록 묶여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또한 로마인들은 일상생활의 모든 면에 크고 작은 많은 신들이 있으며, 그 신들의 비위를 건드리면 불행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의식을 베풀어 모든 신들을 정기적으로 달래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인간은 우주 속에서 신보다 훨씬 나약한 존재라 생각하였다. 그러면서도 로마인들은 신의 매개물인 인간을 통해서 신들은 인류 전체의 안락과 복지 실현에 권능과 위력을 보인다고 생각하였다. 신들의 인도에 의해서 인류의 발전이라는 소망을 실현하기 위해 그들은 기꺼이 신의 뜻에 순종하고 자신들의 맡은 바 의무를 수행하였던 것이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형성된 뿌리 깊은 의무감을 통하여 로마인들은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사실상 로마를 세계의 통치자로 만든 지, 덕, 체를 발전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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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R.W. 호튼. VF. 포퍼, 앞의 책 p. 136.
② 규 율
강한 의무감의 당연한 결과로서 로마인의 삶은 규율 존중 정신으로 특징지어지며, 이 정신은 합리성과 능률성, 그리고 충성심을 낳는 결과를 가져왔다.
로마인들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엄격한 규율을 따르고 순종하도록 훈련되었다. 그들은 요람에서부터 가족회의의 사전승인을 얻도록 교육받았다. 교육, 직업, 결혼, 자식의 작명, 심지어 자기 자식들의 직업 선택의 문제까지도 가족회의의 심의를 거쳐야만 하였다. 그들은 이것에 대한 대안이 될 만한 다른 제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제약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성인이 되더라도 이와 같은 관습에 반항하는 마음을 먹을 수 없었다. 로마인들은 가정 내에서도 사회가 전반적으로 기대하고 있는 질서와 능률을 존중하였다. 국가는 국민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공정하고 너그럽고 그러면서도 사리가 분명하였으나, 존경과 절대 순종을 요구하는데 있어서만은 조금의 양보도 없었다. 탄압을 하지 않았으나, 국가의 요구를 어기는 자는 엄격하게 처벌하였다. 국가는 많은 봉사를 요구하였지만, 그 대신 반대급부도 적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그 규율을 묵묵히 지켰던 것이다.
③ 성 취
로마인들은 그리스인들처럼 목적 없이 방법만 생각하는 것은 사려 깊은 행동이 아니라고 여겼다. 로마인들은 명확한 결론에 도달해야만 이상을 추구하는 헌신적 노력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이 지적인 결론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는데 반해, 로마인들은 추상적인 사유보다 눈앞에 보이는 구체성을 띤 것으로 나타내기를 더 좋아하였다. 그리스인들에게 하나의 원리는 완성된 산물이었지만, 로마인들에게 원리란 실용적으로 쓸모 있는 것을 창조해내는 데 필요한 연장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로마인들은 결과적으로 창조의 본능은 실용성에 있다고 보게 되었다. 로마인들이 뛰어난 건축가였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건물, 교량, 수도시설, 공공 경기장들은 실용적이었으며, 보기에도 장관이었다. 도시와 공원은 웅대하게 설계되었으며, 포장과 조경이 잘되고 경사처리가 완만하게 된 도로를 따라 여행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러한 실용성은 결과적으로 전통적인 로마의 도덕성의 붕괴를 초래케 했고 물질적인 삶을 조장하여 그 자체 내에서 정신적인 붕괴를 부채질하였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성취’라는 이상이 이룩됨으로써 로마는 멸망하게 된 것이다.
타국의 정복은 부를 가져 왔고, 로마공학의 발달은 생활의 안락을 가져 왔다. 엄청난 부가 축적되고, 그것으로 인한 빈부의 격차가 크게 벌어져서 사회가 타락되었고, 또한 그처럼 규율과 기강이 잘 확립되었던 로마 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 균형이 깨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실용 지향적인 로마인이긴 하지만 그리스 사람들을 인도하였던 중용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만큼 실용적이지는 못했으며, 로마인의 규율과 투철한 의무감마저도 물질적 성공이 가져다주는 유혹을 끝까지 이겨낼 수는 없었다.
로마는 마침내 멸망하였다. 로마의 멸망은 고트족의 도시 약탈에 의한 멸망처럼 확실히 퇴폐적인 물질위주 풍조에 기인한 것이었다.
로마가 위대해진 여러 이유를 찾으면 타인으로부터 배우는 로마인의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된다. 자신들의 문화적 유산을 자랑하기도 하였지만 로마인들은 제도와 풍습에 관하여 독선적인 태도를 결코 취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활방식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고 찾고 배웠다. 한 나라를 정복하면 그들은 그 나라의 물질적인 부를 평가하고 그 부를 자국의 재력을 튼튼히 하는 데 이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두뇌도 잘 활용하였다.
독창성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로마인들은 대부분의 아이디어나 이론들을 수입하여 실용적으로 발전시켰다. 교육과 철학, 예술 등 모든 분야에 걸쳐서 로마인들은 독창성은 거의 없었지만, 학문의 활동은 크게 번성하였다. 로마인들이 다른 나라의 문화를 터전으로 하여 더 큰 문화를 발전시키지 안했더라면 대부분의 문화가 오늘날로 전승되지 못하고 사라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라틴문명 이전의 지적 산물에 관하여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거의 상당수가 로마의 복사판이거나 개작물, 또는 번역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예술 및 지적 자료가 풍부했던 것은 물론 그리스 문화이다. 로마의 군대가 그리스를 정복하였지만, 로마를 궁극적으로 정복한 것은 그리스의 학문이었다. 이 말의 의미는 로마인들은 그리스 문화에 심취하였고, 그래서 그리스의 교사와 시인들을 초빙하였고, 자녀들의 교육을 심화시키기 위하여 그들을 아테네로 유학 보냈다. 그리스의 시, 철학, 연극, 종교, 회화, 조각을 그들의 지적 정신생활의 모델로 사용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로마인들은 헬레닉 반도 전 지역을 로마 공화국으로 합병하기 훨씬 전부터 그리스의 문화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8세기에 로마인들은 최초로 알파벳을 알게 되었다. 그 때부터 계속해서 그리스 문화와의 접촉이 중단되지 않고 교류가 이루어진 곳은 이탈리아의 남부에 있는 그리스인 거류지인 쿠메Cume이다. 그리스의 위대한 예술작품이 로마의 정신을 형성하는데 필요했고 그들은 그리스의 문화와 정신에 힘입어 로마문화를 발전시키는데 활용하였다.
요컨대, 로마의 위대성은 로마인의 지적 탁월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고전 작품의 보존자며 전달자로서 로마는 후세 사람들의 감사를 받을 만하다. 그러나 예술에 대한 로마의 공헌은 뛰어난 점도 있었지만, 모방적이며 자의식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로마의 귀중한 유산들은 지적인 면에서보다는 오히려 감성적인 면, 즉 애국심, 로마 민족으로서의 긍지, 국가의 운명과 일심동체가 되겠다는 굳은 신념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정신적 요소로부터 규율존중, 질서와 정의 애호, 시민으로서의 책임감, 그리고 로마를 서구세계의 정치적 사회적 지도자로 만든 실용성을 추구하는 지혜에서 로마 정신은 비롯되었던 것이다.
2. 로마 문학의 전개과정
로마 문학이란 로마인들이 그들의 언어인 라틴어로 기록한 문학을 말하며, 달리 라틴 문학이라고도 한다. 원래 농경민족이었던 로마인들에게는 예로부터 주법呪法*의 노래나 즉흥 연극에 속하는 아테라나극劇이 있었으나 기원전 3세기까지는 문학다운 문학이 없었다.
로마는 그리스 문화에 접하게 되면서 서서히 문학에 눈뜨기 시작하였다. 로마의 역사에 언급된 최초의 문인은 아피우스 클라우디스Appius Claudius(B.C 312)이다. 앞에서 언급한 안드로니쿠스는 그리스 문학을 처음으로 로마에 소개한 공로자이며, 나에비우스Naevius(B.C 270?~200?)는 그리스의 비극과 희극을 번안하는 한편, 로마의 고사에서 제재를 취한 비장극悲壯劇을 창시하였다. 플라우투수Plautus(B.C 254?~184)는 로마 최대의 희극 작가로서 《유령의 집Mostellaria》, 《포로Captivi》, 《거짓말쟁이 기사Miles Gloriosus》 등 천재적 독창성을 보인 21편의 작품을 남겼다. 북방 움브리아 출신인 그는 그리스의 메난드로스의 작품과 그 밖의 그리스의 기원전 4~3세기의 희극을 라틴어로 능숙하게 번안하였으며, 그 가운데 가요를 삽입하여 훌륭한 희극을 만들었다. 테렌티우스Terentius, Afer(B.C 195~159)는 아프리카 출신이면서도 민중들이 쓰는 속어를 사용하지 않고 상류사회 사람들의 전아典雅한 라틴어를 구사하여 순수언어 문학의 극을 창작했으며 《안드로스의 여인》이라는 수준 높은 희극을 남기기도 하였다.
초기 로마문학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사람은 로마인이 아닌 에니우스Ennius(B.C 239~169)로서 18권의 《연대기Annales》를 저술하여 ‘로마 문학의 아버지’란 칭호를 받았다. 《연대기》는 미숙하였지만, 애국적인 신념과 장중한 스타일과 상상적이면서도 음악적인 언어로 로마의 역사를 서사체로 노래하여 라틴어 서사시의 기초가 되었다. 초기 로마문학의 시기가 지나고 기원전 2세기 후반기에 시작된 공화정 말기에 그리스의 웅변적 수사학은 쇠퇴하고, 세계적인 대제국으로 성장한 로마는 웅변술을 중시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키케로Cicero M. Tullius(B.C 106~43)의 웅변적 산문은 그 절정에 달하였다. 그의 문체는 장식이나 가식이 없는 유창하고 힘찬 대화조의 연설 스타일이었다. 키케로와 더불어 그의 정적이었던 케사르Caesar, Julis(B.C 102~44)역시 뛰어난 웅변가였다. 그의 문체는 간결하고 장식이 없었으며 듣는 이로 하여금 진실을 느끼게 하는 산문체였다.
개인 전기물도 그리스의 산문을 본받아 하나의 문학 장르가 되었으며, 키케로 시대의 네포스, 타키루스 등이 대표된다. 특히 네로 황제의 사부로서 스토아학파인 세네카Seneca(B.C 4 B.C~ A.D 65)의 서간체, 도덕철학론과 수많은 논설들이 유명하다.
기원전 30년경에는 아우구스투스가 제정을 수립하면서 소위 ‘황금시대’를 열었는데, 이때 베르길리우스(B.C 70~19)를 중심으로 서정시가 완성되었다. 로마의 국민적인 시인이었던 그는 목가牧歌, 교훈시 뿐 만아니라 영웅서사시도 완성하였다. 그리고 로마 역사문학의 정점을 이룬 리비우스의 《로마사》가 완성된 것도 이 때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변사학辨辭學이 점차로 문학을 좀먹기 시작했다.
아우구스투스로부터 도아티아누스제帝에 이르는 암흑 제정시대를 거쳐, 로마제국의 최전성기였던 ‘백은시대’가 계속되었는데, 이때는 변사학과 변사술이 세력을 날로 더해 갔다. 그 결과 로마의 문학은 2세기 후반부터 급속히 생명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미 문학에서의 라틴어는 외국어와 같은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렇듯 기원전 3세기 그리스문화와 접촉하면서 발생한 라틴문학은 그리스 문학을 모방, 계승하면서 발전하였는데, 문학의 형식에 있어서도 서사시, 서정시, 비극과 희극, 산문문학 등 그리스의 양식들을 그대로 이어왔던 것이다. 그러다 후대에 와서 변사학에 의해 문학자체가 점점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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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법呪法 : 모든 여명기의 국민 문학과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의식에 따르는 노래와 주언呪言을 비롯하여 사람들을 경계하는 말과 묘비문 등을 말한다.
3. 로마 문학의 특징
로마인들은 전통적으로 예술이나 예술가에 대하여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원래 농업을 주로 하던 그들은 노동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에도 노동경시의 풍조가 강했으며, 그 결과 육체노동과 조형예술을 경시하였다. 문화가 화폐와 경제적, 도회적인 성격으로 변모하고 로마가 그리스化되면서 시인의 사회적 지위가 점차 높아지기 시작했고 이어서 조형예술가의 사회적 지위도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원래 이러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였다. 이어서, 한편에서는 시인이 예언자로 간주되는 형태로, 다른 한편에서는 궁정과 더불어 개인이 예술보호에 나섰고, 이것이 상당한 규모로 확대되어 나타났다. 이처럼 조형예술의 사회적 지위에 비교하면 문학의 사회적 인식과 지위는 꽤 높은 편이었다.
당시 로마의 극작가이자 철학자였던 세네카Seneca는 예술작품과 그 작자를 분리해서 생각한다는 고전적인 생각을 대변한 인물이었다. 그는 “사람들은 신들의 상像을 숭상하고 이에 희생을 바친다. 그러나 이들 상을 만든 조각가는 경멸한다”고 했다. 이와 같이 시인을 조각가와 동렬에 두는 것은 상당히 비고전적인 사고방식으로서, 이러한 모든 문제에 대한 제정시대 후기의 사람들의 태도가 얼마나 일관성이 없었던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시인이 조각가와 같은 취급을 받았던 것은 그 역시 일개의 전문가이고 일정한 예술 규범을 실천하고 있는, 즉 신으로부터 받은 영감을 합리화된 기술로 바꾸는 행위에 종사하고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플루타르크의 예술관을 일관하고 있는 동일한 모순은, 루키아노수Lucianos, Lucian의 풍자시 《꿈》에서도 발견된다. 즉 이 시에서 조각은 평범하고 더러운 여자로 그려져 있는데 비해, 웅변술은 천사와 같은 고귀한 존재로 그려져 있다. 다만 풀루타르크와는 반대로 신들의 상과 더불어 그 작자도 우리는 존경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말에서 그나마 나타나는 예술가에 대한 인간적인 존경은 분명히 제정시대의 심미주의와 관련된 것이며, 간접적으로는 신新플라톤 철학이나 기타 이와 비슷한 철학사조들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시대에 조형예술가를 사회적으로 경시하는 소리가 끝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은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가 그 말기에 이르러서도, 그 자랑스러운 미적 문화에도 불구하고 르네상스나 근대의 천재개념 같은 발상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발상에 입각할 때에야 비로소 예술가는 자기 내면의 것을 표현하기만 하면 되고, 아니 심지어는 자기 내부의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암시하기만 해도 되고, 그 표현하는 형식이나 수단의 여하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고방식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17)
또한 고대 로마 제국시절 리비우스,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등의 시인들이 세계 문명의 중심지인 로마의 영원성을 노래한 이래, 전통적으로 로마의 지배가 세계의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로마의 이념Idea of Rome’이 로마 문학의 일관된 주제였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자리 잡으면서, 기독교 측에서도 이러한 정신 고양에 일조를 했는데, 특히 4세기 초기에 주교 에우세비오스가 주장했던 기독교적 로마제국 이념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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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A.하우저, 앞의 책 p. 137~138.
▲ 동양문학
1. 오리엔트의 문학
인류의 발생과 함께 싹튼 자연주의적 예술양식은 구석기시대의 종말까지 거의 수천, 수만 년까지 계속되었다. 예술사상 최초의 양식 변화를 이루는 전환점은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 이행되면서 나타났다.
이때에 비로소 체험과 경험에 대해 개방적인 자연주의적 경향이 물러나고, 경험세계의 풍성함을 등진 채 모든 것을 기하학적 무늬로 양식화하려는 경향이 대두되었다. 즉, 자연에 충실하며 그때그때 모델의 특징들을 애정과 인내로써 묘사하려는 그림 대신에, 사물을 충실히 그려낸다기 보다 상형문자처럼 가리키는 데 그치는, 획일적이고 인습화된 기호가 나타난 것이다.
예술은 이제 인생의 구체적이고 생생한 모습보다는 사물의 이념이나 개념 내지는 본질을 포착하려고 하고, 대상의 묘사보다 상징의 창조에 주력하였던 것이다.
기원전 5000년경부터 이집트의 나일강 유역과 메소포타미아(현재의 이라크)의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 유역에서는 기하학적 모양을 위주로 하는 장식적, 형식주의적 예술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양식의 예술형태는 이 지역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다.18) 또한 이 지역에서는 기원전 5000년경부터 유목생활에서 벗어나 농경생활과 더불어 정착생활이 시작되었는데, 이 시기를 기점으로 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피라미드와 신전으로 대표되는 문화적 전통과 절대왕권제도가 확립되면서 도시가 생기고 신을 모시는 신전이 생겼으며, 문자가 발명되었다. 그리하여 기원전 3000년경 무렵에는 어느 정도의 수준에 도달한 문학도 나타나게 되었다. 그 가운데 걸작으로서 후세에까지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서사시 《길가메슈》이다.
《길가메슈》는 처음에 티그리스강 하류에 살던 슈메르족 사이에서 기원전 3000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서사시는 찰흙판에 설형문자(쐐기문자)로 기록되어, 앗시리아의 니느웨 궁전에 무려 3500~2500년 동안이나 보관되어 오다가, 1862년 영국의 조지 스미스가 이를 해독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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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A.하우저, 앞의 책 p.17.
오랜 옛날 엘레크 도시에 2/3는 신이고 1/3은 사람의 모습을 한 한 용사 길가메슈가 살고 있었다. 그는 너무 제멋대로 굴기 때문에 하늘의 신은 도시사람들을 돕기 위해 여신 아루루에게 명하여 찰흙으로 괴물 엔키두를 만들게 하였다. 엔키두와 길가메슈는 거리에서 만나 격투를 벌였으나 둘 다 지지 않았다. 마침내 그들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의 힘을 인정하고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그들 두 사람은 성스러운 숲의 괴물 훔바바를 쓰러뜨리기 위하여 모험길에 나섰다. 숲의 입구에 있는 큰 문에 손이 끼여 꼼짝 못하기도 하고, 이상한 꿈을 꾸는 일 등이 있은 뒤, 두 사람은 홈바바를 쓰러뜨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하늘의 소와도 싸우게 되었는데, 엔키두는 그 소를 죽이고 말았다. 그 일 때문에 하늘의 신은 엔키두에게 죽음의 벌을 내렸다. 그는 점점 약해지다가 마침내 죽고 말았다. 친구를 잃은 길가메슈는 슬픔에 잠겼다. 그는 불사不死를 찾아 끝없는 나그네 길에 나섰다.
여행 도중 길가메슈는 전갈 인간과 만나기도 하고, 여인숙에서 시두리라는 여인으로부터 불사를 구하는 것이 헛된 것이라는 사실을 배우기도 하면서, 먼 섬에 사는 불사의 사람 우투나피슈탐을 찾아가게 되었다. 그는 불사의 비밀로서 오랜 옛날 신이 일으킨 대홍수(구약의 노아 홍수 이야기와 같은 내용임)이야기를 하며, 그 때 살아남게 된 전말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러나, 불사의 사람 우트나피슈탐 역시 불사의 방법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결국 바다 밑에 있다는 불로초에 대한 말을 듣고, 그것을 구했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귀로에 올랐으나, 도중에 잠시 쉬는 사이에 뱀이 와서 그것을 먹어 버렸다.
이집트에는 주로 《사자死者의 글》이나 《이시스와 네프티스의 탄식》과 같이 종교문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쿤아톤 왕의 《태양 찬가》와 같이 뛰어난 시가 있고, 소설적인 작품도 《시누헤 이야기》와 같이 뛰어난 것이 있다. 이는 고대 이집트 문학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작가 미상의 소설적인 이야기로서 파피루스에 상형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이집트의 고관 ‘시누헤’의 자서전과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 줄거리를 보면 다음과 같다.
고대 이집트에 시누헤라는 세소스트리스 왕가의 시종이 있었다. 왕이 승하하자 왕자들 사이에 후계 문제로 싸움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것을 본 시누헤는 그 싸움에 말려들게 되면 생명이 위험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서둘러 도망쳐서 남쪽을 향해 끝없이 나아갔다. 그는 나일강을 건너 국경을 넘어서 유목민인 베드윈 사람들이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대접을 받은 그는 더 남하하여 케뎀 땅에서 한해를 보냈다. 레테누에서는 태수의 신임을 받아 그 딸과 결혼하여 자녀들도 생기게 되었다. 이 땅은 기름져서 생활은 여유가 있었다. 아이들도 성장하였고, 영지도 넓게 차지하게 되어 느긋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레테누 땅에는 악한 자가 있어 이 나라를 불안에 몰아넣었다. 시누헤는 그 악당과 싸워 마침내 그를 멸망시켰다. 사람들은 모두 환성을 지르며 시누헤를 예찬하였다. 그의 영토도 사는 집도 점점 커지게 되었고, 신전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지게 되었다. 그러나 늙어짐에 따라 시누헤는 고향 이집트가 그리워지게 되었다. 그는 이집트 왕에게 귀국허가를 요청하였다. 왕으로부터 사자가 와서 고국에 돌아오도록 허가를 받은 시누헤는 많은 선물을 준비한 뒤 귀국하여 왕과 왕비를 알현하였다. 왕은 시누헤에게 궁전의 특별실에 살게 하였고, 또한 죽은 뒤를 위해 피라밋도 건축하여 주었다.
고대 오리엔트 문학에 대하여 이를 전체적으로 통합하면서, 작품의 세계관과 작가를 포함한 문인들의 사회적 지위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즉, 고대 오리엔트 지역에서는 일반적으로 예술가란 어디까지나 이름 없는 장인匠人에 불과했고, 기껏해야 작품의 작자로 대접을 받았지 인격으로서 존중된 것은 아니었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구별을 말할 수 있는 것은 건축가의 경우에서나 가능한 정도였고, 조각가나 화가는 육체노동을 하는 장인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문학은 경우가 조금 달랐다. 그리스, 로마 시대에 문학이 존중받은 반면 조형예술이 천시 당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그 징조는 이미 고대 이집트에서 싹튼 것이었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세계문학사를 설명할 때는 반드시 그리스의 헬레니즘과 유태의 헤브라이즘으로 대표되는 서양문학에서부터 그 출발점으로 잡았으나, 근래에 와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서양문학보다도 1000년 이상이나 먼저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이집트 지역, 즉 오리엔트 지역에서 문학이 발생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비록 작품의 대부분이 신들의 영광이나 지배자들의 권리를 정당화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쓰여졌다고는 하나, 세계에서 가장 앞선 시기에 문학작품을 탄생시켰다는 데 그 역사적 의의가 있을 것이다.
2. 인도의 문학
세계 4대 문명 발상지 가운데 하나인 인도는 기원전 2500년 무렵부터 번영하기 시작한 인더스 문명을 계승 발전하였다.
인도 문학의 최초 발생은 기원전 1500년 무렵 아리아인에 의해서 시작된 브라만교의 종교문학에서 출발한다. 브라만교의 성전聖典인 ‘베다’의 이름을 따서 베다문학이라 일컫는 이 고대 인도문학은 약 1000년 동안에 걸쳐 번성하였으며, 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이들 인도문학의 첫 출발은 아리아인들이 대자연의 웅대한 변화를 보고 태양과 번개 및 비와 바람 따위를 신으로 보고, 그런 신을 예찬한 자연숭배의 서정시를 짓는 데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자연신을 기린 시가를 중심으로 집대성한 것이 인도 최고最故 문헌인 《리그 베다》 10권이다.
이것을 중심으로 하여 제사祭詞를 모은 《아쥬르 베다》와 가사를 모은 《샤마 베다》 그리고 주사呪詞를 모은 《아탈 베다》가 형성되었다. 이 모든 것을 모아 ‘베다문학’이라 한다. 즉 베다문학은 고대 시인의 소박한 서정시가에서 시작되어 브라만교의 제식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 종교문학이다.
베다문학이 끝날 무렵인 기원전 수세기 전에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라는 2대 서사시가 형성되었다. 이 두 편의 서사시는 먼 옛날의 사건이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온 것을 정리한 이른바 구비문학이다. 《마하바라타》는 ‘바라타족의 전쟁에 관한 대설화’란 뜻이며, 바라타족의 대전쟁을 노래한 서사시로서 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되어 있으며 18편 10만 송頌의 본문과 ‘하리반샤’라는 부록 1권으로 된 장편이다. 《라마야나》는 인도의 시선詩仙이라 일컫는 발미키가 쓴, 영웅 라마의 무용담으로서 7편 24,000송의 거대한 장편 서사시이다. 이 두 편의 서사시의 기원은 정확하지는 않으나 기원전 6세기에 힌두교의 전통이 문헌으로 정리되기 시작했는데, 그보다 약간 후대에 정리 기록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두 편 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동안 점점 길어지게 되었고, 마침내 오늘날 전해지는 형태를 이루게 되었다. 따라서 한 작자에 의해서 창작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인도인은 현재도 자기들의 나라를 가리켜 ‘바라타 바르샤(바라타 왕이 나라)’라 하는데, 이는 이 이야기가 인도 국민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 서사시에 포함되어 있는 많은 이야기는 후세의 사상과 문학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19)
기원전 4세기경 바니니라는 문전가文典家가 등장하여 산스크리트어의 문법을 만들었다. 이 말에 의해 수많은 인도 문학작품이 기록되게 되었다. 고전 산스크리트 문학 최초의 작가는 불교 시인 아쉬바고사馬鳴(2세기경)이다. 불타의 전기를 기록한 서사시 《붓다 찰리타佛陀行讚》는 그의 대표작이다.
뒤이어 바사(3세기)와 쉬드라카(4세기경)라는 두 명의 뛰어난 극작가가 배출된 뒤, 인도 제1의 문호로 일컬어지는 카리다사Kaliidása(4~5세기)가 등장하여 산크리스트 문학을 완성시켰다. 그는 인도 문학사상 최대의 작가로서 걸작 《샤쿤탈라Sakuntalà》극을 위시하여 극과 서정시 및 서사에 우수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칼리다사 이후 약 800년간은 인도 문학의 전성시대로서, 그 기간 동안에 각종 작품이 창작되었다. 서정시에서는 바르트르하리Bhartrhari(7세기)가 등장하여 100수의 시를 모은 《샤타카 [百詩集]》라는 시집을 세 권 저술하여 시집의 새로운 형식을 창출하였다. 또한 시대적으로 중세와 근세에 속하는 시대에 아마루Amaru(7~8세기)와 빌하나Bilhana(11세기) 등의 시인이 나온 뒤, 자야데바Jayadeva(12세기)는 소치는 목동 크리쉬나를 비쉬누 신의 화신으로 노래한 《기타 고반다Gita govinda[소치기의 노래]》를 지어 산스크리트 문학의 최후를 장식하였다. 바라비Bharavi(6세기)와 바티Bhatti(7세기) 및 마가Magha(7~8세기경) 등의 서사시인들이 등장하였고, 역사상 유명한 희곡으로 하르사Harsa(606~648)가 불교극劇 《나가난다Nagananda[용왕의 기쁨]》 외 두 편을 남겼다.
7세기경 성행한 산문 이야기 소설은 단딘Dhandin(7~8세기 경), 수반두Subandhu(7~8세기), 바나Bana(7세기) 등 세 시인이 전설과 옛 이야기에서 제재를 취하여 흥미로운 새 분야를 개척하였다. 인도의 설화와 우화문학은 세계 문학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5편으로 되어 있는 《팡차탄트라Pancatantra》는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서, 작자도 연대도 분명하지 않으나 그 내용과 형식은 동서 여러 나라의 설화 문학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또한 구나디야Gunadiya(6세기 이전)의 대설화집 《브르하트카타Brhatkath》는 현재 전해지지는 않고 있으나,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지어진 설화집이 여러 가지로 전한다. 그 중 소마데바Somadeva (11세기)가 지은 《카타사리트사가라Kathasaritsagara[이야기가 흘러드는 바다]》는 아름다운 산스크리스트어로 기록되어 있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샤쿤탈라》는 인도 제일의 시인이며 흔히 인도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려오던 칼리다사의 대표작이다. 1789년 처음 영어로 번역되자, 유럽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헤르더와 괴테 등을 감격케 했다. 특히 괴테가 이것을 찬양하는 시를 쓰기도 하고 또 《파우스트》의 구상에 모방한 일들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즉, 그 ‘천상의 서곡’과 ‘프롤로그’는 이 인도극에서 배운 것이리라 추측되고 있다.
이 극의 재료는 옛날 대서사시 《마하바라타》 등에 나타나 있는 신화, 전설에 의거한 것이다. 처음에는 신을 찬양하는 송시가 있고, 이어 좌장座長과 배우에 의한 극의 작자 및 제목을 소개하는 훌륭한 서막을 지나 주제로 들어가고, 극은 7막으로 되어 있다.
제1막은 사냥꾼 차림을 한 ‘도샨타’ 왕이 사슴을 쫓아 히말라야 산중에서 길을 잃고, 칸바 선인의 집에 의탁하고 있는 선녀 ‘샤쿤탈라’를 보고 반하게 되는 장면이다. 제2막은 광대인 종자와 사랑에 고민하는 왕과의 익살맞은 대화이며 제3막에서는 샤쿤탈라도 왕을 사랑하여, 그의 친구에게 고백하는 것을 엿듣고, 왕이 결혼을 청한다. 제4막, 왕은 선녀와 인연을 맺고 먼저 궁성으로 돌아온 후 샤쿤탈라는 나중에 뒤를 쫓아오기로 약속했으나, 선녀는 사랑에만 마음을 팔고 ‘돌바시스’ 선인에게 예를 닦지 못했기 때문에 애인으로 하여금 그녀를 잊어버리게 하는 저주를 받는다. 그러나 친구의 노력으로 선인의 노여움이 풀려, 그녀가 왕으로부터 받은 반지를 왕에게 보일 때 이 저주가 풀리게 된다. 샤쿤탈라는 칼바 선인으로부터 여자로서 행할 길을 가르쳐 주는 축하의 말을 들은 뒤, 친구들과 평소에 사랑하던 나무나 동물에게 상냥스럽고 인정스런 이별의 말을 고하고 궁성이 있는 수도로 나그네 길을 떠난다. 이 부분이 가장 절정에 이른 아름다운 장면, 제5막, 선녀는 왕궁에 도달했으나 왕은 그녀를 잊어버리고 있고 기념으로 준 반지도 잊어버리고 있어서 비탄에 빠진다. 이 때 하늘로부터 한 줄기 빛이 내려와 선녀는 승천한다. 제6막은 어부가 잡은 고기의 뱃속에서 반지가 나와 그가 그것을 팔려고 하다가 경관에게 끌려간다. 왕은 반지를 보고 선녀가 생각나서, 그냥 모르는 체하여 선녀를 떠나보낸 것이 후회되어 고민한다. 이 때에 인드라 신의 사자가 나타나서 악마를 정복하는 데 왕의 힘을 빌리고 싶다고 신의 뜻을 전한다. 제7막, 하늘의 악마를 정복한 왕은 전차를 몰고 공중을 지나는 중에 산중에 사내아이가 사자와 놀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 아이는 샤쿤탈라와 왕과의 사이에 태어난 ‘바라타’이며 잠시 후 선녀도 그곳에 나타나 둘이서 재회를 기뻐하는 데에서 막이 내린다.
구상의 묘함도 그렇거니와 시문의 아름다움에 있어서는 예부터 산스크리트 문학의 첫째로 꼽혀 여러 가지로 변형된 책이 많이 있는데, 《데바 나가리》 책이 가장 원본의 모습을 남기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영국, 독일 그 밖의 유럽말로 번역되어 있다. 칼리다사의 연대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유명한 것은 찬드라 구프타 2세의 궁정시인이었다고 하는 것인데, 그로 미루어 보면 4세기에서 5세기 초엽의 사람이었다고 생각된다. 당시의 구프타 왕조는 최융성기로서 그는 풍부한 고전 산스크리트 문학을 계승하여 이것을 완성시켰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샤쿤탈라》외에 극으로는 《용기로써 얻어진 우르바시》등이 있고, 서사시 《군신 쿠마라의 탄생》, 《라그의 왕통》, 서정시에는 유명한 《구름의 사자》, 《계절집》이 있다.
한편 기원전 4세기경에, 예로부터 전해오던 바라몬교에 대하여 불교와 자이나교가 발생하여, 각각 그 신앙을 배경으로 한 종교문학을 발전시켰다. 불교의 경전은 ‘삼장三藏’이라 하여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 경전들 속에는 문학적으로 우수한 것이 적지 않다. 그 중 《대장경大藏經》이 유명하다. 또한 불타의 전생 이야기를 소재로 한 설화 547종을 모은 《자타카말라Jatakamala》는 불교 시인 아리아쉬라Aryasura (6세기 경)의 작품으로서 산스크리스트어의 《팡차탄트라》와 더불어 세계 설화문학상 중요하다.
《자타카말라》는 고대 인도어인 바리어로 기록되어 있는데, 불타는 전생에 왕, 장관, 부자, 현자, 도둑 또는 코끼리, 원숭이, 공자, 물고기 등 여러 가지 생물로 태어났던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설화는 예로부터 중국에 전해져 《본생화本生花》라 일컬어졌고, 한문으로 번역된 불경에도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도 전해지는 것이 많다. 《원숭이(토끼)의 생간》과 《달 속의 토끼》등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또한 사자 껍질을 쓴 나귀 이야기, 까마귀의 목소리를 칭찬하여 잡아먹는 표범이야기 등 이솝 우화나 라퐁텐의 《우화》와 같은 내용의 것도 있어, 세계 설화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팡차탄트라》는 ‘다섯 편의 이야기’라는 제목이 말해 주듯이 5권으로 된 작자 미상의 고대 인도 설화집이다. 바라몬의 비쉬누살만이 왕의 부탁을 받아 세 왕자에게 처세와 통치의 방법을 터득하게 가르친다는 것이 전편의 틀을 이루고 있다. 원본은 오랜 옛날에 없어졌으나, 세계 50개 국어로 번역되어 그 내용과 형식은 동서 여러 나라의 설화문학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팡차탄트라》에 수록되어 있는 이야기는 《그림동화》와 《이솝우화》 또는 《아라비안 나이트》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벵갈 지방에 전하는 설화집 《히토파데사Hitopadesa》(10~14세기)는 나라야나Nharayana가 《팡차탄트라》의 5편을 4편으로 고쳐 쓴 것으로서, 이것 또한 널리 읽혀지고 있다.
고대 불교 문학 작품은 팔리어로 기록되었으나, 뒷날 산스크리스트어도 사용되게 되었다. 고전 산스크리스트 문학의 최초의 시인 아쉬바고사Asvaghosa(馬鳴 2세기 경)의 전기를 비롯하여 24명의 조사祖師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발달하여 수많은 우수한 문학자를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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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이하 인도의 문학에 대해서는 김희보 편저 《세계 문예사조사》(1989, 서울, 종로서적) p.62~72.참조.
3. 중국의 문학
가. 주周대의 문학
황하강 유역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의 하나를 만들어낸 중국인들의 문학은 농경 생활을 하면서 자신들의 소망인 풍년의 기원, 수확에 대한 감사, 그리고 농사를 지으면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노동요에서 출발한다.
이 때에 발생한 문학들은 생활의 필요에 의해서 생긴 것이었지만, 오랫동안의 경험 축적을 통해 독특한 시가詩歌형식을 만들어냈다. 이들 중국 문학의 역사를 개관하기 위해서는 《시경詩經》과 《초사楚詞》로 대표되는 주대周代의 문학, ‘부賦’의 성립을 본 한 대漢代 문학,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위魏, 진晉, 남북조南北朝 시기의 문학으로 나누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의 문학을 논하려면 주대周代의 《시경詩經》, 《초사楚詞》 등에서 출발하여야만 한다. 이 가운데 특히 《시경詩經》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집이다. 수록된 작품은 모두 305편으로 그 가운데 반수 이상인 160편은 ‘국풍國風’이라 하여 여러 지방의 민요를 모은 것으로서 가장 문학성이 뛰어난 작품이다.
《시경詩經》에는 기원전 11세기에서 기원전 8세기경까지의 한시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시경詩經》의 시는 모두 북방 황하 유역의 것이고, 시형이 4자씩 되어 있는 구절을 여러 줄 겹쳐나가는 이른바 ‘사언시四言詩’로서 대부분은 단편이다. 그 중에는 궁정연회에서 노래된 것도 있고, 종묘의 제사를 위한 무악舞樂에 맞추어 노래된 것도 있으며, 또한 주나라 왕실의 선조의 위대한 업적을 기린 장중한 서사시도 있다. 그러나 가장 뛰어난 것은 여러 지방의 민요이다. 그 대부분은 즉흥적으로 지어진 소박한 사랑의 노래들이다. 그 외에 생활의 괴로움과 병역의 쓰라림을 하소연한 것도 있다.20)
《초사楚詞》는 주周 시대 말기인 기원전 3세기경이 되어 남방 양자강 유역에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초楚 나라의 대시인 굴원屈原이 등장하여, 그를 중심으로 하여 새로운 낭송체 시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들의 작품을 모은 것을 《초사楚詞》라고 한다.
《초사楚詞》의 시행은 ‘시경’의 시에 비해 훨씬 자유롭고 느긋하다. 굴원의 대표작인 《이소離騷》의 경우 2천 5백자에 이르는 장시이다. 나라를 사랑하는 그의 일편단심은 읽는 사람의 마음에 감동이 저절로 우러나게 한다. 또한 《구경九經》의 여러 대목에서 볼 수 있는 남방의 정서 넘치는 풍경의 묘사나 애틋한 심정의 표현도 《시경詩經》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다.
중국문학사상 가장 오래된 장편 서정시 《이소離騷》는 ‘근심을 느낀다’는 뜻의 제목으로 춘추전국시대 말기인 기원전 3세기 초楚나라 때의 굴원屈原이 지은 작품이다. 간신의 참소를 받아 방랑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나라에 대한 걱정과 사랑하는 마음을 읊은 작품이다. 특히 《시경》에 수록된 작품들이 중국 북부지장의 시풍을 반영하여 소박하고 현실적인 반면, 이는 자유분방하고 정열적이고 낭만적이어서, 시어 또한 화려하다.
《서경書經》은 은과 주에서 형성된 산문을 집대성한 것이다. 산문의 기술로서는 이미 높은 수준에 도달하였으나, 이것들은 모두 왕후王侯의 선언과 포고문 등의 공문집을 모은 것이다. 개인의 자유로운 사상이나 감정이 숨 쉬는 산문은 주나라 말기인 기원전 4세기에야 비로소 나타나게 되었다.
주나라 왕실의 세력이 쇠퇴하면서, 약육강식의 시대가 된다. 이른바 춘추전국시대가 그것인데,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그치지 않아 사람들의 마음은 아주 거칠어지게 되었지만, 오히려 이때 여러 나라에서 사상이 꽃피게 되었다.
스스로 나아가 세상을 구원하려는 공자와 맹자의 유가儒家와 묵자의 묵가墨家 등 모든 욕심을 버리고 무위자연無爲自然의 한 길로 돌아오라고 주장하는 노자와 장자의 도가道家, 그 외에 상자와 한비자 등의 법가法家, 손자와 오자 등의 병가兵家, 공손용자公孫龍子 등의 명가名家 등 ‘제자백가’가 그것이다.
이들 사상가에 의해 기록된 문장은 모두 각각 특색 있는 것이었다. 《논어》와 《노자》처럼 간결하면서도 뜻 깊은 것, 《맹자》와 《장자》처럼 명쾌하고 유창한 것, 또는 자유분방한 것도 있었다. 더욱이 《순자荀子》와 《한비자韓非子》에 이르기까지 산문의 발달은 그야말로 눈부신 바가 있었다. 또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국어國語》, 《전국책戰國策》 등 뛰어난 역사문학도 이 시대에 기록되었다.
《논어》는 유교의 경전일 뿐만 아니라, 오래도록 중국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조상들이 성전聖典으로 받들어 왔다. ‘논어’는 공자의 말씀을 그의 사후 제자들이 기록한 책으로서 인생의 지혜를 담은 처세철학서이다. 중국 최고의 문헌학인 《한서예문지漢書藝文志》에 의하면, “공자가 그 제자들과 이야기한 것을 그때그때 제자들이 적었다가 공자 사후, 제자들이 한 데 모아서 편찬하였다”고 한다. 공자는 기원전 479년에 돌아갔으나, 《논어》의 이름이 문헌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그 후 300년이 지난 기원전 2세기 말부터였다.
맹자에 의해 성聖이요, 인仁이요, 지智라고 불리우고, 요순보다 월등히 현명할 뿐 아니라 유사 이래 아직 공자를 능가하는 자는 없다고 찬양을 받은 그는, “성스럽고, 어진 일을 어찌 내 할 수 있으랴”(《논어》의 〈술이述而〉편)라고 말하였으며, 또 같은 곳에서 “말없이 이것을 깨치고, 배움을 싫어하지 아니하고, 남을 가르쳐 싫증을 느끼지 아니하는 그 무엇을 내가 지니고 있단 말인가”라고도 말하였다. 공자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성聖이라거나 인仁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이외에도 이 세상의 큰 것이나 작은 것, 삶이나 죽음, 옳은 것과 그른 것, 추한 것이나 아름다운 것, 이 모든 것들이 도道 즉, 우주의 원리를 깨달으면, 모두가 하나라는 장자莊子의 사상을 체계화한 《장자莊子》가 유명하다.
나. 한漢 대의 문학
전국시대는 진秦나라의 시황始皇이 천하를 통일하면서 막을 내리고, 진나라에 이른 한漢나라까지 약 400년간의 전제군주제가 확립되고, 황제가 절대적인 권력을 장악했던 시대였기 때문에 유교儒敎에 의한 사상통일도 성공하였다.
그로부터 유교는 20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중국의 전통사상으로서 존중되었고, 중국인의 모든 일상생활의 가치 규범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따라서 문학도 자유로운 발전을 이루기가 힘들게 되었다.
한漢 대를 통하여 유행한 것은 ‘부賦’라는 낭송체의 아름다운 문장이었다. 역대의 천자와 왕후가 부賦를 애호하여 장려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앞 다투어 부賦를 지어 출세에 이용하려 했다. 이 문체의 대표적인 작가로는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있다. 부 외의 문장 중에는 천자에 대하여 의견을 말한 상소문 가운데 우수한 것이 많은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진秦의 이사李斯, 한의 가의賈誼와 조착晁錯 등의 정치 논문은 정정당당한 논법을 펴서 설득력이 뛰어나고 후세 ‘의론문議論文’의 모범이 되었다.
한漢 대 제일의 산문작가는 역사가로서 유명한 사마천司馬遷이다. 그의 거작 《사기史記》는 황제黃帝에서 무제武帝까지의 역사를 서술한 것으로 투철한 역사적 안목과 박력 있는 문장은 고금을 통하여 비교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할 만큼 우수하다. 《사기》는 본래 《태사공서太史公書》라 했으나, 위魏, 진晉 이후 《사기》라 불렸다. 정사正史 또는 기전체紀傳體 사서의 원조로서 위로는 황제黃帝부터 아래로는 한무제漢武帝에 이르기까지의 사건이 12본기本紀, 10표表, 8서書, 30세가世家, 70열전列傳의 130편으로 나누어 기술되어 있다. 〈본기〉는 제왕의 흥망을 적었고, 〈표〉는 세계 연표, 〈서〉는 예악禮樂제도, 〈세가〉는 춘추전국의 제후 및 한대漢代의 왕족과 공신으로서 왕후로 봉해진 사람들의 일, 〈열전〉은 중요한 인물들을 기록하고 있다. 사마천은 이 책을 쓰면서 모든 고금의 문헌을 샅샅이 뒤졌으나, 기록에 있는 것 이외에도 자기의 견문에 의하여 확실하다고 믿은 것은 대담하게 수록하여, 각 인물을 생생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자료는 옛날일수록 적고, 현대에 가까울수록 많고, 또 옛날과 지금과의 기술 형식에는 차이가 있으므로, 대략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묘사된 인물이 더욱 생생하게 드러나고 있다. 가령, 〈본기〉에 있어서 오제기五帝記부터 진본기秦本紀에 이르기까지는 대개 왕조의 흥망을 총괄해서 기술하였으나, 진시황 이후 한나라 경제景帝에 이르기까지는 시황始皇본기, 항우項羽본기, 고조高祖본기 등인데, 시황의 경우에 있어서는 절대자로서의 위대성을 자세하고 성실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약점도 빼놓지 않고 묘사하였다. 이러한 점이 그의 독특한 역사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마천은 사관의 집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고문을 배우고, 20세 때에 천하를 주유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간 후 태사령의 직을 계승하고 아버지의 유지에 따라 《사기》를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천한天漢 2년, 이능 장군이 흉노족에게 항복한 것을 변호하다 무제武帝의 노여움을 사서 궁형宮刑에 처해졌다. 남자로서 가장 큰 치욕을 당했으면서도, 사마천은 굴하지 않고 계속 《사기》를 집필하여 기원전 80년경에 완성시켰던 것이다.
한대의 시작품들은 계속해서 《시경》과 《초사》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궁정의 어용御用 시인들이 미사여구의 시구들을 즐기는 사이에, 민간의 시인들은 자유로운 형식과 쉬운 언어로 소박한 심정을 노래하였다.
악부樂府라 일컬어지는 가요가 그것들인데 정열적인 사랑의 노래, 한가로운 전원의 노래, 슬픔에 겨운 노래들과 하층 사회의 비참한 현실을 묘사한 것과 재미있는 서사시도 있다. 후대에 이르러 전문적인 시인은 모두 이 민간시의 형식을 모방하게 되었다. 오언시五言詩는 그 속에서 생겨나게 되었다.
다. 위魏. 진晉. 남북조南北朝의 문학
3세기 초, 한나라 말기에는 이미 삼국시대로 들어가 위나라 다음에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였다. 그러나 북방의 이민족이 중국 대륙의 중앙부에 진출하였기 때문에 중국은 남과 북으로 갈라져 왕조가 병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새 왕조가 번영하다가 또 망하는 동란이 계속되었다. 그 때문에 정치의 실권은 황제에게서 귀족에 넘어갔고, 가문이 무엇보다 존중되는 시대가 되었다. 또한 지식인들 중에는 유교의 속박에 혐오감을 느끼고 탈속적인 노장사상으로 도피하기도 하였고, 혹은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사상에 심취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영향은 문학에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다.
이 시대 문학의 대표적인 형식은 한漢 대에 이어 부賦 및 부에서 발전한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이었다. 이것은 4자 6자의 대우對偶를 겹쳐서 꾸민, 형식만을 존중하는 미문으로서 귀족이 아니면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던 당시에는 이 문체가 아니면 문장으로 취급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 당시 문장으로 취급받지 못했던 통속문으로 기록된 것 중에 오히려 참된 가치가 있는 문학으로 평가되는 것이 있다.
송宋의 유의경劉義慶의 《세설신어世說新語》와 같은 일화지, 북제北齊의 안지추顔之推의 《안씨가훈顔氏家訓》과 같은 자손에게 준 교훈서, 진晋의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와 같은 역사서, 진의 간보干寶의 《수신기搜神記》를 비롯한 많은 소설집, 또는 구마라사鷗摩羅什 등 서역사람들에 의해 이룩된 불경 번역의 문장 등이 그것이다.
또한 시인의 사회적인 지위가 높아진 것도 이 시대부터였다. 위나라의 조조曹操, 조정曹正, 조식曹植의 조씨曹氏 일가와 왕찬王粲, 유정劉楨 등의 건안칠자建安七子 등에 의해 오언시가 시 형식으로 확립되었다. 칠언시七言詩도 시험 삼아 사용되었으나, 이 시대는 일반적으로 오언시의 시대라 할 수 있다.
진나라의 원적阮籍과 육기陸機 및 반악潘岳, 송의 사영운謝靈運, 제의 사조謝眺 등 뛰어난 시인들이 배출되었다. 그 중에서도 진나라 말기와 송나라 초기에 걸쳐 활약한 도연명陶淵明은 시대의 유행에 따르지 않고 쉽고 소박한 전원시를 지은 대시인이었다.
도연명(365~427)은 진나라가 망하고 위송魏宋의 시대가 된 뒤에는 숨어서 산다는 뜻에서 이름을 잠潛으로 고쳤다. 그가 지은 《도연명집陶淵明集》은 시 120여 수와 문장 10여 편을 모은 것에 지나지 않으나, 이 문집만으로도 그는 고금의 독보적인 대시인이요 전원시의 시조로 숭앙받고 있다.
당시의 시문은 한 결 같이 수사법의 기술을 중요시하고, 언어 사용의 재치와 화려함을 다투는 것이 많았으나, 도연명만은 그러한 시대의 유행을 따르지 않고 평범하고 자연스런 시를 지었다. 그의 시세계는 송대宋代의 대시인 소식蘇軾[蘇東坡]이 기막히게 비평한 바와 같이 “질質하면서 기綺하다”는 것, 곧 소박하고 꾸밈이 없는 것처럼 보이면서 사실은 한껏 아름다움을 그 속에 지니고 있어 깊은 맛을 느끼게 한다.
송대宋代와 제대齊代 무렵부터 인도의 음운학의 영향을 받아 시의 운율에 대해 까다롭게 따지기 시작했고, 점차 구절의 아름다움에만 치중한 궁정의 시가 시단을 지배하여 시는 점차 쇠퇴해갔다. 그러나 그 사이에 민간의 이름 없는 시인들에 의해 우수한 민요(악부)가 창작되었다. 남조에서는 가련한 시풍이 지배적이었고, 북조에서는 호쾌하고 비장한 시풍이 지배적이었다.〈18호에 계속-‘중세의 서양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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